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21.

[명시음악] 천상병 시모음 귀천 나무 Lee Oskar - You and I









[명시음악] 천상병 시모음 귀천 나무 Lee Oskar - You and I




[음악동영상]


01 귀 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02 나 무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03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갑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04 행 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05 광화문 근처의 행복

광화문에,
옛 이승만 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
기어코 나의 단골인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그리고 천 원짜리 두 개를 주는데---
나는 그 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포켓에서 이천원을 끄집어 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
"귀찮아! 귀찮아!"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단골집은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자유당 때 휴간(休刊)당하기도 했던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06 편 지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07 새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08 강 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09 날 개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안 다셨는지 모르겠다
내같이 가난한 놈은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뿐인데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 성취다
하나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10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11 나의 가난함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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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없을 순수 영혼 나의 남편 천상병 - 목순옥

나의 남편 천상병 시인은 한마디로 남편이라기 보다 늘 일곱 살짜리 같다는 별명을
붙일 만큼 아기 같은 심성을 가진 남편이다. 때로는 깔깔 웃다가 마음에 안 들면
 "문디 가시나"(본인은 애칭이라 함)라고 말을 뱉곤 했다.

남편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빠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명동 '갈채다방'에서
그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으로 시작됐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살게 되
면서 '갈채다방'에 더욱 자주 들르게 됐다. 그때 많은 문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서정
주 선생님을 비롯해서 김동리·손소회·박기원·황금찬·박재삼·이근배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계셨다. 오빠는 '금문다방' '은성다방' 등 여러 곳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오빠 친구들이 동생처럼 아껴주시고 귀여워해주셨기에 천상병 시인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오빠 친구들과 함께 영화도, 연극도, 대폿집도, 자연스럽게 다녔다. 그때
 나의 눈에는, 많은 문인들의 모습이 순수 그 자체처럼 보였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돌이켜 생각해본다. 내가 그 시절
로 돌아간다면 다시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택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그
러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으로, 잘 견디어낸 나 자신에 감사하고 싶다.

천상병 시인이 나의 남편이 되기 전의 일이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옥고를 치른 후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가 7개월 만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시립정
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그의 입원 사실을 모른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며 걱정하
던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해도 연락이 없자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시집을 만들기
로 했다. 성춘복·민영·박재삼 선생들께서 흩어져 있던 그의 시들을 모았다. 민영 선
생님이 원고를 정리하시고 성춘복 선생님이 돈을 마련하셔서 유고시집《새》가 나왔다.
김구용 선생님이 쓰신 <내 말이 들리는가>라는 서문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집 발간 이후 천상병 시인은 시립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니까《새》는 살아
 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된 셈이고, 그것은 천상병 시인만이 가진 유명한 일화가 되
었다. 나는 정신병원을 찾아가 그를 면회했고, 병원에서 그를 보살펴주던 김종해 박사
님의 권유로 그를 퇴원시켜 2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로 종로5가
 동원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수락산 밑 초가집 문간방 하나를 얻어놓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이면 일어나 수
락산 입구까지 산책하고 돌아와 아침을 먹고, 소꿉놀이하듯 그렇게 시작한 신혼생활은
 상상을 초월한 생활이었다. 그 사이 또 한 번의 정신병원 입원 등 고난의 연속이었지
만 꿈이라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결혼생활 20년, 참으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살앗다. 남편을 두고 기인이라는 사람들
이 있지만, 남편은 결코 기인이 아니라 순수한 삶을 살다 간 아이 같은 심성의 시인이
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런 순수한 마음의 사람은 앞으로 다시 없을 것이라고, 나 자신
에게 거듭 말하곤 한다. 그를 오십년 동안 거울 안 같이 들여다 본 나이기 때문에 감
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지 30년(13년인데 표기가 잘못된 듯 합니다. 김승규). 올해도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천상병예술제가 열린다. 앞으로 남은 내 생도 남편을 위해 쓰
고 싶다. 소풍 끝내는 날 가서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월간 문학사상 2006년 4월호



천상병 생각 - 이승하

인사동 거리 걸어갈 때 마주치는 찻집
내 그대 살아 생전의 얼굴 본 적은 없네
그대 반평생 제정신으로 살다
반평생 넋 나가 살았다는 얘기며
술잔만큼의 웃음과
담배 개비만큼의 구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뿐
나 2000년에
시인으로 살아가기 부끄럽고 한심스러워
‘歸天’ 간판 못 본 듯 발걸음 옮기네
천상의 시인이었으면 무엇하나
지상의 병든 몸이었던 것을
그대 애꿎게 당한 세 차례의 전기 고문과
생전의 유고 시집 『새』 이후
황폐한 나날에 쓴 시들이 쨍그랑!
내 혼을 깨뜨리네
아프고 또 아픈 몸으로
소풍 나온 아이처럼 웃고 또 웃다가
하늘로 돌아간 그대 생각에
나 부끄러워 그 집 앞
얼른 지나쳐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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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시나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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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천상병 시인은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여기 실린 것은 그 중 유명한 것들로 지극히
 일부라는 점을 밝혀둔다.

