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8.

[명시음악] 기형도 시 모음 입 속의 검은 입 Twist in my sobriety




[명시음악] 기형도 시 모음 입 속의 검은 입  Twist in my sobriety







[음악동영상  Twist in my sobriety - Tanita Tikaram ]









Twist In My Sobriety

- Tanita Tikaram -



Ancient Heart (1988)











All God's children need travelling shoes

Drive your problems from here

All good people read good books

Now your conscience is clear

I hear you talk, girl

Now your conscience is clear



In the morning when I wipe my brow

Wipe the miles away

I like to think I can be so willed

And never do what you say

I'll never hear you

And never do what you say



Look my eyes are just holograms

Look your love has drawn red

from my hands, from my hands

You know you'll never be

more than twist in my sobriety



We just poked a little empty pie

for the fun the people had at night

Late at night don't need hostility

The timid smile and pause to free



I don't care about

their different thoughts

Different thoughts are good for me

Up in arms and chaste and whole

All God's children took their toll



Look my eyes are just holograms

Look your love has drawn red

from my hands, from my hands

You know you'll never be

more than twist in my sobriety



Cup of tea, take time to think, yeah

Time to risk a life, a life, a life

Sweet and handsome

Soft and porky

You pig out till you've seen the light

Pig out till you've seen the light



Half the people read the papers

Read them good and well

Pretty people, nervous people

People have got to sell

News you have to sell



Look my eyes are just holograms

Look your love has drawn red

from my hands, from my hands

You know you'll never be

more than twist in my sobriety (2x)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근심을 떠나 보낼 여행 신발이 필요해

좋은 사람들은 좋은 책을 읽고

순결한 양심을 같게 되지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어

이제 순결한 양심을 갖게 되었다고



아침에 눈썹을 밀어 버리면

아주 깨끗이 밀어 버리면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절대 그대로 하지 않을거야

시키는대로 하지 않을 거야



봐, 내 눈은 홀로그램 같고

당신의 사랑은 내 손에 의해

붉게 물들었지만

얽히고 설켜 버린 나의 온전함보다는

더 심하지 않을거야



우리는 그저 한밤에 즐기는 장난처럼

텅 빈 파이를 찔렀지

늦은밤, 적대감이나 소심한 웃음

머뭇거림은 필요치 않아



생각이 다르다 해도

난 상관 없어

사고의 차이는 내게 도움이 되거든

정숙하고 온전하게 품에 안겨

신의 자녀들은 누구나 대가를 치르지



봐, 내 눈은 홀로그램 같고

당신의 사랑은 내 손에 의해

붉게 물들었지만

얽히고 설켜 버린 나의 온전함보다는

더 심하지 않을거야



차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생각해 봐

인생의 모험을 해 볼 때가 됐어

달콤하고 멋지고

부드럽고 통통하고

깨닫기 전까진 무턱대고 먹어대지

깨닫기 전까진 말야



사람들 중 반은 신문을 읽어

그것도 아주 꼼꼼히 말이야

잘생긴 사람들, 긴장한 사람들

사람들은 팔아야 해

뉴스를 팔아야 해



봐, 내 눈은 홀로그램 같고

당신의 사랑은 내 손에 의해

붉게 물들었지만

얽히고 설켜 버린 나의 온전함보다는

더 심하지 않을거야 (2x)













1969년 피지계의 아버지와 말레이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Tanita Tikaram이 1988년

발표한 데뷔작에 수록된 곡입니다. 당시 나이가 겨우 19세에 불과했던 그녀는 이 데뷔 앨범으로

영국 차트 10위권에 진입했고, 각 언론으로부터 '천재 싱어송라이터' '영국의 미래를 대표할

뮤지션'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죠. 이 곡은 Good Tradition과 함께 앨범에서 싱글로 발표된 곡

입니다.



 twist in my sobriety

sobriety는 '술에 취하지 않은, 침착한, 냉정한' 이란 뜻으로 경찰이 실시하는 음주운전 테스트를

 sobriety test라고 하죠. twist는 배배 꼰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나의 sobriety의 twist'라는 건

 온전한 정신을 찾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과 고민에 괴로워 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원문출처:

http://popnlyric.com/home/lyrics/_t/twistinmysobriet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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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입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시 대학 시절 중에서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위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은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은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추억에 대한 경멸

  -시 나쁘게 말하다 중에서














  입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눈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아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그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빈 집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 밤 눈 中.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 입속의 검은 잎 - 詩作 메모 中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 노인들 中.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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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



                                                          김 현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p.107)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환각처럼 읽은 짧은 일단 기사는, 「제망매가」의  슬픈 어조와는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럴 수가 있나, 아니, 이건 거짓이거나 환각이라는 게 내  첫 반응이었다. 나는 그

시인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공적이었지만,

나는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좋은 그의 내부에 공격적인  허무감, 허무적 공격성이

 숨겨져 있음을 그의 시를  통해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죽었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이지만, 머릿속에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

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한 힘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서워서, 그것이 겁나서, 사람들은 그를 영구히

기억해줄  방도를 찾는다.



