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3.

[음악명언] 비트겐슈타인 명언 어록 Beethoven Tempest Sonata No. 17





[음악명언] 비트겐슈타인 명언 어록   Beethoven Tempest Sonata No. 17















[음악동영상 Beethoven Tempest Sonata No. 17]









그는 철학에 대해 온 힘과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그가 눈사태라면 난 눈 뭉치다.

나는 그의 '순전히 지적인 열정'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그는 매일 아침 희망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매일 저녁 절망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나는 그와 완전히 지적으로 공감한다. -러셀 서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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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02

생각도 일종의 언어이다.



03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04

우리는 남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싶어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아름답게만 간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05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의 극복이 칭찬받을만한 것이고, 인생을 보람차게 만든다.



06

어떤 돌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도저히 손을 쓸 방도가 없다면

먼저 주변의 돌부터 움직여라.



07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서 온다.





08

반대되는 결론도 항상 함께 생각하라.







09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고뇌하고 인내하는 능력을 누르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10

나는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단지 즐기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11

의심은 믿음 이후에 온다.



12

인생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때, 우리는 상황이 변화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변화, 즉 자기자신의 태도를 바꿔야한다는 인식에는 거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13

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나도 단순하고 친숙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

길을 끌지 못한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가는 것 중에 있다.



14

철학적 탐구는 인간생활에 보탬이 되는 쪽으로 국한되어야 한다.









15

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들어섰다.

어떤 의미에서 그 조건은 이상적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되돌아 가자.







16

영웅은 죽음을 직시한다.

그저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 죽음을,

죽음 자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는 뜻이다.







17

너 자신의 생각을 하라.

남의 사상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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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정을 느낄 뿐이다.







24

나는 박봉이지만 내자신이 만족하는 노동을 할 것이며,

언젠가는 만족스런 인간으로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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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시간날 때 보세요]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내가 아는 천재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완전히 전통적 천재관에 부합되는,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의 예 ― 버트런드 러셀



흔히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비트겐슈타인 이전까지'라는 단서를 덧붙여야 한다.

― 와스피 히잡, 비트겐슈타인의 제자











1. 개요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며 현대 영미분석철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일상언어학파의 창시자 격이다. 일반성을 갈망해 점점 일그러져

가는 지성계에 언어사용의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였다.



"표현은 삶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그 스스로가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삶을 그의 철

학과 분리시켜 고찰하기는 어렵다. 그 누구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답기를 바랐던 인간.



2. 생애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카를(1847~1913)과 레오폴디네(1850~1926)

비트겐슈타인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은 오스트리아에서 철강산업을 이끌던 대

단히 부유한 사람 중 하나로 유태인이었으나 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유대인과 오스트리아계의 혼혈로 가톨릭 교도로 성장했으며 여덟 자녀 모두 가

톨릭 세례를 받게 하였다. 비트겐슈타인 가족은 대단히 큰 저택에서 살았고 레오폴디네의 음악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 덕택에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그 집에 초대받아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클

래식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브람스나 말러도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아기 시절(1891년경)

첫째 누나 헤르미네(1874~1950): 루트비히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의 고민을 함께하였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재능있는 화가로 아버지 카를과 함께 클림트, 로댕의 그림을 수집하였다.

루트비히의 철학적 진로에 항상 관심을 가졌으며, 나중에 버트런드 러셀이 루트비히에 대해 칭찬을 아끼

지 않을 때 가장 기뻐했던 것도 그녀였다.



살아있었다면 둘째 누나가 됐을 도라(1876): 태어난 해에 사망하였다.

둘째 누나 헬레네(1879~1956): 어린 루트비히와 함께 "어리석은 장난"을 많이 쳤다. 나치 독일 시대 때와

루트비히가 암에 걸렸을 때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외에 별다른 기록은 없다.



셋째 누나 마르가레테(1882~1958):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프로이트의 친한 친구로

그가 나치 독일을 탈출할 때 도와주었다. 루트비히의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지적인 영향을 끼쳤다.

루트비히에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소개했다.



넷째 형 파울(1887~1961): 피아니스트. 1차 대전 중에 오른팔을 잃었다. 볼레로로 유명한 라벨(1875~1937)

이 그를 위해 1931년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이 곡의 일부분을 파울은 고쳐 연주하기

를 원했고 라벨은 이에 분노했다.



다섯 형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루트비히는 헤르미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오형제는 서로에게 다정한 형제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누나는 나나 그레틀 누나하

고는 대화가 되지만 우리 셋이 다함께 대화하는 건 힘들지. 파울 형과 그레틀 누나가 서로 대화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고. 헬레네 누나는 누구하고도 잘 맞지만 헤르미네 누나하고는 절대로 맞지 않고, 나와는 같이

 잘 어울려. 우리 모두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블록처럼 서로 편안하게 맞기 어려운 사이 같아…….

친구들이 우리의 삭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줄 때에야 그나마 서로에게 조금 싹싹하게 대하지."





2.1.1. 형제의 자살

첫째 형 한스(1877~1902):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으나 아버지 카를은 한스가 가업을 물려받길 원

했고, 한스는 강압에 못 이겨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으로 홀연히 떠난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

어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1902년 체사피크 만의 보트 위에서 실종되었고 자살로 결론이 났다.



