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11.

[사상] 범아일여 환각의 세상 양자물리학 놀라운 가설






[사상] 범아일여 환각의 세상 양자물리학 놀라운 가설




요즘 과학이론은 불교나 힌두교의 사상으로 흘러가는 느낌을 준다. 동
양인들이 예전에 직관으로 체험했던 사실이 과학이론의 뒷바침을 받으
며 더욱 힘을 얻는다. 인내천(사람이 하늘), 범아일여(주객이 하나)란
범신론까지...
하지만 아직까지는 가설로 제기되는 수준이며, 좀더 발전해 나가려면
세월이 더 흘러야할 것이다.
아무튼 아래 이론들은 우리 유한한 생명체에 어느정도 위안을 주는 것
은 사실이다. 자료들은 가급적 원안을 그대로 실었다. -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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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곧 너였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내 육체속에 있는것은 언제나 너였다.
이 세계 안에서 나는 너에 대한 증거를 물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 전부가
너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잘랄루딘 루미-
수피즘(회교 신비주의)의 시인





00 돼지의 행복

"깨달은 이는 알고 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으면서도 또 먹고, 걷고,
잠자고, 숨쉬면서도 '나[主人空]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말하고, 배설하고, 잡으면서도 또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도 감각들이
 대상을 만나 적절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뿐
'나는 아무것도 행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바가바드기타 5:8-9)

감각에 묶인 '나'를 '참 나'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참 나'인 아트만을 알 길이
 없다. 자신의 본성이 主人空임을 알지 못하면 현상세계 경험의 종노릇하는 신세
를 한탄하면서 고통의 바다를 한없이 떠다닐 수밖에 없다.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옛날에 신들의 왕인 인드라가 돼지가 되어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가 다른 돼지들
과 함께 오물 더미 속에서 뒹굴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암퇘지와 짝을 맺고 새끼
 돼지들도 여럿 낳았다. 그는 매우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딱한 처지를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 다른 신들이 돼지로
살고 있는 인드라를 찾아와 말했다.
 '당신은 신들의 왕입니다. 모든 신들이 당신의 휘하에 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인드라가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나는 여기가 좋소. 이렇게 예쁜 마누라
와 귀여운 새끼들이 있는데 하늘나라가 뭐 부럽겠소.'

인드라를 찾아온 신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그들은 돼지들을 한 마
리씩 차례대로 모두 죽이기로 결심했다. 마누라와 새끼들이 모두 죽자 인드라는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신들은 인드라가 쓰고 있던 돼지 껍데기를 벗겨 냈다. 그러자 돼지 속에서 나온
인드라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돼지가 되었던 끔직한 꿈을 통해서 깨달은 바
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베카난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인드라도 돼지가 되었을 때는 돼지의 삶이 유일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우주 전체를 돼지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서 안달복달했다.


-발췌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2015tungi&logNo=220331349191&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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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바라는 대로 된다"- 오컬트 구상화 기법 (키레네)
분별과 검증/현대영성비평 2009.08.30 14:21 Posted by 김삼

    "비비디바비디부"
-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어요" - '생각대로 T' 선전에서

    "아브라카다브라"
- 마법사의 주문 "수리수리마하수리" -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노래에서
 
"소원을 말해 봐 - 너의 지니(Genie)1 내가 들어줄게"
- '소녀시대'의 노래에서

요즈음 TV를 켜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위의 대중문화의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 것
처럼, 이 시대의 (뉴에이지적) 메시지 중의 하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그냥 스쳐 넘길 일
만은 아닐 것 같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이 오컬트 사상은 '신사상'(New Thought)운동이라
고도 불리는데, 생각과 말과 그림(이미지/상상)을 통해 바라는 것을 "실체"로 만
들어 낸다는 사상이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그림 그린 것이 초자연적인 (끌어
들임/끌어당김의) 작용을 통해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과 구상화(영상화/시각화 Visualization)의 법칙에 대한 뉴에이
저들의 말이다:

     "당신의 인생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당신이 끌어당긴 것이다. 당신이 마
음에 그린 그림과 생각이 그것들을 끌어당겼다는 뜻이다...이것으로 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그림을 그릴 때 당신은 그 강한 파장을 우주에 내뿜는 것이다.
그러면 끌어당김의 법칙이 그 신호를 받아서 당신이 마음 속에 그린 그림을 현실로
만들어 되돌려 준다." - 론다 번 ['시크릿'의 저자]


-발췌출처: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
바라는-대로-이뤄진다-오컬트의-구상화-기법-키레네 [진리와 사랑 (T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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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가설]


146 프랜시스 크릭 crick의 '놀라운 가설'

당신, 즉 당신의 기쁨과 즐거움, 당신의 기억과 욕망, 당신의 개인적
정체성과 자유의지는 실제로 신경세포들과 이에 관련된 분자들의 커다
란 모임이 나타내는 행위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1994. 3쪽.

