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 바르도 49제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
00 故 김주혁, 오늘(17일) 49재 미사... '1박2일 멤버'·이유영 참석
2017년 12월 17일 (일) 08:06:53 천설화 기자 news@stardailynews.co.kr
[스타데일리뉴스=천설화 기자] 故 김주혁의 49재 추모미사가 치러진다.
오늘(17일) 오후 서울 청담동 성당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故 김주혁의 49재 미사
가 진행된다.
소속사는 "고인과 함께 했던 날들을 추억하며 편안한 안식을 기원하는 시간을 차분히 가지려
한다"며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
추모미사에는 가족과 친지, 동료와 팬이 함께 한다. 생전 연인이었던 배우 이유영과 KBS2
'1박2일' 멤버, 사전에 미사를 신청한 일부 팬이 김주혁의 영면을 기원한다.
한편 故 김주혁은 지난 10월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영동대로 자택 근처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눈을 감았다. 향년 45세. 부검 결과 최종 사인은 심각한 머리손상이었으나 정확한 사
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출처: 스타데일리뉴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7440
00 자만시
함께 살던 아내가 죽었을때 애닲은 심정으로 애도한 시를 도망시悼亡詩라고 한다.
친구가 죽었을때는 도붕시 悼朋詩 라 하고 자식이 죽었을때 남기는 시를 곡자시
哭子詩라고 한다.사람들은 병에 들어서 신음할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스스로 짓는 시가 자만시이다.
한평생 시름속에서 살다보니
밝은 달도 제대로 보지 못했네
이제 머잖아 길이 길이 대할것이매
무덤가는 이길도 나쁘지는 않으리..
조선 중기때 이식이란 선비가 큰병을 앓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남긴 자만
시自晩詩이다.새해를 맞이하기전에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만시 한편씩 작성해
보면 어떨까요?
조선시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많은 시가 있다.그 중 추사가 먼저 떠난 그의 아내
예안이씨에게 남긴 도망시를 백미로 꼽는다.추사는 15세에 결혼하여 첫 아내를 얻었
으나 일찍 죽는다.16세에는 어머니가 36세로 사망한다.어머니 나이16세에 추사가 태
어난 것이다.
추사 나이 23세에 두번째 아내를 얻으니 예안이씨이다.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 할때
뒷바라지 하던 아내가 죽는다.추사 나이 57세이니 34년의 부부인연이다.아내의 영전
에도 가보지 못하는 비통한 심정을 시로 남긴다.
어찌하면 저승의 월하노인에게 하소연 하여
다음 세상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날까
내가 죽고 당신은 천리 떨어진 곳에 홀로 남아
당신에게 이 비통한 마음을 알게 하고 싶다오.
추사가 아내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다는 소식은 시간이 지나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에
게 전해진다.초의스님은 바로 행장을 차려 제주행 배에 몸을 싣는다.다행히 초의스님
주관으로 예안이씨의 49재를 치를수 있었다.
-발췌출처:
https://www.templestay.com/temple_info_gallery_view.asp?idx=8343&page=5&t_id=daewons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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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죽음은 끝이 아니다.
2009.05.22 10:02 포대화상
임종환자는 흔히 죽음 이후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Y씨는 3개의 회사를 경영해온 60세의 남자로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친구가 의사로
있는 어느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친구인 의사의 생각으로는 Y씨가 평소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또 경영하던 회사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잔여수명이 3개월 정도라고 말래 주었다. 잠시 후부터 환
자의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온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
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친구인 의사는 정신과 의사에게 의뢰했는데도 별 효과가 없자 마
지막으로 호스피스에게 의뢰하였다. 빨리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호스피스 관계자가
병실을 찾아가 보니 환자는 침대에 똑바로 누워 무릎을 약간 세운 채 이빨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보고 있는 듯 공포에 질린 얼굴 표정으
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난 후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
해 보았더니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으니 죽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지옥의 공포가 몰려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55세의 말기 위암 환자 B씨는 전혀 아픈 곳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부
터인가 소화가 잘 안되는 것 같았고 그런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기에 병원에 갔더니
여러 가지 검사 끝에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하기 위해 막상 열어 보았으나 위 주변의 림프 결절에까지 전이되어 수술도 하지 못
하고 그냥 덮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 항암 치료를 두 차례 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어서 퇴
원한 뒤 가정 호스피스에 의뢰되었다.
