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9.

[팝송] 처녀처럼 Like a virgin 마돈나






[팝송] 처녀 처녀성 순결 Like a virgin 마돈나





[음악동영상]

[Like a virgin 마돈나]

I made it through the wilderness. Somehow, I made it through.
난 척박했던 과거를 헤쳐나왔어요.
어쨌든, 난 이겨냈다고요.

Didn't know how lost I was until I found you.
내가 당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내가 얼마나 방황했는지조차 몰랐어요.

I was beat incomplete. I'd been had, I was sad and blue.
난 지쳤어요, 불완전했구요. 이용도 당했었죠.
난 슬프고 우울했었어요.

But you made me feel. Yeah, you made me feel shiny and new.
하지만 당신은 나를, 네, 당신은 나를
빛나고 새롭게 느끼도록 만들어줬어요.



Like a virgin touched for the very first time, like a virgin.
처음으로 손길이 닿은 처녀처럼,
처음 경험한 것 처럼.

When your heart beats next to mine, gonna give you all my love, boy.
당신의 심장이 내 심장 옆에서 뛸 때,
내 모든 사랑을 당신에게 줄 거에요.

My fear is fading fast. Been saving it all for you.
나의 두려움은 재빨리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을 위해 모든 것들을 아껴두고 있었어요.

'Cause only love can last. You're so fine and you're mine.
왜냐하면 오직 사랑만이 끝까지 남을테니까요.
당신은 너무 멋져요 그리고 당신은 내 것이에요.

Make me strong, yeah, you make me bold. Oh, your love thawed out.
날 강하게 만들어주죠. 네, 당신은 날 용감하게 만들어요.
오, 당신의 사랑이 녹여주었어요.

Yeah, your love thawed out what was scared and cold.
네, 당신의 사랑이 두려움과 얼어붙었던 것들을 모두 녹여주었어요.


Like a virgin touched for the very first time, like a virgin.
처음으로 손길이 닿은 처녀처럼, 처음 경험한 것 처럼.

With your heartbeat next to mine. You're so fine and you're mine.
당신의 심장박동이 내 것과 함께 하고 있어요.
당신은 너무 멋져요 그리고 당신은 내 것이에요.

I'll be yours 'till the end of time. 'Cause you made me feel.
난 생이 끝날 때까지 당신의 것이 될거에요. 왜냐하면 당신은 날,

Yeah, you made me feel I've nothing to hide.
네, 당신은 내가 감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주니까요.

Like a virgin touched for the very first time, like a virgin.
처음으로 손길이 닿은 처녀처럼, 처음 경험한 것 처럼.

With your heartbeat next to mine. Like a virgin, Like a virgin.
당신의 심장박동이 내 것과 함께 하고 있어요.  처음 경험한 것 처럼.

Feels so good inside when you hold me.
당신이 나를 안을 때 내 안에 행복이 가득 차요.

And your heart beats, and you love me
당신의 심장이 뛰고, 당신이 날 사랑하죠.

Can't you hear my heart beat for the very first time?
당신은 내 심장이 최초로 뛰고 있는 것이 들리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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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2004년 12월 15일 미국의 연예전문지 『빌보드』는 2004년에 콘서트로 가장
돈을 많이 번 아티스트는 마돈나로 56개 콘서트 가운데 55개가 매진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모두 1억 2,500만 달러(약 1,322억 원)를 벌었다고 발표
했다. 12월 21일 마돈나는 무대에 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며
“무대에 설 때에는 언제나 전쟁을 하러 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마돈나라는 이름이 학계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그의 노래
때문이 아니다. 그의 탁월한 상술 때문도 아니다. 물론 그의 노래나 상술이 오
늘날의 마돈나라고 하는 인물을 만드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건 분명하지
만, 수많은 대학에서 마돈나를 다루는 대중문화 강좌가 열리고 마돈나를 주제
로 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그의 이미지와 그의 철학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마돈나는 머리가 대단히 뛰어나고 영악한 엔
터테이너인 동시에 사업가다. 그리고 그의 엔터테인먼트 행위와 사업은 엄청
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기성 문화와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을 유발
시켰다. 철학 없이 그게 가능할까? 실제로 마돈나는 철학적인 발언을 자주 하
기도 한다.

예컨대, 마돈나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 생각으론 인간은 모두 마조히스트이자 사디스트이다. 인간은 어차피 서
로 상대를 폭행 내지 고통을 주며 살아가는 것이다. 수갑을 채워 묶고 회초리
를 휘둘러야 꼭 폭행이 아니다. 남자들은 매일같이 여자들에게 폭력을 가하
고 있다. 단지 그 폭력의 형태가 대부분 사회가 용납하는 형태로 이뤄지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또 마돈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필요, 소망, 취향, 환상을 갖고 있다. 그것
들이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평가해서는 안 된다.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영역이 섹스일 뿐이다. 섹스는 늘
금기의 주제였다. 나는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며, 『섹스』라는
나의 누드집은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 자신은 일종의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
락한 성 문화라고 여기는 하위문화를 주류 문화로 끌어들일 것이다”라고 말
했다.

마돈나는 어렸을 때 남녀 간 오줌싸는 방식의 차이조차 그냥 넘어가질 않
았다고 한다.
“사내아이에겐 모든 것이 허용돼요. 여름에 셔츠를 마음대로 벗을 수도 있
어요. 서서 오줌을 싸도 되구요. 여자아이와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해도 임신
할 걱정이 없어요.”

그래서 마돈나는 사내아이가 갖는 자유를 얻기 위해, 쭈그리지 않고 소변을
 보는 걸 시도했다고 한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다. 서서 오줌이 제대로 싸 질
 리 없었다. 그런 무력감(?)이 공격성으로 발전한 걸까? 마돈나는 확실히 별
난 아이였다.