그의 놀라운 가설은 1인칭으로서의 나가 이러한 물질의 집합이 나타내
는 행위 그 이상이 아니라는 주장 속에 나타난다.
그 하나는 마음이라는 하나의 현상이 있고 이현상이 지닌 모든 성질들
이 이를 구성하는 신경세포의 조직을 통해 설명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
나는 이러한 신경조직이 형성될 때 그 안에서 객관적 서술의 대상이 되
는 한 현상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더이상 환원될 수 없는 주체로서의
'나'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147.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이러한 신경세포들이 마련되었을 때,
 그 안에서 갑자기 주체로서의 '나'가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물질은 그 안에 바로 '나'를 이루어낼 성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것이 바로 크릭이 말하는 '놀라운 가설'이다. 149

놀라운 가설은 어떻게 물질만으로서 이뤄진 체계 속에서 주체로서의
 나'가 출현할 수 있으며, 또 이 나가 나로서의 삶을 영휘할 수 있는가
에 대해 최대한 깊이 있게 이해해 나가자는 것이다. 151








161슈뢰딩거의 의식론
-양자역학자의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부록

내가 원자들을 움직이는가, 원자들이 나를 움직이는가?
이 글에서 그는 두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1. 내몸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순수한 역학적 기구로 기능한다.
2. 그렇지만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직접 경험에 의해, 내가 내 몸
의 움직임을 지시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이 두 가정으로부터 '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원자들의 운동'
을 조정하는 존재'라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즉 힌두교의 아트만(개아)이
 브라만(범아)이다고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주장때문에 출판사가 원고수정을 요구했고, 그것을 거부한 슈뢰딩거는
 새출판사를 찾아 출판시기를 1년정도 늦추었다.

이는 주체적 의식을 지닌 '나'라는 것이 이러한 물질적 현상에 내재하는
'존재의 한 양상'이라는 뜻이며, 이러한 '양상' 곧 '나'는 물질세계의 적
어도 한 부분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고 스스로 파악하는 성격을 지닌
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일으켜 주는 것 또한 물질일 것
이고, 또 이러한 마음의 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 또한 물질이라는 점이다.
이 모두가 물질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마음 상태를 가진 물질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주도하는 마음의 흐름에 맞게 물질의 움직임도 일어나야 하므
로 이는 곧 자신이 물질세게를 조정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 안에 특정한 프로그램이 갈릴 경우, 만일 그 프로그램을
 자기 자신이라 의식하는 어던 물질적 여건이 형성된다면, 이렇게 형성된
의식의 주체는 자신이 자신의 의지대로 컴퓨터를 작동해 나간다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63



의식은 오직 하나인가? 164~

슈뢰딩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주체가 지닌 개인적인 성격을 부정
하고 세계 전체에 오로지 하나의 주체만이 형성된다고 보는데, 이것 또한
매우 흥미로운 관점이다. 이 생각은 의식이라는 것이 결코 하나 둘 셀 수
 있는 복수의 형태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서 출발한다.

의식은 결코 복수 plural로 경험되지 않는다. 오직 단수 singlar로 만 경
험한다. 의식분열 혹은 다중인격같은 병적인 경우에도 두 인격은 결코 동
시에 나타나지 않고 교대로 나타난다.
자기가 여럿이라는 관념, 정신이 복수라는 관념이 어떻게 생겨날까? 의식
은 몸이라는 제한된 구역에 있는 물질의 물리적 상태에 의존하며 그것과 직
접 연결된다. 그런데 이런 몸들이 무척많다.(사춘기, 노화기, 노망기 등 신
체의 발달 단계에 따라 정신이 변하는 것, 또는 열, 중독, 마취, 뇌손상 등
에의한 결과를 생각해보라)

"유일한 대안은 의식이 단수라고 하는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의식이 복수라는 것은 알려진 일이 없다. 단지 하나일 뿐이며, 여
럿으로 보이는 것은 이 하나의 다른 국면들인데, 이것들 또한 미망(=마야)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환영은 여러 거울이 달린 방에서도 나타나며, 가우리
상카르라는 봉우리와 에베레스트라는 봉우리가 서로 다른 계곡에서 바라본
같은 봉우리라는 사실과도 같은 일이다." -슈뢰딩거. 1944. 95쪽.

