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4.

[기독교신학] 예정론, 싸구려 구원신앙 칼뱅 알미니즘 아르방주의






[기독교신학] 예정론 - 싸구려 구원신앙  칼뱅 알미니즘 아르방주의






오늘은 개신교의 기본교리 중 하나인 예정론을 중심으로 한 문제점을 살펴본다.
아래 자료들은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목사저/포이에마간/2014.3쇄본'을 중심
으로 편집한 것이며, 위 저서와는 무관한 나 연우의 관점이 많이 들어가 있다.
아울러 칼뱅주의, 알미니우스주의의 내용도 알아보기로 한다.

내용이 좀 길고 무거울 수 있으니 관심있는 분만 시간있을 때 일독을 권한다.
-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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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아르뱅주의...]



01 영화 <밀양>:  용서라는 이름의 배신 -줄거리

'남편이 죽었다. 바람을 피우다 죽어 버린 남편. 죽어서도 나를 괴롭힌다. 온갖 소
문과 따가운 시선. 지긋지긋하다. 평소 그가 살고 싶어 하던 밀양. 그곳에 가면 더
 이상 바람이네, 과부네, 말들 않겠지. 그래, 나를 모르는 곳, 밀양으로 가자.' 아
들 준과 함께 밀양에 도착한 신애(전도연 분). 가게가 딸린 집을 얻어 피아노학원을
 차린다. 활발하지 않은 아들준은 웅변학원에 보낸다.

 동네 여자들과 어울리다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준이 없다. 전화가
울린다. 준을 데리고 있다는 그. 돈을 요구한다. 시키는 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돈을 전한다. 며칠 후, 살해 당한 채 강가에 버려진 준을 경찰이 찾아낸다.
범인은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다.

남편도, 이제 겨우 살인 아들도 모두 잃었다. 교회가 보인다. 무작정 들어간다. 사
람들이 울부짖으며 기도한다. 그들 틈에서 주체할 수 없었던 고통과 슬픔이 한꺼번
에 터져 나온다. 실컷 울고 났더니 좀 낫다.

이제 신애는 교인이다. 교회도 나가고, 전도도 하고, 교회 밖에서도 옹기종기 모여
 예배 드린다. 용서는 하나님의 뜻. 신애는 그 뜻을 따르기로 한다. 교도소에 있는
범인과 마주 앉는다. 그에게 용서와 복음을 함께 전할 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의 얼굴이 좋아 보인다. 이미 교도소 안에서 주님을 만났단다. 마음의 평안도 얻었
단다. 용서를 받았단다. 신애는, 기가 막힌다. 교도소를 나서는 길에 정신을 잃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놀라 자빠진 이유를 알겠다. 배신감 탓이다. '나도 아직 용서
를 안 했는데, 누가 그 사람을 용서해!? 하나님?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제 신애는 교인이 아니다. (중략)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범인을 용서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마주한 범인의
얼굴.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단다. 신애에게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다행이란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운가. 하찮은 인간인지라 죄에 응당한
벌을 내리는 건 자기가 아닌 하나님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엄정히 선악을 심판해야
 할 하나님이 단 며칠 만에 아들을 살해한 자를 용서하고 구원하다니!
죄를 짓고도 편안히 지내는 가해자, 아직도 문득문득 설움이 복받치는 피해자. 하
나님이 내린 심판은 너무 잔인하다.
출처: http://monzaq.tistory.com/212 [엇박의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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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오늘날 개신교회는 다른 방식으로 회개를 파괴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
스도의 은총을 남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죄의 평준화와 영혼의 민주화라는
 방식을 통해서인듯하다.

천박한 개신교의 설교에 따르면 죄는 다 똑같다. 큰죄와 작은 죄, 중죄와 경죄, 회개
 가능한 죄와 회개 불가능한 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죄는 다 똑같이 지옥
에 전져질 죄다. 이것이 죄의 평준화고, 영혼의 민주화란 뭔가? 그것은 선인과 악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마음으로 죄지은 자와 행위로 죄 지은 자, 위대한 신앙인과 흉
악한 악인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똑같이 죄인이다.
그래서 은총은 모두에게 '또같은 은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은총의 동일화가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 교리와 결합하자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믿기만 하면 큰죄든 작은 죄든 무조건 전부 용서받는다.' 80쪽.

...이런 논리는 죄인들에게 실로 엄청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준의 살인범 입장에서
신약성서를 이렇게 읽었을 때 정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기뻤을 것이다.

결국 이논리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준을 죽인 자신이나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
 신애나 다 똑같은 죄인일 뿐이다. 그런데 자신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신애가 찾
아와 자신을 용서해 주겠다니, 실로 오만방자한 말이 아니고 뭔가?
'너나 나나 똑같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그대를 위해서 기도해줄 테니
너나 잘하세요'...
하지만 살인범의 이러한 이론은 결코 신약성서의 가르침은 아니다. 죄인의 죄책감을 근
거없이 경감시키고, 피해자의 기소권을 부당하게 빼앗는 이 논리가 십자가 복음일수 없다.

이제 우리는 매주 예배 때마다 이런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한 주간 지었던 모든 죄들, 큰 죄, 작은 죄,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이
 모든 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주시옵고..."

아마도 준의 살인범도 매주 교회에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 분명하다. 교회만 가면 무슨
 죄든 용서받는다. 회개만 하면 어떤 죄라도 씻음 받을 수 있다. " 자, 이제 난 회개했으
니 깨끗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 너도 나를 정죄할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나를 죄인이라 고발하는가?"
중세의 면죄부보다 더 악질적인 면죄부다. 돈도 한푼 안 들었으니 말이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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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남발하는 면죄부

우리는 지금 개신교회가 선포해왔던 복음이 점차 살인면허로 전락해버린 끔직한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J목사는 한국 교회 청년사역의 대표 주자였으며, 한국 교회 차세대 리더
였다.
하지만 그는 S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을 때 여러 명의 자매들에게 상당한 수위의 성추행을
반복하는 물의를 빚어 결국 교회를 사임했다.

