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명상] 바니타스 허무 한스홀바인 작품들 Vitas - Opera N2
[음악동영상]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 서양에서 최초로 초상화를 그린 화가 ]
00 한스 홀바인, 제인 시모어, 1536년,
나무판에 유채, 65.4 x 40.7 cm, 빈 미술사 박물관
16세기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이 그린 이 그림 속의 여인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잉글랜드 왕비
제인 시모어입니다. 하긴 화려한 옷차림과 놀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 솜씨를 미루어 보아도
그림 속의 인물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란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의 첫 왕비 캐서린을 수행한 궁녀로 영국 왕실에 들어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 밑에서도 그 일을 계속 하였습니다. 앤 불린은 <천일의 앤>이란 영화가 만들어질
만큼 그야말로 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앤 왕비가 헨리 8세의 눈 밖에 나 간통하였다는 억울한 누명
을 쓰고 죽음을 당하자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왕비
가 된 다음해에 헨리 8세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인 에드워드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출산의 후유
증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면서 낳은 아들 에드워드는 아버지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열 살 때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으나 그만 열여섯 살 때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홀바인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1536년에 발탁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그의 첫 궁정 초상화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자체는 정교한 의상 묘사와 단
정한 붓놀림으로 매우 깔끔한 느낌을 줍니다.
제인 시모어의 생김새는 시녀에서 왕비로 등극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리 기품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사리가 분명하며 신중한 성격을 지닌 여인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아무튼, 헨리 8세
는 이런 그녀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에게 간통 누명을
씌워 처형까지 하였으니까요. 살아생전 헨리 8세는 그의 여섯 왕비 가운데 제인 시모어를 가장 사랑
하여, 그녀가 묻힌 윈저 성의 성 조지 교회에 자신의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
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가운데 유일하게 헨리 8세와 함께 묻힌 아내가 되었습니다.
-출처: 빛과 영혼의 그림자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6Yp9&fldid=K0hA&datanum=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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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대사들>
바니타스의 메시지를 수수께끼 같은 화법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다. 영국 내셔널갤러리에 소장된
16세기 독일 초상화의 대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프랑스 대사들>(그림2)이 대표적이다.
그림2. 한스 홀바인 <프랑스 대사들> 1533년, 나무패널에 유화, 207×209cm,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
<프랑스 대사들>은 영국의 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와 국내외 정치, 종교적 정세가 얽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대 지성을 대표하는 외교관 장 드 댕트빌(당시 29세)과 성자 조르주 드셀브(당시
25세)가 영국에 파견 와서 궁정화가였던 홀바인에게 주문해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당시 과학과 종교를 상징하는 각종 물체가 화면 중앙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천구의, 사분의, 다면해시계, 트르카툼 등 천문학이나 과학을 상징하는 사물과 류트, 피리, 성가
집, 삼각자 등 종교적 사물을 화면의 상하에 배치했다. 이같은 구성은 카톨릭과 신교도와의 갈등,
신대륙 발견과 과학적 힘으로 무너지는 불확실한 지식 세계의 위기를 암시한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를 체감한 작가는 다가올 세상의 갈등과 혼돈을 구원하고 싶었을까. 왼쪽 위 구
석에 답답하게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살짝 내민 은제 십자가가 그림에 표현된 어떤 물체보다 절실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 그림에서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헨리 8세의 이혼문제도, 종교와 과학의 갈등도
아니다. 화면 정면에 비정상적 원근법과 기이한 형태로 길게 늘어진 이미지야말로 이 작품의 잠재적
메시지가 담긴 부분이다. 모호한 이 형상의 실체는 해골이다. 특정한 위치에서 볼 때만 그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 왜상(歪像))기법으로 죽음의 기호인 해골을 그렸다.
그렇다면 작가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 소재를 왜 수수께끼 같은 기법으로 표현했을까? 그것도 인
간의 두개골을…. 이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댕트빌의 신조를 반영한
것이지만, 해골을 변형 투영으로 그린 것은 죽음이 갖는 삶의 경계에 관한 복합적 의미를 성찰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즉, 해골을 통한 가시적 의미(죽음)와 심층적 의미(삶)를 되돌아보게 하
는 철학을 담고자 한 것이다.