마돈나는 1958년 8월 16일 미국 미시간주 베이시티에서 3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어린 마돈나는 집
안의 가장 큰 여자로서 어머니 노릇을 맡게 되었는데, 그때의 경험이 오늘
날의 마돈나를 만든 것 같다. 권력은 전혀 없으면서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해야 하는 책임만 있는 자리, 그게 바로 마돈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이탈리
아계인 아버지 덕분에 집안에는 남녀차별적인 가톨릭 정신이 가득했는데,
그 분위기는 매우 억압적인 것이었다. 마돈나는 후일
 “당신은 섹스를 통해 고통을 즐기고 있는 듯한 인상인데”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나는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마조히스트들이다.
우리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참으며 살아가도록 교육을 받았다.
나는 고통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받는다.”

마돈나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돈나는 아버지와 두 오빠와 계모의 지배
에 신음하는 신데렐라였다. 그는 어린 동생들을 도맡아 돌봐야 했으며, 늘
기저귀를 갈아 끼우는 게 어찌나 힘들고 귀찮았는지 자신은 절대 애 같은 건
 갖지 않겠다고 맹세하기까지 했다. 마돈나는 그런 고생 속에서 조숙해졌다.
 자신의 어려움을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꾀를 내는 법을 배워 나갔다.

마돈나가 자신의 비참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낸 꾀 가운데 하나는 끊임
없이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도 해석에 차이가 있다. 일부 사
람들은 그걸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술수 정도로 폄하한다. 어찌됐건 마돈
나는 끊임없이 떠들어 댔고, 그래서 잠자코 있으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그는 떠들어 대는 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여겼던지 언제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려 했다. 그 동기야 어찌됐건, 그는 스타 취급을 받지 않으면 견디
질 못했고, 무슨 일에든 1등을 하지 못하면 안달복달했다.

마돈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자기중심적이었다. 병아
리 배우 때에도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지 않으면 침착성을 잃고 산만해졌
다. 그건 거의 ‘병’의 수준이었다. 그는 1980년 최초로 뮤직 비디오에 엑스트
라로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그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던 프로듀서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엑스트라 한 명이 항상 사람들 틈에서 튀어나와 격렬하게 춤을 추며 카메
라를 독점해 버렸습니다. 보기 드물게 정열적인 아가씨였지만, 좀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돈나의 공격성은 대인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오로지 권력과
 연줄로 사람을 평가했으며,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무시했다. 잔혹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마돈나가 기존의 상식으로 평가해선 안 될 사람이라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을 너무 자주 드러냈다. 마돈나가 어찌나 몸을 드러
냈던지 그가 지난 92년 누드 사진집을 내자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도대체 누
가 이런 형편없는 사진집을 사는 데 50달러를 쓰겠느냐”고 하면서 “마돈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노출이 심한 여자다. 사람들은 마돈나의 몸에 대해 자기 배
우자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지난 94년 3월 마돈나는 미 CBS TV 심야토크쇼 데이비드 레터먼의 〈레이트
쇼〉에 출연, 또다시 상상을 초월하는 언행으로 시청자들을 경악케 했다.
마돈나는 〈레이트 쇼〉에서 곧잘 농담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이참에 톡톡히
 그 보복을 하기로 작정한 듯, 방송 언어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못할 상소리로
레터먼을 욕하는가 하면 안절부절못하는 레터먼에게 자기 팬티를 꺼내서는
그의 얼굴에 대고 흔들어 대면서 ‘냄새를 맡아 보라’고 했다. 또 샤워하면서
오줌 누는 것에 대한 이점을 상세히 설명하는가 하면 제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레터먼과 방청객들은 안중에 없다는 듯 혼자 계속 떠들어 댔다. 마침내 강제로
떼밀려 퇴장당하면서도 그녀는 ‘규정을 좀 위반하면 안 되는 거냐’고 외쳤고,
이에 방청석에선 ‘안 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마돈나가 원했던 반응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앤더슨이 지적했
듯이, “그녀는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주목을
받아 왔다. ‘자아, 미워해 봐요!’ 그것이 차례차례로 금기를 깨뜨려 온 마돈나의
신조였던 것이다.”

마돈나가 언론을 다루는 솜씨도 비슷했다. 기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예사였
다는 주장도 있다. 기자가 원할 법한 자신에 관한 쇼킹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해
주곤 했는데, 그게 나중에 기사로 나오면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는 것이다.

무슨 일에서건 기존의 경계를 부순다는 건 ‘충격’이다. ‘충격’은 장사가 된다. 그
래서 마돈나를 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들은 그녀가 장사를 위해 끊임없이 ‘충격’
을 만들어 낸다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마돈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남성들을 건드렸다. 이 점에 분개할 사람들도
없진 않겠지만, 수많은 여자를 건드린 플레이보이에 대해 가질 법한 생각을 마
돈나에게 베풀어 주면 문제될 게 없을 것이다. 마돈나의 엽남(獵男) 행각은 어느
 정도였을까?

크리스토퍼 앤더슨은 “옛 매니저의 말에 따르면, 마돈나에게는 1978년에 뉴욕에
돌아온 날부터 처음으로 레코드가 히트하기까지 4년 동안 최소한 100명의 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성욕이 남달리 강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는 마돈나는 새로
 만든 출판사의 이름을 ‘슬러트(매춘부) 사’라고 붙이는 등 세간의 평판에 걸맞게
 행동해 왔다”고 말했다.

유혹의 주체는 늘 마돈나였다. 85년에 결혼하고 89년에 이혼했던 영화배우 숀 펜,
 고참 영화배우 워렌 비티,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맨,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스타들
과의 관계도 모두 마돈나가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거다.