제일 쉬운 방도는, 그를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줄 사람을 만들어놓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기형도에게는 아이들이 없다. 그는  혼자 죽었다.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

들이 살아 있을 때, 그가 완전한 사라짐 속에 잠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어쩌면, 그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완전히 사라지면, 모든 역사적

 소추에서 자유로울 것이고, 그는 우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모든 글들을,  카프카가 바란 것처럼, 다 태워  없애야

한다. 그의 글뿐만 아니라, 그 글들이 실린 모든 지면을 없애야 한다. 그것은 바랄 수

있으나,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를 살리는 것이 낫다. 그의 시들을

 접근이 쉬운 곳에 모아놓고, 그래서  그것을 읽고 그를 기억하게 한다면, 그의 육체는

사라졌어도, 그는 죽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빨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의 시들을 모아, 그의 시들의  방향으로 불을 지핀다. 향이 타는 냄새가 난다.

죽은 자를 진혼하는  향내 속에서 새로운 그의 육체가 나타난다. 나는 샤먼이다……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는, 갖고 있으려 하는 한 사람의 문학비평가이다.





                               *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 내적  상처를 반성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러나, 자기의 감정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기형도의 표현을 빌면, "추상이나 힘겨운 감사의 망토"

(p.105)를 벗지  못한다. 그것은 보기에 흉하다. 그것은 성숙하지 못한 짓이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상처는 어떤 것일까? 유년/소년 시절의 그의 상처는 가난이며, 젊은 날의 그의

 상처는 이별이다. 「위험한 가계 1969」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는, 그의 내적 개인적

상처를 서정적으로, 다시 말해 증오의 감정 없는 추억의 어조로 되살리고 있다.



그 시에  의하면 "열 살 때" 아버지가 풍병[중풍?]으로 쓰러진다. 아마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듯,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별다른 재산이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쓰러지자, 어머니는 콩나물을 키우고, 큰누이는 공장엘 다닌다.



생활은 어려워, 작은누이는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에다 스웨터를 걸치고, 그는

다 떨어진 잠바를 걸치고 지낸다. 그들이 먹은 것은 주로 칼국수인  듯,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p.81),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p.108)

등을 보면, 칼국수는 그의 감각에 깊숙이 인각되어 있다. 그 굶주림의 시각에서 봐야, 하늘

의 별이 "티밥"(p.82)같이 보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풍경의 공간 속에서 본 아버지는 언제나  "가난한 아버지"(p.94)이며, 그래서  "불쌍한

아버지"(p.94)이고, 어머니는 위태로운 모습이다[한 시편에서,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아니

 절규한다 : "광포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지 알 것 같으다.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언덕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p.109). 바람은

風病의 그 바람이며, 수염투성이는 아버지의 모습이며, 콩나물의 뿌리이다. 유리막대는

콩나물대에서 연상된 이미지이다. 아니다, 그토록 단순하지는 않다. 수염투성이의 바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있다. 피투성이의? 어려운

삶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 가난의 공간에서 그가 체험한 최초의 상처 :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꽃혀서 잠

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p.83).



그는 반장이고, 월말고사에서 성적이 좋아 상장을 받았다. 그러나 집에 가서도 그것을 자랑할

사람이 없다. 누이는 공장에서 일하고, 아버지는 누워 있고, 어머니는 콩나물[/무우]을 팔러

 갔다. 그도 신문 배달을 할까 한다. 그는 가정방문을 하겠다는 선생님에게 집에 안 오시면 좋

겠다고 말하고, 풀밭에 '꽃혀'(마치, 꽃병 속에 꽃히듯!) 잠을  잔 뒤, 돌아오면서 상장으로

 종이배를 만들어 개천에 띄운다(이 체험은  뒤에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p.42)라는 수일한 이미지를 낳는다).



그 체험 이후에, 그는 바람 소리만 들으면 무서워하는…… 그런 정황에 빠진다.  그것이 병일까?