1
한창 젊었을 적 완전히 폐인 모습으로 살고 있던 천상병 시인. 머리가 하도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 다. 이를 딱하게 여기던 친구 한 명이 그냥 돈을 주면 술
을 사먹을까봐 천상병을 데리고 이발소로 갔다. 거기서 이발비를 지불하고 천상병이 머
리카락을 자르는 걸 본 친구는 안심하고 집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친구가 나가자마자
천상병은 이발사에게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해달라고 요구한다. 어이없
어진 이발사는 환불을 해주고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먹었다고 한다.

2
대학시절, 교수님 집에서 머무는데 화장대에 멋있어 보이는 병이 있어서 양주인 줄 알고
마셨는데, 이상하게 향이 심해서 '역시 좋은 술인 가보다.'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향수
였다고 한다. (출처: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3
그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었을 당시 그의 죄명은 그의 친구였던 강빈구에게 공갈로
 3만 6500원을 갈취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강빈구에게 술값으로 백 원,
오백 원씩 받아썼던 돈으로, 그것 때문에 하루 아침에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4
천상병과는 술동무로 절친한 사이였던 시인 신경림의 회고에 따르면, 먹성이 좋고 주량도
 엄청났던 모양이다. 또한 몸이 튼튼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험하게 살았음에도 어디
서든 멀쩡히 잘 먹고 잘 살았던 탓에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속이 무쇠로 되어있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그러나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당시에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
문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서 젊은 시절의 먹성도 사라졌고, 술은 많이 먹었으나 주량이
 줄어들어서 금방 취해 횡설수설하기 일쑤였으며, 평소같았으면 쓰지 않을 이상한 글을
써서 동료 시인들이 무척 놀랐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과 정신이 크게 쇠약해진 것
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한다.

5
천상병은 언제나 "사람은 탄탄한 조직에 들어가야 잘 살 수 있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친구였던 신경림 시인이 영어학원 강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
하며 취직을 시켜주겠다면서 일자리 알선도 해 주었다고. 신경림은 일정한 수익이 없었던
천상병이 제 걱정은 않고 남 걱정만 하는 것을 보고는 우스워서 한마디 했더니, 천상병 또
한 이에 지지 않고 "너와 나는 타고난 생리가 다르다"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즉 자신
은 남들보다 시를 잘쓰니 자기 힘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6
천상병은 절친한 친구인 시인 김관식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김관식도 골탕먹이
고 술사먹을 돈도 벌 겸 김관식의 집에 있던 오래된 책 한권을 몰래 봉투에 담아 이를 고서
점에 팔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관식이 이를 눈치채고는 천상병이 훔친 책을 몰래
봉투에서 빼내고선 대신에 낡은 원고지 한뭉치를 넣어버렸다. 이를 모르고 고서점에 책을
팔러 갔던 천상병은 되려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김관식은 이 광경을 보고 배꼽이 빠져
라 웃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천상병에게 따로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6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어 취조를 받던 당시 그의 별명은 '천희갑'이었다고 한다.
그의 얼굴이 당시의 넌센스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아서였다고 한다.

7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당시에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특히 전기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아이
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고문에 의한 후유증은 이뿐만이 아니었기에 죽을 때까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8
그가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감될 당시 그의 지인들이 그가 객사한 것으
로 생각하여 그가 남긴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살아서
유고시집을 남기는 진기록을 가졌다. 물론 93년에 확실히(...) 죽은 뒤에도 유고시집 《나 하
늘로 돌아가네》가 출간되었다.

9
천상병 시인은 생전에 지인들에게 세금(?)으로 500원, 1000원[3]씩을 받아내곤 했었는데 징수(?)
의 기준이 특이했다. 돈을 받는 사람은 꼭 지인 한정이었고 지인이 아닌 사람한테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이라 생각하면 1000원, 어른이 아니라 생각하면 500원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기준도 나이같은 게 아니라 결혼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1000원,
결혼 안 하면 500원씩 받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천상병이 스스로 어지간히 친하다고 생
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돈을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돈을 주면서도 기분이 나쁘
지 않았다고 한다.

10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병원장과 천상병 시인은 친구
관계였다고 한다. 그를 만났을 당시 병원장이 천상병 시인에게 배에 복수가 차서 누워있는 시인
에게 배가 왜 이렇게 불렀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은 임신을 했다는 개드립 농담을 던진다.(...)

