2015. 9. 9.

[표현주의대표작가] 뭉크의 절규




[표현주의대표작가] 뭉크의 절규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년 12월 12일 ~ 1944년 1월 23일)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 작가. 노르웨이에서는 국민적인 화가이다. 그의 
초상이 1000 크로네 지폐에도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신(新)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점묘의 수법을 사용하여 삶과 죽음에의 극적이고 내
면적인 그림을 그렸다. 1892년 베를린으로 이주, 그곳의 미술 협회에 출품했다. 그는 나면
서부터 몸이 약해 작품에도 그 영향이 드러나 있는데, 나치스는 퇴폐예술이라는 이유로 그
의 그림을 몰수하기도 했다. 작품으로 <절규>, <병든 소녀> 등이 있다.

생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응시하는 인
물을, 인물화를 통해 표현했다. 표현주의적인 화풍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발췌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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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해설]

01.《절규》( Skrik; 1893-1910년 작)





뭉크의 연작 중 하나인 표현주의 그림으로, 핏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
하였다. 배경의 풍경은 노르웨이 오슬로 .

작가가 생전에 붙인 이름은 독일어로 <Der Schrei der Natur>(자연의 절규)이나 흔히 <The
 Scream>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유화 작품을 그린 뒤에 3점의 작품을 더 제작해 총 4점
의 연작이 있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드에 걸린
칼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가 1892년 1월에 남긴
글은 매우 유명하다.

다리위에서 공포에 휩싸인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의 인물은 바로 그 절규에 필사적으로
귀를 막는 형상이다. 그러나 그는 그 무서운 소리를 피할 수 없다. 하늘의 <핏빛> 같은 새
빨간 구름도, 멀리 뒤로 보이는 강줄기도, 그리고 그 자신의 몸도, 마음속의 절규를 반영하
고 있는 것처럼 크게 파도치는 선으로 표현돼 있다. 이 곡선은 참으로 강렬한 표현성을 보인
다. 뭉크는 고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간담을 서늘케 하는 요괴의 도움을 빌지 않고 그러한
공포의 체념을 시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작품은 한층 설득력
을 갖는다. 뭉크의 대표적인 명작의 하나이다.


02. 마돈나(1894~5 : 캔버스에 유채 91x70.5cm :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한편으로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또 체념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마돈나'에 나타난 여인에 대하여 "몸을 바치
는 여자- 성모의 고통스런 아름다움에 싸인다."라고 쓰기도 하고,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 너의 얼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익어가는 과일처럼 새
빨간 너의 입술은 고통 때문이기도한 것처럼 달싹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의 미소이다. 바야
흐로 삶이 죽음에게 손을 내민다. 죽어서 사라진 무수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와의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뭉크의 나이 30세이던 1893년 12월, 베를린에서
'생의 프리이즈' 연작, '흡혈귀', '절규', '입맞춤', '질투'등의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중심이 된
 것은 이 '마돈나'였다.

03. 사춘기 : 1894  캔버스에 유채.  150x110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전나(全裸)의 소녀가 침대에 걸터 앉아, 자신의 알몸을 가능한 감추어야 겠다는 듯이 두 손을
무릎께로 엇갈리게 가져오고 있는 포즈로 그려져 있다. 수줍음과 불안감을 미묘하게 발산하
고 있는 소녀의 심리 상황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듯 이 뒤의 벽면에는 마치 괴물 같은 형상의
검은 그림자가 커다랗게 나타나 있다. 사춘기의 불안한 소녀의 심리 표현이 뭉크의독특한 수
법으로 다루어진 명작이다.
뭉크가 이 주제를 처음으로 그렸던 것은 23세 때인 1886년이었다. 그러나 그 첫 작품은 4년
후에 불타 버리게 되어, 다시 그린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그런데 이러한 포즈의 소녀 나상은
당시 다른 몇몇 화가의 판화와 삽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 그 시대를 매혹한 공동의 소
재였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04. 누이동생 잉게르의 초상(1892 캔버스에 유채 172x122.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당시 29세 때 잠시 귀국하여 9월에 오슬로의 토스톨프고렌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되는데 이때 발표한 초기의 대표작이다. '검은색과 자주색의하모니'라는 제목으로 출품
되었던 초상화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서 외부로부터 내면 세계를 투영하려는 의지
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면성에 의한 시선의 초점은 뭉크 세계의 특색이기도 하다. 인물의
표현을 정교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면서도 특징적인 것외에 불필요한 요소는 생략하였고,
간결한 형태와 조화를 갖춘 색채는 조형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구도적인 면에서 좌우 대칭으
로 이루어진 형태는 강인하면서도 엄숙한 고전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인물 하단부에 바닥
을 가로지르는 수평선과의 관계는 화면의 긴장을 강하게 느끼게 하면서 순수한 감동을 더 한
층 주고 있다.