둘째 형 쿠르트(1878~1918): 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의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자 비관하여 총으로 자살하였다. 그의 자살과 아버지의 바람 사이에 연결고리는 없다. 쿠르트와 아버지

카를 사이에 한스의 것과 같은 장래 문제에 관한 마찰은 없었다.



셋째 형 루돌프(1881~1904): 배우로서 살기를 희망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집에서 나와 베를린

에서 살고 있었다. 1904년, 베를린의 한 술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한 뒤 그것을 들으며 청산가

리를 먹고 자살하였다.



유서에는 '친구의 죽음'과 '자신의 타락한 성격'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고 적혀 있다. 동성연애자

해방 운동을 하던 단체에 가 도움을 청한 것으로 보아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적 성향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타락한 성격'은 그것과 연관지어서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루돌프도 아버지의 강

압에 적잖이 힘들어 했음에 분명하나 그것이 직접적인 자살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의 자살에 대한 루트비히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바이닝거 본인조차 자살 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살은 용기의 표시가 아니라 비겁함의 표시다.

비겁한 행동 가운데 가장 덜 비겁하다 할지라도.'

루트비히는 때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걸 부끄러워 했지만, 그와 파울이 결코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형태의 비겁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파멸을 의지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와 관계된 것을 상상한 사람이라면 자살이란

언제나 성급한 자기 방어임을 알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불시에 목숨을 끊을 수밖

에 없었을까.'"





2.2. 아동·청소년기

비트겐슈타인이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거대한 정신의 요람'이자 '세계 파괴의 실험실'

이었다. 한쪽에서는 빈의 부르주아 계층이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을 즐겼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궁핍한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하에서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

빈의 예술가들은 그런 세상을 도피하듯이 탐미주의에 빠졌고, 프로이트는 역설적인 도시 빈에서 신경증을 진

단하였다. 비평가 카를 크라우스는 거의 종말을 예견하는 예언자처럼 빈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대대적인

 수술이 시급함을 역설하였다. 그곳은 말 그대로 '세기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도시 상황과 분리시켜

고찰해서는 안 된다. 이런 '병적일 정도의 아름다운 공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탄생의 제비뽑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고, 경제적인 것에 국한될지라도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아홉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로울 때에도 사람들은 진실을 말해야 할까?" 첫 철학적 사유라는 것을 한다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결국 그런 경우에는 거짓말을 말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아무래

도 '천재'라는 말이 따라붙다 보니 비트겐슈타인도 모차르트처럼 어렸을 적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을 것 같지

만 그렇지 않다. 이따금 실 짜는 기계를 만들거나 종교 과목에서 A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과목에서는 평균

점을 기록하였고 심지어 화학에서는 낙제를 받기도 했다.



1903년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부르주아 계층의 자녀들과는 달리 김나지움(문법학교)에 가지 않고 린츠의 실업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이는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이 가미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린츠의 실업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학우들과 가정환경의 극명한 차이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실

제로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그 시절의 자신을 "불행했다"고 회상한다.



1903년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토 바이닝거(1880~1903)가 「성과 성격」을 출판하고 그해 베토벤이 죽은 집

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쏴 자살하였다. "천재가 아니면 죽음을!"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라이프

치히 대학의 교수인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가 바이닝거의 주저 「성과 성격」을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

거의 책을 탐독했으며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시신이 운구될 때 그 뒤를 따라갔고 평생 그의 추종자로 남았다.

 「성과 성격」의 내용은 비장하리만치 과장된 여성의 결함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과 금욕을 통한 인류의 멸종(...)

의 주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청소년기(1905년경)

1906년 과학철학에 흥미를 느낀 비트겐슈타인은 린츠의 실업학교를 떠나 루트비히 볼츠만에게 물리학을 배

우기 위해 빈 대학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해 9월에 볼츠만이 두이노에서 자신이 과학계에서 중요하게 받아들

여질 가능성이 없음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결국 이론과학을 공부하고 싶은 자신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강요로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기능 대학으로 기계공학을 공부하러 가게 된다.

그곳에서 1908년 학위를 취득하고 항공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가게 된다. 1906년~1908년 사이

 별다른 기록은 없다.



2.3. 성인기

1908년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을 만들어 대기를 관측하고, 비행기 엔진을 설계하는 등의 일을 하다가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 원리」를 읽게 된다. 「수학 원리」에서 유형론의 난점을 발견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했고 수리철학과 기계공학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러나 1911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그는

 항공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그해 8월 '항공 기계에 응용할 수 있는 프로펠러의 개선'에 대한 임시 설계명

세서를 제출하며 그 특허가 받아들여지기까지 그의 공학도로서의 경력은 계속됐다.



1911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책을 쓰기 위해 예나 대학에 있는 프레게를 찾아가게

된다. 프레게는 시의적절하게도 비트겐슈타인에게 케임브리지에 있는 러셀에게 가 배우라고 권유한다. 비트

겐슈타인에게는 선생이 필요했고, 러셀에게는 제자가 필요했다. 그해 10월 18일,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러셀의 방에 갑자기 나타나서 불쑥 자신을 소개한다. 그 뒤 러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의 강

의에 참석하며 그를 괴롭힌다. 나중에 가서는 급기야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한지에 관해서

 논쟁하게 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11월, 이제 그는 더 이상 맨체스터 대학의 공학도가 아니었다.