우리는 두 사람이 각각 지니고 있는 의식을 서로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인가, 다른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먼저 우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 곧 두뇌만을 보자면 이 둘은 분명히 서
로 다른데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말하자면 공통점이 매
우많다.
 우리는 앞에서 물질과 의식이 둘이 아니고 한 실체의 두 측면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이들은 결국 그릇과 내용은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의식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문화공동체라 볼 수 있다. 즉 의식은 많은
점에서 문화 공동체이의 공유물이며, 각각의 의식이라는 것은 이것의 약간씩
 다른 복사본이라 말할 수도 있다.
이는 '춘향전'이 하나이나 여럿의 전승본이 있는 것과 같다. 결국 우리의 의
식은 각각 낱생명적인 의식을 지니면서도 전체가 서로 엮이고 유통이 되면서
 마치도 온생명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에 담긴 하나의 의식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168

-발췌출처:
물질 생명 인간
장회익(물리학박사)저/ 돌배게간/200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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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양자물리학자 슈뢰딩거가 말하는 ‘기억으로서, 생명’


[생명이란 무엇인가]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궁리
What is life? :  Erwin Schroding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    -발타사르 그라시안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이다. 나였던 것들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엄마 손을 잡고 불이
난 건물 계단을 내려오던 나도, 산골짜기를 헤매며 사슴벌레를 잡던 나도,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나도, 흰 눈을 맞으며 펑펑 울던 나도, 없다. 오직 그것들에 대한 기

우리는 기억의 퇴적층이다. 시간은 기억을 풍화시키고, 죽음은 마침내 기억을 소멸
시킨다. 나는 한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타자의 기억을 통
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기억이 있다. 생명이다.


…기억으로서, 생명…

기억의 핵심은 재현이다. 기억 속에서 사건은 재현된다. 내일 자전거를 자연스럽게
탈 수 있는 것은 어제 자전거를 탔던 행위를 내 몸이 기억하고 그것을 재현하기 때
문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행복했던 여행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도
 기억이고 재현이다. 기억이 없다면 재현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사건은 오로지 기억
의 매개를 통해서만 현재, 혹은 미래와 연결된다.

생명의 핵심 또한 재현이다. 생명체는 사건을 끊임없이 재현한다. 세포가 분열하여
똑같은 세포가 나오고, 그 세포들이 분열하여 다시 똑같은 세포를 만든다. 하나의
세포가 닭이 되어 하나의 세포로 된 알을 낳고, 그 알은 다시 닭이 되어 하나의 세
포로 된 알을 낳는다. 아버지가 딸에게 파란 눈을 물려주고, 어머니가 다시 그 파란
 눈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생명체는 기억을 통해 본연의 삶을 획득하고, 살아 있는 한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는
다. 반대로 생명체의 죽음은 기억의 끝이며 재현의 정지다. 최초의 심장박동이 더 이
상 재현되지 않을 때,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없는 상태가 죽음
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죽음 이후에도 기억을 매개로 생명은 이어진다.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도 손자의 눈은 여전히 파랗다. 닭이 더 이상 달걀을 낳을 수 없게 되는 날,
 그가 낳은 달걀이 닭이 되어 다시 달걀을 낳고 있다. 최초의 생명은 그 탄생 이후
단 한 순간도 재현을 멈추지 않았다. 38억 년 동안 지구 위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기억, 생명은 바로 그 영속하는 기억이다.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의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는 그 영속성에 대한 고찰
이다. 그는 여기서 생명이라는 기억의 물리적 본성을, 그 물질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의 지적 모험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생명이 기억이라면, 그 기
억은 어디에 기록되는가.”