05. 죽음과 소녀 1893 캔버스에 유채  128x86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수한 세대와 장래의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징적으로 드라마
틱하게 나타내고 있다. 벌거숭이의 천진한 소녀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해골과 포
옹을 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환희에 잠겨 있는 소녀는 죽음을 외면
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가장자리에는 정충이 그려져 있기도 하며, 태아가 웅크린 모
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사랑, 죽음이 동존 속에 같이 나타나며 남자, 여자 모두가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죽음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후에 표현주의 회화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
것은 그 원형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으로,
유화 작품 외에도 동판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 있다. 뭉크의 숙명관을 보는 듯하다.

06. 병실에서의 죽음  1893 캔버스 . 크레용 150x167.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그의 작품은 문학적이기는 하나 문학적이면서도 동시에 반사실적 성향이 뭉크 예술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개인적 일들을 비유적으로 재현하였으며, 개인적 체험을 근
본으로하여 승화시켜 환원화된 창조력을 보였다. 여기에서의 내용이 뭉크 자신의 가족의 죽
음을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낸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과거 가정 내에 있었던 병과
 죽음에 대한 불행적인 기억을 상기시켰다고 할수 있겠다. 병실 내의 무력감이 가득차게 톤
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 개개인 표정은 실의에 찬 가운데 슬픔, 기원, 상념의 모습들을 강한
 형태로서 요약시켜 주관성있게 나타내고 있다.
뭉크 자신이 언급하였듯이 육체와 정신, 질환,죽음이 항상 자신을 찾아든 흑의의 천사였던
것처럼 이를 적절히 표현한 작례라 하겠다.

07. 프로르치비네누스카의 초상



뭉크는 이탈리아 여행 후 독일로 가게 될 기회를 갖게 된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면
서도 문학적인 단체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신비주의와 환상적인 경향의 감정을 발표하고 있
다. 이 무렵 제작한 것으로 실재적인 인간을 표현하면서도 공간 속에 떠 있는 듯한 인물의 묘
사는 탐미적(耽美的)인 세계에 몰입되어지는 내면 세계를 느끼게 한다.
뭉크는 많은 인물화를 그렸는데, 항시 생존의 의미를 존중하며, 인간을 위한 예술을 창조하
였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형태에 의한 단순한 표현은 주제를 확대시켜 주는 반면에 얼굴의
섬세한 사실성과 손, 발의 생략되어진 묘사는 상반된 조화를 강하게 느끼게 하여 준다. 주관
적인 감정이 내용과 형태를 결정한다는 기조를 적절하게 나타냈으며 뭉크의 내재된 가능성
을 찾을 수 있다