마이클 잭슨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마돈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마
이클 잭슨에 대해 “나는 완전히 벌거벗은 채 그를 안았으나 그는 발기하지 않았다”
며 마이클 잭슨이 ‘임포’라고 주장했다. 이에 마이클 잭슨은 “그것은 강간 미수였다”
며 “마돈나는 나를 발기 불능 취급하고 있지만 나는 단지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
었다”고 반격을 가했다.

마돈나의 84년 히트곡 〈처녀처럼(Like a Virgin)〉은 처녀성을 조롱했다. 마돈나
는 고교 시절 첫 성경험 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처녀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할 때까지는 결코 순결을 잃은 게 아니기 때문”
이란다. 이 노래에서의 ‘처녀처럼’은 “처녀가 아닌데 처녀처럼 행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성에 의해 아름다움이나 처녀 여부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처녀’가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마돈나를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확립한 인물로 꼽는다.
그간 여권론자들은 ‘질의 입구를 막고 있는 탄력성 있는 점막’에 불과한 처녀막이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주요 메커니즘’으로 기능해 왔다고 순결성 논리를 비
판해 왔는데, 마돈나는 ‘처녀처럼’의 강렬한 메시지를 통해 ‘막’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김형찬은 마돈나가 ‘상처’를 딛고 새출발하는 모습을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대신 ‘항상 처녀’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했다고 평가한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99년 4월 5일 미국 성(性)정보교육위원회는 자체 웹사이
트에 접속한 6만 4,000여 명을 대상으로 “미국인들이 성을 자연스럽고 건강한 삶의
 일부로 이해하도록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킨 인물 10명을 선정하라”는 조사에서
마돈나가 10대 인물로 뽑혔다고 발표했다.


-발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마돈나 (세계문화사전, 2005. 8. 20., 인물과사상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46115&cid=43114&categoryId=4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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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나무위키]




팝의 여왕. 팝 역사상 가장 성공한 최고의 레전드 여성 아티스트
미국의 가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성 음악가로 꼽힌다. 마이클 잭슨이 팝의 황제
로 불린다면 마돈나는 팝의 여왕. 80년대에는 'boy toy'를 휘두르는 물질적인 여자
(material girl)로, 90년대에는 누드집 《SEX》를 발간하는 등 성(性)에 대해 도발적
으로 외치는 섹슈얼한 여자로, 2000년대에는 아이의 어머니이자 당시 미국에서 갓
 시작되던 일렉트로니카를 선구자적으로 도입한 아티스트이다.

처음엔 단순한 섹시 여가수 정도로 취급받았으나 30년 넘는 세월동안 끊임없는 변
신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적 역량으로 지금은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확고한 위치에 올랐다. 특히 과거 유럽에서의 인기가 대단했었는데, 80년대에는 빌
보드 유로 차트에서 가장 성공한 가수였고, 90년대에도 1위 앨범 + 싱글 수로는 5위
안에 들었고, 2000년대에도 싱글은 에미넴에 밀려 2위였지만, 여가수 판매량 1위다.

수많은 여가수들의 롤모델이며, '제2의 마돈나'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가수들은
숱하게 많다. 물론 그 중에 마돈나를 뛰어넘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0년대
초중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포스트 마돈나 자리를 놓고
유력하게 경쟁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이혼 등 암흑기를 겪은
 뒤 약간 다른 쪽의 음악으로 돌아섰고,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완전히 하향세.
갑툭튀한 레이디 가가가 포스트 마돈나로 점쳐지기도 했으나, 행위예술(...)에
심취하며 대중과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중이다.

2. 바이오그래피

자동차의 본고장인 디트로이트에서, 제너럴 모터스에서 일하던 엔지니어인 이탈
리아 이민자 출신인 아버지와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탈리아 계 집안이었으므로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찢어
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 가정이었다. 다만 어머니가 5살 때 돌아가셨고 이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어린 시절을 흑인들과 같이 지냈다고 한다. 덕분에 흑인 배우
들과 염문설이나 흑인 인권에 대하여 꽤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어릴 적
동네 흑인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던 점이 컸다고 한다.[4][5] 한때는 너무 배가 고
파서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고 고백한 바 있지만 이것은 가수가 되기 위해 뉴
욕에서 고생하던 무명시기의 이야기이다. 의외로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어서 미
시건 주립대학에 무용 전공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가 가수가 되느라 중퇴했다. 아
이큐가 140이라는 설도 있다.

3.1. 80년대

1977년 단돈 35달러를 가지고 뉴욕에 입성하여 백댄서와 밴드 활동을 하며 기본기
를 닦았다. 이 당시 돈이 없어서 10달러를 받고 찍은 누드사진 때문에 유명해진
후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사진을 보면 근육없는 평범한 소녀 몸매의 갈색 머리의
전형적인 이탈리아 여성이다. 2013년 마돈나는 당시 성폭행당한 것을 고백했다.

이후 남자들을 이용해서 차근차근 연예계에 데뷔했다. 1983년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Madonna를 발매해 'Holiday'와 'Borderline'을 빌보드 핫 100 10위권에 진입시
키는 등 중박을 냈다. 당시 마돈나가 생신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괜찮은 성적.


다음 해 2집 Like a Virgin의 리드 싱글 Like a Virgin으로 처음으로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랐고, 세계적으로 2,0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월드스타가 되
었다. 특히 1984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Boy Toy라고 새겨진 벨트와 웨딩
드레스, 그리고 머리를 헝클며 바닥에 몸을 문대는 Like a Virgin 공연은 당시 엄
청난 파격이었으며, 마돈나의 베스트 퍼포먼스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Like a Virgin의 히트는 데뷔한지 2년 밖에 안 된 여가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
의 수준이었고, 이 앨범으로 마돈나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오늘날까지도 마
돈나 최고의 히트곡을 꼽자면 단연 Like a Virgin이 꼽히며 이때 섹시한 이미지와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많은 마돈나 워너비들을 양산해 내기도 했다.

