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4.

[팝송명곡] Alida Chelli Sinno Me Moro (죽도록 사랑해서) 위험한 정사










[팝송명곡] Alida Chelli Sinno Me Moro (죽도록 사랑해서) 위험한 정사





[음악동영상]







[음악동영상2]
川井郁子 Ikuko Kawai 死ぬほど爱して Sinno Me Merro


영화"형사(위험한 관계)" OST.

 Amore,amore,amore,amore mio 내 사랑, 내 사랑, 내 사랑, 내 사랑이여
in braccio a te, me scordo ogni dolore 당신의 가슴에 안겨서 난 모든 시름을 잊죠

voio resta co"te sinno" me moro 언제까지나 당신과 있고 싶어요
voio resta co"te sinno" me moro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voio resta co"te sinno" me moro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어요

 Nun pia"gne amore, nun pia"gne, amore mio 울지말아요, 울지말아요 내사랑이여
 nun pia"gne state zitto su sto core 울지 말고 가만히 내 가슴에 기대요
 ma si te fa soffri dimmelo pure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면 말해주세요
 quello che m"hai da di", dimmelo pure 내게 할말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quello che m"hai da di", dimmelo pure 내게 하고 싶은 그말을 말예요

Read more at: http://lyrics.jetmute.com/viewlyrics.php?id=244027



 

 



-------------





 정사 情死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동반 자살하는 것을 이르는 표현
이다. 2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는 거의 일어나지도, 쓰이지도 않았다. 사실상 일본에서
 수입된 것에 가깝다. 일본어에선 신주(心中)라고 부른다.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면, 에도시대에도 정사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로
유곽의 기녀와 사랑 때문에 자살을 하다보니, 당시 '정사'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소네자키 신주처럼 조루리나 가부키로 정사가 미화되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끄
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메이지~다이쇼시기 일본에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살이 자주 벌어지게 되
는데 그 가운데 정사가 존재했으며 <정사론>도 쏟아져 나왔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역사학자인 미우에 산지(三上参次)는 이 시기 빈번했던 정사의 원인
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세에서 함께 살 수있다는 불교적 세계관
할복과 같이 죽음을 경시하고 아름답게 보는 풍조
부인의 정조 문제
사회적인 억압

어쨋든 당시 이러한 동반자살에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지만, 동정적인 의견도 많았으며
 낭만적으로 미화하기도 했었다.



心中; 동반자살

일본어 신주(しんじゅう;心中), 에도시대에 유행하던 남녀동반자살(정사). 서로 사랑하
는 남녀가 결혼할 수 없을때 택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둘이 함께 죽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 남녀 사이 최대의 로망이었다. 오사카에서 있었던 소네자키 신주가 분라쿠(일본의
 전통 인형극)로 만들어져 엄청난 히트를 치면서 이후 20-30년간 신주는 대단히 유행하였다.

신주가 마치 유행병처럼 번지자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 국법으로 신주가 금지되었다. 시도
는 했으나 둘 다 살아남은 경우 혼바시에 3일간 벌거벗고 세워놓아 수치를 준 후 천민 계
급이 되었으며, 혼자 살아남아도 감옥에 들어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일생을 살아야한다.
 특히 무사가 신주를 시도한 경우 집안 전체가 죠닌(평민)계급으로 강등되었다.

주로 유녀들과의 신주가 많았다고 한다. 유녀 자체가 포주에게 묶인 몸, 돈을 내는 남자에
게 팔려갈 수 밖에 없었으니 운명을 거부한다면 가능한 선택지가 몇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를 거치며 단어의 뜻이 변하는데, 최초에는 남녀간 치정 문제에 연관된 동반자살이었
으나 동성(同性) 연인의 동반자살도 신주라 부르게 되었고, 이후 근대를 거치며 연인이
아닌 집단자살, 최근에는 종교 집단의 집단자살이나,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끼리[1] 함께
 자살하는 것도 신주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 경우는 넷 신주(ネット心中)라는 신조
어로 사용하기도.