08.  빨간 덩굴풀 ( 1900 캔버스에 유채 120x120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노르웨이 풍경 중에서도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에서 뭉크는
 정신적인 생명감을 표현하였으며, 자연을 통해 외로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자연
 속의 분위기를 찾아냈던 것이 이 작품을 제작한 해가 1900년으로서 이때에는 베를린 화단
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문인과의 교류가 왕성하였으며, 한편 뭉크의 주관성의 강조가
고호 등과 함께 포비즘이나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중심부에서
약간 휜 듯 수직적인 나무와 불규칙한 듯한 울타리의 직선적 효과가 중앙 건물 덩굴풀의 빨
간색의 강렬함과 상호 대립을 가지면서도 공간 변화를 강하게 주고 있다. 원근법의 강조,
불규칙한 형태 변화, 주관성에 의한 곡선표현과,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심리 상태로 뭉크
의 내면에 고조된 심리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09. 다리 위의 소녀들(1900. 캔버스에 유채 83.5x128.5cm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강렬한 색채의 처리와 빛, 명암 관계를 조화있으면서도 대담하게 나타낸 것은 상당히 명쾌
한 느낌을 주며,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선명한 색 감각을 발휘하고 있다.
원근법을 강조하였으며 비스듬히 놓여진 다리와 난간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녀는 단순화의 형
태를 보여주며, 동감動感과 리듬을 화면에 도입시켜 구성하고 있다. 뭉크는 자연을 주관적
분위기에 의한 반영으로 보았으며, 낭만적인 자연 속의 인간의 무의미를 투영하려 했다. 곡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필세는 간명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판화로도 표현
시키고 있는데, 구도는 거의 같으나 좌우가 완전히 반대로 된 동판화 '선창의 소녀'(1903년)
와 같은 제명으로 된 목판화(1920년)가 있다. 뭉크는 판화를 유화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며 중요시하였다.

10. 마라의 죽음 1907 캔버스 . 유채 153x149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마라는 프랑스 혁명 시대의 정치가로서 자코방 당을 이끌고 앞장서서 지롱드 당
을 공격했으나 자롱드 강에 동조한 샬롯 코르데라는 여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이외에도 여
자에 의해 배반당하는 남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는데 '아담과 이브'.'삼손과 데릴라'등이
그 일련의 내용이다.
뭉크 자신이 여자에 의해 불신과 굴역을 겪게 되는데, 1902년 가을에 그가 오스가르스트란
드에 살고 있을 때 부유한 사업가의 딸 투라 랄손과 연애를 하게 되면서 결혼 문제로 다투던
 중 그녀의 손에서 권총을 뺏으려다 왼쪽 약손가락의 일부를 잃게 된다. 그 후로 여자를 악
마의 화신으로 보는
습관적 이유가 생기게 된 것 같다. 죽음과 증오와 사랑이 동시에 표출되어진 내용은 그의
심리를 적절히 묘사했다고 하겠다.

11. 미역감는 남자들( 1915 캔버스 . 유채 203x230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만년에 뭉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내가 얻은 건강의 좋지못함도 나의 부분이며 더불어 나의 예술은 그 허약함을 원천으로 삼
은 것이므로 나는 내가 건강해지길 원치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뭉크의 극한적인 상황은
강인하면서도 희망찬 남성을 동경의 대상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바르네뮌데 트리프틱'
(1907년과 1908년 여름에 뭉크가 가 있었던 독일 북부의 바르네뮌데에서 제작한 3장으로 된
그림) 중 한가운데의 성인 부분을 나중에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나머지 두 장 '청'
과 '노인'이다. 그 당시 무질서 하면서도 거친 생활에 술만 마시고 방황하던 때로, 건강을 되
찾기 위해 바르네뮌데에 가 있었다. 뭉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이면서도 요약된 강인한
형태와는 다른 밝은 색채가 풍요스럽게 나타나 있다.

12. 생명의 춤(1925  캔버스 . 유채 143x208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하여 예술적 생명성을 나타내려 노력하였는데 1894년 스
톡홀름에서, 1895년 베를린에서 사랑 연작을 발표한 후 1902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
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생의 프라이즈' 연작으로 확대되어 발전한다.
이 작품 역시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그의 체험적 심성을 표현한 것으로 내부적 사고에서
생겨 난 것이다.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像으로 보았는데 꿈꾸는 여인, 삶을 갈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의 상으로 여기에서 표현되어진 여인들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진지하
게 다루고 있다. 매월 6월 23일마다 개최되는 하지제夏至祭의 무도회에서 느낀 것을 시도한
것으로써 인물의 대담한 배치, 색채의 강렬함, 해안선을 통해 나타난 강직함은 생명감이 충
만하다.