통증이 심해서 호스피스에 가입한 초기에는 통증 조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조용한
성품이어서 호스피스 봉사자가 집을 방문할 경우 부인이 주로 병세를 말했다. 부인이
외출하고 없을 적에만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특별한 종교가 없었
던 그는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공자가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고 말한 바 있다. 유교사상에는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도덕윤리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B씨도 또한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기
에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호스피스 봉사자가 물어 보았다. 그는 한숨을 푸욱 쉬면서
“아무런 희망이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병이 나을 수 잇다는 희망이 없어서 우울하고
죽으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음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지 않다.
그러나 몸이 점점 쇠약해지니 이젠 못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난다. 죽
음이란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아니냐. 죽으면 모든 게
정지하고 끝나는 것인데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로부터 며칠 지나서 그는 죽
었다. B씨처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해 죽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례가 적지 않다.
(중략)
서양에서 생사학을 창시한 퀴블러로스 박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종교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 사실의 문제라고 말한다. 사후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종교적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해 바른 지식을 통해 제
대로 알고 있느냐, 아니면 잘못 알고 있느냐 하는 지식의 문제라는 뜻이다.
퀴블러로스 박사는 어린이들에게 죽음을 설명할 때 자주 나비의 유충인 번데기 모양의 인
형을 사용했다. 번데기 모양의 인형은 퀴블러로스 박사가 직접 만든 것이다. 번데기 모양
의 지퍼를 열면 속에서 예쁜 나비 인형이 나온다. 소아암으로 인해 죽음에 직면한 어린 아
이를 향해 퀴블러로스 박사는 다음같이 말했다. “여러분의 몸은 헝겊으로 만든 번데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에 의해 여러분의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저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
먼저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을 빌리면, 임종 2, 3일 전이면 환자는 대화하던 중에도 갑
자기 허공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고 한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누가 와 있다’ ‘누구를 보
았다’고 말한다. 때로는 천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든가 이미 죽은 사람과 말했다고도 하고
‘문밖에 누가 있으니까 들어오라고 하라’고 가족들에게 말하기도 한다.
골수염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던 이군은 열일곱 살이었다. 15세 중학교 3학년 때 발
병해 치료를 했지만 폐와 뇌에 전이되어 결국 호스피스에 의뢰되었다.
어느 날 성직자와 함께 호스피스 봉사자가 방문했을 때 이군은 호흡이 곤란한 상태였다.
이군의 어머니는 울고 있었고 이군은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행했던 성직자가 이
군을 안고 기도해주자 잠시 후 이군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저녁 이군은 숨을 거두었다. 연락을 받은 호스피스 관계자가 밤늦게 빈소를 방문
했다. 평소에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보이곤 하던 이군의 어머니가 전혀 울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군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묻자 어머니는 전혀 뜻
밖의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호스피스에서 방문한 다음에 잠을 잘 잤는데 아침부터 이군이 자구 무엇이 보인다며 허
공을 쳐다보면서 웃고 놀라워했다는 것이었다. 이군은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고 호
흡곤란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이군은 허공을 쳐다보면서 “베드로가 보인다. 그 옆에 빛
나는 분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도대체 무엇이 보이니? 엄마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라고 말했다.
나중에 이군이 “우리 엄마는 큰일났다.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가겠다” 고
하면서 엉엉 울더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어머니가 어찌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안보이지
만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 저거 말이니? 나도 이젠 보인다”라고 말하자,
환자는 너무 좋아하면서 자기가 보고 있는 광경을 어머니도 보고 있는 줄 알고 하나하
나 가르키면서 설명하더라고 어머니가 전했다.