일본 애니메이션 昭和元禄落語心中(쇼와 겐로쿠 라쿠고 신주)의 心中도 여기에 해당한다.





동반자살 -- 함께 자살하는 것


말 그대로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자살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일가족 단위로
 동반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 단독 자살의 경우는 혼자의 결심으로 혼자 단행하는
것이라 상대적으로 쉽지만 동반자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자면 동반자살을
주도하는 자가 "우리 다 같이 죽자!"고 해도 집단 구성원들 중에는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살인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즉,
동반자살을 주도하는 자가 집단 내 자살 반대자들을 살해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동반자살의 90% 이상이 순수 자살이 아니라 자살+살인의 형태다.

한국의 대표적인 동반자살 사례는 1960년 4.19 혁명 때 벌어진 이기붕 일가 동반자살이
 있다. 이 때 자살을 주도한 이는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이었고 형태는 자살+살인이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동반자살로는 263년 촉한 멸망 당시 유선의 아들 유심이 일가족과 동
반자살을 했다. 역시 자살+살인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일본의 대표적인 동반자살 사건
은 히로시마 일가족 실종 사건이다. 정황 상 가장인 야마가미 마사히로의 주도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는데 자살 동기가 무엇인지 또 순수하게 일가족들이 자살에 동의했는지
 아니면 자살+살인인지 알 수가 없어 미제 사건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心中이라는 단어가 해당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유래된 듯한 표현으로는
우리말의 정사(情死)가 있다.

-출처: 나무위키





---------------------------------------------


실락원 失樂園(1997년 영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감독 모리타 요시미츠
원작 와타나베 준이치 『실락원』
출연 야쿠쇼 코지, 쿠로키 히토미
제작사 토에이, 카도카와픽쳐스

《실락원》는 와타나베 준이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97년 제작된 일본의 멜로
드라마 영화이다.
와타나베 준이치의『실락원』이라는 동명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불륜의
 미화라는 주제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원작소설은 1997년 출판되자마자 베스
트셀러에 오르며 50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사랑을 하다 결국엔 동반자살을 한다는 ‘실락원증후군’ 혹은 ‘신쥬’
(心中情死: 동반자살)라는 사회적 현상까지 일으키며 문제가 되었다.

제21회 일본 아카데미상 (1998)에서 우수 여우조연상, 우수 남우조연상, 최우수 여우주
연상, 우수 남우주연상, 우수 각본상, 우수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해당 영화는 1998년 대한민국에서 장길수 감독, 심혜진, 이영하 주연으로 『실락원』 리
메이크되어 공개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보충자료]








자살 고위험군

유가족

한국은 하루 평균 43.6명이 목숨을 끊을 정도로 세계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다. 수년째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최악의 문제는 고위험군
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숫자가 250만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



유가족은 일반인에 비해 4배 정도 높은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된다.

하규섭 국립서울병원 원장 曰 우리나라처럼 인구밀도가 높고 인간관계가 대단히 밀접한 곳
에서 한 명의 자살이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큰집, 작은집, 사촌들을 생각해 보라. 한 아
이의 급우만 해도 몇 명인가. 우리 문화의 특성상, 아마도 한 명의 자살이 미치는 영향력은
 심각한 수준만 꼽아도 적어도 10~20명은 될 것이다.

목격자와 처리반

공공장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은 또 다른 자살 고위험군을 만들어내는 2차 피해를
 낳는다.

2012년 2월, 이씨가 운전하던 버스는 강남대로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정류장을
 출발하던 순간, 갑자기 운전기사 이 씨가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는다. 버스 밑을 확인하더
니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차를 출발하려던 그 순간 누군가가 버스 밑으로 뛰어든 것이
다. 이씨는 본능적으로 사고를 직감했다. 누군가 버스를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다.
그날 놀란 것은 이 씨뿐만이 아니다. 버스 안 승객들과 도심 행인들이 예상치 못한 죽음의
 목격자가 됐다. 그날 이후 이 씨의 현실은 악몽이 됐다.


