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13.
[예화] 견딜 수 없는 가벼움
[예화] 견딜 수 없는 가벼움
사람이 한 순간 아주 간단하게,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의 작동권에
휘말려 소멸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을 증거하는 현
상 같아 보인다.
자연을 다스리고 우연을 통제하기 위한 문명의 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
간의 목숨이 여전히 가볍게 위협당할 수 있다면 문명과 사회와 질서와 제
도들은 다 무엇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현대인을 미치게 하는 것은 문명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여전히 불안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반대,
곧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아니 바로 그 문명의 질 때문에, 삶은 더 많은
위협 앞에 노출된다는 이상한 역설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극작가 새뮤얼 베케트는 어느날 파리 노상에서 낯선
청년의 칼에 찔려 병원으로 실려간다. 입원 기간 내내 그를 궁금하게 한 것
은 그 낯선 사내가 왜 자기를 찔렀을까라는 의문이었다. 정신이상자였을까?
그러나 경찰에 붙잡혀 온 그 사내는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이 멀쩡한 사내
는 "왜 나를 찔렀소?"라는 베케트의 질문에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한다.
"나를 미치게 한 것은 바로 그 대답이었다"라고 베케트는 나중에 술회한다.
"차라리 무슨 이유를 댔더라면, 그 이유가 아무리 황당한 것이라 해도 나는
오히려 안심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최소한 `이유'를 가진 것이니까. 그
런데 모르겠다니, 그 무슨 어이없는 대답인가. "
베케트의 이 경험은 존재의 `어이없음'이라는 그의 극작 주제와 기막히게
어울리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게 한 극작가의 생애에 발생한 예외적 사건
이 아니라는 사실만 빼고는.
문명이 삶의 질을 높인다는 믿음으로 굳게 무장한 이 시대에 어째서 어이없
는 사건들이 무더기로 터져나오는가라는 문제는 현대인의 악몽임과 동시에
당대 `문화론'을 쓰는 사람이라면 맨 먼저 다루어야 할 화두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존재의 존재론적 가벼움이나 무거움이 아니라 이 문명
이 정의하는 삶의 질 속에서 느끼는 존재의 어이없음이다. 그러나 어이없는
사건들은 이유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발생한다.
돈지갑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게 자체는 잠자리 날개처럼 나날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이다. 이 가벼움을 견딜 수 없어 어이없는
사건들이 터지는 것은 아닌가? 견딜 수 없는 가벼움 때문에 견딜 수없는 무
거움이 우리를 짓누른 것은 아닌가, 어이없게도?
우리는 이미 해답의 상당 부분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우리는 어이 없이
그 앎을 은폐하는 적극적 무지를 지향하고 있다.
-발췌출처:
http://cyw.pe.kr/xe/index.php?mid=a39&page=6&document_srl=67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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