11월 말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재능을 확신해주기를 러셀에게 원했고, 러셀은 겨울 방학 동

안 철학과 관련된 글을 비트겐슈타인더러 쓰게끔 해 1912년 1월 글을 받아보게 된다. 러셀은 그 글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적 재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그를 격려해주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러셀의

격려는 '구원과 같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성인기 초기(1910년경)

1912년 2월,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 된다.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며 철학에 대한 과도한

평가에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1912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 주최하는 스쿼시 모임에서

 나중에 「논고」를 헌정하게 될 데이비드 핀센트와 사귀게 된다. 그는 수학과 2학년 생으로 총명하였으나 두

드러진 재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핀센트와 같이 아이슬란드 여행을 갈 만큼 돈독한 사이가

된다. 여행 경비를 모두 비트겐슈타인이 부담할 만큼 핀센트에게 친절히 대하려고 애썼다워낙 과민한 성격

탓에 서로 언쟁하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엘리트임을 자처하는 사도 클

럽의 회원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보통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그리 중요한 기록이 아닌데, 몇 달 지나지 않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사도 회원들과의 마찰 때문에 클럽

을 탈퇴했기 때문이다.



1913년 1월 20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 카를이 사망했는데 편안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았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슬퍼하는 모습을 내비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기뻤다"고 말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축하하려고 했다. 부자였던 아버지의 유산의 1/3은 1914년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쓰이게

 된다.



1913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논리학 연구를 계속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과민한 성격 탓에 대학의 어수

선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그해 10월, 노르웨이에서 몇 년간 혼자서 논리학 연구를 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미쳤다"고 말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신이 자신을 정상인이

 못 되도록 막고 있다"며 대꾸한다. 러셀은 "신은 확실히 그럴 것이다."라고 받아치면서 어련하시겠냐는듯

마지못해 비트겐슈타인의 돌발 선언을 받아들여준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말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에 착수한다. 겨울,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스키올덴에 있는 농장에 거처를 잡고 그곳에서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노르웨이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고

(비록 정신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주민들도 그와의 관계에서 이렇다 할 커다란 문제는

없었다.



1914년 7월, 예술가들에게 돈을 배분하는 문제와 휴가 문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잠시 오스트리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탈장 때문에 징집에서 면제 되었으나, '강렬하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에 의

해 지원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8월 7일, 비트겐슈타인은 동부전선에 있는 크라코프 주둔 제1사단 포병연대에 배치되어 비스툴라 강가에

있는 고플라나 호에서 탐조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가 처음 적군을 보고 생각한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 훌륭한 인간이 될 기회가 왔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과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적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터에서 톨스토이의 「요약 복음서」에 특히 매료되었는데 그것을 항상 들고 다니며 동료

들에게 읽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몇 년 전 연극 「십자가 원판」을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 즉, "'외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것도 그에게는, 그의 가장 내적인 존재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그는 전쟁기간 동안 신앙인(그것도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신앙인)에 가장 가까워졌다.



12월, 그는 수학 교육을 받은 경력을 인정받아 포병작업소로 이동하게 된다. 그곳에서 준장교로 승진했고

 차량의 목록을 작성하거나 용광로를 관장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동료들과 부하, 상급자들과

 잦은 마찰이 있었고 이는 비트겐슈타인을 지치게 했다. 결국 그는 전선으로 가기를 바랐고, 1916년 3월, 루

마니아 국경 근처에 있는 동부전선 최남단 지점 오스트리아 제7군 소속 포병연대에 배치되게 된다.



최전방에서 가장 위험한 곳인 관측소에 배치되도록 비트겐슈타인은 요청했다. 그곳은 포격대상이 될 것이

뻔한 위치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논고」의 중후반을 차지하는 함수와 명제의 본성에 관한 문제와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는 윤리학과 미학 그리고 세계의 본성(삶과 죽음 등에 관한 문제도 간헐적으로 적었다)에 관한

질문에 관해서 쓴다.



1916년 7월, 비트겐슈타인은 드디어 계속되는 사격에 의해 '공포'를 호소하게 된다. 그는 오직 살기 위한 본

능으로 점철된 자기를 바라보게 되고 동물적인 감각에 사로잡혀 온갖 윤리적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

하게 된다. 그는 후퇴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진지를 고수하였고 곧 훈장 수여 대상자에 추천되게 된다.

그는 상사로 진급했으며 얼마가지 않아 곧바로 또다시 소위로 승진됐다. 8월, 그는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모

리비아에 있는 올뮈츠의 연대 사령부로 보내진다.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의 영혼을 깨닫게 하소서!"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적었던 일기의 부분



1917년 1월, 비트겐슈타인은 카르파티아 산맥 북쪽에 위치한 제3군 소속 포병 장교로 배치된다. 이때 러시

아는 혁명 전야에 있었기 때문에 전선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러나 혁명을 수습한 러시아는 7월, 공격을 재개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르드지아니 지방을 수비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1918년 2월 1일 비트겐슈타인은 소위에서 중위로 승급했고 3월,볼셰비키 정부가 동맹국과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이탈리아 전선에 위치한 산악포병연대에 재배치되게 된다.



6월 6일,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하다. 핀센트는 5월 8일 비행

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핀센트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최초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평전, 232)



6월 15일, 연합군을 공격하는 주요한 포대의 관측을 맡아 공로를 인정 금성무공훈장의 후보로 추천되지만 군

봉사 메달을 받게 된다.