 병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담담하게, 과장하거나 감추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고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p.90).

정말 무서운 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다. 가난한 아버지와 위태로운  어머니가

무서운 것이다. 어머니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무서운 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울음 소리라고 말한다. 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울고 있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나이 들면,

더 크게 울게 될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옳았다.



그는 그의 울음으로 시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울음을 더 크게 울기 위해 그는

그가 "내부의 유배지"(p.106)라고 부른 곳으로 유배간다. 그것은  독일인들이 내적 망명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며, 최인훈이 내부로의 망명이라고 부른 것과 거의 같다.  내적 유배지에서

그가 한 것은 책읽기이다. 그것은 그의 짧은 일생 내내 지속된 행위이다 :



"[……]돌층계 위에서/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p.21).

그가 읽은 책들은 광범위하고 깊이 있다.  시에 한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의 시는,  벤, 릴케,

샤르, 첼란,  정현종, 황동규, 오규원, 고은…… 등의 흔적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그는 그의

 어머니가 바란 대로,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운"다.



그 울음의 흔적 중의 하나가 「엄마 걱정」이다. 무우를  팔러간 어머니를 배고픈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데도, 그 어조는 서정적이다. 그 공간이 옛날 이야기의 공간과 닮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여하튼,  그 시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물론, 위태로운 어머니를 따뜻하게 회상하는 시인의

눈길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p.127)



  그의 가난의 공간은, 그러니까  가난한 아버지, 그의  치유될 길 없는 병, 위태로운 어머니,

그녀의 삶을 위한 발버둥, 그리고 부모들과 서로들에게서 소외된, "찬밥처럼 방에 담겨"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배고픔(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음식의

이미지들!)으로 채워져 있으며, 당시의  그는 그것을 무서움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나, 커서는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 그 공간을 무서움으로 가 아니라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 공간은 부정적 성격을 잃고 있지만,  그 부정성의 흔적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빈방, 혼자 있음,  외로움 등은 여전히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유년/소년 시절의 그의 상처가 가난이라면, 청년 시절의―청년  시절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세상을 "건너가버린"(p.64) 그에게 청년 시절이란 말을 쓰는 사람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그의 상처는 못 이룬 사랑이다. 「쥐불놀이」란 시에서,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을 해야겠습니다 (p.111)



라고 당당하게 말한 그는―사랑을 목발질한다? 사랑이라는  목발을 짚고 세상을 산다라는

 뜻일까? 아니면 서툴게 사랑을 했다는 뜻일까?―곧,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p.75)



라고 말한다. 위의 시행을 끝행으로 갖고 있는 시를 꼼꼼히 읽어보면, 어느 겨울날, 너무나

가까운 사이라고 믿고, 여러 사람이 같이 어울린 술집에서 여자에게 실수를 하여, 그의

사랑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나 그 술집

잊으려네/기억이 오면 도망 치려네"(p.74).



그녀와  헤어진 기억이 너무나 아파, 그는 그 "기억이 오면" 있는 힘 다해 도망치려 한다.

그래서 "모든 추억은 쉴곳을 잃"(p.74)고,  "어떤 조롱도 [그의]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p.74)한다. 그토록 좁은 술집에서 그는  그토록 큰 그의 사랑을 잃는다. 그는 그 빈 좁은

 방에 갇혀, "벗어둔 외투 곁에서[……] 흐느"(p.74)낀다. 그 체험은, 그러나, 이상한 가역성에

 의해, 사랑을 빈방에  가두는 행위로 바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p.77)라고 말한 그는,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p.77)



라고, 그녀를 향한 열망의 소유권 주장을 포기한 뒤, "장님처럼 [……]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

(p.77)다. 그 방안에 갇힌 것은,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아니라,  "가엾은  내 사랑"이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p.77).



그토록 좁은 곳에 갇혀 있던 그는 사랑에 대한 시를 씀으로써, 마치 그가 가난의 공간을

 추억 속에 가둬놓듯, 그가  갇혀 있던 빈집의 좁은 방에 사랑을 가둬놓는다. 그 사랑은

 이제 그의 눈물을 자아내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되돌아보는  사랑이다. 그는 이미

 그  빈집에서 나와 있다. 아니 그가 나오니까, 그 집은 빈집이  된 것이다. 그 빈집 속

에 갇힌 것은, 짧은 밤, 창밖을 떠돈 겨울안개,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는 눈물, 내 것이 아닌  열망 등이다.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빈집에서 살 수 있다.  누가 살아도, 그 집은, 그가 들어가지 않는 한, 빈집이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기형도의 힘은 그가 가난과 이별의 체험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런 체험을 한 것은 그만이 아니다. 다른 많은 시인들도 그와 같은 체험을 했고,