-발췌출처:
http://www.junggi.co.kr/article/articleView.html?no=7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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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그리스도의 주검
Hans Holbein the Yonger (1497/8~1543),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1521, Oil on wood, 30.5 x 200 cm, Offentliche Kunstsammlung, Basel
바젤 미술관은 세계 어떤 미술관보다도 홀바인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무덤 속
의 그리스도 주검>이란 그림이 특히 유명한데, 이 그림은 당시 신성시되었던 그리스도의 육체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는데, 이
토록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린 그리스도의 주검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에는 흰 천이 깔린 바닥 위에 시신이 길게 누워 있습니다.
바짝 마르고 굳어버린 몸뚱이와 검게 변해버린 얼굴과 손발, 그리고 옆구리에 창에 찔린 상처와 손등에
못에 박힌 흔적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힘없이 열린 입술과 이미 초점을 잃고 풀려버린 눈동자를 한
이 주검은 그 참혹한 모습으로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여기에는 신의 아들로서
의 위엄이나 권위를 어느 한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의 주검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이런 모습은 이전의 다른 화가들이 묘사한 그리스도의 주검과는 너무나도 대조를 이룹니다.
- 세부
이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검게 변한 죽은 그리스도의 얼굴은 옆으로 조금 기울었고, 빳빳하고
메마른 머리카락은 하얀 수의가 덮여 있은 관의 바닥 위로 아무렇게 흩어져 있으며, 턱수염은 관의 덮
개 쪽을 향해 뻗쳐 있고, 검게 변한 발은 돌로 만든 관의 벽 가까이에 놓여 있습니다. 오른손은 구겨진
시트의 가장자리에 힘없이 놓여 있고, 허리에 두른 천을 제외하고는 알몸인 채로 있습니다. 뼈와, 그리
고 힘줄이 드러난 근육들이 힘없이 내려앉은 피부를 통해 드러나 보입니다.
이처럼 사실적으로 그린 이 그림을 보면서 화가가 그린 그림이란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것은 마치 미술관 벽에 안치된 시체 바로 그 자체와도 같이 보일 정도입니다. 물론 이런 느낌이 화가에
의해 만들어진 착시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처럼 이 그림은 실제로 시체를 보았을 때와 같
은 느낌이 들게 합니다. 그러니 이 그림을 그린 홀바인의 그림 솜씨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림의 형태도 관의 모양과 같이 기다란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있어 큰 효과
가 있습니다. 폐쇄공포감마저 자아내는 이런 형태의 그림에서 홀베인은 창에 찔린 상처에 있는 검은 피딱
지나 갈비뼈 부분의 돌출, 그리고 작고 초점을 잃은 눈 등 주검 자체를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이 주검에서 보편적으로 보아왔던 그리스도의 죽음을 연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일반적인 주검의 모습
일 뿐입니다. 홀바인은 마치 병원 영안실에 보관된 사고로 죽은 어느 희생자의 모습처럼 그리스도의 주검
을 묘사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현한 예술가는 없었습니다.
-출처:
http://egloos.zum.com/hanulh/v/452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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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홀바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조상인 기자2017-04-07 17:55:36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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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藝)-한스 홀바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다소곳 드러낸 얼굴·손...단아한 공주의 기품이 서리다
영국 왕 헨리8세의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이 1538년 그린 덴마크의 공주 크리스티나의 초상화. 남편을
여읜 상복차림의 크리스티나는 단아한 표정으로 왕의 청혼을 이끌어냈지만 거절했다. 179.1×82.6cm
크기의 그림으로 영국 국립 내셔널갤러리에 걸려있다. /사진제공=내셔널갤러리
사람을 고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선택해야 할
사람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라면 더욱 고심하게 되고, 그것이 왕의 반려자라면 크나큰 부담이 될 일이
다. 한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의 아내이자 민중들이 우러러보는 왕비이며 주변국을 향해 존재
감을 드러내는 인물이니 말이다.
