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

[팝송명곡] 한국의 라스푸틴 최순실 그리고 최태민 Boney M - Rasputin







[팝송명곡] 한국의 라스푸틴 최순실 그리고 최태민 Boney M - Rasputin





[음악동영상]


옛날 러시아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요
그자는 크고 강했으며
눈은 불타듯이 이글거리고 있었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그자를 바라보았지만
그자는 모스크바의 병아리(젊은 여자)
들에게는 사랑스런 사람이었답니다.

그자는 희열과 정열로 가득 차
설교자처럼 성경을 설교할 수 있었지만
그자는 또한 여자들이 갈망하는
그런 따위의 선생이었죠

라 라 라스푸틴
러시아 황후의 연인
정말로 사라진 고양이 한마리가 있었죠

라 라 라스푸틴
러시아의 위대한 사랑기계
그자가 한 짓은 부끄러운 짓이죠

그자는 러시아 대륙을 지배했었고
짜르(러시아 황제)는 안중에도 없었죠
그러나 kasachok 그자는 정말로
wunderbar 춤을 추었죠

그자는 모든 국정업무에
즐거워 했지만
그자는 품에 안을 여자를 가질 때
정말 위대했었답니다
황후에게 그자는 wheeler dealer가
아니었습니다

황후는
그자가 한 짓들을 들었을지라도
그자가 그녀의 아들을 낫게 한
신성한 치료사라고 믿었죠

라 라 라스푸틴
러시아 황후의 연인
정말로 사라진 고양이 한마리가 있었죠

라 라 라스푸틴
러시아의 위대한 사랑기계
그자가 한 짓은 부끄러운 짓이죠

(대사:)
그러나 그자의 음주
욕정, 권력에의 갈망이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이 방약무도한 남자를
어떻게 조치하라는 요구가
더욱 더 커져갔죠

"이 놈을 없애야만 돼!"
그자의 적들이 선언했지만,
귀부인들은 "그러지 마세요 제발"
하고 빌었죠

의심할 것 없이 이 라스푸틴은
숨겨진 많은 매력을 지녔답니다
비록 그자는 짐승같은 자였지만
그 귀부인들은 그의 팔 속으로 빠져들었죠

그런데 어느 날 밤
몇몇 고위층 사람들이 덫을 놓고
책임지지 않으려고
"이리 와 우리를 방문해 주시오"
라고 계속 요구했고
그래서 그자는 정말
(그들에게) 왔습니다

라 라 라스푸틴
러시아 황후의 연인
그들은 그자의 포도주에 독을 넣었죠

라 라 라스푸틴
러시아의 위대한 사랑기계
그자는 그것을 모두 마셔버리고는 말하길
"난 괜찮아"

라 라 라스푸틴
러시아 황후의 연인
그들은 멈추지 않고 그자의 머리를 원했죠

라 라 라스푸틴
러시아의 위대한 사랑기계
그래서 그들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를
(총으로) 쏘았답니다


There lived a certain man
in Russia long ago
He was big and strong
in his eyes a flaming glow

Most people looked at him
with terror and with fear
But to Moscow chicks
he was such a lovely dear

He could preach the
bible like a preacher
Full of ecstacy and fire
But he also was the kind of teacher
Women would desire

Ra Ra Rasputin
Lover of the Russian queen
There was a cat that really was gone

Ra Ra Rasputin
Russia"s greatest love machine
It was a shame how he carried on

He ruled the Russian land
and never mind the czar
But the kasachok
he danced really wunderbar

In all affairs of state
he was the man to please
But he was real great
when he had a girl to squeeze
For the queen he
was no wheeler dealer

Though she"d heard the things
he"d done
She believed he was a holy healer
Who would heal her son

Ra Ra Rasputin
Lover of the Russian queen
There was a cat that really was gone

Ra Ra Rasputin
Russia"s greatest love machine
It was a shame how he carried on

(Spoken:)
But when his drinking
and lusting and his hunger for power
became known to more and
more people
the demands to do something
about this outrageous man
became louder and louder

"This man"s just got to go!"
declared his enemies
But the ladies begged
"Don"t you try to do it please"

No doubt this Rasputin
had lots of hidden charms
Though he was a brute
they just fell into his arms

Then one night some
men of higher standing
Set a trap, they
"re not to blame
"Come to visit us"
they kept demanding
And he really came

Ra Ra Rasputin
Lover of the Russian queen
They put some poison into his wine

Ra Ra Rasputin
Russia"s greatest love machine
He drank it all and he said
"I feel fine"

Ra Ra Rasputin
Lover of the Russian queen
They didn"t quit they wanted his head

Ra Ra Rasputin
Russia"s greatest love machine
And so they shot him till he was dead






--------


[최태민 - 나무위키]
--- 한국의 그리고리 라스푸틴

대한민국의 종교인이자 기관단체인이었다. 1949년 이전에는 주로 치안당국에서 근무
하였으며, 1970년대 들어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이다가 1975년부터 박근혜와의 인연으로 막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생애

여러 가지로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1912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확실
치 않다.