민한홍 ○○ 법무법인 변호사 曰 이튿날 버스 기사를 만났다. 극심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
었다.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피해자는 바로 이 버스기사다.

이 씨 당시 버스 기사 曰 버스 바퀴가 머리를 역과했으니 그 주변이 얼마나 낭자했겠나.
손 쓸 방법도, 살릴 방법도 없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퇴근 시간대라 사람도
많았다. 나로 인해 사람이 죽었다는 충격에 머릿속이 하얘졌고, 조금 지나니 오만 가지 생
각이 다 들더라. 그날의 여파는 지금도 상당하다. 사람을 죽였다는 심리적인 압박이 평생
나를 괴롭힐 것 같다.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 역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2010년 한 해에만 75
명이 선로로 몸을 던져 숨을 거뒀다. 스스로 생을 포기한 사람들이 피하려 했던 고통은 기
관사에게 전달된다.


윤 씨 지하철 기관사 曰 사고 얘기를 전해 들은 기관사들은 승객이 승강장 펜스 앞으로
조금만 다가서도 극도로 긴장 상태가 된다. 그래서 굉장이 데시벨이 높은 경적도 울리고,
열차를 바로 정차시키기도 한다.

김 씨 지하철 기관사 曰 내 손으로 한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시간이 지나니
 원망으로 바뀌더라. 그가 뛰어든 게 왜 하필 내 열차였나 원망스러웠다. 현재 심정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사건에 대해 심적으로 치료되고 견뎌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덮으
려고만 한 것 같다.


홍진표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曰 119구급대원, 경찰관, 철도역무원 등 자살을
 목격하거나 현장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은 3~4배 증가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수치를
 보인다. 자살 현장이 반복적으로 떠올라 수면장애를 겪을 뿐 아니라 항상 긴장과 초조,
그런 끔찍한 장면에 또다시 노출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친족 간 동반 자살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동반 자살 중 친족 살해 후 자살은 56%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어느 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아빠가 아이를 데리러 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선 아
이. 아빠는 무거운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는다.
담당 경찰 曰 먼저 목을 졸라 딸을 살해한 후 산에 올라가 본인도 목을 매 자살한 것으
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아이를 데리고 하늘나라에 가서 잘살겠다는 유서를 남겼다.

박종익 중앙자살예방센터 센터장 曰 자식을 살해한 다음 부모가 자살하는 심리에는, 부모
인 내가 죽으면 자식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소유 개념이 작용한다. 이는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으로, 외국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심리다. 정신분석학적으로 공격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대방을 향하면 타살, 본인을 향하면 자살이 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살과 타살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살은 타살과 같은 맥락

무차별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체포 후 인터뷰에서 한 범인은 이렇게 말했다.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고. 또 다른 범인은 자살 시도에 실패한 뒤 살인을 저지르면 사형 당
하겠지 하는 생각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우스이 마후미 교수 니가타 세이료대학 임상심리학연구과 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사
람들이 가지는 심리적 공통점은 고독감과 절망감이다. 그들은 대개 그 자리에서 체포되거
나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도망칠 마음이 전혀 없다. 자신의 삶도 끝내고, 동시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 세상 전체를 끝내고 싶어한다.


보통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소중히 여긴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굉장히 아끼는 나무
블록을 쌓고 있던 중 누군가 그 블록을 망가뜨렸다고 가정해 보자. 망가진 블록을 보고
극심한 슬픔과 고통을 느낀 아이는 망가진 부분을 고쳐 쌓는 게 아니라, 스스로 블록을
 몽땅 부숴버린다.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으면 주변을 향해 블록을 던지기 시작한다. 자
살은 자신의 블록을 부수는 행동, 살인은 주변을 향해 블록을 던지는 행동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누구든 상관없이 마구 던지는 것이 무차별 살인이다.