그런데 3년도 채 안 돼서 새로 교회를 개척했다. 피해여성들은 가해자로부터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사죄나 피해보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논란이 한참일 때 궁지에
몰린 J목사가 마지못해 교회 게시판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소극적으로나마 인정한 것이 전
부다. 하지만 피해 여성들을 직접만나 용서를 구하거나 보상을 한 적은 없다. 도리어 교회
를 사암히면서 13억억원이 넘는 전별금을 수령한 것 때문에 또 다른 논란만 일으켰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새로 개척한 교회에 벌써 수많은 신자들이 몰렸다는 것
이다. 과연 J목사는 회개란 것일까? 그는 용서받았을까? 피해자들은 아직도 그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상황이 어쩌면 이렇게도 '밀양과 똑같은가? 86쪽

진짜문제는 J목사 현상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천박한 신학이다. 매우 건강하지 못한, 편
의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썩은 신학이 진짜 문제다. ..
J목사의 설교를 통해 그 썩은 신학을 들여다 보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누구든지 털면 먼지 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허물을 터는 곳이 아니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허물을 씻어주는 곳이죠.

회개를 떠들면서 해요? 회개를 사람 앞에서 해요?
사람들이 회개한다고 하면 용서해줘요?
회개는요, 은밀히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인간이 심판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위의 설교는 그가 S교회를 사임한 후 새로 개쳑한 H교회 강단에서 한 설교 내용의 일부다.
그는 지금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 그 천박한 참회신학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습니까?
---->J목사의 이말에서 우리는 죄의 평준화를 보게 된다. 큰 죄와 작은 죄의 구분은 없다.
모든 죄는 다 똑같다. 더 나아가 너나 나나 다 똑같은 죄인이다. 그러니 내게 돌 던지는 자
들아, 그 입을 다물라. 너희도 다 똑같은 죄인이다. 피해 여성들아, 그대들도 하나님 앞에서
나와 똑같은 죄인 아니냐, 그대들이 나를 향해 고발할 권리를 누가 주었느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보혈로 허물을 씻어 주는 곳이죠
--->모든 죄는 언제나 용서받을 수 있다. 회개 불가능한 죄는 없다. 교회는 언제나 죄를 용
서해 주는 곳이지 정죄하는 곳이 아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질 필요없다. 교회만 가면 용서
받으니까. 공로없이, 대가없이, 보상없이 모든 죄는 교회에서 용서된다. 극단적으로 간소화
된 개신교회의 참회신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설교다.


회개를 떠들면서 해요? 회개한 사람 앞에서 해요?
--->회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공적 고백은 불필요하다. 고해성사? 그건
타락한 로마가톨리교회의 비성서적 관습이다. 그러므로 고백과 회개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밀히 하는 것이다. 고백은 철저하게 사적인 행위다. 회개는 오직 하나님과의 일대일 문제다.


그가 개척한 H교회를 출석하는 한 교인은 이렇게 말했다. (성추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면, 목사님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했을 것이다. 해결하지 않았
더라면 목사님의 좋은 말씀과 부흥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을 리가 없다..."

더욱 주목할 것은 소위 '교회성장'이 J목사의 회개의 진정성의 표지이자 하나님의 용서의
증거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여기서 메가처치(대형교회) 현상과 한국 개신교회의 면죄
부 메커니즘이 결합되어 있는 현상과 만나게 된다.

통속적인 대중의 신앙 속에는, 만일 교회가 부흥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용서의 외적 징
표일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교회가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는 것, 그래서 비범하게
크다는 것, 사람이 많이 모이고, 재정이 풍부하다는 것, 그러한 메가처지의 담임목사라는 것, ...

이런 것들이 용서의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실제 교회 현장에서 심심찮게 발
견할 수 있는 논리다. 실제로 메가처치 목사들의 독재, 전횡, 탈법 등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이런 메가처치 현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면죄부 메카니즘 덕이다. 메가처치 목사는 하나님께
서 쓰시는 기름부은 종인고로 그의 잘못을 함부로 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양 여
기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적그리스도적인 사고인가? ~89쪽

-발췌출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목사저/포이에마간/2014.3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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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씻을 수 있다]


2003년 12월 발생한 사건과 그 현장 검증에서 나온 범인의 망언에서 유래된 말이다.

2. 사건 경위

2003년 12월 19일 금요일 오후 4시경 범인 이진우(24·무직, 마진우)는 서울특별시 동작대교
에서 남쪽으로 검은색 트라제 승용차를 몰고 가다 다리 중간 지점에서 내려 자신의 아들(6)과
 딸(5)을 다리 아래로 한강으로 내던지고 달아났다.

목격자 서 씨는 이때 범인이 차에서 나와 커다란 물체를 강으로 휙 던지는 것을 목격했다. 자
신의 눈을 의심한 서 씨는 차를 급히 세웠고 범인에게 다가갔으나 이 씨는 급히 차를 타고 도
주했다. 서 씨는 "아이를 던진 것을 확신하고 도망치는 이 씨의 차량 번호를 급히 적어 경찰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다른 목격자 박영창씨(36, 전기공)는 "처음 아이를 던질 때는 사람인지 확신이 안 섰으나 두번
째는 아이임을 확신했다"며 "아이가 축 처져있지 않아 살아있는 상태로 보였으나 던지는 순간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3. 범인의 신상과 범행 과정

이 씨는 고2 때 1997년 같은 학교 여학생이던 지금의 부인과 동거에 들어간 뒤 이듬해 아들을
낳고 정식 결혼을 했다. 그 뒤로 직업 없이 부모에게 얹혀 살면서 월 50만원씩 용돈을 타서
살아왔다고 한다. 고교를 졸업하고 1998년부터 과천시의 경마공원과 부천의 TV 경륜장을 출입
했다.

2000년경부터는 5개의 카드를 발급 받아 사용하다가 3000여만 원의 카드 빚을 지게 돼 2000년
 7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이 씨의 부모는 아들의 카드빚을 갚아주다가
 이 씨가 경마 등으로 자꾸 빚을 지자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과의 불화도 있었는데 도박을 하기 위해 범행 7일 전에도 부인의 카드를 훔쳐 500만 원 가
량을 사용한 것이 드러나 심하게 다퉜다고 증언했다.