1986년에는 3집 True Blue를 발매했다. 싱글 'Live to Tell', 'Papa Don't Preach',
 'Open Your Heart'는 빌보드 1위, 'True Blue', 'La Isla Bonita'는 각각 3위와 4위
를 기록하면서 앨범의 모든 싱글을 5위권에 진입시키는 성공을 거뒀다. 앨범 판
매량은 2100만장을 기록했다. 투어 Who's That Girl World Tour도 성공적이었는
데, 남자 솔로 또는 밴드 투어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여자 가수로는 독보적이었다.
 이 당시가 가히 마돈나의 진정한 리즈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1989년 4집 Like a Prayer 시기에는 신성 모독등 다양한 논란을 몰고 다녔으며,
앨범 판매량은 전작에 비해 절반이나 떨어졌다. 하지만 리드곡인 Like a Prayer
는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극적인 구성 덕에 마돈나 곡들 중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는 명곡이며, 팬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비
슷한 시기에 월드 투어 Blond Ambition World Tour를 다니면서 대박을 쳤다.

3.2. 90년대

1990년에는 베스트 앨범 The Immaculate Collection을 발매해 3,000만 장의 판
매량을 기록했으며 이 판매량은 마돈나 커리어 최다 판매량이며 역대 솔로 아
티스트 베스트 앨범 판매량 최다 기록이다.

같은 해 마돈나의 대표곡이자 명곡으로 다섯 손가락안에 반드시 꼽히는 'Vogue'
도 발매 되었다. 1990년 9월 열린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선보인 'Vogue'
공연은 마돈나의 레전드 공연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마이크도 없이 아주 당당한 립싱크 공연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호평을
받는 무대이다 . MTV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 공연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MTV Awards 1990 - Vogue 공연영상

이후 90년대로 넘어가면서 5집 Erotica 시기부터 대놓고 섹스 어필 컨셉을 밀고
홍보를 위해 본인의 누드집까지 일부러 유출시켰으나, 앨범 판매량이 고작 400
만장에 그쳤다. 또한 6집 Bedtime Stories에서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했는지
 부드럽고 차분한 사운드를 가지고 나왔지만, 전작 에로티카에 비해 약간의 앨
범 판매량이 늘었을 뿐 대중적으로 크게 실패했다. 90년대부터 연이은 실패는
마돈나를 좌절케 했고,마돈나는 심지어 자신을 미국이 알아주지 않는다며 이민
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8년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수용한 7집 Ray of
 Light를 통해 재기에 성공한다. 음악성, 대중성 모두 인정받았다. 그동안 마돈나
를 외면해왔던 그래미상 조차도 상을 주며 인정했다.

3.3. 2000년대

2000년에는 일렉트로닉 장르의 연장선인 8집 Music을 발매, 성공을 거뒀다.
또한 앨범의 동명 싱글 Music은 마돈나의 마지막 1위 싱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3년 9집 American Life를 발매하면서 마돈나는 다시 한 번 추락한다.
리드 싱글 American Life의 뮤직비디오에서 자국 대통령인 부시를 묘사한 사람
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등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미국인들을 비판했다. 한국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가수 인생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라디오 에어플레이 보이
콧을 당하며 싱글 American Life는 37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에어플
레이 보이콧은 이후에 마돈나의 싱글이 1위에 오르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앨범은 이렇게 망했으나, 투어 Re-Invention World Tour는 1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벌어들이면서 성공을 거뒀다.

'American Life'에서 이라크 전쟁을 비판해서 라디오 스테이션이 일제히 마돈나
를 보이콧한 이후 마돈나의 싱글플레이는 걷잡을 수 없이 하락했고 이후로 회복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시기의 투어인 'Re-Invention Tour'의 경우 직전의
'Drowned World Tour'나 이후의 'Confessions Tour'와 비교해서 세트도 거의 밴
드 구성으로 이뤄진 소박한 것이며 무대의 크기 역시 스태디움이 아닌 중극장 정
도이다. 이후 이렇다할 싱글 히트곡이 나오지 않는 상황. 그러나 사실 어떻게 보면
85년 데뷔한 가수, 그것도 전성기 짧기로 유명한 여자 솔로 댄스가수가 아직까지
월드 투어를 돌 정도로 커리어를 서서히 연착륙시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
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5년 10집 Confessions on a Dance Floor로 재기에 성공. 참 굴곡이
많은 커리어이다. 싱글 Hung Up은 가장 많은 국가에서 1위를 한 싱글이라는 기록
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폭발적인 디지털 판매량에도 불
구하고 이전의 사건으로 7위로 마감. 2008년 11집 Hard Candy도 나름 중박을 기록
했다. 특히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리드 싱글 4 Minutes은 21개
국에서 1위에 올랐으며, 미국에서도 3위까지 올랐다. 이전 싱글들의 안습한 미국 성
적을 생각해보면 성공적이다.

3.4. 2010년대

2000년대 후반부터 차트 성적이 부진한 것은 마돈나 본인이 약삭빠르게 2010년대
음악계의 중심이 싱글이나 앨범이 아닌 라이브 공연인 것을 파악하고 월드 투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냉정히 바라보자면 마돈나의 인기가 하락세에
접어들고 있다는 게 객관적인 설명이다. 다만, 수익을 올리는 데에는 이골이 난 마
돈나답게 MDNA 앨범부터 수십년간 소속사였던 워너와 계약을 종료하고 공연위주
 기획사인 'Live Nation'과 계약하기도 했다. MDNA 투어로 자신의 이전 투어 기록
을 갈아치우며 이를 바탕으로 1억2천5백만$를 벌어들여 2013년 아티스트 수익 1위
를 기록했다.



5. 논란

마돈나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홍보 방식(...)은 논란을 일으키는 것. 주로 지나치게
도발적인 성적 표현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일부러 본래 의도를 숨기고 논란을 부채
질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많다.