그 후 저녁 무렵에 이군이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엄마, 저것 보았지요! 나 먼저 갈테니까
나중에 오세 요" 라고 말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이 현상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죽음이
임박한 임종환자들은 죽기 며칠 전부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보는 일이 일어나
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기 2, 3일 전부터 이런 현상을 경험하지만, 더러는 그보다
훨씬 일찍부터 이런 현상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임사체험자들의 증언
임사 체험을 겪고도 살아남은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다. 임사체험자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전에 종교적 믿음이라든
가 어떤 영적인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다. 임사체험은 한 마디로 임상적으로 죽음
판정받았다가, 얼마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되살아나 그 기간 동안 겪은 경험을 말한다.
임사체험 연구는 서양에서 30여 년 전부터 시작되어 전세계에 수천만 건에 이르는 다양
한 체험사례가 수집되었고 국제임사체험학회까지 결성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1975년 미
국의 레이몬드 무디 교수가 <삶 이후의 삶> (Life After Life)을 간행한 이후 다양한 전문
가가 연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임사체험자의 증언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
체로 다음같이 6가지 내용으로 정리될 수 있다.
임사체험자는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나 자기의 육신을 허공에서 내려다본다. 의식은
분명하고 생생하게 깨어있다. 체험자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육신과 영혼의 분리임을 경험
한다. 아무런 고통도 없이 평온함과 행복감을 살아있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느낀다.
임사체험자는 자신의 육신과 함께 주위 환경을 볼 수 있다.
죽었다는 판정을 받은 임사체험자는 칠흙처럼 어두운 터널같은 곳을 통과하는 듯 캄캄한
어둠 속을 지나 삶과는 다른 현실, 다른 세계를 만난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차원
없는 공간을 떠다니기도 하고 급속도로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흔히 저승이라고 일컫는
세계로 살아있을 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다른 세상이다.
임사체험자는 빛의 존재를 만난다. 체험자마다 빛의 존재를 예수, 붓다, 보살, 마리아 등
다양하게 증언하지만, 체험자의 종교나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
다. 임사체험자는 사랑으로 감싸는 빛의 존재와 함께 있으면서 축복을 가득 느낀다. 빛의
존재와 나누는 대화는 말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의사소통한다.
임사체험자들의 다양한 증언에 공통되는 또 다른 특징은 ‘파노라마처럼 자기 삶을 되돌아
보는 일’로 갑자기 등장한 빛의 존재와 함께 체험자는 자기 삶에서 일생 동안 겪었던 다양한
일들을 영상 이미지를 통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되돌아본다. 자기 삶이 있는 그대로 드러
나는 이런 회상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평가가 저절로 내려진다.
돌연 어떤 장벽, 경계선 같은 것에 도달한다. 몇몇은 먼저 죽은 친척이나 친구와 만나기도 한
다. 임사체험자들은 가족을 돌보기 위해, 때로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삶의 목적을 위해, 때로
는 사명감이나 봉사정신으로 자기 육신과 이 삶에로 되돌아와 복귀한다.
의학적으로 죽었다가 임사체험을 겪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살아난 체험자들은 이전의
삶과는 크게 다른 식으로 삶을 영위한다. 대다수가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임사체험자들이 크
게 바뀐다. 체험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죽음이 끝이 아님을 확신하
게 된다. 또 체험 이전 보다 훨씬 관대해지고 사랑을 베풀고 영혼이나 영성에 대해 큰 관심
을 보이는 등 삶과 죽음을 보는 방식이 이전과는 크게 다르다.
티벳 바르도의 가르침
티벳 사자의서는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이다. 이 책은 죽음 이후의 상황에 대한 안
내서이다. 어떤 사람이 죽어갈 때 또는 죽은 이후에 스승이나 주위 사람이 그를 위해 읽어
주는 책이다. 티베트인들은 죽은 사람의 시신 옆에서 그의 귀에 대고 이 책을 읽어준다.