이 씨는 경제적 문제로 아이들을 키울 여력이 없어 범행 2주 전부터 동작대교 인근의 물 깊이
를 재기 위해 답사를 하고 인터넷으로 "한강에 투신했을 때 살아날 수 있는지" 등의 정보를
조사했다고 한다.

19일 오전 이 씨는 부인이 자신의 승합차를 허락 없이 타고 나갔다며 부부싸움을 벌였다. 이
씨의 부인은 "남편은 '당신이 산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이 너무 비싸다' 고 한 뒤 선물을
바꿔오겠다며 나갔다" 고 말했다. 그 승합차를 타고 가서 인근 H어린이집에 맡겨진 아이들을
 "놀이공원에 가자"면서 데리고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오면서
아이들에게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1알씩 먹인 다음 몽롱한 상태의 아이들을 한강에 집어던
졌다.

범인 이 씨는 범행을 저지른 다음 전화를 걸어 어머니 천 모 씨(55)에게 "아이들을 한강에 던
져버렸다. 부인도 죽이러 간다"고 말했다 한다.

4. 체포

경찰은 차량의 뒤를 따르던 운전자의 신고를 받고 차량번호를 추적해서 이씨의 신원을 알아냈다.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이씨의 집으로 경찰을 급파, 오후 6시15분 경 귀가하는 이씨를 체포해서
 서울 용산경찰서로 압송했다.

검거 당시 이씨는 "정신 장애 3급이라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장애인 신분증을 경찰에 제
시했다.


5. 시신 발견

경찰은 목격자의 신고를 받고 119 구조대와 함께 4대의 배와 잠수부 15명을 동원해 한강을 수색
했으나 물결이 높고 장비가 얼어붙자 당일에는 어린이들을 찾지 못하고 5시 반경에 수색을 중단
했다.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 수색을 재개했으나 결국 아이들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6. 현장 검증

위 짤방은 22일 오전 11시 동작대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현장 검증 영상에서 탄생한 것이다.


영상(54초부터)

기자 : 지금 심정이 어때요?
범인 : 착찹하고 괴롭습니다.
기자 : 후회 안 해요?
범인 : 후회합니다.
기자 : 뭐라고요? 애들 사체 발견된 건 알아요?
범인 : 어제 들었습니다.
기자 : 어때요? 심정이.
범인 : 괴롭습니다.
기자 : 왜 그랬어요?
범인 : ...살 방법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기자 : 왜 같이 안 죽었어요?
범인 :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했습니다.
기자 : 기독교인인데 사람 죽이는 건 괜찮아요?
범인 :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기자 : 뭐라고요?
범인 : 죄를... 죄송합니다.
기자 : 입 벌리고 말하세요.
범인 : 죄송합니다.

이 어처구니 없고 기막힌 망언에 많은 사람들이 할 말을 잃었다.


7. 판결

이후 1심과 2심에서 모두 징역 15년형이 선고되었다.
언론에 대법원에서의 상고심 판결 기사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상고를 포기했거나 상고가
 기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8. 기독교 교리에 따른 문제 분석

8.1. 공교회의 관점

고해성사를 모독하는 것. 모고해가 성립되는 경우는 고해자가 고해신부 앞에서 죄의 고백
을 할 때 기억에 떠오르는 사죄(死罪)들 중 어느 것을 고의로 숨기거나 사죄의 종류 혹은
 회수를 은폐할 때, 그리고 사죄의 어느 것에 대하여 하등통회조차 하지 않고 고백할 때이
다. 모고해의 결과 고해자의 조의 고백과 고해신부의 사죄(赦罪)는 모두 효력이 없으며 고
해자는 독성죄(瀆聖罪)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해자는 다시 온전한 고해를 해야 할 뿐
 아니라 독성죄까지 통회하고 고백해야 한다.

가톨릭 대사전, <모고해> 항목

모고해란 고해 성사를 모독하는 경우나, 죄를 고의로 은폐시키거나, 중죄의 경우 불완전한
 뉘우침(하등 통회)조차도 하지 않고, 고해 성사를 보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죄를 용서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음에 다시 고백해야 하며, 모고해 사실도 말해야 한다.

천주교 용어사전, <모고해> 항목


하지만 이들 공교회에서는 이 항목과 같은 미친 소리를 방지하기 위하여, '제대로 된 반
성 없이 고해성사를 보는 자들'을 '모고해'라고 하여서 '고해성사, 나아가 하느님을 모독하
는 대죄'로 본다. 당연히 죄가 씻어지기는 커녕, 죄가 더 깊어지는 역효과가 난다. 인터뷰
에서 말하는 태도를 볼때, 이미 "죽이고 회개하면 된다" 라는 마음가짐이고,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모고해에 속한다. 고해성사를 통해 주어지는 회개[8]에 대한 죄사함은 죄를 맘대로
 짓고 입에 발린 반성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8.2. 개신교의 관점

이번에는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를 두고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식 구원론을
한국 근본주의 개독들이 함부로 남용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남용
도 남용이지만 구원론에 대한 자의적 왜곡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예수천국
불신지옥 교리와 엮어서 비판하기도 하는데, 효과적인 비판을 위해서는 기독론보다는 구원론
의 측면에서 접근함이 적절하다.

어쨌건 개신교의 입장에서 얼핏 보기에는 마치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을 뿐, 옳은 말이지
 않은가" 식의 반응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죄는 씻을 수 있다는 이
개드립에 담겨 있는 구원론은 근본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잡탕식 구원론이라는 비판을 제
기할 수 있다. 일례로 침례교 신학자인 신광은은 한국 개신교에 만연한 구원론을 분석한 바
있는데 이것은 위의 드립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그에 따르면, 개신교 구원론의 두 축을
이루는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부적절한 야합이 문제라는 것이다. 참고로 칼뱅주의와 알
미니안주의는 아직까지도 상충관계에 있으며 두 교리 사이의 충돌은 현재진행형이다.(…) 전
세계 신학자들이 통합하지 못했던 두 교리를 대한민국 개신교가 합쳤다


알미니안주의 : 내가 내 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
(but 도중에 구원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칼뱅주의] : 신은 나의 구원을 끝까지 결코 취소시키지 않는다.
(but 신이 나를 구원하지 않았을 위험이 있다.)