5.2. SEX

마돈나는 90년대 누드집 《SEX》를 발간하기도 했다. 수위가 장난 아님 대학 경영
학 교수에게 '도대체 어떻게 마케팅을 했길래 그렇게 불티나게 팔리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절판된 이 누드집은 그냥 몸만 찍은 누드집이 아니라
성행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수위가 꽤 높다.

5.4. 신성모독

〈Like A Prayer〉의 뮤직비디오에서 Leon Robinson이라는 흑인 배우가 예수 역
할을 맡았는데(물론 이것은 신성모독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 흑인 예수와의 성관
계를 암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묘사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 러시아 마피아들로부
터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지만 마돈나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6.3. 마돈나와 패션

지금에서야 마돈나가 워낙 오랫동안 활동해왔던 가수이기도 하고 전성기도 지난
가수이기 때문에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80~9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당시 트렌드를 이끄는 패셔니스타로 유명했다. 1980년대 찢어진 청바지, 가죽
자켓, 과한 악세사리 등으로 대표되는 펑크스런 패션을 이끄는 트렌드세터였던 마
돈나이다. 이외에도 무대에서 입은 웨딩드레스, 콘브라 의상 등 유명한 의상들도
 많다. 현재 브리트니 스피어스, 비욘세, 레이디 가가 등 유명한 댄스 가수들은 무
대에서 바디슈트 의상을 입는 것이 트렌드인데, 이미 마돈나는 이미 90년대에 이
러한 의상을 입고 공연했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여자가수 무대 의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구자였던 것.


6.4. 마돈나와 뮤직비디오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뮤직비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가수로, MTV 시대를 본
격적으로 이끌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들이 워낙
인상적이고 논란을 이끌어내어서, 노래 자체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어왔다는
평이 있을 정도. 2012년 기준으로 무려 20개의 MTV 뮤직비디오 상을 받기도 했다.
많은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들과 작업했으며, 그 중에는 훗날 영화감독으로 성공
한 데이비드 핀처도 있다.


6.6. 실패에 대처하는 마돈나의 자세[편집]

피도 눈물도 없는 미국 연예계에서 몇십년동안 소위 최고의 '탑 셀러브리티'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80년대, 90년대, 2000년대에 각각 '마돈
나의 라이벌' 이나 '포스트 마돈나' 로 꼽히는 여자 가수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만 봐
도 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물론 마돈나도 항상 최고의 자리에 있진 않았고 정상의
자리에 있던 기간을 보면 10년 정도다.

2010년 들어서는 여느 중견가수들과 마찬가지로 하락세를 타고 있고 레전드의 반열
에 드는 중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절대 인기가수라고 부를 수 없는 신디 로퍼가 80
년대 마돈나의 라이벌이었다. 아니, 사실은 마돈나가 신디 로퍼의 라이벌이었다. 당
시 마돈나는 '신디 로퍼에 비교하면 한참 질이 떨어지는 저 섹시함만 내세우는 3류
가수는 몇 년 내로 사라질 것이다'라는 평을 들었다(...)

마돈나의 성공비결이 딱 잘라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돈나 평전이 묘사
하는 바 그 긴 활동기간을 버텨내게 한 여러 요인 중 실패에 대처하는 마돈나의 자세
는 참으로 귀감이 될만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긴 활동기간 동안 음악, 영화, 사업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모두 성공할 수는 없었고,
심지어 본업인 음악마저도 몇 번의 하락기를 겪었다. 대표적인 것이 1992년의
 'Erotica' 와 2003년의 'American Life' 앨범. 그리고 2012년 'MDNA' 앨범(...) 골든
라즈베리 상의 대표주자답게 영화에서의 실패는 너무나 많아서 모두 언급하기 힘
들고(...) 자신의 음악 레이블이어던 '매버릭 레코드'[29] 사 역시 실패하는 등 사업
에서도 실패를 많이 겪었다. 그럴 때마다 마돈나가 실패를 이겨나는 방법은 아주 명
쾌했다.

음악이 실패한 경우 : 프로듀서를 비난하고 해고한 뒤 다른 프로듀서와 작업한다(...)
영화가 실패한 경우 : 감독을 비난하고 해고한 뒤 다른 감독과 작업한다(...)
사업이 실패한 경우 : 사업 파트너를 비난하고 해고한 뒤 다른 파트너와 일한다(...)

사실 마돈나 평전에 의하면,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슬리퍼 한 켤레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불같이 화를 내며 가정부를 해고하거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절대로
돈을 내지 않고 팁도 아주 적게 주는 등, 짠순이(...) 스러운 면 역시 실패를 이겨내고
 재기하는 발판이 되었을지도.


6.7. 이름

프로필에 나와있듯 마돈나의 본명은 마돈나 루이스 베로니카 치코네(Madonna Louise
 Veronica Ciccone)로, 사실 마돈나라는 이름은 본명이다.  거의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전형적인 이름. 동갑내기인 가수 프린스 역시 (다소 오만한) 예명으로 자주 오해를 받
지만 그쪽 역시 본명이다.

원래 마돈나(Madonna)는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호칭으로, 섹시한 컨셉의 가수가 이
 이름을 쓴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것이 본명인 것을 어쩌겠는가.

7. 어록

마돈나의 어록들을 보면 욕설이 참(...) 많은데, 이것은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돈나 평전에서는 평소엔 세련된 미국 영어를 논리적으로 구사하지만
때로는 어설픈 영국 억양을 사용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심지어 동사도 없
으며 욕설로 가득한 천박한 문장'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7.1. 마돈나가 한 말들

난 강하고 야심만만해. 그리고 난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어.
그것 때문에 나를 씨발년이라고 부른다면, 뭐, 좋아.

내 실험 대상은 바로 나인 셈이지. 내가 예술이야.
내가 바로 나 자신의 예술 작품이야.
- 예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내 생각에, 내 좆은 머리 속에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내 다리 사이에도 달려있을 필요는 없다구.