잘 알려졌듯 영국 왕 헨리 8세(1491~1547)는 6번이나 결혼했다. 새 결혼을 위해 ‘이혼’ 절차가 필요했
고 그로 인해 헨리 8세는 이미 500년 앞서 영국을 유럽에서 떼어내는 제1차 브렉시트(Brexit)의 주인공
이 됐다. 형에 이어 왕세자 자리뿐 아니라 형수인 캐서린까지 왕비로 넘겨받은 그는 여러 정부(情婦)를
두고 있었다. 내연녀 메리 불린의 동생이자 왕비의 궁녀였던 앤 불린은 과감하게 왕에게 정식결혼을 요
구했다. 로마 교황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왕은 1527년 유럽 결속력의 아교 격인 로마 가톨릭에서
‘탈퇴’했고 수장령을 내려 영국 성공회를 세웠다. 민족주의적 종교개혁을 감행하며 얻은 젊은 새 아내는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뒤 거듭 유산하며 부부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앤 불린은 불륜과 근친상간, 마녀
라는 누명을 쓰고 런던탑에서 참수당했다. 왕은 곧장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고 애타게
기다리던 왕자 에드워드 6세를 얻지만 산후병으로 아내를 잃는다.
이혼, 사형, 사별 후 이제 네 번째 아내를 구해야 하는 왕에게 인물 표현이 특출난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
(1497~1543)은 자신을 대신해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붓감을 만나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려다 줄
매파같은 존재였다. 홀바인이 1538년에 그린 초상화 ‘덴마크의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탄생했다. 여인
은 목 끝까지 올라온 새까만 드레스를 입었다. 온몸을 뒤덮은 풍성한 검정 코트는 안쪽에 덧댄 방한용 모
피 외에 장식하나 없다. 머리에 딱 붙은 검은 모자는 그녀가 금발인지 흑발인지조차 알 수 없게 가렸다.
상복(喪服) 차림이다. 오직 얼굴과 손만 드러났을 뿐이다.
꾸미지 않아도 보석은 반짝이기 마련이다. 단조로운 검은 옷이지만 소재 자체가 갖는 광택이 우아하게 빛
나듯 말이다. 수줍게 살짝 몸을 돌렸지만 당당한 눈은 정면을 응시한다. 그녀의 오른쪽 눈은 우리를 보고
있지만 왼쪽 눈은 아주 살짝 다른 곳을, 좀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 그녀가 뜻밖에 닥친 이 별난 상황
에 대해 약간의 흥미와 호기심을 느끼는 듯하다. 유일한 장신구인 왼손 넷째 손가락의 알 작은 루비반지는
그녀의 자존심이 아닐까. 이 그림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손이다. 끼고 있던 장갑을 두 손
에 움켜쥔 모양새가 다소곳한 듯하지만 어느 것 하나 같은 곳을 가리키지 않는 그녀의 손가락들은 이 여인
이 얼마나 호기심 많고 적극적이며 똑똑한지를 알려준다. 황급히 장갑을 벗고 그것을 채 내려놓을 틈 없이
숨기듯 손에 쥐는 그 모습이 화가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인간적, 여성적 매력을 탐
색하고픈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고 보니 화장이라기보다는 혈색에 가까운 꼭 다문 입술에서 생명력이 느껴진다.
덴마크의 공주이자 스페인 왕 카를5세의 여동생인 크리스티나(1522~1590)는 11살이던 1533년 밀라노의 공
작과 정략결혼했지만 2년 만에 남편을 잃은, 젊다 못해 어린 미망인이었다. 홀바인이 그녀를 찾아간 것이
1538년이었으니 갓 열여섯 살에 그려진 인물화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성숙했고 재기발랄함을
잠시 숨길 줄 아는 지혜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을 본 영국 왕은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단칼에 거절
당한다. 당대 유럽 최고의 남자였던 헨리8세를 마다한 그녀가 남편감의 여성편력과 여러 풍파를 내다본 듯
하다.
-출처:서울경제
http://www.sedaily.com/News/NewsView/NewsPrint?Nid=1OEJZIDY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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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홀바인(Hans Holbein ; 1497년 ~ 1543년)]
한스 홀바인은 독일의 화가이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으며,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큰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특히, 초상화에 능하여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동등하게 그려진 종교적인
기풍 등으로 인해 독일 최대의 화가로 일컫는다. 작품으로는 <헨리 8세>, <모레테 상>, <에라스무스>, <죽음
의 무도>, <대사들> 등이 있다.