13. 목소리(1893 캔버스에 유채 88x108cm 보스턴 미술관)



작품설명 : 본래는 [여름밤의 꿈]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중 한 작품이다.
여기서 표현된 등뒤의 뱃노래소리를 듣는듯 양팔을 뒤로하고 이쪽을 바라보는 여인은 여기
서는 체념한 여인으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을 하고 있다.
뭉크는 이와같이 인간의 심적이거나 영혼의 상태를 자연관조에 동화시킴으로써 풍경 자체
속에 인간의 정서를 나타내려고 하였다. 고독과 불안에 찬 여인이 소나무앞에 서서 멀리
보트놀이 하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는듯하다. 수직적인 나무와 수평선의 바다 구성은
여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14. 병든아이(1896 캔버스에 유채 42.1x56.5cm 오슬로 뭉크미술관)



 뭉크는 19세기 노르웨이 상류계급에 속하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다섯살인 1868년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후 누나 소피에도 그가 14세때 결
핵으로 죽었다.
이런 환경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내향적 성격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소년시절의 경험은
일생 지워지지 않는 비극적인 제재를 자신의 회화주제로 삼게된다. [병든아이]는 누이 소피
에의 모습으로 그녀에 대한 추억이 깊이 잠겨있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병상에 누운 수피에의 모습에서 찾아낸 강렬한 인상을 작품화 한 것인데, 석판화에
의한 섬세한 필치게 돋보인다. 이 두점의 석판화는 같은 판에 잉크색을 바꾸어 찍어낸 것이다.

15. 결별(1893 캔버스에 유채)



뭉크는 노르웨이가 낳은 위대한 화가로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하여 내면 세계를
시각화 하였으며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적 작품세계를 통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전환점을 제기하였다.
그의 작품은 19세기말 자연주의, 인상주의의 반대로 대두한 상징주의나 아르누보와 관계를 가
지는 주관주의적 표현이다.
그는 고갱, 앙소르, 고호, 호들러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회화에 있어
극적 테마, 요약된 강한 형태, 강렬한 색채등을 통한 주관의 표현이 이들과의 연관성을 증명하
여 준다.
뭉크는 병과 죽음에 의한 인간 생명의 불가사의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죽음을 향
한 불안은 그의 작품 전반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런 속에서 관찰된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주제로하여 [생명 프리즈] 시리즈를 위시한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16. 그랑카페의 입센



이 작품을 그린 1906년(43세)에 베를린에 서 공연한 입센의 '유령', '헤다 가블러' 를 위한 무대
장치의 밑그림을 제작하였다. 당시 32세이던 1895년 오슬로의 브롬 쿠비스트 화랑에서 개인전
이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보이콧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 후 전시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 때 개인전을 방문한 입센의 지지와 격려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내
게는 매우 즐겁군, 나를 믿게. 사태는 내 편을 든 것과 같이 틀림없이 자네 편을 들게 될거야.
적이 많을수록 친구도 많은 법이라네.'하고 입센은 격려를 하여 주었는데, 이 때 뭉크의 마음에
강한 용기를 갖게 하였다. 전체의 구성이 불안정한 어지러움을 특성있게 주입시켜 주고 있다.
석판화 작품에서는 뭉크의 섬세한 소묘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여자의 마스크 밑에 자화상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에 이길 수가 없었다.' 라고 어린
시절을 말하듯이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것으로써 항시 의
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항시 내부에는 깊은 불안 속에 잠겨져 있는 상태에서의 운명적인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물 배경의 붉은 벽면 위에 침통한 표정을 한 여자의 대형
마스크가 걸려 있으며, 자화상은 무표정한 채 정면을 응시한 채 간단하게 표현되어져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곧 덮칠 듯한 마스크의 상징은 압박과 고뇌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하여
진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빨간색은 인상적이라기 보다 그의 몸 내부에 흐르고 있
는 피에 대한 관심과 죽음을 항시 생각하는 뜻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하면서도 암
시적인 채색에 의한 집중적 표현이다