불행이란 다른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
- Justify My Love (The Immaculative Collection 베스트 앨범 中)

처녀처럼, 처음 손길이 닿은 처녀처럼 느껴져. 처녀처럼,
네 심장이 내 심장과 함께 뛸 때면.
- Like A Virgin (Like A Virgon 앨범 中)
 

7.3. 마돈나에 대한 어록

나는 내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마돈나의 동생으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 모든 것들이
 끝난 뒤에도, 나는 언제나 내가 마돈나의 동생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크리스토퍼 치코네 (마돈나의 동생)


10. 각종 기록

여성 최다 음반 판매 기록(2억장), 기네스 기록
여성 최다 싱글 판매 기록(1억 2000만장)
빌보드 싱글차트 50주년 기념 차트에서 빌보드 싱글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솔로 가수, 전체 2위, 1위는 Beatles
여성 최초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 10개 돌파(Like A Virgin(1984)~This Used To Be My Playground(1992))
솔로가수 베스트 앨범 최다 판매(The Immaculate Collection(1990), 3000만장)
영국 콘서트에서 가장 많은 관객 동원 기록
15개의 싱글을 빌보드 유럽 싱글 차트 1위 기록의 최고 기록(Live To Tell(1986)~4 Minutes(2008))
총 87주간 빌보드 유럽 싱글 차트 1위 기록의 최고 기록
11개의 싱글을 빌보드 유럽 싱글차트 2위 기록의 최고 기록(Like A Virgin(1984)~Celebration(2009))
6개의 싱글을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의 최고 기록
37개의 싱글을 빌보드 싱글 차트 10위권 진입의 최고 기록
빌보드 유럽 싱글 차트에서 1위, 2위, 5위, 10위, 20위, 40위, 진입 전 분야에서 최고 기록
44개 싱글을 영국 싱글 차트 5위권 진입, 6



-발췌출처  : 나무위키








[유머] 지각해서요







[유머] 지각해서요



“회사에서 잘렸어요.”

“왜 잘렸어요?”
“지각했다고요.”

“왜 지각했어요?”
“늦게까지 술 마셔서요.”

“술 왜 마셨어요?”
“사장님한테 혼나서요.”

“사장님한테 왜 혼났어요?”




“지각해서요.”













[유머] 지루할 수 밖에







[유머] 지루할 수 밖에



한 기업체 사장이
중요한 모임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비서가 대신해서 20분짜리 연설문을 썼다.

그런데 연설을 하고 온 사장이 노발대발했다.
"어쩌자고 40분짜리 연설문을 썼는가?
연설 중간에 청중이 다 나가버렸잖아! 응?"

그러자 비서의 대답!
"저는 20분짜리를 써 드렸는데요.
그리고 사장님께서 분부한대로......


2부를 복사해 드렸고요?"

(두 번 읽었으니 지루할 수 밖에^^)

------
강의나 연설을 하는 이들가운데는, 써온 것을
애써 읽는 분들이 있다. 그것은 연설내용을
숙지 못해서 오는 결과거나 자기것으로 소화
못한 탓이다.
요즘 만인의 지탄을 받고 있는 박대통령도 읽
는 데에만 몰두했던 것 같다.
그러니 이해부족을 넘어 '유체이탈' 화법까지
등장할 수 밖에...

당신이 원고를 읽는 것만해도 다행이라고 여긴
다면 할  말 없지만, 진정 리더가 되길 바란다면
이런 경우 '필요한 메모'외에는 가슴 속에서 나
온 말로 전달해야 한다.
-연우생각













[예화] 켈래포니아주의 유레카







[예화] 켈래포니아주의 유레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좌우명은 ‘유레카(Eureka)’다.
헬라어로 ‘내가 찾았노라’ 정도의 뜻인 이 단어가 캘리포니아주의
 좌우명이 된 유래는 이렇다.

1800년대 서부 개척시대에 캘리포니아 곳곳에서 많은 금광이 발
견되었다. 사람들이 금을 찾으러 몰려들었고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이 “내가 찾았다” “나도 찾았다” 하면서 이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캘리포니아 인구가 매년 두 배씩 늘었고 황금의 주
(Golden State)라고도 불리게 됐다.

유레카라는 말은 아르키메데스가 왕이 명령한 왕관의 금(金) 순도
측정법을 목욕하다가 발견하고는 벗은 몸으로 거리로 뛰어나가 지
른 소리로도 알려진다.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이 벗은 줄도 잊고 “유레카, 유레카” 하면서
뛰어다닌 것이다.

당신도 '삶의 유레카'를 찾아 외치시길....














[예화] 핑계와 거짓말







[예화] 핑계와 거짓말




아룬에게 열일곱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룬이 그의 아들에게 10마일 떨어진 외곽에 있는 사무실
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아룬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아무래도 차를 수리해야하겠다.
덜덜 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구나
차를 정비소에 맡긴 다음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늦어도 다섯 시까지는 나를 데리러 다시 사무실로 오너라.”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평소에 가는 정비소에 가서 차를 맡겼습
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아니라서 차 수리는 열두시 경에 끝났습니다.
다섯 시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차를 몰고 시내로 갔습니다. 영화관 앞을 지나가다가 두 편
을 동시에 상영하는 것을 보고는 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 영화관에
들어갔습니다. 한 편만 보고 가면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보는 재미에 빠져 두 편을 다 보았습니다.

밖에 나오니 시간이 여섯시 오분이었습니다. 급하게 차를 몰고 아
버지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하고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그는 차마 영화를 보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정비소에서 차를 늦게
고쳐서 늦었노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때 아룬은 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차를 몰고 집으로 가거라.
 나는 걸어서 가겠다.”