최태민의 아버지인 최윤성(1892~1945)은 독립유공자이다. 최윤성은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 1천여장을 인쇄해 배부한 뒤 피신했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
금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8월을 선고받고 1년여 정도 감옥에서 지냈
다. 그는 1990년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최태민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해서 어렸을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처음 이름은 최도원이었다고 하며, 1927년에 황해도의 재령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순사 출신이며,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후에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가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 이름을 바꾼 건 광
복 직후였다고 한다. 광복 전에 순사였기 때문에 과거를 숨기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으
나 광복 직후 이름을 최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에서 경찰 생활을 했다.

이후, 대전과 인천 등으로 옮기기도 하다가 1949년부터 군대에 헌병대 비공식 문관으
로 들어갔다고 조사되었다. 이후 해병대 비공식 문관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3월 갑자기 군인을 그만두고 이름을 최봉수로 바꾸
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여러모로 알 수가 없는 인물이다. 이후에도 부인과 다
툼이 심해 도망치듯 경상도 절로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름도 최퇴운, 공
해남, 방민, 최태민 등 다양하게 바꾸며 살았다. 참고로 중앙정보부 조사 보고서에 따
르면, 1960년대 여당이던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이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불교 승려였던 사람이 15년뒤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최태민이 유일하게 정식으
로 오랜 경력을 갖추었던 종교단체는 불교이다.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 들어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
였다. 불교,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 둘다 포함),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
웠다. 그는 이를 '영혼합일법'이라 칭하며, 영세계의 교리라고 주장했다.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고 스스로
를 '단군', '미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영세교(영생교는 잘못 알려진 이름이다) 제1대
교주다.
얼핏 보면 대단한 사이비 교주쯤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막상 후세에 그에 대해 조사했
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1975년 이전까지 큰 사이비 종교 조직이었던 적은 전혀 없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구성원 10명에서 30명 사이로 유지되는 소형 집단이었다고 알려진
다. 박근혜를 만나기 몇개월 전까지도 제기동이나 북아현동 등 당시 별로 서울 중심지
가 아닌 곳을 이리저리 떠돌아 전세를 살며 계속 저런 걸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신자들 뜯어먹고 한탕한 부자 교주이기는 커녕 잘 사는 편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저거보다 훨씬 큰 집단의 사이비 교주들이 꽤 있었고 현대에는 그것보다 더
 큰 집단들도 있을 정도라 그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던 걸로 알려진다.

1974년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 완전히 멘붕 상태였던 박근혜에게
 1975년 2월경 위로하는 편지를 3차례 보내 박근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편지를
본 박근혜가 최태민을 직접 만나기로 결정하게 되고, 실제로 1975년 3월에 직접 만나게
 된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이 당시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의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
에 시달리는 상태였는데, 육영수의 영혼에 빙의되었다며 육영수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
로 재연하는 최태민에게 심리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최태민을 목사로 착각하고 있는데 최태민은 사실 목사였던 적도 없는 자
다. 박근혜를 만난 이후 목사안수를 받은적도 없으면서 자신을 목사라 칭한 것이다.

 2016년 10월 26일자에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안수자체를 받은바가 없다고 확인되었다.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 또한 없다. ‘태민’이라는
 ‘마지막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다. 현재 목사라고 지칭된 여러 언론사의 기사들이
 오보인정을 하고 '최태민씨'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노컷뉴스 단독보도로 최태민이 이전에 떠돌던 말처럼 돈 주고 목사 안수를 받
았음이 확인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이하 예장종합총회) 총회장 전기영
목사로부터 안수를 받은 것. 나중엔 주술사스러운 행동 탓에 교단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 후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하였다. 1975년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
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
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
마음운동의 본산이다.