 하고 있다), 그 체험에서 의미 있는 미학을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그 의미 있는  미학에

 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시를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일상 생활에

서 보기 힘든 괴이한, 부정적 이미지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가령, 기형도의 시에 나오는,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이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p.11)



라는, 하늘을 두꺼운 종잇장으로, 태양을 노랗고 딱딱한 것으로 비유하는 이미지나,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p.19)



라는, 서로 엉키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비연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나,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p.27)



라는, 만화영화의 이미지 같은, 그러나 개별자들의 고립성이 유난히 강조되는 이미지들이,

비일상적이고, 괴이하고,  때로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이,  가령, 하나의 예를 들자면,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p.16)



라든가,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p.22)



따위의 시행들에서 볼 수 있듯이, 딱딱함이라는 의미소 주변으로 모인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그런 괴이한

 이미지들 속에, 뒤에, 아니 밑에,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자신 속에서 암종처럼

자라나는 죽음을 바라보는 개별자,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

처럼―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시인은 우선  그의 모든 꿈이 망가져 있음을 깨닫는다. 가난과 이별은 그 망가진 꿈의 완

강한 배경 그림이다. 보라, "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p.18),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p.64).



망가진 꿈, 꿈의 환멸은 삶을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방점과도  같은"(p.17) 것으로 느끼게

  한다.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 책읽기와 잘못 강조된 삶[/꿈]의 교묘한 삼투. 그래

서 시인은 자기가 이미 늙었다고 느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죽음은 생각도 못했다"(p.24)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과연 그렇다. 그는 열심히 살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p.24)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눈깨비처럼 나는 곧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집요하게 시달린다 :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p.35) 이 도저한

 자기 인식은, 젊어서 이미 지나치게 늙어버린 희귀하게 예민한  사람의 자기 인식이다. 그

가 말한다 :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

워냈다/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p.41).

 그러니, "나를 찾지 말라"(41).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쓴다. 글쓰기에  대한 이 미친 듯한 정열.  그것이 우울한 정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쓴다  :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pp.44-45).

이미 늙은 시인에게 남은 죽음뿐이다.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p.67)



된다. 죽음만이 망가져 있지 않은 시인의 유일한 꿈이다. 자기 속에 갇혀 죽음만을 바라다보는

늙은이의 눈에  비치는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남과 같은 익명인인가, 아니면 독특한 개별자일까.

그가 바라는 것은  물론 독특한 개별자이다 : "[나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p.34). 그에게 그만한 권리는 있다.  그러나 그가 파악하는 그는 "다른 사람

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p50).  그래서 그가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p.75)라고 말할 때나,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p.107)라고 말할 때에도,  그 다름, 그 혼자임은  갇혀 있는

개별자라는 같음의 다른 모습임을  어렵사리 깨닫게 된다.  나는 위대한 혼자가 아니라, 우리는

 위대한 혼자이다. 그 혼자 있는 개별자의



    [……]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p.25)



그 개별자는 읽을 수 없는 책과도 같다(시인의 의식은 끊임없이 책으로 되돌아온다. 그에게는

 세계도 사람도 모두가 책이다. 그는 빈방에 누워 휼쩍이며 책 속으로 유배간다. 그 책 속에

 뭐가 있단  말인가. 헛된 희망과 죽음뿐 아닌가! 아, 그가 본 책들은 너무  비극적이고 부정적이다).

마지막으로, 죽음만을 마주하고 있는 늙은이에게 흥미있는 것은―흥미? 흥미라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관계 있는 것은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p.37)과 같은 우연한 것(필연적이지 않은 것),  '진눈깨비'와 같은

순간적인 것(영원하지 않은 것). '바람'과  같은 갑작스러운 것(준비―예비할 수 없는 것),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p.41)과 같은  표류하는 것(고정되지 않은 것), 그리고

 "쓸데없는 것"(p.46)(쓸모없는 것) 등이다.



사람은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을 부수적인 것으로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늙은(허물어진) 육체를 바라다보며 울부짖는다.



    [……]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p.34)

 

아무리 움직여봐도, 자신이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 움직여본들 무엇할 것인가.