아들이 왜 걸어가려하느냐고 이유를 묻자 아룬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17년 동안 너를 올바르게 키우고자 노력했단다.
그런데 나는 너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구나.
나는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구나.
내가 어떻게 해야 더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집까지 걸어가겠다. 그리고 네가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나쁜
아버지였다면 부디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아룬은 아들이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자 정비소에 전화를 걸어서 사정
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10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다섯 시간
이나 걸어서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울면서 아버지 뒤를 천천히
 차를 몰고 따라갔습니다.

그 후부터 아룬의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평생을 거짓말
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화] 사자와 누







[예화] 사자와 누



사자는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어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립니다.

사자와의 마주친다는 것은
이 세상과의 작별을 의미하기에,
많은 동물들은
사자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작고 연약한 '누'(염소처럼 생긴 동물)는
사자의 눈앞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곤 합니다.

사자가 슬금슬금 움직이면 '누'도 역시
사자와의 거리를 두고 물러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사자가 득달같이 달려들면
'누'도 총알처럼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광활한 광야를 사자와 '누'가 필사적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사자는 '누'를 잡지 못하고 놓쳐 버립니다.

사자가 힘껏 달릴 수 있는 거리는 90m 남짓이며
더 이상 뛰면 심장에 무리가 온다고 합니다.
일부 힘 있는 사자는 90m에서 10m를 더 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가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100m 정도입니다.
물론 더 이상 뛰면 지쳐 쓰러져버립니다.

'누'가 어떤 사자에게도 잡혀 먹지 않으려면
100m를 달리고1-2미터 더 달릴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됩니다.

- 최용우 (햇볕 같은 이야기 中) -

---------------
위험속에서 살아가는 지헤를 터득한 자는
어떤 시련이 와도 이겨낼 수 있다.













[운길산종주] 운길산역-운길산-적갑산-예봉산-팔당역


[운길산종주] 운길산역-운길산-적갑산-예봉산-팔당역



산악회 다닐 때 자주 갔던 운길산을 되돌아 가보기로 한다.
이 코스는주로 종주 산행으로 갔는데, 오늘도 역시 종주코스다.
그래도 크게 힘들지않은 곳이라 즐거운 웰빙산행이 되었다.



------------- 오늘의 코스  --------------------

□ 산행코스 : 운길산역-운길산-적갑산-예봉산-팔당역
□ 산행날자 : 2016년 11월 162일(수)
□ 시작지점 : 지하철4호선이촌역->중앙선 운길산역 2번출구
□ 산행난도 : 중
□ 소요시간 : 6시간(휴식포함)
□ 날씨온도 : -1~11도. 맑음

----------------------------------------------


[오늘의 코스 지도. 인터넷사진과 같은 코스다]



□ 운길산역-운길산

수도권산행은 주로 전철을 이용하는데, 길게는 두시간여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으니,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하며 갈 수 있어서다.
하산길 혼자라도 한잔술로 피로를 풀 때가 많으니 더욱 자차이용은 하지
않는다.

전철4호선 이촌역에서 환승하여 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린 시각은 10시
55분. 2번 출구로 나와 우측을 보면 수종사방면 표지판이 있다. 굴다리 밑
을 지나면 마을길로 들어서는데, 팻말따라 진행하면 된다.

마을길 다리를 지나 좌측으로 올라가면 좌측에 나무계단이 보이는데 이곳
이 운길산 들머리다.

올라가보면 정자가 보이는데, '유기농대회정'이란 푯말이 있다. 여기서 국제
대회를 개최한 듯... 이어 편한 오솔길이 이어지는데, 곧 두갈래길이 나온다.

왼쪽은 일반코스고, 오른쪽은 수종사로 이어지는 곳, 조망이 뛰어나기로 유
명한 수종사를 안거칠수는 없는지라 포장도로로 이어지는 오름길을 택했는
데 이렇게 길게 포장도로가 이어지는 줄은 몰랐다. 산악회에서는 주로 반대
로 하산코스로 잡고가서 몰랐는데, 혼자가니 전혀 다르다.

거의 꼭대기에 이를무렵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는 수종사입구에서 끝난다.
과연 전망은 확트여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관광객과 등산객도 많다.

두루 돌아본 뒤 다시 운길산 정상코스로 되돌아 올라간다. 가다보니 정상은
 얼마안가  나오고 그 근처에서 식사를 하며 쉬어간다.

---


[운길산역. 나이드신 등산객들이 많다]


[역에서 나와 우측방향으로 가면 푯말이 보인다]


[마을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듯한 푯말따라 마을을
가로질러가면 운길산 들머리가 나온다]


[이 나무계단부터 운길산등산코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들머리를 바로 오르면 나오는 정자]


정자 앞의 포근한 오솔길. 낙엽이 푹신하다]


[수종사 오르는 길 내내 아주 긴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물론 옆의 산길코스는 수종사를 거치지 않는다]




[수종사 일주문]


[수종사만 찾는이들은 차를 갖고와 절주변 주차장에 대고,
근처 경관을 즐길 수도 있다. 평일인데도 제법 분비는 절 입구]


[수종사에서 본 한강]




[수종사 전경. 한강이 바로 눈앞에 있다]




[수종사로 들어가는 길 옆의 등산로. 나무계단길]


[굴은 아니고 일종의 바위틈 그늘]


[능선에서 본 한강]




[운길산 정상에서의 인증삿]



□ 운길산-적갑산-예봉산-팔당역

운길산 정상에서 푯말에 있는 예봉산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우측 계단으로 내
려가게 된다. 바위구간이 좀 나오면서 가파른 내리막 길이 이어진다.

가다보면 오르내리막이 많이 나오는데, 힘들게 꼭대기까지 올라도 표석이 없
다. 무명봉인셈, 이런 곳이 여러군데 나와 힘들게 한다.
또 한참가다보면 흔적이 별로 없는 곳도 나오는데, 이럴때는 계속가면 위험하
다. 앞의 확실한 곳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해야한다. 다행이 잠깐의 알바로
바른 길로 갈 수 있었다.