여기서 문제는, 서로 상충되는 두 교파의 교리에서 신자들이 듣기 좋고 입맛에 딱 맞는 부분
만 이렇게 쏙쏙 끄집어내어, 그 둘을 한데 합쳐 버림으로써, 편의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교리라기보다는 비즈니스에 가까운 마케팅용 잡탕을 만들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즉, 제대로 된 알미니안주의자는 범인 이씨의 죄에 대하여 구원의 상실을 엄중히 경고했을 것
이며, 제대로 된 칼뱅주의자는 범인 이씨의 죄에 대하여 주권적 유기를 엄중히 경고했을 것이
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는 이 두 가지 중에 껄끄러운 교리는 마음대로 버리고 지들 마음에
드는 교리만 취해서 합쳐 버리는 취사선택을 범하여, 결과적으로 위와 같이 신학적으로도 근거
없고 사회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개드립을 낳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이와 같은 비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저 위의 두 가지 주장을 짬뽕
해서 신자들에게 "판매" 하는 것이 교세확장이나 신자의 유입과 같은 소위 "부흥" 에 더 도움
이 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사실 구원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고들다 보면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같은 적반하장 격의 개드립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말인지 대강 짐작이
 가능하긴 하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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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건에서 범인의 변명의 배후에는 고도의 정교한 신학적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범인의 말에서 J목사의 설교에 맞다아있는 썩은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1. 살인은 용서받을 수 있다
2.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다

오늘날 개신교회에서 아마도 자살만이 유일하게 회개 불가능한 죄이고, 살인죄를 포함한
나머지 모든 죄는 회개 가능한 죄라는 말이 될 것이다.
범인의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두 자식에게 수면제를 먹여 차가운 한 강 물 속에 던져죽인
 아버지의 자식 살해죄는 회개 가능하단다. 그것은 아까 살펴본 그 저렴한 회개신학 때문
이다. 그리스도의 무한한 보혈 공로를 빙자해서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말 한마디 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고 하는 그 싸구려 신학 말이다.

그런데 살인죄도 이렇게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데 왜 자살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
는 걸까? 아마도 이런 논리일 것이다. 자살은 살인죄다. 모든 죄의 삯은 사망, 곧 지옥행
이다.
모든 죄는 회개하면 용서받는다. 하지만 자살은 죄 짓는 순간 죽어버리기 때문에 회개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 자연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즉 자살자는 죄 짓는 순간 죽어버리니
회개를 할 시간적 여유가 존재하지 안는다는 논리다. 결국 범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면, 필요하면 살인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자살만은 결코 안 된다는 말이 된다. 92쪽.


아르뱅 주의

221쪽. 아르뱅 주의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의 회악의 조합으로, 오늘날 한국 교
회의 타락을 부추키며 그러한 타락을 정당화하고 있는 현대 한국 교회가 발행하는 면죄부이
다. 오늘날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왜곡된 구원론을 주입시키고 있는 주범이기도하다.

여기서 아르뱅주의를 칼뱅의 튤립교리의 구조를 따라 다섯가지로 정리해보겠다.


1. 타락에 대해 :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주장한다(칼뱅주의). 하지만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아르미니우스주의)


2. 선택에 대해
나도 알지 못하는 때에 나를 위해 구원을 준비하고 나로하여금 믿음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
풀어주셨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 주셨다는 의미로 하
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믿는다(칼뱅주의). 하지만 예정론이 논리적으로 이중예정으로나아갈
수 있다는 점까지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내가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애정과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아르미니우스주의)


3. 속죄에 대해
속죄에 대해서는 거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쪽에 일치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
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차별없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르뱅주의자들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주의적 초청을 강
력하게 활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속죄는 아르뱅주의의 강력한 복음주의적 추진력의 근
원 중 하나다.


4.은혜에 대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아르뱅주의는 거의 아르미니우스주의쪽에 가깝다. 하나님의 은혜가 거부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은혜가 크고 놀랍다고 찬양할 때 그 고백은 불가항력
적 은혜와 비슷하다(칼뱅주의). 하지만 아르뱅주의는 불신자가 스스로 복음을 믿기를 거부해서
지옥에 가고, 신자는 복음을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르뱅주의는 저항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가깝다(아르미니우스주의)


5. 견인에 대해
이부분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롤 칼뱅주의적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이라고 굳게 믿는다. 즉 아르뱅주의자들은 한 번 받은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견인 교리를 확실히 붙든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로마인의 악수에 비유된다. 내가
 손을 놓아도 하나님은 내 손을 놓지 않는 악수다. 로마서 8장 37~39절을 읽어보라. 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의 구원을 앗아갈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225쪽



이상에서 본 것처럼 아르뱅주의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따와서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혼합물이다.
아르뱅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뭔가? 그건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뒤섞어 혼합물을 만
드는 와중에,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모두가 유지하려고 했던 변증법적 긴장을 파괴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 역사와 종말, 확실과 불확실성, ....등 사이에
 존재하는 변증법적 긴장를 말한다.
이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긴장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긴장으로부터 신앙이 끊임없이 능력을 얻고 여기에서 윤리적 추진력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아르뱅주의는 이 긴장을 파괴함으로써 신앙의 동력을 상실하고 윤리적 추진력의 근거를
제거하고 마는 것이다. 247


1. 나는 구원받았다
2. 나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이 두문장이 결합되면 천하무적 구원론이 된다. 긴장이 사라진 기독교 신앙은 나태와 방종을 향한
 고도속도로를 만들어냈다. 그  고속도로의 종착지는 '무율법주의'다. 아르뱅주의는 무슨 짓을 해
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고,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는 식의 거짓된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담
대히 죄 짓게 만든다. 결국 아르뱅주의 구원론은 살인면허다. 253.