…기억의 법칙…

자신의 한계와 책무를 인정한 슈뢰딩거의 작업은 과감하다. 그는 물리학과 유전학을
통합하여 생명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재현적 사건들의 물적 토대, 즉 기억의 화학적
본성에 대해 논증, 더 정확히 말하면 예언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류를 실제로 범
했다. 유전자를 단백질이라고 본 잘못된 예언과, 유전정보는 이성질체의 형태로 저장
될 것이라는 부정확한 예언을 했다. 그러나 예언은 반증의 대상이 아니라 묵상의 원
천이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는 완벽한 방법은 아무 길로도 가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목적지를 잃어버리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기도 하다.

비록 완벽한 예언은 아니지만, 그의 세련된 예언은 이미 당대 과학자들의 의식계에서
 조용히 점화되고 있던 어떤 열망을 폭발적으로 발화시켰다. 기억으로서의 생명을 해
독할 수 있는 ‘로제타석’에 대한 열망 말이다.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로
제타석은 훗날 왓슨과 크릭에 의해 디엔에이(DNA)라는 이중나선 구조의 화합물로 해
독되었다. 왓슨은 그 여정을 기록한 <이중나선>에서 자신과 크릭을 순례길로 이끈 예
언자와 예언서가 슈뢰딩거의 <생명은 무엇인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물리학자로서 슈뢰딩거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문한다. 생명은 물리학 법칙들에 기반을
 두는가. 그의 자답은 간결하다. 그렇다. 그것도 자신이 크게 기여한 양자역학이 생
명의 원리이자 기억의 법칙이라고 예언한다.

우리는 유기체 내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새로운 유형의 물리학 법칙을 기꺼이
찾아야 한다. 혹시 그 법칙을 비물리학적인, 아니 심지어 초물리학적인 법칙이라 불
러야 할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새로운 원리는 전적으로 물리
학적이다. 그 원리는 다름 아닌 양자이론의 원리라고 나는 믿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135쪽)


…염색체는 어떻게 그토록 작은가…

슈뢰딩거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논증을 시작한다. “원자는 왜 그토록 작은가?” 사실
 이 질문은 “우리는 왜 원자에 비해 그토록 큰가?”라는 같은 질문의 다른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수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원자에 비할 바 없이 크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크기의 문제가 필연적
이라고 진단한다.

모든 원자가 항상 완전히 무질서한 열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오직 엄청나게 많은
원자들이 함께 행동할 때만, 통계적인 법칙들이 그 집단의 행동을 원자의 개수가 늘
어날수록 증가하는 정확도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사건들은 참된 질서를
 얻는다. 유기체의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물리법칙들과 화학법칙들은
 모두 이런 통계적인 법칙이다.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법칙성이나 질서는 원자들
의 끊임없는 열운동에 의해 교란당하고 무력해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28쪽)

아주 작은 원자들의 세계는 카오스다. 그 많은 존재들이 아무런 목적도, 의도도 없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런 원자들의 모임인 빨간 잉크를 물에 한 방울 떨어뜨리면, 여
지없이 잉크의 원자들은 물 전체를 빨갛게 물들인다. 천 번을 반복한다 해도 마찬가
지다. 마치 잉크가 물을 빨갛게 물들이려는 지향성을 품고 있는 듯 말이다.

하지만 잉크 속의 원자들은 결코 물에 퍼지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물에 퍼지는 것
은 개별 원자가 아니라 평균으로서 원자 집단이며, 과학자들은 이 집단적 패턴을 확산
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무작위로 움직인다. 무수히 많은 원자들이 물병
안에서 아무렇게나 움직이다 보니 아무 곳에나 있게 되는 패턴이 확산이다.

이처럼 지향 없는 것들의 지향성은 우주의 지향으로부터 발생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이행이라는 우주의 본성 말이다. 필요한 것
은 오직 그 지향성이 성취될 시간뿐이다. 그리고 이 무질서함은 오로지 거대한 원자
집단에서 통계적인 차원에서만 법칙적으로 성립한다. 개별적인 원자들은 패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고전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우리가 원자들보다 이토록 커야만 하는
이유다.