그 후 최태민은 새마음운동본부의 비공식 고문으로서 박근혜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새마음운동본부의 모든 업무를 관장했다. 새마음운동본부를 기반으로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실제로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
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이에 청와대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1977
년 9월 직접 심문을 당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최태민의 생식능력을 없애는 것과
청와대 근처에 얼씬을 못하게 하고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 모두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어떻게 잘 넘어갔는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0.26 사건 때까지 박근혜의 옆을 계속 지켰다. 김재규는 박정희 살해의 동기에 자신이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그를 비호하는
 바람에 대질심문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하였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 이후에는 전두환이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를 받았다. 당
시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 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
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
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에 강제
로 해산되었다.

그 후 박근혜가 육영재단과 영남대학교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가자 최태민은 슬그
머니 거기에 동참했다. 그러다가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
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
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녀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
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 파업과 직원들 농성도, 모두 ‘외부세
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가 여동생 박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박근혜는 물러나면서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
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이후 서울특별시 역삼동 자택에 칩거하다가, 1994년 노환으로 숨졌다. 이때가 향년
81세다.


4. 박근혜와의 부적절한 관계

박근혜와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냐 하면, (위에 쓰여져 있듯) 박정희가 살아 있었던
시절, 중앙정보부, 검찰청, 경찰청 등 박정희 정권의 사정 기관들은 '이런 사기꾼이 영
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최태민을 잡아들여서 족치고 박정희에게 이
인물을 '처리'해야 한다고 건의할 때마다 직접 나서서 이 사람을 비호하고 지켜줬다.
아무리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최태민이 직접 박근혜와 영적부부 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는 증언이 나왔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근화봉사단에 맡아달라는 것이다.

1990년 8월엔 친동생들이 직접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최태민을 족쳐 줄
것을 요구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경찰청장 등을 시켜 최태민을 조사할 것을 요
구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박근혜는 먼 훗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그리고 그 이전
에도 이 사람을 마치 인생의 가장 큰 은인인 것처럼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드러낸
바 있었다.

박근혜와 최태민 사이에 사생아가 있다는 의혹도 여러 차례 제기된 바가 있다.
 박근혜 는 '원한다면 DNA 검사라도 받겠다'며 이러한 의혹을 일절 부정하였다.


2016년 10월 29일, 박정희가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 최태민을 박근혜에게서
적극적으로 떼어놓지 않았나에 대해 추측해 볼만 한 증언이 나왔다. 박근혜가 연루 된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은 박정희의 지시로 창설 되었으며, 그 목적은 민주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이다.

전 목사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씨를 불러 민주화 운동을 하는 진보 기
독교 세력이 강하다며, 이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최태민 씨
에게 보수 기독교 세력의 결집을 주문한 셈이다.
--노컷뉴스, 2016-10-29 20:15

이 말대로라면 보수랍시고 그나마도 제대로 된 기독교도도 아닌 골수 이단인 최태민을
 내세워 보수기독교 규합의 구심점으로 세우고 기독교 내의 진보 세력들을 견제시켰다
는 건데.


가족 관계

1954년엔 김 아무개씨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하는 등 여자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그 결과 부인 6명으로부터 자식을 3남 6녀나 두었다.

5번째 부인 임선이(1920~2003) 최순실의 모친. 박근혜의 정계입문에 큰 도움을 주었고
 사위인 정윤회에게 비서실장직을 추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민의 사망 직후 배다
른 자식 3명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냈다고 한다. 판결문을 보면, 최태민은 임선
이와의 혼인신고 전에 두 여인에게서 이들을 낳았다. 결혼과 동시에 “편의상” 이 3명을
 모두 임선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듯 출생신고를 했지만, 최태민 사망 뒤 임선이가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유산 배분 문제를 염두에 둔 조처였을 거란 관측이 제
기되지만, 최태민 본인도 생전에 이들을 언급하지 않은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박근혜와의 인연이 5녀 최순실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은
자매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정윤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초선의원이
었을 때 첫 비서실장을 지냈던 사람이며,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의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이다.

최순실은 이때 잠깐 이름이 언급되었다가, 미르 재단 & K 스포츠 재단 사건의 흑막으
로 지목되면서 우리나라 뉴스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비리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70년대 당시 국가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조
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고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인사 청탁

1975년 9월15일 2군 이모 대령의 부인 김OO에게 "국방부 장관에게 청탁하여 이OO을
준장으로 진급시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원 수수. 1976년 6월 4일 H사 사장
김OO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서울시 비상유류 저장탱크 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5,000만원 수수. 1976년 10월 초순 한국소방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이OO에게 내무부 차관에게 청탁하여 "소방기구 신규제조 허가를 억제해주고 동 기구
검정권을 동 조합에 주도록 해준다"는 조건으로 200만원 수수.

