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사건] 이혼고백서 그리고 순결 나혜석
<이혼고백서>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배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린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이
보통 인정 아닙니까?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적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곤 합니
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리오.
조선 남성들은 보시오.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 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머니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
일 당신네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하게 넘겼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
지언정 언젠가 먼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리라.
그러니 소녀들아, 깨어나 내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라.
-나혜석
****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18일 ~ 1948년 1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
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 나혜석은 1930년 결혼 10년만에 불륜을 이유로 이혼당했다.
후일 그녀는 이혼과정을 소상히 밝힌 '이혼고백장'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하면서
재산분할도 공개 요구했다. 이글에서 그녀는 조선의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강하게
비판했다.
-출처: 위키백과
[나혜석 그림들]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보충자료]
신여성 나혜석은 왜 행려병자로 죽었나
[그때그사람]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68주기
아시아경제 | 김철현 입력 16.12.10. 07:30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경기도 수원시 인계동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다. 우리나
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이 거리는 다양한 음식점
과 백화점, 영화관 등이 있는 번화가다.
대표적인 신여성 나혜석의 삶도 시작은 이 거리의 불빛들만큼 화려했다. 하지만 여
성을 억압하는 시대에 온몸으로 부딪혔던 그는 행려병자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야
했다.
10일은 화가이자 문인, 독립운동가였던 나혜석의 68주기다. 화가였고, 문인이었던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록은 "본적, 주소 미상. 연령 53세. 신장 4척 5촌. 체격
보통. 기타 특징 없음. 헌옷에 소지품 없음. 사인은 병사. 사망 장소 시립 자제원"이
었다. 나혜석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열었던 1921년 개인전에는 5000여명이 몰렸
고 20여점이 고가에 팔렸다고 한다. 세상의 주목을 받던 화가가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혜석은 지금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 수원에서 1896년 태어났다.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면서부터다. 이후 일본으로 유
학을 가 서양화를 배웠고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신문에 날 정도로
화제였다. 나혜석이 결혼하면서 남편에게 요구했던 조건은 세 가지였다고 한다.
지금처럼 평생 사랑해달라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시어머니와 따로 살겠다는 것. 이때가 192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조건은 파격적
인 것이었다.
나혜석의 인생은 남편과 떠난 세계여행을 통해 바뀌기 시작한다. 여성으로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지만 여행 중 만난 최린과의 불륜 때문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그의
이혼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데 '이혼고백서' 때문이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
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나혜석의 이혼고백서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고발
하면서 스스로 독립된 주체로 살겠다는 선언이었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나혜석은 이를 발표하고 불륜 상대인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
했다. 하지만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혼고백서와 정조 유린
손해배상청구를 당시 조선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혜석은 고립됐고 경제적으로 어
려운 상태에서 절과 양로원 등을 전전하며 그림을 그리다 결국 무연고자로 죽음을
맞게 됐다.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고 엘리트 신여성이었기에 혜택 받은 화려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조선 사회의 봉건적 인습에서 비롯된 남녀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여성운동의 선구자였기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이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에 희생됐다고 했다. 나혜석을 행려병자로 죽게 한 부조리한 관습과 제
도들은 68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개선됐을까. 세계경제포럼(WEF)의 최근 발표에 따
르면 한국의 양성평등 수준은 144개국 중 116위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출처:
http://media.daum.net/m/channel/view/media/2016121007303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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