시신이 없다면 죽은 사람이 쓰던 침대나 의자 옆에서 그의 영혼을 불러, 그 영혼이 옆에서
듣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읽어준다.
티베트인들은 죽어가는 사람 혹은 이미 죽은 사람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티베트 사자의 서>의 원래 제목은 <바르도
퇴돌 첸모> (Bardo Todrol Chenmo) 이다. 그것은 “바르도 상태에서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위대한 해탈을 성취한다“(Great Liberation through Hearing in the bardo)는 뜻이다.
바르도 개념은 티베트인의 생사관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바르도’의 ‘바르’ (Bar) 는
‘사이’를 뜻하고 ‘도’(Do)는 ‘매달린’ ‘던져진’을 뜻한다. 하나의 상황의 완성과 다른 상황의
시작 사이에 걸쳐있는 ‘과도기 ’혹은 ‘틈’을 의미한다. 인간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있는
과정적 존재라는 뜻이다.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4가지 바르도
티베트인들이 일반적으로 죽음과 다시 태어남 사이의 중간 상태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하
기도 하지만, 바르도라는 용어에는 훨씬 깊고 넓은 의미가 담겨있다. 바르도에는 4가지로
나뉘어 말해지고 있다.첫번째 삶, 두 번째 죽어가는 과정과 죽음, 세 번째 죽음 이후, 네 번
째 환생이라는 4가지 바르도가 있다.
바로 지금의 삶, 일상적인 바르도
죽어가는 과정, 고통스러운 바르도
다르마타(Dharmata), 밝게 빛나는 바르도
업에 따라 다시 생성되는 바르도
첫째 ‘바로 지금의 삶이라는 일상적인 바르도‘는 태어난 이후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기간
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지금을 가르킨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르도는
이것 뿐이고 나머지 세가지 바르도는 알지 못한다. 둘째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바르도’는
죽어가는 과정이 시작된 직후부터 ‘내적인 호흡’이 끝날 때가지 지속된다. 이 바르도는 죽
음의 순간에 ‘근원적 광명이라 불리는 마음의 본성이 떠오르면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셋째
‘다르마타라는 밝게 빛나는 바르도’는 마음의 본성이 밝게 빛을 내기 시작하는 죽음 이후의
모든 경험을 포함한다. ‘밝은 빛’은 소리, 색채, 빛깔을 지닌다. 넷째 ‘업에 따라 다시 생성되
는 바르도‘는 우리가 환생하는 순간까지 지속된다.
티베트어의 바르도 개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삶, 그리고 죽음의 범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삶만 알고 있을 뿐 죽어 가는 과정이라든가 죽음 이후에 대해 입을 댈 수 없
다. 그러나 바르도 개념에 따르면 바로 지금 이 삶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 죽음 이후, 다
시 태어나는 바르도까지 포함해 말하고 있다.
네 가지 바르도 개념에 비추어볼 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말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이와 같이 삶과 죽음에 대해 확고한 생사관을 갖춘 티베트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당연히 지
나 가야할 과정을 받아들인다.
죽어 가는 임종과정이 거의 끝날 무렵 임종자의 귀에 대고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어준다.
“그대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의식을 집중하라. 죽음이라 불리는 것이 이제 그대에게 다
가왔다. 그러니 이와 같이 결심해라. ‘아, 지금은 죽음의 때로구나. 나는 이 죽음을 이용해 허
공처럼 많은 생명 가진 모든 것들에게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리라.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리라......
비록 내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사후세계만은 정확하게 지각하리라.
사후세계에서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되리라.’ ”
이를 임종하는 사람의 귀에 가까이 대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반복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임종자의 마음이 단 한 순간이라도 흩어지지 않도록 확실한 인상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것
이다. 생명이 끊어져 영혼이 몸 밖에 나왔을 때 ‘자기가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반문
하게 된다.