그가 할 일은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뿐이다. 나는 홀로 없어지는 구름같이 우연한 존재이다라는

 것이 기형도의 리얼리즘이 전달하는 구극적인 전언이다.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사람에겐 본질적이며, 영원한 것은 없는가? 놀랍게도,  열심히 혼자 살다간 한  젊은 시인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한다. 그 도저한  세계관이 나를 전율케 한다. 세계는 쓰레기통 같은 것이고,

사람은, 베케트의 표현을 빌면,  줄만 잡아당기면 쓸려나갈 수세식 변기  위의 똥덩어리 같은 것일

  따름인가? 무엇이 한 젊은 시인으로 하여금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p.33)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게 한 것일까?

  거추장스러운 어떤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육체(p.23), 그리움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희망,

구부러진 핀(p.108) 같은 가족들, 눈물마저 말라버린 눈, 헛것을 살았다는 아픈(쓰디쓴) 자각……

등이 바람병 든 아버지와 결부된 뛰어난 시가 「물 속의 사막」이다. 나는 그 시를 그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한 예로, 가장 적절한 한 전형으로 적어두고 싶다. 내가 적어두고 싶었던 것은

「죽은 구름」이었지만, 거기에는 그의 개인적 상처의 흔적들이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있다, 아니

감춰져 있다.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심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짓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이미지만을 뒤따라가자면, 밝은 빌딩의 유리창을 치는 빗줄기는 어릴 적에 본 옥수수잎과 결부되고,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과 겹쳐지지만("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는 그 이미지

들이 교란되는  순간의 묘사이다. 우수수는 옥수수 때문에 따라나오고, 빗줄기와 아버지는 정상으로

회귀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나는 헛것을 살았다/나는 살아서 헛것이었다"는

 교묘한 대립과 "물들은 집을 버렸다"의, 집을 버리고 되는 대로 쏟아지는, 그래서 다 없어져버린 물/

집의 대립이 더 중요하다.

시인은 집이 없는, 방황하는 시대의 지친 넋이며, 그 원형을 그의 아버지이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아니  살다보니 나는 헛것이었다, 그런데 그 나는 바로 아버지였다! 그 인식 이후에, 나에겐 눈물도 없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개인적인 것―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의 시학은 현실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대립 위에 세

워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이라도  꿈을 꾸는 자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망가진 꿈도 꿈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은 그리움의 상태로, 그런 것도  있었지라는 쓰디쓴 회상의 상태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현실적인 것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아름다움, 추함과 대립되는  의미의 아름다움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아름다움이란,  아는 대상다웁다라는 뜻이다―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목표한다. 그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소외된 개별자, 썩어가는 육체, 절망없는 미래[보라, 시인은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p.24)라고 말한다], 헛것인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아름―아는 대상답다.

그에게 있어, 시적인 것은 따로  없다. 그가 익숙하게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부정적인 것들인지.



  기형도의 시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피상적인 것은, 그의 현실에 역사가

없으며, 더 정확히 말해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는 비판일 것이다. 그 비

판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에  가깝다.

그 비판은 기형도 시가 연 시의 새  지평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며, 그의 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시를

비판하고 있는 비판이다. 그 비판은 몸이 약해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채식을 하지 않는다

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비판이다. 그의 시의 약점을  지적하려면, 우선 그의 시의 차원 안에  있어야 한다.



나는 기형도의  시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이

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부정성을 그 이전에 보여준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아무리 비극적인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더라도, 대부분의 시인들은 낙관적인 미래 전망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성복이 그렇

고, 황지우가 그렇다. 그런데 기형도의 시엔 그런 낙관적인  미래 전망이 거의 없다. 그 도저한 부정성은 벤이나

첼란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부정성이다(한국 시에서 그런 부정성을 보여준  시인이 누구일까? 이상? 이상에게

는 그러나 치열성이 부족하다). 기형도의 부정성은,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두 개의 출구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그 부정성을 더욱 밀고나가, 유한한 육체의 추함을 더 과격하게 보여주는 길이며, 또 하나는 그 부정성을 긍

정적 부정성으로 환치시켜, 혹은 발전시켜  해학 풍자 골계(/익살) 쪽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첫번째 길은 개별자의

 갇혀  있음을 더욱 명료하게 보여줄 것이며, 두번째의 길은 미래 전망의  결여를 운명적인 것으로 인식

시킨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웃음으로써,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며, 문화적인 것이라는 것을 뒤집어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첫번째 길은 비용이나 보들레르 등이 걸어간 길이며, 두번째  길은 라블레나 김지하가 걸어

간 길이다. 기형도는 그 두 길의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그 갈림길에서 갑자기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  갈림길은 이제 다시 없어졌다, 이미 그가 노래한 것처럼.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p.27)



  나는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 그 길은 생각만해도

 내 "얼굴이 이그러진다"(p.31). 나는 불행하다, 나는 삶을 증오한다라는  끔찍한 소리를 다시는  누구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 해도.