-발췌출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목사저/포이에마간/2014.3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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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예정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예정설(豫定說)이란 구원과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개신교의 신학 이론을 지칭하는
말이며, 종종 좁은 의미로 개혁주의 즉,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이중예정론을 의미
하기도 한다. 예정설에서는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
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설명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이중예정론

개혁주의 예정론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구원에 관한 전적 은혜를 그 배경으로 하
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타락한 까닭에 회개하기
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전적 타락; 루터는 이를 보고 '인간의 의지는 죄의 노예'
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거부와 불순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양심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다. (오직 은혜)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개혁주의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기 이전, 곧 시
간조차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역에서, 창조 후 인간의 멸망을 아시사 그 가운
데서 일부를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사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를 방치하실 것인가에 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중예정론이라고 불린다.


운명론과의 차이

이중예정론과 운명론의 차이는 운명론의 경우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미래의 일을 결
정지었다는 이론이지만, 이중예정론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축을 초월한 신의
 영역에서의 결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결정된 사실은 시
간에 갇혀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공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신학적인 체계화

이러한 이중예정론은 일찍이 어거스틴이 주장하여 '어거스틴주의'라는 별명이 붙어있
다.그러나 신학적으로 체계화 된 것은 종교개혁 때 개혁자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 《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은 이에 대한 변증서로 유
명하다. 그래서 이중예정론은 개혁주의 신학의 한 특징이 되었다. 특히 개혁주의에서
얘기하는 칼뱅주의 5대 강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중예정론은 칼뱅주의 5대 강령 중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첫
번째 항목에 명문화되어있다. 즉, 구원은 사람의 어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만 받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이 멸망 받는
사람의 책임을 없애지는 못하는 것은, 예정론은 모든 인류가 멸망 가운데 있는데 하
나님께서 그 중 몇몇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자랑하지 못하며, 멸망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
임을 면하지 못한다.

루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든다면,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멸망시키실 때 당신은 불평하면 안 됩니다."

이중예정론에 대한 근거로 개혁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성경 구절로 다음이 있다: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
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
나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로마서 9:11, 공동번역)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9:16, 공동번역)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
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 (로마서 9:18, 공동번역)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
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페소 1:5-6, 공동번역)


관련된 성서 구절

예정론의 근거로서 자주 인용되는 성서 구절들로 다음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
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 나를 보내신 아
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
시 살리리라" (요한복음서 6:37,39,40,44)
위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과, 한 번 그리스도를 믿고 나온 자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이
론의 근거로 자주 등장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4)
위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란 이론의 근거로 종종
쓰인다. 이때 "창세 전"이란 시간조차 창조 되기 전, 즉 시간을 초월한 신의 영역에서의
결정이란 뜻으로 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축 위에서 과거의 어떤 시점에 미래의
 일이 결정되었다는 운명론과는 차이가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
라" (요한복음 1:12,13)
위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의지나 선택에 상관 없이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란 이론의 근거로 종종 쓰인다.
자주 인용 되는 기타 구절로 다음이 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
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
심이니" (데살로니가후서 2:13)


-발췌출처: 위키백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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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에대한 다양한 견해 (칼빈, 웨슬리, 알미니안, 칼바르트의 입장)]


예정론에 대한 조금 다른 정리를 가져왔습니다. 앞선 포스팅에 비하면 웨슬리와 알미니안
의 입장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대부분이 갖고 있는 예정론에 대한 입장은 웨슬리나 알미니안의 그것에
가깝기 때문에 이 정리가 좀 더 유익하고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칼빈의 예정론과 비슷하지만 조금 차이가 있는 입장이고, 웨
슬리나 알미니안의 견해는 크게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너무나 잘못된 견해라서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에는 제가 빨간색으로 주석을 달
았으니 참고 바랍니다. 원문을 보존하기 위해서, 비교적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
은 가능한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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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트 주인이 빨간색으로 주석을 달은 부분은 본문과 다른 견해이며,
그내용도 동의할 수 없으므로 생략했음. 이글의 원본은 출처가 밝혀져있지
않아 표시할수 없었고 인용사이트만 표기했습니다 -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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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학적인 분류를 학자들은 이렇게 분류합니다. 이것보다 더 복잡하게 분류하는 사
람도 있고 이것보다 간단하게 분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이렇게 분류되어진
다고 봅니다.

Hyper칼비니즘(이중예정론, 타락전 예정설) - 극단적칼비니즘(타락후 예정설) - Mild칼비
니즘 - 수정칼비니즘(신칼빈주의, 칼바르트) - 웨슬리적 칼빈주의 - 칼빈적 웨슬리안 - 웨
슬리안 - 웨슬리적 알미니안 - 알미니안 - 자유주의적 알미니안

그러나 신학대학 교수나 신학자들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칼빈주의와 웨슬리안,
알미니안의 구별이 거의 없다고 보면 확실합니다. 즉 장로교회에서도 성도들의 믿음을 강
조하고, 감리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강조합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매우
고무적으로 봅니다. 즉 교회 성도들과 목회자에게는 신학적인 구별이 거의 없는 것이 현
실입니다.


알미니안과 칼비니즘의 다섯강령의 차이점

알미니우스 칼빈
1. 자연적 무능력 (Natural Inability)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2. 조건적 선택 (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3. 만인 구속 (Universal Atonement) 제한적구속 (Limited Atonement)
4. 선행적 은총 (Prevenient Grace) 불가항력적 은총 (Irresistible Grace)
5. 조건적 견인 (Conditional Persererance) 무조건적 견인 (Final Perseverance)


1. 칼빈의 예정론

칼빈도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즉 모든 사람이 동
일한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벌에 이르도록 미리 정
해져 있다고 하는 예정론을 주장한다. 영생에 이를 자를 선택된(elected) 자라 부르고, 선택
되지 못한 자를 버림받은(reprobated) 자라 한다. 흔히 칼빈의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
으로 전해지는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창세 전부터 구별하
여 예정하셨다고 말한다.(타락전 예정설)

영벌로 예정된 죄인들은 멸망받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멸망으로 예정되었기에 멸망받기 위하여 태
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예정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그 마음을 부드
럽게 하사 영생에 이를 수 있게 하시며, 유기(遺棄)된 자는 그들의 악함과 강퍅한 마음대로 내
버려 두셔서 영벌에 이르게 하신다고 한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따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2. 절대예정에 대한 웨슬리의 반박