7월, 오스트리아 군은 퇴각을 결정하다. 8월, 「논리철학논문」을 완성하다(후에 1922년 조지 무어의 권유에 따

라 「논리철학논고」로 바꿨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데이비드 핀센트에게 헌정했다.



10월 30일, 연합국은 승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합스부르크는 체코,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의 민족국가로

 분리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코모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고(후에 카시노에 있는 수용소로 옮겨지게

된다), 친척의 도움으로 포로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의사가 가짜로 그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

고 진단을 내릴 예정이었다) 완고하게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주장하며 거부했다. 포로 기간 중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프레게, 엥겔만, 러셀에게 보내지만 세 사람 모두 논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1919년 8월 21일, 석방

1919년 10월, 빈의 프라터 거리에서 동성애로 인해 곤경에 빠지다. "생명을 끊는 것을 계속 생각", 그는 "내

려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까지 가라앉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매주 며칠 동안

그는 방을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프라터 공원에 갔다. 친구에게 말한 대로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악마에 홀

린 채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도심 부근의 바에 드나드는 세련된 외모의 청년들보다 프라터 공원의 산책

길과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칠고 솔직한 타입의 동성애 청년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트겐

슈타인이 빈에 사는 동안이나 빈을 방문했을 때마다 서둘러 찾아간 곳은 바로 이 특별한 장소였다. ……

나중에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그는 때때로 그의 처분에 자신들을 맡길 준비가 된 멋지고 지적인 청년들보

다는 런던 술집의 거친 젊은이들을 선호했다."[43] 이 시기 젊은 이성애자인 자동차 기계공 아르비트 셰그렌과

 가까운 친구가 되어 그의 집에서 하숙하게 되지만 셰그렌의 어머니가 비트겐슈타인을 사랑하게 되어 아침 드

라마 1920년 4월,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에 빠진 이 기간을 일컬어 "쓸모없는

 에피소드들"로 가득찬 "내 삶을 무너뜨리"는 기간이라고 하지만 이 기간이야말로 그가 오토 바이닝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었던 해방구가 아니었나 바틀리는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성인기 중기(1920년경)

전쟁에서 돌아온 뒤에 그는 몇 년간 군복을 입고 다녔을 정도로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았으며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되기를 원해 사범학교에 다녔다. 전쟁 전 아버지가 전 재산을

 미국으로 이전시킨 바람에 (예술가에게 나눠준 것 외에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가족들에게 나눠주게 된다. 그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자 중 한 사람이었다. 「논고」의

출판은 번번이 거절당했으며 사범학교에서의 피로 따위가 겹쳐져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논고」를 영국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줘도 되겠냐고 묻고, 비트겐슈타인은 원하는

 대로 하라며 답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치고, 1920년 여름, 수도원에서 잠시 정원사로

 일하다가 그해 가을 트라텐바흐라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1920년 가을, 트라텐바흐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교육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그가 자주 아이들 뺨을 때린다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는 기록은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질문을

 했다거나 단지 잔인하기만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단지 지나치게 열정적이었고, 그 시절 어린 소녀가

 대수를 하지 못하는 것쯤은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재능있는 아이들이 집안 사정으로 배우기를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방면으로 배우기를 계속하도록 지원

해주었다. 어떤 아이는 첫째 누나 헤르미네의 집에 보내 기숙 생활을 하게끔 하려고 했다. 그 밖에 어린이를 위한

 사전을 편찬하기도 하는 등 그의 교사 생활에 누는 적지 않았으나 결코 미달은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교사

생활 시기 아이를 때린 것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막대기로, 다리로, 주먹으로 때리는 것과 동급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잔인한 교사'가 아니었다는 점은 다음 기록에서 드러난다.



"……상점 주인인 요한 샤이벤바우어는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 그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방금

바나나를 산 것이 기묘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독일 오스트리아가 굶주렸던 그 황량한 전후 기간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에게 처음으로 바나나를 -그리고 처음으로 오렌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먹이기 위

해 비트겐슈타인은 과일 다발이 든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몇 킬로미터 산길을 오르내렸다. 그 시절에는 트라

텐바흐와 오테르탈 사이에 대중교통이 없었다. 오테르탈에 가려는 사람들은 글로그니츠의 기차역에서부터 20

킬로미터 숲을 지나 언덕을 하이킹했다.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듯이."



1921년, 독일 「자연철학연보」에 「논고」가 엉망진창으로 게재되다. 이는 저자와의 최소한의 상의도 없이 게재됐

기 때문에 해적판으로 여겨지게 된다. 「자연철학연보」의 「논고」는 후에 1922년,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에

의해 영어판으로 개정되어 재출판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교사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고장난 기계를 고쳐주거나 하는 호의를 보여

주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이상한 귀족'이나 '약간은 미쳐버린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비

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좀처럼 끊지 못

했다. 그 스스로가 교사 생활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떠난다면 노동을

할 생각이었다. 가끔씩 옛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고(러셀과는 직접 만나기도 했다) 램지와 만나 그의 「논고」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의 문제는 「논고」에 의해 모두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



1922년 11월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에서 푸흐베르크의 초등학교로 새로 부임하게 되다.