17 야곱슨 교수의 초상화



뭉크가 45세 되던 해, 오랜 외국 생활의 제작 활동으로 인하여 긴장, 음주 등에 의한 알콜 중독
증세가 보인다. 또 천성이기도 한 내적 갈등, 정서적 어려움, 강박관념 등은 그를 위기로 몰고
 가게 된다. 이 작품은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로부터 치료를 받게 되고, 병원에 머물며
치료 중에도 제작 활동을 하게 되는 이즈음의 작품이다.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듯이 붉
은 색조에 의한 필세는 강렬한 느낌과 함께 고조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치료소에서 퇴원한
후에는 건강한 가운데 풍경과 사회적인 모티브를 제작함과 동시, 벽화 등 다작(多作)에 들어
가는 의욕적인 자세를 보인다. 야곱슨 교수의 위엄있으면서도 강직한 모습이 다른 초상화 작
품에서보다 세밀하면서도 명료하게 표출되었고, 색채의 조화있는 다양한 변화에서 새로운 의
지를 보는 듯하다

17. 불안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1890년 도라 라우젠 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지면
서 신경 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 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群像)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
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正面性)에 대하여 혹간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
성, 친화성(親和性)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뭉크의 근원적인 위문이나 불안이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창작토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
과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화에서 뿐만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많이 남기고 있다.

18. 등의자 곁에 선 나부



바르네뮌데에서 1907-8년에 쓴 글 중 '예술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다만 인간
의 내면에서부터 온다. 예술은 인간의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 만년에 제작한 모델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서, 서 있는 누드를 중심으로 하여 착색되어진 억제
된 빨간색, 회색 등의 톤은 원근법을 미묘하게 처리한 공간 속에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밀
도있게 표현되어졌다. 뭉크가 여성을 주제로 그린 작품에는 몸을 보호하듯 손을 앞에 놓고 있는
경우와 손을 뒤로 돌린 경우의 두 모양이 있다

19. 빨간 깔개위에 앉은소녀



그의 나이는 66세(1929년), 에에켈리에 겨울 아틀리에를 짓고 만년을 보내면서 고독과 쇠약해진
건강과의 고투 속에 있었다. 외로움을 달래면서 제작을 하게 되는 가운데 내적 상태가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청순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빨간 깔개 위에 손을 짚고, 두 다리를 편하게 뻗고
휴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붉은 색면이 강렬하다. 회화의 형식으로서의 붉은 색채가 아니라,
지향하는 욕구로서의 정신을 존재시켜 주는 독특한 형상을 느끼게 한다

20. 베르겐의 자화상



자화상을 통하여 뭉크는 생의 불안을 극복하려 하였으며 자신의 인생 시리즈로 자기 변천과
자아 의식을 찾았던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자화상에는 자아 그것을 그리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 이미지 표현의 진실성이 있다.' 이렇듯 엄격한 양식에 자기애적(自己愛的) 경 향과 자의
식(自意識)에 찬 인물 자신을 표현하였다. 이 자화상을 제작할 당시 53세로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을 때였건만 어딘지 고독 속에 불안에 찬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 굴을 돌아보고 있는 것을 인상파 풍의 속필로 묘사하였으며, 인물 뒤에
보이는 노르웨이 서해안의 도시 베르겐의 거리와 집들, 널따란 광장의 선명한 색채가 대조
 적인 변화를 준다. 풍경화에서 볼 수 없는 초조감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 그의 정신 상태인
불안을 외적으로 투영시켜 주고 있다



[담배피는 자화상]


[저승에서의 자화상]

21. 죽은 사람을 누인 베드



<병실에서의 죽음>과 깊은 연관을 갖는 듯한 계열의 작품으로 여기에서도 역시 고통, 죽음,
불안에 대한 내용을 시각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대담 한 콤포지션으로 왼쪽 상
단 부분에 침대를 놓고 나머지 아래 부분은 빈 공간으로서 처리하고 실의에 찬 사람들을 오
른쪽 부분으로 몰아 놓은 것이, 허탈한 공간 감과 긴장된 중압감이 대비를 이루면서 표현되어
지고 있다. 단조로운 색채와 강직한 형태감은 대담한 구도와 조화를 이루면서 상징적 표현
효과를 주고 있다. 드라마틱한 모습을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둘러싼 허(虛)와
실(實), 공백과 실재(實在)의 대조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간결하면서도
생략되어진 인물의 표정과 단조로운 필세는 희화화(戱畵 化)된 것처럼 단순화되어 보이는
것이 충격있게 전달되어지고 있다