절대예정(Absolute 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변경할 수 없
다는 주장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일단 예정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뿐 인간의
 태도나 의지에 관계가 없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웨슬리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교리가 성경의 교훈
에 맞지도 않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배치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칼빈의 예정교리를
비판한다. 웨슬리는 예정론이 말하는 바 하나님은 전능하신 폭군(Almighty Tyrant)으로 인간의
의지나 성향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인간의 멸망을 결정하는 신으로
 묘사된다고 비판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멸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신다면 죄인의 멸망이 하나
님께 원인이 있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죄의 근원이 된다고 말하게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인간의 구원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불변의 경륜에 따라 미리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복음을 전하거나 전도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라 한다. 구원으로 예정된 이
는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며, 멸망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들
어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니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듣는 일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구원으로든 멸망으로든 이미 어떤 사람의 운명이 무조건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다만 자기가 어느 쪽으로 결정되어 있는지만 모르는 경우라면 이를 바꾸기 위해 인간 편에서 수
고하고 노력하는 일은 무의미하게 된다. 즉 어떤 병자의 장래가 낫든지 죽든지 어느 편으로 이
미 결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약을 먹든지 안 먹든지 살도록 또는 죽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는 모른다 해도 이미 결정된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없으니 약을 먹는 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정론의 교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를 포기하게 하는 비성서적 교훈이
라 한다.


3. 죄와 구원에 대한 일치된 견해

칼빈과 웨슬리가 똑같이 주장하는 바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의지(natural free-will)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본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고 인간에게
서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다는데 칼빈과 웨슬리는 동의한다.

모든 선은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하는데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것도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아니고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free-grace of God)라는 점에서 웨슬리신학은
칼빈신학과 공통의 견해를 견지한다. 특별히 웨슬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칼빈주의에 대한 지
나친 비난은 온당치 않다는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 자기의 주장과 칼빈주의는 머리털 하나의 차이
밖에 안되며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멀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술회한다.

칭의와 성결에 관하여 웨슬리가 강조하는 것을 본 당시의 교계는 그가 선행으로 성화되는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이에 답하기 위하여 웨슬리는 1763년에 "구원의 성서적 방법"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를 통해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고 믿음으로 되며 성결의 은총도 믿음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믿음만이 구원과 성결의 유일한 조건인 것을 밝힘과 동시에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하
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으로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칼빈과 대립
을 보이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웨슬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거나 받
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는 점에서 칼빈과 차이를 보인다.


4. 하나님의 선행은총,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도 있고 혹 거역할 수도 있는 인간의 능력을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의
지라 부른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담의 타락으로 모두 잃어버렸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자기 구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 후에도 손상이 없이 보존되고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고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이나 역할을 부정하는 칼빈주의와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
나고 있다. 전적타락과 무능력의 상태에 있는 원죄하의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의지의 자유가 회복되는가를 다루는 것이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ting grace 또는
 prevenient grace)의 교리이다. 선행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웨슬리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죄에 죽은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소원에 응답하여 구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능력이 부여된다는 것이 웨슬리의 구원관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연인에게 하나님께서 선행은총
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시기에 인간의 책임이 고조된다.
-이 역시 성경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나타난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
의 빛을 비추신다(요 1:9). 사람들은 이 빛 가운데서 비췸을 받아 자비를 사랑하고, 옳은 일을 분
별하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따르고 싶은 선한 소원(good desire)을 가지게 된다. 웨
슬리는 이러한 선한 소원을 생래적 양심(natural conscience) 또는 선행적 은총이라 부른다.


따라서 양심에 화인(火印)을 맞아 분별력을 잃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유한 선행적 은총을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또는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여 죄를 범하고 멸
망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구원에 응답할 만한 양심 또는 선행은총을 누구에게나 주시고 다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완전한 타락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자연인(natural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에게도 태어나면
서부터 가지는 양심이 있고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그 양심이 구원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회
복되기에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인이란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가 부여되어
 있고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지를 악용하여 죄의
길을 선택하여 고집할 때, 구원은 거부되는 것이라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는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한
다.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된 자유의지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응답할 수 있을 만큼 분
별의 능력과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에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인간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고 선택할 수 있는
선행은총을 주신다. 생래적인 양심 또는 회복된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양심 또는 의지 자체가 선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행(先行) 은총을
따라 의지를 선용할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니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인간에
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니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것이며 거저 주시는 바 은혜가 된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구원으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에 대답해야 할 자유의지를 악
용함과 동시에 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악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하
나님의 선행은총과 부르시는 음성을 거역하고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구원의 길에서 처음
부터 멀어지게 된다. 비록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지 않고 순종하여 거듭나는 은혜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사탄의 계속적인 유혹에 따라 신앙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행적 은총은 죄인을 깨닫게 하고 거
듭나게 하는 예비적 은혜일 뿐이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중생의
은혜에 이른 자라 하더라도 최종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항상 깨어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신다. 그러나 주신바 자유의지를 남용
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며, 구원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지만 제시되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기에 구원의 성취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협동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신인협동설(Synergism)이다.
후대의 신학자들 중 웨슬리의 신인협동설을 해석할 때 그것은 인본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공로를 내세
우는 주장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의 자세를 강조한
신단독설(Monergism)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5. 맺는 말

웨슬리가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도덕폐기론자
(또는 반율법주의자, Antinomianist)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 볼 때도 인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주장을 동의할 수 없었기 때
문이다. 도덕폐기론자들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선을 행한다든가 법을 지키는 일이 무의미
하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 똑같이 해당된다고 하는데, 이에 반대하여 기독교와 윤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웨슬리의 입장이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죄론(罪論)이나,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
에 있어서 웨슬리의 입장은 칼빈과 일치한다. 다만 극단적인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에 반대하며 구
원에 있어서 인간의 결단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믿음(sola fideism)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구원을 적용하는 일
에도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유의지를 부여하시므로 역시 구원에 있어서 하나
님의 역사는 주도적(monergism)이라는 점에서 개혁자들의 신앙과 일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선행은총(先行恩寵)이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어진다고
 하는 점에서 있어서는 웨슬리의 주장이 개혁자들에게 가깝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도르트공의회

1618년 11월13일부터 1619년 5월9일에 끝난 도르트공의회에서, 102명의 네델란드 칼빈주의자와 28명의
외국 칼빈주의자, 그리고 13명의 알미니안주의자가 참석하였다.