유기체와 유기체가 경험하는 모든 생물학적인 과정들이 극도의 ‘다수-원자’ 구조를
가져야 하며, 우연적인 ‘단일-원자’ 사건들이 너무 큰 중요성을 얻지 못하도록 보호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이다, ‘유기체는 충분히 정확한 물리법칙들을 가
질 것이며, 그에 의지하여 놀랄 만큼 규칙적이고 질서 있는 활동을 할 것이다’라고
‘소박한 물리학자’는 말한다.(<생명이란 무엇인가>, 41쪽)

자연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패턴은 생명이다. 기억으로서 생명은 끊임없이
 패턴을 재생산하고 재현한다. 봄이 오면 꽃이 들판을 물들이고, 여름이 오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 공기를 물들인다. 꽃은 봄을 기억하고 개구리는 여름을 기억한다. 들판
은 꽃을 재현하고 여름밤은 울음소리를 재현한다. 슈뢰딩거는 이 영속적인 패턴을 기적
이라고 말한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원자 집단이, 정확한 통계적인 법칙성을 보이기에는 너무 작은
 집단이 살아 있는 유기체 속에서 일어나는 매우 질서 있고 규칙적인 사건들에서 결정적
인 역할을 한다. 그 작은 집단들은 유기체가 발생하면서 획득하는 관찰 가능한 거시적
특성을 통제하며, 유기체의 중요한 기능적 특징을 결정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42쪽)


…기억은 분자에 기록된다…

이 오류를 극복할 방안이 고전물리학에는 없다. 염색체라는 그리 크지 않은 원자 집단이
생명의 기억을 담고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도, (어쩌
면 필연적으로) 염색체가 생물학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그 시대에 새로운 물리학이
등장했다. 양자역학이다. 슈뢰딩거는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두 이론, 유전학과 양자역학의
 통합으로 새로운 시대의 서곡을 썼다. 유전자의 시대 말이다.

양자이론이 해답을 제공한다. 현재의 지식에 따르면 유전 메커니즘은 양자이론의 기초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니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이 위대한 두 이론의 탄생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 양자이론의 가장 큰 업적은 자연의 책 속에서, 그 속에서는
오직 연속성만이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과거의 전통을 뒤엎고, 불연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83-84쪽)

기억은 비가역적인 무엇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말하면, 기억은 비가역적인 토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토대는 기록이어야 한다. 기록만이 기억을 품는다. 그것이 일기장이든, 우
리 뇌 속의 신경구조든 말이다. 과거와의 접속은 오로지 기억을 매개로만 가능하며, 기억
은 오직 기록에서만 호출될 수 있다. 기록이 사라졌다면 더 이상 기억은 없다. 망각이란
기록의 소거로 인한 기억의 소멸이다.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이 바로 기억을 망각으로부터 보호할 비가역적인 토대를 제공할 수 있
다고 말한다. 그 토대란 우주의 불연속성이다. 양자역학은 물은 위에서 아래로 연속적으로
흐른다는 과거의 전통을 뒤엎고, 양자라는 우주의 존재들이 불연속적인 상태를 뛰어다니며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소립자들의 세계는 아파트와 같아서 우리는 1층 혹은 2층에 살 수
있을 뿐, 1.5층이나 2.8층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1층을 선택하면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계단을 지나야 한다. 바로 그 계단이 기억의 비가역적 토대이며, 망각에 대한
 성벽이다.

분자는 이처럼 양자화 된 우주의 역작이다. 주어진 원자 집단에 허용된 불연속적인 상태들
중 안정적으로 서로 근접한 상태가 분자이다. 분자는 한 집에 살기로 한 원자들의 공동체이
며, 이들의 동거는 전자의 공유로 실현된다. 과학자들은 그 결속력을 공유결합이라 부른다.
시간이라는 무질서의 파도에 견뎌낼 수 있는 힘은 원자들이 분자공동체로서 지켜내는 질서이다.
기억은 이 공유결합 위에 기록되고, 보존되며, 재현된다. 생명의 기억은 유전자에 기록되며,
유전자는 분자여야 한다.

유전물질의 미세한 크기와 고도의 영속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분자를 제안함으로써’,
 그러니까 세분된 질서를 구현한 걸작이며 양자이론의 마술지팡이에 의해 보호를 받는 예외적
으로 큰 분자를 제안함으로써 자연적인 무질서화 경향성을 피해나가야 했다. … 생명은 물질
의 질서 있고 법칙적인 행동이며, 그 행동은 물질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하는 경향성에만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에도 부분적으로 기반을 두는 것으로 보인
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117쪽)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위대한 예언서인 이유는 그것이 분자와 생명의 결합, 즉 분자생물학의
 시대를 정확히 예언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DNA의 등장을 예비하
고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예언자는 말한다. 생명은 우주의 예외적 법칙으로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보편적 법칙의 산물이다. 바위와 물을 이루는 존재들과, 그것이 있
게 한 법칙이 생명 역시 꽃피우고 있다.