1923년 9월 17일 프랭크 램지가 푸흐베르크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을 방문

1924년 9월 푸흐베르크의 초등학교에서 오테르탈의 초등학교로 다시 부임하게 된다.



1926년 4월 하우트바우어 사건이 터졌다. 나중에 14살에 백혈병으로 죽게 될 요제프 하우트바우어(이때 당시

 11세)라는 남자 아이가 비트겐슈타인에게 맞아 실신하게 된다. 자랑할 얘기는 물론 아니겠지만 이전에도 비트

겐슈타인은 여러 번 다른 아이들을 때렸고 하우트바우어라는 아이는 그에 비하면 표현이 좀 그렇지만 때린 것조

차도 아니었다. 하우트바우어의 어머니는 피리바우어라는 농부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피리

바우어는 곧장 학교로 향했고 길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만나 온갖 욕설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을 체포

하기 위해 파출소로 가는데, 때마침 파출소에 경찰이 있지 않았고 다음 날 비트겐슈타인을 찾았을 때 비트겐슈타

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1926년 4월 28일, 비트겐슈타인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일로 재판이 일어나게 됐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무죄로 판결받는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비트겐슈타인은 휘텔도르프에 있는 정원의 헛간에서 3개

월 동안 야영을 하며 수도 애호사들과 정원사 일을 한다.



1926년 6월 3일, 레오폴디네 비트겐슈타인이 사망하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셋째 누나 그레틀의 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주로 천장의 높이, 창문, 문, 자물쇠, 라

디에이터, 벽의 디자인 등을 맡았다. 건축가 파울 엥겔만과 같이 만들었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마르그리트

레스핑거라는 여성과 만나 1931년까지 사귄다. 그러나 둘은 성격 차이가 있었고 어울리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

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엄밀히 말해 게이가 아니라 양성애자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지난밤에 자위를 했다.

양심의 가책. 그러나 또한 난 너무 약해서 그 충동과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는 확신. 만일 그 충동과 유혹, 그리고

 그것들을 수반하는 이미지들이, 내가 다른 것에서 피난처를 마련할 수 없을 때, 내게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겨우 어제 저녁 나는 깨끗한 인생을 살아갈 필요에 대해서 숙고했다(마르그리트와 프랜시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1937년 12월 2일]" (평전, 550)





"마르그리트는 이제 나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매우 이상하다. 어떤 목소리는 내게 말한다.

그렇다면 다 끝났다고, 너는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다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낙심해서는 안 된

다고. 너는 그것을 예상했어야 하며, 비록 열렬히 소망했다 하더라도 네 인생이 어떤 특정한 사건의 발생에 좌우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바로 이것이 옳은 목소리다. …신이 그녀와 함께하기를 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마침내 신의 손에 맡기지 못하고, 자기 수중에서 계속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시련 또한 사랑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일기 1930-32, 1936-37』 79쪽, 1931.3.1."





1927년 2월, 「논고」에 영향을 받은 빈 학파의 모리츠 슐리크가 비트겐슈타인을 찾아오다. 이후 여름 동안 빈

학파의 루돌프 카르납, 헤르베르트 파이글, 프리드리히 바이스만 같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에게 실증주의자의 명민함보다는 타고르의 시를 읽어주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빈 학파와의 접촉이 계기가 되어 1928년 3월, 직관주의 수학자 브라우어를 만나게 되고, 브라우어는 러셀을

 비판하면서 수학이 논리학에 기반을 둘 수 없고, 일관성이 수학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자가 탐험가가 아니라 발명가라는 것, 사실들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 정신이 구현해낸 것이 수학이라는

것에 동의했고 「논고」 비판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비록 그의 주장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1929년 1월 28일, 비트겐슈타인은 램지와 함께 철학을 다시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된다.



2.4. 중년기

1929년 6월 18일, 비트겐슈타인은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구두 시험을 치른다. 평가관은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무어였다. 러셀은 이를 두고 '내 평생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는 처음이다'라고 말하며 시험을 진행했다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구두 시험을 마치고 비트겐슈타인은 평가관들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걱정하지 마

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시험장을 나갔다(...)



1929년 크리스마스 휴가, 비트겐슈타인은 빈 학파에게 자신의 「논고」가 잘못되었음을 설명하였다. 그는 「논고」

에서 원자명제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독립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견해를 폐기하고 내적 연결 관계를 고려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은 '검증주의적 단계'로 불리며 「논고」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완전히

논리실증주의에서 발을 돌리지는 않았다. 빈 학파는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의 전환의 움직임을 그리 중요치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그의 검증주의적 단계를 도그마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그것

이 한 가지 유용한 방법이기는하지만 전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면서 일축하기도 한다.



"한 마을에 경찰관이 있는데, 각 국민으로부터 가령 연령, 출생지, 직업 등의 정보를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이 정보들은 기록되고 그 기록은 어떤 식으로건 이용된다. 때로 그 경찰이 한 주민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경찰은 이 사실을 기록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쓸모있는 정

보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초 검증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1930년 1월 19일, 프랭크 램지가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중년기(1930년경)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도덕학 강의를 맡았다. 그의 강의는 완전히 형식에서 벗어나 노트 없이 수업을 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격렬한 탄성을 내기도 했다. 수강자들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오직 무어만이 예외로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의 얘기를 들었다. 이 시기 버트런드 러셀의 대중 강연과 사회 비평서를 혹독히 비난했다. 그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유행이 되는 「행복의 정복」을 구역질이 난다고 말하고 「결혼과 도덕」에 대해서는 러셀을 사기꾼과 서슴

없이 비교하였다.