그들 13명의 알미니안 대표자들은 이미 국가반역죄가 주어졌으므로 발언권과 선거권이 없었고, 결과적으
로 도르트공의회에서 알미니안들은 만장일치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들은 항의자(Remonstrations)로 불려졌다.

그 회의로부터 예정론을 비판하는 자는 하나님을 비판하는 비기독교인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
도르트 공의회는 발언권과 선거권이 전혀 없는 13명의 알미니안 대표들을 앉혀놓고, 칼빈의 5대강령을
재확인하며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알미니우스의 근본적 원리

제임스알미니우스는 1560년 네델란드에서 태어났다. 홀로인 어머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그는
 개종한 카톨릭 신부의 양자가 되었고 그 신부가 죽은 후에는, 개혁교회 목사인 피터 베르티우스의 집
에 머물며 라이덴 대학에 다니게 된다.

알미니우스는 목회훈련을 위하여 제네바대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베쟈와 다른 스승들에게
 신학을 배웠다. 교육을 마친후 그는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그의 강해설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진다. 1589년 코른헤르트라는 평신도가 베쟈의 이중예정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강연과
 책의 저술을 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 비판이 신학계에 돌풍을 일으켰는데, 코른헤르트가 매우 뛰어난
지식으로 예정론을 비판하는 논리를 주장하자, 어느 목사도 그것을 대항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것을 위
하여 알미니우스에게 그 임무가 주어졌다.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을 비판하는 코른헤르트라는 평신도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하여 로마서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로마서를 연구하면 할수록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께 범죄하고 타락한 유대인들은 멸망당하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예정하시고 부르셨는가? 그렇다면 타락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없도록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고,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 사실을 바꿀 수가 없
었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회개하도록 참고 인내하시지 않았던가? 왜 수
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냈단 말인가?

알미니우스는 교회사적인 연구를 하였고, 놀랍게도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
한 어거스틴마저 도덕적 책임성(Full Moral responsibility)을 가르쳤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알미니우스의 양심은 결코 코른헤르트를 이단으로 만드는 것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후에 제임스 알미니우스(1560)는 라이덴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으며, 그는 예정론자였음에도 불
구하고 칼빈과 베쟈(칼빈의 후계자)의 이중예정론을 전적으로 반박하므로 주목을 끌게 된다. 그가 예정
론을 거부한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이유였다. 결론적으로 알미니우스는 예정론 자체를 반대하며 부정한
것이 아니라, 도덕무용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만일 모든 인간의 구원이 이미 창세 전부터 이미 운명되
어진 대로 흘러간다면, 성결에 의한 윤리적 요구가 전혀 필요없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알미니우스가 성
숙하여지고 라이덴대학의 교수가 되었을 때에 그는 신앙신조에 서약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예정론자이며
 신약교수였던 고마루스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고마루스는 “신성한 성경은 고백서와 교리문답서에 의하여 해석되어져야만 한다”고 선언을 하였고,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성경적 해석을 신조들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였다. 그 누구도 알미니우스와의 논박
에서 예정론을 옹호하는데에 있어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사용하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항상 성경적인
 토론에서 그는 승리하였다. 그가 주장한 예정론 비판의 근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예정교리는 일차적으로 철학적이 아니라 성경적이어야 한다.

2. 예정은 반드시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신적작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원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인간은 강요받은 선택에는 책임이 없다.

3. 구원은 복음적이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4.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어떠한 이론도 비성경적이며, 한편으로 인간을 스스로 구원의 창시
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만일 예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하나님은 곧 죄의 원인
제공자, 즉 죄의 창시자가 된다. 왜냐하면 멸망받기로 미리 예정된 인간들이 있다고 할때에, 그들은 회
개하고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되며, 그러므로 그 멸망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멸망받기로 예정되어 있으므로 인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이 된다.

더군다나 이미 예정되어졌고 이미 운명지워진 “멸망받을 사람”을 다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죄를 짓게끔 예정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시는”(롬5;20) 하나님이시다.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신학적 해결을 보지 못한 채, 160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살아 생전에 알미니우스의 성경해석에 대해 틀렸다고 반박을 하지는 못하였을만큼,
그는 성경을 최종권위로 내세웠고, 그것이 예정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의 불만을 가지게 하는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후에 그가 죽자, 그의 추종자들이 예정론자들과 그 논쟁을 계속했고, 그들 중 일부는
복음적 정신에 충실하였으나, 또 다른 부류의 몇몇 사람들은 자유주의적 신학노선을 걷게 됨으로 알미니
안주의는 두 계열로 분류되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혹간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자유주의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며, 알미니안주의를 인간의 의지로 구
원을 받는다고 하였던 펠라기우스의 후예로 착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또 일부 장로교의 목회자들마저 “감리교회가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더라”는 견해를 갖고
 있을 정도의 잘못된 오해를 갖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장로교 목회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알미니우스는 결코 예정론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조건부
적인 예정론을 수용하였을 뿐이다.


오늘날 감리교의 대표적인 창시자로 불리우는 웨슬리목사는 알미니우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어거스틴의 은총론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는 웨슬리안의 신학은 예정론과 함께 수용되어지는 개신교의 양
대신학으로 인식되어진다. 한편 극단적 칼빈주의도 스스로 온건화, 수정화되면서 오늘날에는 진정한
칼빈주의는 찾아보기가 그야말로 어려운 실정이고, 또 웨슬리안은 칼빈주의와 혼합되어지면서 진정
한 구별은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것은 나쁜 현상이라기 보다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칼바르트의 예정론 비평(신칼빈주의)

1. 그들은 보다 우선적인 하나님의 작정에서 출발한다.

2.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이시기로 작정하셨다.

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수단으로서 은총을 사용하신다.

4. 하나님은 신적예정에 근거하여 예정하신다.