1976년 8월 전 중앙정보부 강원지부장 김OO의 부인 박OO에게 "남편을 중정에 복직시
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차에 걸쳐 150만원 수수. 1976년 9월 초순 S관광 대표
진OO에게 "대덕-연기 지역구 차기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게 해준다"고 하고
 1976년 9월 17일 ~ 12월 10일 5회에 걸쳐 500만원 수수

1977년 3월 24일 H사 K회장에게 "구국봉사단 부산지단장에 임명해 준다"고 하고 그 대
가로 200만원 수수. 1975년 9월 27일 H사 사장 K회장에게 "대한화재보험협회에 청탁하
여 동 협회 청사 신축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7,000만원 수수

재산 관련

최태민은 각종 비리 의혹과 함께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내세워 재산을 부정 축적하였
고, 이를 자녀들에게 상속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최태민의 5녀 최순실-정윤
회 부부는 강남의 200억 원 빌딩의 소유주이고, 6녀 부부는 150억 원 규모의 부동산
소유주이다. 최태민과 박근혜 사이에 숨겨둔 아이설마 정유라 겠어?가 있다는 의혹
이 있으나,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없다. 이 의혹을 제기한 백은종은 명예훼손으로 고
발당한 상태이며 재판이 진행 중이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

































----------------

그리고리 라스푸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러시아어: Григо́рий Ефи́мович Распу́тин,
영어: Grigori Yefimovich Rasputin, 1869년 1월 22일(구력 1월 10일)~1916년 12월 29일
(구력 12월 16일))은 제정 러시아 말기의 파계 수도자이자 예언자이다.


시베리아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살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903년 당시 제정 러시아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났고, 혈우병으로 고생한
 황태자를 기도 요법으로 병세를 완화시켜 신망을 얻었으며, 귀족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당시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라스푸틴은 이를 이용하여 니콜라이 2세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며 폭정을 일삼았다.

이러한 라스푸틴을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은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특히 장녀 올
가 로마노바는 라스푸틴을 죽여 없애야 러시아가 평화로워진다고 하면서 라스푸틴을
몰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알렉산드라 황후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올가가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라스푸틴은 러시아의 농민들에게 생계유지조차 어려울 만큼 가혹한 세금을 거둬들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이에 항의하는 농민들에게 총탄을 퍼붓기까지 했다.

이를 후세의 사람들은 피의 일요일이라 부르고 있다. 특히 1915년 니콜라이 2세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하게 되자 러시아는 완전히 라스푸틴의 천하가 되었는데 이
때 라스푸틴의 폭정은 전무후무한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모든 일반 농민
들은 물론이며 심지어는 황제파의 귀족들마저 황제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라스푸틴의 반대 세력이던 펠릭스 유스포프 공작,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푸리쉬케비
치가 라스푸틴의 전횡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를 처치하기로 모의하고,
궐석재판을 집행하여 라스푸틴에게 사형을 언도한 후 라스푸틴을 잔치로 초대했다.
그들은 준비한 독극물을 라스푸틴에게 먹였다.

그러나 라스푸틴은 독약(청산가리)을 먹었음에도 기타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그의
기행은 2시간 반 정도 계속되었다. 보통 사람은 청산가리를 먹고 5초 이내에 죽는다.
그러자 황족 펠릭스 유스포프가 그를 총으로 쏜 뒤 강철 지팡이로 머리를 마구 때리고
양탄자에 싸서 얼어 붙은 네바 강 물에 빠뜨렸다. 이 때 라스푸틴의 몸에는 실탄이 4발
이나 박혔다.

나중에 황비 일행이 라스푸틴의 상태를 보니 그는 독살도 총살도 아닌 익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2] 실탄을 맞고 강철 지팡이에 머리를 맞을 때도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
던 것이다. 더군다나 라스푸틴의 영구를 네바 강에서 건져 올릴 당시 네바 강 표면의
 얼어붙은 얼음에서 라스푸틴의 손톱자국이 발견되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라스푸
틴은 처형되기 전에 편지를 썼는데, 내용은 그의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다. 나를 죽이는 장본인이 황제의 친구(황족 혹은
인척)이면 황실도 머지않아 몰락할 것이고 귀족에게 죽는다면 차르는 25년 후에 러
시아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며 농부의 손에 죽는다면 차르는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릴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라스푸틴의 예언대로 몇 달 후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도하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는 붕괴되었으며 로마노프 왕조도 단절되
었다.

-발췌출처: 위키백과

---




















댓글 1개:

  1. 좌좀들은 이런 날조 아직도 믿는구나 광우뻥이 무섭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