11
역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소설가 이외수가 문병을 왔는데 그때 초면이
었던 이외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외수야! 넌 이제 내 동생이다!(...) 이외수의 회
고에 따르면, 평소에 천상병 시인을 존경하여 직접 만나 보고 싶었으나, 정작 그런 기회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뒤늦게 병문안을 가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가 이와 같은 환대를 받자
 무척 감격했다는 듯. 이후에 서로 연락도 하고 자주 만난 듯 하다.

12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목순옥 여사가 춘천으로 오고가
면서 천상병 시인을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던 그의 병은 완쾌되었고 더 놀랍게도 정확히 5년 후인 1993년 거짓말같이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목순옥 여사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5년이 아니라 10년
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을..."

13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8백만원에 달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생전 처음
만져보는 돈을 그의 장모가 잘 숨겨둔다는 것을 하필 아궁이에 숨겨놓았다.(...) 그런데 목순옥
여사가 이것을 모르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나마 형태가 남은 것을 은행에
 가져가서 그나마 절반은 건졌다고 한다.[5] 장모인 조성대 여사는 딸인 목순옥 여사가 세상을
 뜨던 2010년 102세로 생존, 그리고 2011년 4월 12일 사위와 딸을 다 보내고 103세로 귀천하셨다.
아이러니하게 천상병 시인은 평소 장모의 장례비 걱정을 많이 했다는데 그래놓고 장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남은 돈이 장모의 장례비 만큼의 돈이었다고 한다.

14
당시 '귀천'에 자주 다니던 사람이 천상병 시인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을 거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테니 오거든 갚을 만큼의 공짜술을 주겠네." 이 이야기는 일본인이 쓴 세계 유명인의 명
대사란 책자에 나온 적도 있다.

15
개를 무척 좋아하여 개와 함께한 유명인이라는 책자에 나오기도 했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
날 때 기르던 개는 슬퍼하며 천상병이 자주 앉던 서재에 항상 누워있다가 3년 뒤에 주인을 따라
갔다고 한다.

16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에는 천상병 공원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천상병 시인의 유품 203점을
묻어놓은 타임캡슐이 있는데 천상병 시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130년 공개한다고 한다.그러니
까 도굴할거 아니면 살아서 볼 생각은 포기하는게 좋습니다.

17
천상병 시인은 인사동에서 찻집 '귀천'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천상병 시인이 죽은 뒤에는 아내
 목순옥 여사가 계속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순옥 여사마저 2010년 세상을 떠나자 '귀천'
은 문을 닫아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목순옥 여사의 조카가 하고 있는 귀천 2호점은 계속 운
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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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천상병(千祥炳, 1930년 1월 29일 ~ 1993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문학평론가이다.
일본 효고 현 히메지 출생이며 원적지는 경상남도 마산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소풍 온
속세를 떠나 하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을 담은 시 《귀천(歸天)》으로 유명하다.
1967년 불행히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타계하였다.



생애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한국인 부모에게서 출생했으며, 8.15 광복 후 부모를 따라 귀국하
였다.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발표했으며,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
과를 다니다가 중퇴했으며, 중앙정보부에 의해 과장된 사건으로 판명된 소위 '동백림 사건'
(1967년)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돈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으며, 천상병 시인 자신도 전기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멍들었다. 그때의 처참한 수난을 천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고문)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이후 천시인은 여러 일화들을 남기는데, 1970년에는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
에 수용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지인들은 갑자기 사라진 천시인이 죽었다고 생각, 유고시집
 《새》를 발표하였다.

1972년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 여사와 결혼한 천상병 시인은 1979년 시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냈고,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년),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1987년),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
아》"(1993년)도 발표하였다. 천시인은 하느님에 대한 소박하고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을 보
여주는 작품활동도 하였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되신 분이 아니실까싶다.//
대우주는 넓다./너무나 크다.//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우리 하느님이/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천상병은 개종을 하지는 않았다. 천주교 성당을 다니다가 81년부터 개신교 연동교회로 나갔다.

"나는 지금까지 약 30년동안은/명동 천주성당에 다녔는데/ 그러니까 어엿한 천주교신도인데도/
81년부터는/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주임목사 김형태 목사님도/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
으로/ 그리고 기독교방송에서/그동안 두번 설교를 하셔서/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교회엘/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갑니다./교회당 구조도 아주 교회당답고/조용하고 아늑하여 기뻐집니다./아내
는 미리 연동교회였으나/그동안 가톨릭에 구애되어 나 혼자/명동 천주성당에 나갔었으나/그런데
81년부터는 다릅니다./한번밖에 안 나갔어도 그렇게 좋으니/이제는 연동교회에만 나가겠습니다.
/물론 개종은 않고 말입니다./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연동교회)

1993년 4월 28일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의정부시 장암동 자택에서 타계했고, 의정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천상병 전집》이 발표되었다. 2007년
5월 1일에는 제 4회 천상병 예술제가 천상병이 죽을 때까지 10여 년 간 거주한 의정부시에서 열
리기도 했다.


-발췌출처: 위키백과 '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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