다시 몇개의 무명봉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내린 후에야 철탑이 나오고 세재
고개 푯말이 보인다.

흙산의 단조로운 오르내림길이 정말 힘들게 느껴질 때 드디어 적갑산이 나왔다.
하지만 능선길에 비켜선듯 정상치곤 좀 어색하다.

이어 포토존으로 유명한 활공장이 나오는데, 여기는 전망이 탁 트이고, 시원한
느낌이라 그간의 고생이 한숨에 날라간다.
이어 조금더 가면 철문봉이 나타난다. 다산 정약용 형제들이 학문과 인생을 논
하던 곳이라는 푯말. 풍류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다시 내려가는 길이 지속되다가 억새풀밭이 나오고, 헬기장을 지나가면 오늘의
마지막 목표인 예봉산 정상에 이른다.

정상밑에는 주막이 있어 한 잔 하곤 했는데, 오늘은 평일이라선지 문을 안 열었
다. 주막을 지나 팔당역 쪽인 팔당 2리로 하산길을 택한다. 이곳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팔당댐이며 강전경이 내내 보여 기분은 상쾌하다.

 휴게소터를 지나 예봉산 삼거리 전망대를 지나 갈림길이 나오는데 팔당2리 길
을 택하고, 예봉산입구쪽으로 내려간다.

날머리쪽은 낙엽이 즐비하여 미끄럽다. 조심하며 어둑한 길을 내려오니 큰 길이
나오면서 3거리 우로 가면 팔당역이 된다. 날머리 근처가 역이라 교통은 편하다.
차를 기다리며 기분좋게 산행을 마감한다.

---


[예봉산으로 가는 길. 간판대로 따라가면 되지만, 때론 길이
애매한 곳도 나온다. 이럴 때는 큰길, 빈번한 왕래길을 택하는
것이 길찾기 요령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계속 오르내리막 산길이 반복된다]








[오르내리막을 한참 하고나서나 나타나는 세재길]






[바위길쪽으로 잘 못 내려갔다 다시 되돌아오다]




[여기 코스는 오르내리막이 무척 많다. 봉우리 이름도 없고,
가파른 곳도 많고, 자칫 길을 벗어날 위험도 잦다. ]


[적갑산은 능선길 바위옆에 비스듬히 위치해있다]


[푯말을 잘 살펴보고, 주의깊게 진행한다. 길을 잘못들면
즉시 중단하고 확인한 곳으로 되돌아온다]


[포근한 낙엽 밑에는 돌부리, 나무뿌리가 숨어있으니 조심할 것]


[활공장터. 여기서 페러그라이딩을 한다는데, 단체 사진빨이 아주 잘 받는
포토존의 명소]


[철문봉. 가는 길에 이 푯말만 표시되어 있다
정씨 일가 형제들이 철학을 논한 곳이라고...]


[능선길이 운치있다]


[저위가 오늘의 마지막 목표 예봉산정상]


[예봉산 정상]


[정상에서 본 전경]


[정상 옆의 주막. 이곳에 오르면 한잔하시길. 여름에는 더욱 시원하다.
오늘은 평일이라 문이 안열려 있다]


[하산길 내릭막이 가파르다]


[어느새 황혼이 찾아들고]


[팔당역이란 표시로 내려간다. 팔당2리쪽이다]


[하산길에서 본 한강. 내려오는 내내 한강이 보여 기분이 좋다]




[떨어진 낙엽이 이불을 덮은 듯 푹신하다. 하지만 자칫하면
미끄러워 넘어질 수 있으니 좋심해야한다]


[산에서 내려오면 한강나룻길이 된다. 아마 여기서 한강길 걷기코스가
시작되는 듯, 나중에 한 번 들려봐야 겠다]


[날머리 팔당2리. 밑으로 내려가면 팔당역이라
교통은 좋은 편]


[팔당역]



[코스평]
운길산역에서 수종사로 가는 길은 포장도로가 무척 길다. 하지만, 본 코스의 긴
행로에 견주면 그런대로 즐기면서 오를만 하다. 그 옆 산길로 오르는 길은 일반
등산로지만, 수종사로 가는 길을 벗어나게 된다.

운길산에서 적갑산으로 가는 길은 오르내리막이 무척 많고 지루하기 십상. 친구
들과 담소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는 좋고, 나름 사색에 잠겨 걸어볼만하다.
하지만 초보자는 너무 지루해 당장 내려오고 싶을 수도 있다.

적갑산에서부터 예봉산까지는 활공장도 있고, 전망도 좋아 지루하지 않다. 특히
팔당역으로 내려오는 하산코스 내내 한강이 보여 기분이 상쾌하다.

초보자분들은 운길산만 택하는게 좋을 듯 싶고, 종주산행을 원하시면 팔당역에서
시작해도 좋고, 운길산역에서 시작해도 좋다.

겨울철에는 눈 내린 다음날은 피하는게 좋다. 길을 헤맬 수도 있다. 그외에는 언제
든 즐길 수 있는 서울근교의 명코스로 유명하다.







[오늘산행의 시간대별 기록]

-10:55분 : 중앙선 운길산역 2번출구
-11:18분 : 진중2리 마을 위 유기농 대회정
-11:49분 : 수종사
-12:18분 : 능선 정상부근에서 식사 30분 휴식
-13:04분 : 운길산 정상
-13:27분 : 쉼터
-15:27분 : 적갑산
-15:43분 : 활공장
-15:54분 : 철문봉
-16:25분 : 예봉산정상
-17:27분 : 한강나루길.
-17:35분 : 팔당2리 예봉산입구
-17:43분 : 팔당역. 산행종료


 ---------산행시간(약7시간. 휴식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