죽은 당사자는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족과 친구들을 여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볼 수도 있고 그들의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볼 수도 없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실망하게 된다. 이 때 그의 귀에 대고 다음 내용의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어준다.
‘이제 죽음이라 불리는 것이 그대에게 찾아왔다.
그대는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대만이 유일하게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 세상의 삶에 애착을 갖거나 집착하지 말라.
그대가 마음이 약해져서 이 세상에 남겨둔 것에 아무리 집착할지라도
그대는 이제 여기에 머물 힘을 잃었다.
그대가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는 윤회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헤매는 것 밖에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그러니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마라.
다만, 진리, 진리를 깨달은 자,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을 기억하라.
그대의 마음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는 이 때, ......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지난 사흘 반 동안 그대는 기절상태에 있었다.
기절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대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할 것이다. 그대는 지금 사후세계에 있다.
지금 그대의 눈에 보이는 모습들은 모두 빛의 몸을 하고 있고
천신들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티베트의 바르도 가르침은 우리가 미리 죽음을 준비할 때 일어나는 것과,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을 때 닥치는 것의 차이를 명확하게 제시해준다. 만일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지금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통해, 죽은 그 순간에,
그리고 죽은 이후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바로 지금 이 삶에서 죽음을 받
아들이지 않을 경우 지금의 삶과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삶은 황폐해지고 우리는 삶
을 온전하게, 충분히 살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우리 자신, 바로 그
상태에 갖혀 버리고 만다.
한림대학교 생사학연수소
-발췌출처 :
http://m.blog.daum.net/tea-zen/8728438
□ ≪바르도 퇴돌 첸모(Bardo Thodol Chenmo)≫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 죽
음을 직시하려는 갈망으로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혀지고 사
랑받은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의 원서 명이다.
[바르도 (Bardo)]
바르도는 티벳불교의 종교용어이다. 바르도(Bardo)는 둘(do) 사이(bar)라는 뜻이다.
그것은 낮과 밤의 사이인 황혼녘이며, 이 세계와 저 세계의 틈새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물게 되는 중간상태를 '바르도'라고 부른다.
그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49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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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후 바르도에서 겪는 3차례의 사후 체험 | 나의 이야기
윤성호 2012.10.30 17:17 http://blog.daum.net/yseongho.yahoo/2
자의든 타의든 죽음을 경험한 사람의 의식체는 육체를 상실한 직후 49일 동안 바
르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세 차례의 바르도를 경험하게 된다.
첫번째 단계 : 치카이 바르도Hchikhahi Bardo -죽음 순간의 바르도’
죽음을 당한 영혼이 죽음의 충격에 의한 잠시의 기절상태에서 맞이하는 치카이 바
르도Hchikhahi Bardo가 그 첫 번째다. 일명 ‘죽음 순간의 바르도’.
이때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밝아오는 투명한 빛이 나타나는데 -우주 탄생의 시
원이 빅뱅, 거대한 빛의 폭발로 시작되듯이!- 죽은 이의 영혼은 그 빛을 깨닫지 못하
고 다음 상태의 바로도에 빠져들고 만다.
(오직 명상과 수행으로 깨달은 영혼-또는 의식체-만이 존재의 근원으로 밝아오는 순
수한 빛을 따라 다음 상태의 바르도에 빠져들지 않고 영원한 니르바나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환생하리라.)
두번째 단계 : 초에니 바르도Chosnyid Bardo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
첫 번째 바르도가 끝나고 두 번째 바르도가 시작되는 순간, 기절상태에서 깨어난 사
자의 눈 앞에 온갖 환영들이 나타난다. 그 환영들은 사자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행
한 온갖 행위들과 생각의 까르마(업)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만화경이다.
이 바르도를 일컬어 초에니 바르도Chosnyid Bardo, 곧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
르도’라 한다.