어쩌면 양자의 우주는 그 태초부터 생명의 출현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는 무질서의 법칙은 우주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는
기억이라는 생명의 법칙이 있다. 우주는 더디지만 온 힘을 다해 분자라는 기록으로 기억을 겹
겹이 쌓아왔다. 생명은 그 기억의 공동체다. 어쩌면 생명이란 우주 전체이며, 지금의 우주를
넘어 지금까지의 우주를 모두 품은 138억 년의 기억이 아닐까.

이 우주는 우리의 등장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프리먼 다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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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한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이대한의 책꽂이: '생명의 느낌' 연재
 생명 또는 생명과학과 관련된 고전 및 최근 명저들에 대한 독서 에세이. 생명과학 박사과정 이대한
 님이 책의 내용이나 주제를 소재로 생명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담으면서 생명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미학적 접근의 접목을 시도한다.

-발췌출처:
http://scienceon.hani.co.kr/15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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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샹카라와 범아일여

『우파니샤드』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깨달으라는 것인가? 『우파니샤드』에서는 우주의 궁극 실재인 ‘브라흐만’
을 깨달으라고 한다. 브라흐만은 ‘네티 네티’라고 한다. ‘이것이라 할 수도 없고
 저것이라 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절대적인 실재이므로 ‘이것’이나 ‘저것’
으로 한정지을 수 없고, 우리의 제약된 생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이 절대적인 실재로서의 브라흐만은 단순히 추상적인 원리만이 아니라 각 사
람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질적이며 참된 ‘자아(아트만)’이기도 하다. ‘참나’는
 브라흐만의 구체화된 상태로서,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곧 브라흐만이다”라는 진리
가 성립된다고 한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tat tvam asi(That art thou)’라고 하
는데, “그대는 바로 그것(브라흐만)”이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
라고 한다. 이렇게 내가 바로 브라흐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곧 무명(無明)이
요, 이를 몸소 체득하여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라고 하였다.


힌두교 중흥에 절대적 공헌

샹카라에 따르면 “브라흐만 만이 참 실재요, 시공의 세계는 허상에 불과하다. 궁극
적으로 브라흐만과 개인적 자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궁극 실재로서의 브라흐만은 결국 아무런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굳이 뭐라고라도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삿 칫 아난다’ 곧 ‘순수 존재, 순수 의
식, 순수 기쁨’이라고나 할 수 있다. 마치 불교에서 궁극 실재는 언설을 이(離)한다는
 뜻에서 공(空)이라 하지만 그 공마저도 공하다는 생각과 비슷하다.


베단타 철학의 삼론 저술

그런데 아름다움, 위대함, 능력있음 등의 특성을 부여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특성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적 특성’이다. 따라서 아직도 이 허상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브라흐만을 ‘주님(이슈바라)’라고 부르고 인격신으로 경배
해도 좋다고 한다. 샹카라 자신도 시바나 비슈누 신을 위한 찬송시를 지었다. 스스로도
 시바 신을 경배하였다.


그러나 샹카라에 의하면 이렇게 인격신으로 섬긴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허상의 세
계에서만 허용되는 일종의 방편에 불과한 것일 뿐, 우리가 취해야 할 궁극 목표는 아
니라는 것이다. 궁극 목표는 물론 니르구나 브라흐만을 체득해서 그로 인해 해탈을 얻
는 것이다.




브라흐만이 ‘유일무이’한 절대적 궁극 실재라고 하는 주장은 동시에 브라흐만만이
참 실재이고 다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마야’(illusion)에 의해 나타난 허상일 뿐
이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허상’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만
아니라는 사실이다.

허상도 브라흐만에서 나온 것이므로 브라흐만은 일종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마
술사라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영적 눈을 뜰 수 있다면 마야의 허상을 통해
브라흐만을 볼 수도 있다.