                               *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경, 종로 2가 부근의 한

극장 안에서 죽었다. 그의 가장 좋은 선배 중의 하나였던 김훈은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극장―

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과연 그가 선택한 것일까. 차라리 운명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인용자)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라고 말한 뒤에, 그의 넋을 가라앉히기 위해, 원효가 사복의 어머니를 위해 부른 게송의 어조로, 침통하게 당부

하고 있다 ;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하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김훈의 어조를 가슴에 담고,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어보면, 그는 젊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김훈처럼 모질지가 못해, 두루뭉수리하게, 오마르카이얌의 『루바이아트』의 시 하나를 빌어, 그의 넋을 달래려한다.



    우리 모두 오고가는 이 세상은

    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

    묻는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리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김병욱 역)









기형도 奇亨度 1960년 2월 16일 ~1989년 3월 7일



분류 대한민국의 시인 옹진군(인천) 출신 인물 1960년 출생 1989년 사망

시인(문학),  일상 속에 내재하는 폭압과 공포의 심리 구조를 처절하게 표현한 천재 시인

인생과 세상의 고뇌를 우울함의 언어로 표현했으나 결코 희망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대의 여행자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언론인. 1960년 3월 13일, 아버지 기우민의 3남 4녀 중 막내로 연평도에서 태어났다.

2010년에 포격 사태가 있었던 그 연평도 맞다.



유년 시절인 1965년에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지금의 광명시 소하동)로 이사하였다. 특히 대표 시

<안개>는 소하동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였다고 한다.



서울시흥초등학교, 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2]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문학 동아

리인 연세문학회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경기도 안양시의 모 부대에서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일했다.



1989년 3월 7일 새벽 4시,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당시 만 28세로,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다.



2. 소개

그는 독특한 색채의 시를 많이 썼는데,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시가 주를 이룬다. 당시의 정치적

 색채가 짙은 민중시, 노동시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한 덕분이었다.

기형도 전집에서는 "기형도의 언어들은 유예된 죽음의 언어들이다"라고 평가한다.



중학생때부터 알게 되는 <엄마 걱정> 이라는 시가 기형도가 쓴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이다.



고등학생들에게는 무분별한 산업화에 따른 환경파괴와 인간성의 상실을 주제로 한 시 <안개> 정도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센티멘탈하고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남겼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시는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라는 마지막 구절로 유명한 <빈 집>이며, 이외에 1980년대 대학가의 정치적 격동 속 외

로움과 상실감을 노래한 <대학 시절> 등이 유명하다.



사실 기형도가 시인으로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독 예심위원이었던 마광수 덕분이었다.

 마광수가 고백하기를 기형도는 별로 시를 잘쓰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5] 그가 낸 작품도 마음에 들지 않았

다고 한다. 오로지 친구의 의가 틀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의 시를 뽑았다고.



3. 작품 일람

유고작 <입 속의 검은 잎> (1989) [6]

<기형도 전집> (1999)

20주기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



등단 전인 1982년에 신촌문학회의 여성 문우에서 써 준 미발표 연시 3개가 2017년 6월에 공개되었다. 군대시절

 술값을 대신 내준 여성회원들에게 고마움에 써준 시가 보관되어 온 것이라 한다. 기사





3.1. 미디어 관련

-<엄마 걱정>이란 시에 조하문이 곡을 붙여 '열무삼십단' 제목으로 발표했다.



-<질투는 나의 힘>은 동명의 영화제목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



4. 기념사업

고인이 유년시절부터 요절할 때까지 살았던 광명시에서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기형도를 기념하고 있다.

2004년 광명중앙도서관을 개관하면서 3층 인문사회자료실에 기형도 코너를 설치한 뒤 지금까지 관리해오고 있다.

관내 화영운수 버스들 내부에 기형도 시가 부착되는가 하면 2014년 3월 6일에는 기형도 25주기 추모문학제가 열

렸고, 2017년까지 광명역 인근에 기형도문학공원과 기념관이 건설될 예정이다.

2017년 11월 10일 기형도문학관이 개관식을 진행했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기형도'















[자필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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