세번째 단계 : 시드파 바르도Sridpahi Bardo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
초에니 바르도에 처한 사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육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
닫고 경악한다. 그리하여 육체를 소유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시달리는 순간,
세 번째 바르도를 향해 폭우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빨려들고 만다. 바로 시드파 바르
도Sridpahi Bardo, 곧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이다
-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zOn&articleno=2&categoryId=1®dt=2012103017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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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를 49일 동안 지내는 이유
장영섭 기자승인 2015.09.24 11:35
49재는 종교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장례문화로 자리했다. 재벌과 유명
연예인들의 죽음은 언제나 화젯거리인데, 이슈의 마지막은 으레 그들의 49재 기사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49재를 통해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 또는 원한
을 털어낸다. 49재를 지내기 전까지는 망자에 대한 왈가왈부를 삼가는 게 또한 예의
다. 이는 비록 그의 육신이 죽었다 해도 49일 동안 영혼은 존속한다는 믿음에서 유래
한다.
49재란 말 그대로 고인(故人)이 된 지 49일이 되는 날에 치르는 의식이다. 이때까지는
정신이 살아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49일간 중유(中有) 혹은 중음(中
陰)이라 불리는 상태로 지내게 된다. 다음 세상에서 또 다른 생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일종의 ‘대기’ 기간이다. 사찰에선 이렇게 반쯤 살아있는 영가(靈駕)들을 위해 7일(1주
일)에 한번씩 7회에 걸쳐 제사를 지내준다. 초재 2재 3재 순으로 번호를 붙이는데, 중간
은 생략하고 49재만 지내도 무방하다. 푸짐하게 차린 음식과 정성어린 예배로, 자식은
못 다한 효도를 뒤늦게 다하며 부모는 살아서 못 먹였다는 아쉬움을 자위한다. 스님들
은 천도(遷度)의 노래를 속삭여주며 살아서의 미련과 회한을 떨어내라고 다독인다.
-발췌출처: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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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四十九齋]
장례 의식의 하나로 고인이 죽은 후 초재부터 1주일(7일)마다 7번씩 지내는 재(齋).
고인이 돌아가신 날을 제1일로 삼아 계산한다.
49일이라는 숫자는 북방불교의 전승에서 나온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일반적으로
칠칠일(49일) 동안 저승에 머무르며 7일째 되는 날마다 심판받다가, 49일에 최종심판을
받고 환생한다하여 심판을 받는 날에 맞추어 49일 동안 7번 재를 지낸다.
이렇게 심판받는 동안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六道), 즉 생물체가 환생하여 태어나는
6 세상 중 어디에도 태어나지 못하고 '중간에 낀' 것처럼 되는데, 이를 중음(中陰)이라
부른다. 흔히들 말하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란 표현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계속 중
음에 머무는 영가'가 된다.
현대에도 49재가 끝난 다음 탈상을 한다. 원래대로라면 49일간 7일째 되는 날마다 한
번씩 재를 올려야 하지만 돈과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간단하게 마지막 49일에 하는
재만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49제라고 많이들 오해를 하는데, 사실은 49"재"(四十九齋)다. 제사 제(祭)와 재계할 재(齋)가
표기는 달라도 입말로는 발음이 똑같고 구체적인 의례도 제사와 비슷하여 불자가 아니
거나, 진짜 유교 집안이 아닌 대부분 사람들은 많이 헷갈려 한다. '齋'자에는 '불공을 드린
다'란 뜻도 있기 때문에 49재가 맞다.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몇몇은 49제라는 제사가 실존하는 줄 알고
절에서 하지도 않고 산소나 집에서 하기도 하며, 매년 하기도 한다. 심지어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 중에서도 49일째 되는 날에 맞추어 미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을 정도. 사람들이
하도 49재를 49제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이게 불교의식인지도 모르고 유교식 제사라고
생각하여 만들어진 근거 없는 의례이다. 애초에 49재는 이름만 비슷할 뿐, 제사가 아니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49재'
불교의 사십구재
불경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 생유(生有)
② 사유(死有) ③ 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④ 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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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식 마지막 장례절차 49재 의미]
2016.10.29 17:10
1. 49재의 의미
“탄생에 있어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조상들은 죽음이 영
혼과의 이별이 아닌 육신의 소멸일 뿐이라고 믿었는데요.