[죽음의 침상]



[일화와 얘깃거리]

□ 아버지 크리스찬 뭉크Christian Munch는 군의관이었고, 백부인 페타 안드레 뭉크Peter
Andreas Munch는 유명한 역사가로 집안의 자랑이었다.
뭉크는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서 그가 다섯 살인 1868년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
나게 되자 집안은 불행을 맞게된다.
국교 신도인 아버지는 하류층을 상대로 한 병원을 개업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에
게 성격의 변화를 일으킨 듯 거칠면서도 편벽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어머니 대신 가정
을 맡아 돌봐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 나이 14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이런 환
경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내향적 성격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소년 시절을 경험은 일
생 지워지지 않은 속에 비극적인 제재를 중심으로 반복하여 그렸다.


[죽은 어머니와 그 아들]


[죽은어머니와 그 아들]

□ 188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이해 생 클루Saint Cloud로 이사를 하고 이 시기에
<생명 프리이즈> 연작을 구상케 된다. 생 클루에 머물면서 쓴 그의 일기 중에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게질을 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와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
를 벗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거리의 저녁]

□ 뭉크의 작품에서는 사랑, 죽음, 불안 등과 언제나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정신 분열에 의
한 두려움의 개인적인 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생활 자체를 존재의 사실성으로 복귀시
키려는 자아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뭉크의 자화상 시리즈는 삶과 죽음과 싸우는 속에 죽음을 관념으로 확대하여 받아들이려는
자세로서 생을 향한 불안의 극복은 전생애를 통한 자기 완성에의 도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다. 뭉크는 생애를 통해 가장 위대한 초상 화가였으며 항시 그리는 대상은 그 자신이었고
 전 인생을 통해 변천되어진 자아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흡혈귀]

□ 판화는 뭉크에 있어 회화에 필적하는 것으로 중요시 하였다. 뭉크가 처음으로 판화를 한
것은 1894년 8장의 에칭Etching과 1장의 목판화를 제작한 것부터인데 1896년 파리 시대는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유화의 중요한 작품과 초상화가 판화를 위한 출발점
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반대로 유화로 옮겨진 것도 있다. 그는 수많은 시도를
통해 회화 못지 않게 판화 작품을 제작하였고,판화 기법상으로도 다양한 혁신을 주고 있다.
판종을 여러가지로 병용하거나, 판목을 분리해서 합성하기도 했으며 부식판을 통해 릴리프
적 효과를 의식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뭉크의 현대에 와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단순히 복제품이라고 하는 사고에서 독립된 미술의 예술품으로 발전시켰다.

□ 뭉크가 베를린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을 때부터 1908년 신경쇠약에 걸릴 때까지의
16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무서운 신경성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는
 구불구불한 선을 사용한 양식으로 인간 실존의 고통과 불안을 표현했다[브레테니카]

□ 뭉크는 80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신이 유전적으로 '결핵과 정신병'
을 갖고 있어서 결혼하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애인들
은 많았다. 그가 유명해진 이후로는 모델을 자청하는 여자들이 줄을 섰고, 청혼도 많이 받았
다고.


[임종]

◆ [표현주의]
표현주의는 주제에 거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풍경화를 그리는 표현주의자는 사실주
의와 자연주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황혼의 하늘과
대지를 강조하기 위해 온통 붉은 색을 칠할 수 있고, 바다를 핑크색으로 칠할 수도
있다. 회화와 조각을 시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고의 문제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부터였다. 이런 사고가 유럽에 만년하게 된것은 20세기 표현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 표현
주의 화가들은 산이나 들에서 주제를 찾는 대신 작업실이나 카페에서 동료들과의
열띤 논쟁을 통해 문학, 철학, 신화 등에서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회화는 문학, 철학, 신화
등의 도움으로 내용이 풍요로워졌다. 뭉크는 반 고흐, 고갱, 앙소르, 쉴레, 클림트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칭송받는다.


[살인자]


[익사한 소년]


[숲을 향하여]

[참고자료]

1.위키백과 ; 뭉크
2. 해설 :   http://mission.bz/10270 외.
3. 기타 인터넷여기저기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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