고위험군 관리

사회복지사 曰 일반 사회복지사들도 자살 고위험군의 고통을 나누고 도움을 드리긴 하지
만, 보다 더 수련을 쌓은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 구조상 대부분의 복지관에서
는 TO, 보조금, 인건비 등의 문제로 정신보건 사회복지사를 고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박형민 유서분석가 한국형사정책연구원 曰 유서란 죽음을 결심 선택한 이들이 사회에 보
내는 마지막 소통의 몸부림이자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이라 생각한다.
온 국민에게 최선의 선택지만 줄 수 있는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유서를 읽으며 생각한다.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 그 다음 차선의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선택지가 그들에게 주어졌
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들은 죽음보다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거다. 바로 그
지점이 사회와 국가가 자살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점이다.

하규섭 원장 국립서울병원 曰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하고 있는 고위험군을 빨리 발견해
예방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교통질서를 잘 지키고, 암을 조기
에 발견하기 위해 미리 검진을 하듯이, 자살을 막기 위해서도 고위험군을 잘 관리해야 한다.



출처: http://monzaq.tistory.com/43 [엇박의 묘미]

--------------


동반자살: 드러난 자살과 감춰진 살인
필자: 민노씨 작성일: 2013-11-19 카테고리: 미디어 | 댓글 : 7

식물인간 아들과 동반자살 ‘안타까운 부정’
식물인간 아들과 동반자살 선택한 아버지의 눈물
‘아들아 미안하다’…25년 돌보던 식물인간 아들과 동반자살
식물인간 아들 25년 병 수발 50대 아버지 동반자살
25년째 식물인간 아들 돌보던 아버지 안타까운 동반자살
식물인간 아들 25년 돌본 父…불 질러 동반자살
수십년째 식물인간 아들 돌보던 부정 결국엔 ‘동반자살’

어제(2013년 11월 18일) 충남에서 있었던 안타까운 소식이다. 기사 제목만으로도 그 안타까움은 그대로 전해진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전달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언론들은 이들의 죽음을 ‘동반자살’이라고 부른다.

‘동반자살’은 없다

자살은 자신을 죽이는 행위다. ‘동반’의 사전적 의미는 “일을 하거나 길을 가는 따위의 행동을 할 때 함께 짝을 함”이다. 기사에서 아버지는 자살한 게 맞다. 하지만 식물인간인 아들은 자살하지 않았다. 자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없다. 그런데 동반자살이라니. 말이 안 된다.

누군가의 자살을 용이하도록 방조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승낙한 승낙 살인도 가능하다. 하지만 동반자살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살은 자신의 일신에 전속한 생명에 관한 처분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인이 함께 죽음을 결심하고 이를 함께 실행하는 ‘동반자살’은 엄밀하게 말해서 자신에 대해선 자실이지만, 상대방(들)에 대해선 ‘자살방조’에 불과하다.

아들이란 ‘물건’을 처분할 수 있는 아버지란 존재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자살할 때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건 더욱 기만적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동반자살’이라는 말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들린다. 언론에서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쓰고, 또 사람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위 충남의 ‘동반자살’ 기사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식물인간 아들을 25년째 돌보던 아버지가 집에 불을 질러 아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중략…) 경찰은 평소 김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말을 자주 했다는 유족들의 진술 등으로 미뤄 김씨가 집에 불을 질러 아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 연합뉴스, ‘아들아 미안하다’…식물인간 아들과 동반자살, 2013년 11월 18일

아들의 생명과 아버지의 목숨은 서로 별개다. 이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기사에서 아버지의 목숨과 아들의 생명은 마치 하나의 쌍처럼 취급된다. 아들은 “함께”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아버지의 소유물, 마치 물건 같다. 기사 속에서 식물인간 아들은 ‘물건’처럼 묘사되고, 아버지는 이 ‘물건’을 처분할 수 있는 비극적인 주체로 묘사된다. 물론 기사의 주어는 아버지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가족관계를 구성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 이 복수의 죽음을 이 기사에서처럼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건 유교적인 정서가 여전히 잔존하는 영역, 즉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부모가 자식을 소유한다는 관념을 정당화한다. 거기에 더해 이 표현은 자식의 목숨을 부모가 처분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강하게 암시한다. 상식적으로 찬찬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지만,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면 뭔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그 표현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말의 힘: 말이 숨기는 부조리