때문에 고인이 사망한 기일에는 영혼과의 만남을 뜻하는 제사가 거행되어 왔습니다.
제사는 시기와 가풍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고인의 영혼과의 이별 의식
49재에 대해 알려 드립니다.
불교의 장례문화에선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을 받기까지 49일이 걸린다고 하는데요.
이 기간 동안 망자가 좋은 생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생에 있는 사람들이 7일에
한번씩 7번의 재를 지낸다고 하여, 이를 칠칠재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49재는 칠칠재 중에서도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에 치르는 마지막 재(齋)
입니다.
2.49재의 절차
49재는 불교의식 이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는 지낼 수 없고 사찰에서 치러지게 되는데요.
사찰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약 3시간 내외 정도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49재의 절차는 다음
과 같습니다.
3.49재 준비방법
칠칠재를 제대로 지내려면 첫재(齋)인 초칠재(初七齋)부터 막재(齋)인 49재(四十九齋)까지
7일마다 다른 목적과 방법으로 7번의 재를 올려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여러 번
재를 올리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요즘엔 형편에 따라 칠칠재의 가장 마지막 재인
49재만 지내는 경우가 많아 졌습니다.
49재는 불교 의식이기 때문에 혼백이나 위패를 절에 봉안하지 않았다면 49재를 지낼 필요
가 없습니다. 이는 재 의식을 지낼 때 법력이 있는 스님이나 법사의 주관 하에 행해야만
이생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가 고인에게 전달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4. 49재의 상차림
49재 제사상차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일반 제사상차림처럼 준비해도 무방한데요..
49재는 유교식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제사상에 큰 대접에 뜬 물 한 그릇과 작은 화분 하나,
밥, 국 정도만 대접해도 크게 상관은 없답니다.
49재 제사상에 고인에 대한 마음과 정성을 담고 싶다면, 고인이 평소 좋아하시던 차나 술
한가지도 함께 올리고, 그 외 삼색나물(도라지, 시금치, 숙주나물), 대추, 밤, 곶감, 배, 사과,
귤, 산적 정도를 추가로 준비하면 좋습니다
5. 고인을 보내드리는 마지막 의식
49재의 마지막 절차인 탈상으로 재를 마무리 짓기도 하나, 경우에 따라 고인에게 영가복
(고인이 입을 한복과 신발)을 태워 보내드리는 것으로 재를 마치기도 합니다. 영가복은
굳이 비싸고 좋은 것 보다는 고인을 생각하여 성심 성의껏 준비하는 마음이면 충분한데요.
고인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를 적은 편지나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 있다면 영가복을 태울
때 함께 보내도 좋습니다.
49재는 집에서 올리는 제사가 아닌 불교 장례의식이기 때문에 다소 번거롭고 어렵다고 느
낄 수 있습니다..
이마저도 간소화 되어 칠칠재가 아닌 49재만 올리거나 집안에 따라 생략하는 경우도 많습
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간소화된 재의식이 아닌 고인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영혼을 위로
하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불교식 사찰 운영 납골봉안 추모공원
의왕시 오봉정사 경기도 광주시 미타정사
http://prime01068384445.tistory.com/82
-발췌출처: http://fttsl.tistory.com/99 [세상이야기]
-------------------[부록 : 시간날 때 보세요]
[사후세계 死後世界 Afterlife]
'죽은 사람들이 간다'고 여겨지는 곳.