생애[편집]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화가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동명인 부친도 당시의 중요한
화가였고 아들인 홀바인도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배웠으며, 1515년 당시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바젤에 가
서 그곳에서 화가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곳에서 1526년까지 머문 후에 약 2년간을 런던에 체재하였다가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1526∼1528). 이 제1차 런던 체재중에 이미 초상화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고 있던 그는 재차
런던 행차를 결의, 일단 고향인 아우크스부르크에 갔다가 1532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안주하여 1543년
에 사망하였다. 그 동안의 1536년에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에 임명된 적도 있다.
평가[편집]
홀바인은 유럽에 있어서 고금을 통하여 최대의 초상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으며, 뒤러와 크라나흐가 대
표하는 독일 르네상스의 빛나는 초상화 예술의 전통을 그 정점에까지 끌어 올린 공적은 매우 크다. 모델에 대한
냉정하고 예리한 관찰과 정확하고 극명을 다한 세부 묘사, 명쾌한 화면 구성, 나아가서 작품을 단순한 초상화
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격에 대한 투철한 이해력 등을 그의 특색으로 하는 홀바인의 예술은, 가령 <로트르담
의 에라스무스>(1523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와 <게오르크 초상>(1532년, 베를린 다름미술관)에 그 진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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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타스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바니타스(Vanitas)는 16-17세기의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정물화에 특히 관련있는 상징과 관련된 예술
작품의 한 종류로, 그 이외의 장소들과 다른 시기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바니티"를 뜻하
고 대략적으로 해석하면 세속적인 삶과 모든 세속적인 추구, 물질의 무의미함과 일치한다. 성경의 전도서
1:2;12:8에서 이 단어와 함께 자주 인용된다.[1] 불가타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에서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라는 운문으로 번역했다. 그 운문은 킹 제임스 성경에서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번역됐다. Utterly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less는 새 국제판 성
경의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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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아트살롱]책과 해골, 헛되니 어쩌라구!
유경희 | 미술평론가 2013.09.09 21:50:36
피테르 클레즈, 바니타스 정물화, 1630년
책 그림은 누구나 다 좋아한다. 그래서 화가들도 즐겨 그린다. 미술에선 이런 걸 소재주의라고 부른다. 호감
살 만한 소재로 가볍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말이다. 그런데 책 위에 해골이 놓여 있다면 사람
들이 좋아할까? 우리라면 거부했을 법한 이런 그림을 네덜란드인은 은근히 즐겼던 것 같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취향을 담은 네덜란드 정물화를 일컬어 바니타스(vanitas·허무, 허영, 영어는 vanity)화
라고 한다. 사실 모든 정물화는 바니타스를 의미한다. 특별히 바니타스 정물화라고 명명할 때는 해골, 책, 골
동품 등을 통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보다 직설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는 경우이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30년전쟁’ 이후 1650~1660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그려진다. 30년전쟁(1618~1648)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 가톨릭과 연합해 반종교개혁을 주창하며 스페인 지배하에 있던 네덜란드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이기고, 오란녀 왕가를 중심으로 한 신교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해골(죽음과 부패의 상징), 시계(얼마 남지 않은 시간, 절제의 상징), 꺼진 등잔과 촛불
(시간의 필연적 경과, 죽음의 임박), 책(지식의 무용함) 등이 단골고객으로 묘사된다. 때로 담배와 부싯돌이나
담배쌈지 같은 모티브들이 더해진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보편적인 모티브는 단연코 책과 해골이다.
중세 때 세계는 읽을 수 있는 책처럼 생각됐다. 또한 세계는 신의 의지가 실현되는 무대와도 같았다. 뿐만 아
니라 책은 인류의 경험과 지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간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골
아래 놓인 낡은 책은 죽음 앞에서는 지식과 지혜도 결코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사실은 사람
들을 겁주고 위협하려고 ‘메멘토 모리’를 설파한 것이 아니다. 바로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살라고, 이
순간을 즐기라고 일갈하는 거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9092150365&code=990100#csidx3dd79a60d4474d48ac334361f9a60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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