1932년부터 1933년, 순수수학의 지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돈키호테적 공격이 시작되다. 이 시기 수학자 고드프리

 하디가 수학을 일컬어 우리 마음의 창조물이 아니고 우리의 인식과 독립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격노하면서 "수학

자들의 말은 그들이 수학을 할 때 엉뚱한 말이 된다."고 말했다. 이때 비트겐슈타인의 강의를 듣던 프랜시스 스키너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1933년부터 1934년, 자신의 강의에 학생들이 너무 몰리자 실망한다. 대신 몇 명의 학생들로하여금 자신의 구술을

기술하게 해 그것을 배포하는데 나중에 그것이 「청색책」으로 불리게 된다. 이 책은 후기 철학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며

 '가족유사성' 개념이 처음 등장하기도 한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소련 작가(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에 심취

하여 소련에서 살 계획을 세운다. 그는 1930년대 중반의 정치적 혼란기에 노동자 계급과 실업자들에 공감하였고, 넓게

 말해 그가 좌파에 속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평전, 490)



1934년부터 1935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프랜시스 스키너와 앨리스 앰브로즈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기록하게

했다. 이것이 나중에 「갈색책」으로 불린다. 독자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므로 읽기가 버겁다고 한다. 언어게임을 다

양한 방법으로 여러가지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1935년 여름, 소련에서 살 계획을 세운다.



1935년 9월 12일, 레닌그라드에 도착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소련에서 집단 농장의 노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당국은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카잔 대학의 철학 과장직과 모스크바 대학의 철학 강사직을 제의한다. 결국 자신의 바람이 들어

지지 않자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된다. 소련에 대한 인상은 "군대에서 사병으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1936년부터 1937년, 스키올덴의 별장에 머물다. 프랜시스 스키너와의 연애기간편지로만. 둘은 1939년까지 사귀다 그

 이후 서먹해지더니 이내 연락이 뜸해졌다. 프랜시스 스키너는 비트겐슈타인의 권고에 따라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 불평하기는 했지만 본인도 나름대로 만족했다고 한다.



1938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머물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때 정신과 의사가 되려는 생각을 해 의사 훈련 과정에 있는

 친구 모리스 드루어리에게 병원의 가장 심각한 정신병 환자를 만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이 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정신과 환자의 비정상적인 측면보다 정상적인 측면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는 정상적인 측면보다는 비정상적인 측

면을 보려고 하였다.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에 '말도 안 되는 루머'라며 일축한다. 그 말을 한 다음 날 히틀러는

진짜로 오스트리아를 침공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자매에 대해 걱정하는 드루어리

에게 '그들은 매우 존경받고 있기 때문에' 무사할 것이라며 여전히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심각하게 걱정하고 빈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 피에로 스라파에게

편지를 쓰고 스라파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당분간은 빈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스라파는

 대신 넌지시 영국 국적을 얻을 것을 제시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케인즈의 도움을 얻어 4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강사

직과 함께 1939년 6월 영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자매들은 이후 긴 협상을 통해 그들이 가진 외화를

건네주는 대가로 1939년 8월, '독일 혈통임을 입증'받음과 함께 1940년 2월, '유대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혼혈 유대인 정

책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비교적 전쟁 기간 동안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1939년 2월 11일, 1월에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야 했던 무어를 대신해 철학 교수로 선출되다. 비트겐

슈타인은 강의에서 본격적으로 수학의 순수성을 공격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수학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와 과학의 우상숭배는 우리 문화가 부패했다는 가장 중요한 증상이며,

또한 그 부패 중 가장 유력한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던 것이었다. 이때의 강의에 참석한 유명한 인물로는 앨런 튜

링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지속적으로 '수학적 발견'이란 말은 온당치 않으며, 수학의 비경험성은 그것의 문법에 있지

확실한 지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튜링은 고전적인 견해를 방어했다. 나중에 결정적으로 비트겐

슈타인이 모순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을 때 튜링은 모순이 수학적 체계의 치명적 결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들 사이에 공통된 기반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강의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튜링의 지식이 아

니라 동기를 공격했고, 이는 튜링에게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비트겐슈타인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고 이는 그에게 '샤워를 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주었다. 그가 좋아

했던 배우 중 하나는 베티 허튼이었는데, 그녀의 익살스런 연기는 비트겐슈타인의 사뭇 엄정한 성격과는 대조적이다.

베티 허튼은 영화에서 유쾌한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았다. 가령, 상사가 뒤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상사의 욕을 흥겹게

노래로 부르다가 곤혹스런 상황에 처한다든지, 무대 위에서 비 맞은 사람 연기를 하려다 정말로 저체온증에 걸려 실려간

다든지 하는 등.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초기, 병원에서 약국의 배달부로 일을 했다. 그 후 1944년

 2월 16일까지 피부과에서 쓸 연고를 조제하는 일부터 쇼크에 대한 연구, 호흡과 맥박 사이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기

계를 고안해 만들어내는 등의 일을 했다. 이 기계는 종래의 것보다 혁신적이어서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쇼크를 연구한 그

랜트 박사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자가 아니라 차라리 생리학자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법했다고 말했다.