미신적 시각
과거부터 많은 종교에서 사후세계를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음양
론적으로는 죽은 뒤의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들어가 3년간 머무른다고 믿었으며
특히 조상신은 후손을 수호한다고 믿었다(3년상의 근거). 죽은 귀신은 '죽은 자가 성불
하여 사후세계로 간다'고 믿으며, 성불하지 않은 영혼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혹
은 이러한 시기 영혼은 저승으로 들어가 심판받으며 이에 따라 윤회하거나 천국, 지옥
등으로 배정받기도 한다. 이는 불교의 영향이 크다.
사후세계의 존재는 죽음을 맞이해도 거기서 끝이 아니라 영혼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게 된다. 때문에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크게 달래 주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죽음으로써 본인의 의식이 아예 끊
어지며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공포를 안고 있기에 '내가 지금 이 모
든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 이 의식이 아예 사라진다는 것은 대체 어떠한 것인가?'에 대
한 철학적, 혹은 과학적 물음들이 많았고, 어떠한 것도 사후세계만큼 명확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안심을 주는 해답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사후세계의 개념이 계속해
서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이유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연유로 아름답게 꾸며낸 사후세계를 통해 종교를 크게 성횡시키는데도 일
조했고, 더불어 전생에서 지은 죄는 사후세계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믿어 사람들에게 더
욱 도덕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또한 명예롭게 싸우다 죽은 전사는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여겼기에 전장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싸울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도 불러내게 됐는데 임사체험 경험담과 천국행 티켓
등 종교와 관련된 각종 사기행각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사후세계에서 보상이 약속
되어 있다고 달래어 하찮은 명예를 위해 죽음을 강요받는 피해자들 또한 발생하였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사후세계를 너무나 동경하여 자살을 행
하거나 다른 이에게 추천하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나게 된다.
좋은일 했으면 편하게 놀고, 나쁜일 했으면 고통을 받는 세계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종
종 차별이 없고 평등한 이상향으로 그려지기도 하며, 주로 선악 구분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샤머니즘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하던 일 그대로 사후세계에서도 일한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지역별 인식
동아시아에서는 '가는 길에 꽃밭이 있다' 고도 한다. 그리고 저 세상 갈 뻔하다가 의식을
찾은 사람들의 말(혹은 이를 희화화한 개그)에서는 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 건너편 꽃밭에서 건너오지 말라고 해서 돌아왔다고들 한다. 이외에도 이미지가 다양한
편. 안개 속에서 행군(?)한다거나, 왠지 산을 걷고 있다거나...
서양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 시절부터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뚜렷한 편이었으며 기독
교 또한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명확했다. 다만 기독교의 경우 사후세계라기보다 말세에
부활하는 것이라서 신학자나 공부를 한 신자들은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경우도 많다.
이슬람교권에서도 교리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착해도 천국은 못 간다고. (천국에는 알라
만이 계시다고 한다.) 대신 천국보다 조금 격이 떨어지지만 낙원이라 할 만한 곳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이외에 힌두교 또한 불교와 비슷한 윤회 사상을 갖고 있다.
동물도 사후세계에 갈 수 있는가?
동물도 사후세계에 갈 수 있는지는 각 종교마다 입장이 다르다.
불교의 경우는 모든 지적 생명체에게 영혼이 있다고 보며 죽을 경우 사후세계가 아닌 인
간이든 동물이든 죽으면 환생한다고 믿고 있고, 인간이 동물로 환생할 수도, 동물이 인간
으로 환생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또한 동물이 된 영혼을 불교에서는 축생계라 한다. 여기
서 축생계란 지옥에 비하면 가벼운 형벌을 의미해서 인간보다 못한 동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대신 인간보다 형벌기간이 훨씬 짧다. 단, 거북같은 건 예외다.
기독교의 경우는 성경에는 동물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가 없고, 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영을 주었기 때문에 동물은 영의 세계에 갈 수 없다는 입장
이다. 가톨릭 교리문답은 동물들이 사후에 천국에 갈 가능성을 별로 열어두지 않고 있는
데 신의 형상을 본떠 창조된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가톨릭 교리의
기조이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사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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