“어두움이 태양의 광채 속에서 녹아 없어지듯 만물도 영원한 실재 속에서 녹아 없어진
다.” 샹카라에게 있어서 현상 세계는 브라흐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우리가 그 영원한 실재와 하나가 되면 신기루 같은 이 현상 세계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사상을 확대해서 삶과 죽음과 다시 태어남, 몸부림과 고
통, 선과 악, 속박과 해방 등도 결국은 허상이라고 했다.


“묶임도 그 묶임에서 벗어남도 모두 신기루 같은 것... 제한도 놓음도, 묶임도 성공
도 없고, 자유를 찾는 이도, 자유스러운 이도 없으니, 이것이야 말로 궁극 진리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모두 마야의 세계에 속한 허상일 뿐이라고 한다. 깨친 이들만이
 자기의 참 자아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고 즐기는’ 자기의 개인적 자아에서
자기의 참 자아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반야심경』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절대적인 궁극 실재는 꿈이 없는 수면(dreamless sleep) 상태에서
체득될 수 있다고 한다. 꿈이 없는 수면 상태란 편안한 즐거움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런 상태에서 궁극 실재에 대한 계시가 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샹카라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아누바바(anubhava)’, 곧 궁극 실재에 대한 직관이다. 이것이야
 말로 ‘완전한 앎’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직관을 통해 우리는 우
리가 우주적 정신과 하나라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우리의 개별적 자아 인식은 사라
지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샹카라는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도 해탈의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살아서
정신적 해방을 경험하는 것을 ‘지반묵티(jivanmukti)’라고 하고, 이렇게 해방된
사람을 지반묵타(jivanmukta), 혹은 마하트마(mahatma)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되 꿈에서 본 땅에 사는 것처럼’ 살고, ‘이 몸이 계속되는 동안 그것을
 그림자처럼’ 여긴다. 이렇게 살다가 이 몸이 끝나는 날 개별적 존재로서의 제약에
서 완전히 벗어나 영원의 찬연한 광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샹카라는 힌두교를 중흥시키는데 절대적으로 공헌한 인물이다. 서양에서 힌두교나
인도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많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우파니샤드와 샹카라의 사상
에 관심을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서 세계 종교의 심층에 흐르는 기
본적 가르침의 전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법보신문]
-발췌출처:
http://www.ibuddha.tv/pds/pds_view.asp?pk_idx=1872&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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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아일여 [梵我一如 ]


우주의 최고 원리인 범(梵, brahman)과 개인의 본질인 아(我, ?tman)는 같다는
우파니샤드(upani?ad)의 중심 내용.

마야 ([산스크리트어]M?y?)
[명사] 고대 인도의 베단타학파의 술어로서, 환영(幻影)과 허위(虛僞)에 충만한
물질계. 또는 그것을 주는 여신의 초자연력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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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뜨만'은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의 참모습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사람의 몸을
채우고 있는 '기(氣)'나 '숨(息)' 그리고 그런 것들의 본체라는 의미에서 사용
되었다. 우파니샤드 사상의 가장 큰 주제는 아뜨만, 즉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
하는 것이다. 단, 자신의 주관적 정체를 파악하되 자신을 둘러싼 세계, 자연
등 모든 것이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긴밀히 연관되어있음을 함께 파악
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궁극자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우파니샤드를 주석한 많은 베단따 학자들은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
이라고 한다. '범(梵)'은 브라흐만을 한자로 옮긴 것이고, '아(我)'는 아뜨만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즉, 주객일체(主客一體)의 단계가 인간 지성의 최종적인
목적지라고 한 것이다. 즉, 브라흐만과 아뜨만이 하나와도 같다(一如)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펼쳐진 것'이라는 뜻이다. 즉, 세상 전체에 퍼져 있는 우주적 영
혼, 우주적 참모습이다. 이것은 남성, 중성, 여성 그 어느 성에도 속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완전한 존재이다. 이것은 모
든 세상의 에너지원이며 원천이다. 그러한 존재를 어떤 말로 이름 지을 수가 없
어 '넓게 펼쳐져 어디든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불렀던 것이다. 심지어
'브라흐만'도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되면 그 또한 그 존재를 지칭하지 못하게 되
므로 '그것(tat)'이라고 칭하거나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와 같이 배제
의 어법을 동원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범아일여의 진리가 인간으로서 얻기 가장 어려운 깨달음이 된 것은 '마야(m?y?)'
 때문이다. 이것은 환영력(幻影力)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눈앞을 가리는 장막
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면목을 볼 수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명
약관화한 진리가 아닌 무명(無明, avidhy?)을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개개인은
 자신의 무명을 버림으로써 범아일여의 진리를 보게 된다. 이러한 개개의 영혼
을 개체아(個體我, j?v?tman)라고 한다.