1944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44년 여름까지 휴직을 신청하고 웨일스의 스완지로 가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기 위해 힘을 쓴다. 스완지에 있을 때 비트겐슈타인의 이웃에는 클레멘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특히 그는

 클레멘트 부인과 그녀의 딸들을 사랑했다.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은 그 가족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여기에 몇 가지 재

밌는 일화가 있다.



"'그녀는 천사가 아닌가요?'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일요일 점심 식사 시간에 그녀의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가요?'하고

클레멘트 씨는 되물었다. '제기랄, 물론 그렇습니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평전, 664)



"……클레멘트 부부는 두 명의 딸, 11세인 조앤과 9세 바버라를 두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의 집에 머무는 동안 거의

한 가족처럼 대우를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이 약간 발음하기 힘들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비키'라

고 불렀다. 비록 그렇게 하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유일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지만 말이다. 클레멘트가와 함께

 사는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보통 그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는 또한 다른 가족 생활에도 참여했다. 특히 그는 소녀

들과 루도(주사위 놀이의 일종)와 뱀과 사다리 놀이(주사위를 던져 말을 나아가게 하는 놀이)를 즐겼는데, 한번은 뱀과 사

다리 놀이에 푹 빠져서 놀이가 두 시간 넘게 계속되자 소녀들은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 놀이를 중간에서 그만두자고

간청해야 했다. 그는 또한 두 소녀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큰딸인 조앤은 그때 그 지역에 있는 중학교의 장학생

선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결과가 발표되던 날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떨어졌다고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럴 리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기랄!'하고 그는 말했다. '한번 알아봐야겠다!' 조앤과

그녀의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따라오는 가운데 비트겐슈타인은 조앤의 학교로 들어가서 그녀가 떨어졌다고 말해주었던 선

생을 만났다. '조앤이 떨어졌다고 말했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합격했음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그는 선생에

게 말했다. 약간 위협을 받은 그 선생은 기록을 검토한 후, 모두에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거기에 정말로 실수가 있었고 조앤은

 그 시험에 합격하기에 충분한 점수를 받았음을 발견했다. 그 선생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무능한 멍청이'로 비난을 받았

다. 하지만 비록 그의 판단이 정당했고 조앤의 능력이 입증되었지만, 클레멘트 여사는 부끄러워서 학교에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 (평전, 664~665)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의 유고 관리자 중 한 사람이 되는 엘리자베스 앤스콤이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에 참석하게 된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이 다정하게 '친구old man'라고 부르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강의에서 다른 학생들이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앤스콤 혼자만 참가한 것을 보고 "여자들이 사라져서 아주 다행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의도치

 않은 보쿠소녀? 이 외에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에 참가한 적이 있는 여성으로는 작가 아이리스 머독이 있다. 그녀는 비트겐

슈타인의 강의가 사람들의 기를 꺾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를 "……항상 한 인격으로서 외경심과 놀라운 마음으로 생각……."

했다고 한다.



1944년 10월, 케임브리지로 복귀. 그는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지 못한 것에 낙담했고, 강의를 하는 책임을 다시 맡아야하는

 것에 대해 열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러셀과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이 극명하게 나타난 때.



1946년, 벤 리처즈와 사랑에 빠지다. 물론 그도 남자다.



1946년 10월 26일, 전설의 탄생. 칼 포퍼와의 도덕학 클럽에서의 패싸움 논쟁. 논쟁 전, 비트겐슈타인은 포퍼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였고, 더군다나 벤 리처즈와의 관계로 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반면, 포퍼는 10년을 기다린 만남이었다. 논쟁의 시

작은 포퍼가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한 몇 가지 연설 규칙에 대해 비웃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규칙은 초청장에 명시되어

 있었는데, "짧은 발표문, 서론은 간단하게, 몇 개의 철학적 수수께끼를 제시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그 초청장은 자신이 비서(와스피 히잡)에게 시킨 일이며 비서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변호했다.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의 (일종의) 철학적 허무주의에 대해 비난을 가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순수 수학이나 사회학에서 다루

어질 문제 외에 문제는 없다."고 응수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때 예를 들기 위해 부지깽이를 들어 허공을 콕콕 찔렀고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비트겐슈타인, 부지깽이를 내려놓으시오."라고 말하게

 된다. 간간이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성난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비트겐슈타인은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셀도 따라 일어났다.



비트겐슈타인: "러셀 선생, 당신은 날 항상 오해하죠."

러셀: "비트겐슈타인, 자넨 뒤죽박죽으로 얘기하는군. 자넨 항상 뒤죽박죽으로 얘기하지."



비트겐슈타인은 이후 자리를 떠났고, 그가 나가면서 '쾅'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비트겐슈타인이 나간 후 리차드 브레이

스웨이트는 도덕 원칙의 사례를 하나만 들어달라고 포퍼에게 요청했고, 포퍼는 "초청 연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말 것."이

라고 비꼬았다. 나중에 포퍼는 이 사건을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바로 그때 비트겐슈타인이 -그는 그때까지 난로 가까이 앉아서 신경질적으로 부지깽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간혹 자

기 주장을 강조할 때마다 마치 그것이 지휘자의 지휘봉이라도 되는 것처럼 흔들어 댔다- 내게 항의했다. '도덕률의 예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초청 강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않는 것.' 이 말에 비트겐슈타인은 벌컥 화를 내면서 부지

깽이를 집어던진 뒤, 방에서 뛰쳐나가며, 문을 쾅 닫았다."