말은 그저 피상적인 관념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의식과 욕구, 그리고 그 말을 널리 인정하는 사회의 의식을 그 말은 담는다. 그렇게 그 말은 실체적인 행위와 그 행위의 잠재적 실현 가능성까지를 내포한다. 즉, 말은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행위)의 잠재적인 실현을 예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이 갖는 비도덕성과 비합리성, 더 나아가 반사회성은 아주 분명해진다.

누구도 자기 아닌 자의 죽음을 ‘동반’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아무리 자식의 불행한 미래를 예측해 그 미래를 막아보려는 부모일지라도 말이다. 더불어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사회적인 책임을 위장하고 숨기는 이데올로기로써 작용한다. 사회의 부조리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아비(혹은 어미)의 안타까운 부정(모정)’으로 둔갑시키는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휴머니즘을 뒤집어쓴 기만적인 표현이다.

사회 전체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죽음은 이제 한 남자의 ‘동반자살’이라는 개인적인 비극으로 위장된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비극을 그저 안타깝게 동정하는 것으로 이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는 끝나버린다. 이 남자가 아들을 ‘살해’하는 행위에 개입한 사회적 무관심과 공적 시스템의 부재는 그 비극 속에 묻힌다.

시마바라 성당에 있는 조각상  (사진: 빛=사랑)
시마바라 성당에 있는 조각상
(사진: 빛=사랑)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이 숨기는 ‘살인’

앞서 적은 이유로, 나는 ‘동반자살’이라는 제목으로 충남에서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론은 제목에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사 속 아버지는 아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비정하게도 그건 “동반” 자살이 아니라, 하나의 자살과 또 다른 하나의 살인이다. 그래서 기사 제목이 담아야 하는 사실은 ‘한 남자가 자식을 살해하고, 스스로 자살하다’이다. 그 사실의 한계 속에서 얼마든지 표제를 정하면 된다.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을 대체할 다른 표현을 찾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문화적으로 ‘발명’된 표현일 뿐이고, 그 표현이 갖는 의미는 앞서 설명했듯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반사회적이기 때문이다. 그저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죽이고, 스스로 자살했다. 사실로서의 죽음은 그뿐이다. 그렇게 표현하면 된다.

드러난 자살과 감춰진 살인 그리고 사라진 ‘책임’

나는 기사 속 ‘아버지’를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아들을 죽이고, 자신마저 자신을 죽인 저 기사 속 ‘아버지’를 동정하고,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죽음보다 더한 삶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식물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삶을 끝내는 방식이 ‘피살’이어도 괜찮은 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자식을 살해한 아버지를 차마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연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비정한 아버지는 훨씬 더 비정한 국가와 사회로부터 살인을 강요 받은 힘없고, 지친 노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에게 살인이라는 형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다만, 그 책임을 져야 할 아버지는 죽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버지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동시에 국가와 사회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그 아버지에게 무엇을 했는지 물어야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사회의 공적 시스템에 우리는 눈길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비극이 단지 그 아버지에게 닥쳤을 뿐이니까. 그래서 언론은 마땅히 그 부실한 공적 시스템을 비판하고, 저 아버지와 같은 불행한 존재가 더는 생기지 않도록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 언론이 써야 하는 건 육하원칙으로 기록된 어떤 죽음의 메마른 서사만은 아니다. ‘동반자살’이라는 기만적인 언어로 관습적 휴머니즘에 편승해 구조적인 모순을 한 가정의 개인적인 비극으로 포장하는 일도 아니다.

그 죽음, 하나의 드러난 자살과 또 하나의 감춰진 살인 속에 있는 부조리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 언론이 정말 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런 일이다.

-출처:
http://slownews.kr/15740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