개체아는 개개인이 가지는 자신의 주관적 정체이다. 자신의 주관적 정체를 파악
하되 자신을 둘러싼 세계, 자연 등 모든 것이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긴
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과 자신이
포함된 세상 전체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궁극자에 대한 열린
이해가 필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아일여  , 2007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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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 아트만 범아일여..



[브라만(brahman)]

브라만(Brahman)은 우파니샤드의 모든 신을 통합하는 마지막 존재자로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들까지 움직이게 하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이며 유일한 통일성을 갖춘 존재로
 묘사됩니다. 브라만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생겨나서 살아가고 죽어서 되돌아가 가는
 곳이자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적용되는 법칙이지만 그는 이 법칙에서 자
유로운 존재입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하나하나 안에 브라만이 존재하며 브라만 안에
 모든 사물들이 들어있습니다. 즉, 자기 스스로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고, 또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모든 자연물 안에 브라만이 들어있으며
또한 창조된 모든 자연물을 넘어서는 브라만의 초월성이 있다고 합니다. 브라만은 자
신의 일부분이 온 우주에 두루 존재하고 있으며,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이지만 또
한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법칙이라는 제한적인 범주와 이분법적인 생각을 통해 사물을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브라만은 우리의 판단기준으로 볼 때, 서로 모순적이며
 이율배반적인 가치가 함께 존재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제한적인 범주와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브라만의 본 모습을 절대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브라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일상적인 우리의 판단기준을 바꾸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트만(Atman)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파니샤드의 특징은 자연이라는 외부 세계로부터 인간 내면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성찰로 주요 관심이 이동한 것입니다. 우주의 절대적 통일성에
대한 탐구도 있었지만 인간의 자아(自我)에 대한 질문도 하였던 것입니다.

우파니샤드가 발견한 자아는 아트만(Atman)이라는 마음의 근본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아트만의 본래 뜻은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는 호흡이었는데, 차츰 그 뜻이 변하여 자
아 또는 영혼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트만에 대한 개념은 계속 발전하여 4가
지 상태에 대한 이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첫 번째 아트만은 우리가 깨어있는 상태의 자아로 우리의 몸을 지칭했습니다. 두 번째
로는 꿈을 꾸는 상태로서의 아트만인데 몸이나 눈, 코, 입 등의 각종 감각기관은 쉬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활동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아트만은 두 번째보다 더 깊은 상태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있는 상태라
고 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기관이나 마음의 활동도 없고 그 대상도 사라진 행복하고 평
화스러운 상태라고 합니다. 이 상태는 한 마리의 새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마침내
자기의 보금자리로 돌아와서 쉬고 있는 상태라고 비유합니다.

마지막 아트만의 상태는 희열(ananda)입니다. 깊은 수면의 단계처럼 주관과 객관의 사
라짐은 물론 자아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스스로 순수하고 밝게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일상의 경험으로는 알 수 없고 요가와 같은 정신적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
는 신비로운 체험의 세계입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

아트만은 어떤 차별성이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며 또한 브라만으로서 모든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소금이 물에 녹으면
어느 부분의 물을 마셔도 소금 맛이 남아 있듯이 아트만은 모든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
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세계는 브라만이라는 궁극적 실재가 만들어 낸 것이며, 브라만은
 세계의 모든 존재에 들어가 있다고 했습니다. 브라만은 우주의 아트만이요, 아트만은
 사람 속에 존재하는 브라만인 것입니다.

바로 이 브라만과 아트만이 동일하다는 생각인 범아일여(梵我一如)야 말로 우파니샤드
 최고의 지혜입니다. "네가 그것이다(tad tvam asi)", 또는 "내가 브라만이다
(aham brahma asmi)"라는 우파니샤드의 구절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곧 브라만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을 원하거나 두려워할 아무런 대상이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런
 사람은 모든 업보에서 자유로워지며 죽은 뒤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브라만으로서
영원한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발췌출처; 오마이뉴스. 06.09.13 14:46l김성후(intar)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9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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