2.5. 노년기

1947년, 여름 학기 중 비트겐슈타인은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그는 게오르크 폰 리히트에게 교수직을 사임할

것이고 그가 계승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교수직을 사직한 후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가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1948년, 비트겐슈타인은 정신적 위기를 겪는다. 산책을 하던 중 시적인 감정에 빠지기도 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집 안에서 혼자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누가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하자, "맞습니다. 나는 아주 친한

 친구, 나 자신과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는 자칫 심각해지면 분열정동장애로 의심될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을 정신분열증의 사례로 소개하는 심리학 교과서가 있기도 하다.  이 시기, 노먼 맬컴이 미국에서 보내주

는 스트리트앤스미스 출판사의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을 즐겨 읽었다.



1948년 9월, 병에 걸린 맏누나 헤르미네를 보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다.

1949년 4월, 자신이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 직감.

1949년 7월, 미국에 사는 노먼 맬컴의 가족을 방문. 이 시기 맬컴이 교수로 있던 코넬 대학의 모임에 참석한다.



"모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맬컴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팔에는 윈드 재킷과 낡은 군복 바지를 입은

 가냘픈 노인이 기대어 있었다. 만일 지성으로 빛나는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를 맬컴이 추위를 피하게 해주려고

 데려온 거리의 부랑자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개스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개스는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농담하지 말라'라는 식의 말을 했다. 그 후 맬컴과 비트겐슈타인이 입장했다. 블라토스가 소

개되었고 그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모임의 사회를 보던 블랙이 일어서서 그의 오른편을 향했다. 이제 분명해졌다. 모든 사

람이 놀랍게도 ……맬컴이 모임에 데리고 온 그 야윈 노인에게 블랙이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충격적인 말이 들

렸다. '비트겐슈타인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블랙이 말했다. 블랙이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이 숨을 크게 멈추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1949년의 철학

세계에선, 특히 코넬에선 신비스럽고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 숨이 멎는 소리는 블랙이 '플라톤,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

니까?'라고 말했을 경우에 생겼을 것과 같은 것이었다." (평전, 796~797)





1949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아파서 쓰러지게 된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나는 미국에서

 죽고싶지 않아. 나는 유럽인이야. 유럽에서 죽고 싶어…… 바보처럼 여기에 오다니." 그러나 병세는 곧 회복되었고, 10월

 말, 런던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때 받은 건강진단의 결과가 11월 25일 나오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전립선암

진단과 함께 시한부 인생이 선고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잘만 치료받으면 6년 정도를 더 살 수 있다는 말에 놀란다. "내 인생이 그렇게 연장된다니 유감이다. 이런 반쯤의 생활에는

 여섯 달도 너무 길다."고 말한다. 시한부 선고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헬레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빈에서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기 위해 비행기를 타 빈으로 출발한다.

1950년 2월 11일 헤르미네 사망.



1951년 2월,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번 노르웨이의 스키올덴 별장이나 수도원에 가려는 생각을 하나 건강 때문에 실행이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자신의 주치의인 베번 박사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



4월 26일, 비트겐슈타인의 예순 두 번째 생일이자, 마지막 생일. 4월 28일, 베번 박사가 이제 며칠밖에 살 수 없음을

이야기.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좋습니다!"라고 대답. 베번 여사는 그의 입종을 지키면서 4월 29일 친구들이 도착할 것을

 전함. 비트겐슈타인이 '멋진 삶을 살았다'고 친구들에게 대신 전달해줄 것을 부탁. 4월 29일, 벤 리처즈, 엘리자베스 앤

스콤, 요릭 스마이시스 그리고 모리스 드루어리가 비트겐슈타인의 임종을 보기 위해 베번의 집에 모였다. 비트겐슈타인

의 친구들은 그에게 가톨릭 의식을 치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스마이시스가 언젠가 비트겐슈타인이 가톨릭 친

구들이 자신에게 기도해주기를 바랐다고 얘기하자 그를 위해 기도한다. 기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번 박사는 그가 임

종했음을 말했다.

4월 30일,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에서 가톨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3.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유명한 말로는 전기 철학시절을 대표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가 있다. 후기 철학 때는 "낱말의

 의미란 언어 안에서의 그 사용이다."가 있다. 흔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러셀의 제자로 있던 시기부터 1차 세계대전

이후 시골에서 교사생활을 하기까지를 전기 철학으로(대표되는 책 「논리철학논고」), 시골에서 교사생활을 끝마치고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온 후 사망할 때까지를 후기 철학으로 구분한다(대표되는 책 「철학적 탐구」).



3.1. 전기 철학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는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밝힌 시기이다. 그의 전기 철학에 의하면 윤리와 아름

다움은 하나이며 인간이 말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 드러난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대답은 말로써 물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물음이란 던져진 이상 그 물음에 대한 대답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윤리 명제는 있을 수 없다."



3.1.1.2. 그림 이론

진리란 세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이론이다. 모사설이라고도 불린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세계를

 말로 옮긴다는 얘기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잡지에서 교통사고에 관한 재판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인형과 모형

으로 상황 설명을 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논고」에서는 이에 대해 2.1~2.225에서 중점적으로 얘기한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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