웨슬리안의 인간의 조건과 책임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어느 감리교회도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받
는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이러한 주장은 이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어느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인간 스스로의 책임이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
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미 누락되도록 운명되어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음으로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들의 책임이며, 선악과의
 과실을 만든 하나님의 책임이 되어질 수 없다.

그 과실을 먹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의지와 욕망으로 인하여,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의지와 욕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웨슬리 역시 예정론 자체를 반대한 것도 아니요, 인간의 책임한계를 예정론에서 끄집어 낸 것뿐
이다. 즉 알미니우스는 믿음을 신적예정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켰으며, 웨슬리는 그 믿음을 새로
운 주인(Master)을 모셔오는 삶의 새로운 길로 인식했다.

즉 성화가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성령의 사역에 의해 수행된다고 웨슬리는 주장하였다. 웨슬리와
알미니우스가 다른 점은, 웨슬리가 특히 성령의 능력과 사역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성도가 성령께 굴복하면(Surrender) 그는 성령에 사로 잡힌다(possessed by) 성령은 인간본성의
 돌출을 압박하고 억제하며 조절한다. 성령이 우리를 사로 잡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성을 억
누르고 지배하게 된다.“

믿음이란 한번의 행위가 아니라, 전인생을 하나님에 대한 계속적인 신뢰와 그리스도께 복종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헬라어에서 “믿는다”는 것은 항상 현재진행적 시제를 갖으며,
 그것은 지속적인 책임성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며, 그러므로
써 인간 스스로에게 책임한계가 있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구
원을 얻으며,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 자신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미리 구원받지 못하기로 예정된 자는 어쩔수 없이 지옥에 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받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
내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과연 성경에는 인간의 조건과 책임이 언급되어있지 않는가? 성경은 분
명하게 인간의 조건과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조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의 약속---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인간의 조건----- 저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약속---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6)

인간의 조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하나님의 약속--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인간의 조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2:21)

인간의 조건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인간의 조건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하나님의 약속--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러한 성경적인 예는 그야말로 얼마든지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조건과 책임을 언급하고 있으며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말하고
 있다. 과연 예수를 믿지 않아도 예정되어있으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가?


에드워즈라는 사람은 "의지란 그 순간에 가장 강한 성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는 길에서 만난 강도가 "돈을 줄 것인지 목숨을 줄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주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 이유는 "목숨이
돈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나의 순간의 성향이며, "살고싶다"는 나의 욕망이 나의 선택을 강
요했기 때문이다.

만일 "나는 힘으로 저 강도를 제압할수 있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강도에게 대항하는 선택
을 할 수도 있는데, 만일 강도가 자신의 힘보다 빈약해 보인다면 나는 강도에게 돈을 주지 않
고 그에게 대항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한 인간의 책임적 한계를 말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개인을 미리 예정하실 수 있으며 강요를 하실 수가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그러한 예정적인 관점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신을 절대로 섬길 수가 없으며, 어쩔수
 없이 하나님만을 믿도록 강제적으로 예정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이 분명하시지만, 선택권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어왔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선택하고 부르시어 누군가를 그리스도를 믿
도록 하시며 구원의 길에 충분히 이르도록 하실 수 있는 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인간은 자
유의지로 그 선택과 부르심을 거절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그를 믿는 자를 원하신다.
-이런데도 행위구원이 아니라고??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는 있음도 인정
하여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인간에게 그 선택권과 자유의지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노예
의지만을 가진 로봇과 같은 존재라고 단정해야만 하면,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 범죄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범죄는 더욱 하나님의 탓이 되고만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를 벗어나 자신들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하여 준다.
하나님의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대로 진행되어진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사역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의 측면에서는 사람의 책임한계가 있다. 아무리 죄인이라고 하여도 예수를 믿으면
그는 구원을 얻으며, 누구든지 예수를 안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http://www.domawe.net/2016/12/blog-post_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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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의 예정론에 강한 거부감이 있다. 칼뱅의 주장대로라면 태초부터 구원받을자
와 버림받을 자가 정해져 있다는 것인데, 예정론 자체도 전혀 수긍이 안가지만, 그 논리
도 배타성과 공격성이 강하다.
기독신학에 별로 공감은 안하지만, 비교적 배타성이 없는 가톨릭의 보편구원론에 오히려
공감이 간다. -연우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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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자유의지론 (목회와 신학, 1992. 7월호)
성기호 성결신학대학교 총장

Ⅰ. 들머리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은 공존할 수 없는 대립되는 개념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즉 펠라기우스와 같은 도덕적인 종교가는 인간의 의지를 선용함
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을 했고, 어거스틴과 루터와 같이 스스로
의 노력의 한계를 깨닫고 고민 하던 이들은 인간 노력의 무가치성과 함께 하나님께서만 구원
하시며 구원은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무력한 것을 강조해 왔다.

지난 호에서 취급한 것과 같이 루터는 인간의 의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고 마귀를 따
르는 일에 익숙한 노예의지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했다. 인간의 의지는 아담의 타락이후 완
전히 타락하여 영적 인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자유의지라는 말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모든 결정에 자유로우시고
행할 능 력이 있으신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라 한다. 즉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죄를
 짓는 노예의지만 있다고 한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쓸 때에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의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라 고 하는 주장이다.


Ⅱ. 칼빈의 예정론

칼빈도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즉 모든 사람이 동
일한 목적 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벌에 이르도록 미리 정
해져 있다고 하는 예 정론을 주장한다. 영생에 이를 자를 선택된(elected) 자라 부르고, 선택
되지 못한 자를 버림받은 (reprobated) 자라 한다. 흔히 칼빈의 이중예정론(二重豫定論,
Double Predestination)으로 전해지는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
을 창세 전부터 구별하여 예정하셨다고 말한다. 영벌로 예정된 죄인들은 멸망받기 위하여 하나
님에 의해 창조되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태어나기 전
부터 멸망으로 예정되었기에 멸망받기 위하여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예정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영생에 이
를 수 있 게 하시며, 유기(遺棄)된 자는 그들의 악함과 강팍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영벌에
 이르게 하신다고 한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따 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Ⅲ. 절대예정에 대한 웨슬리의 반박

절대예정(Absolute 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변경할 수 없
다는 주장 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일단 예정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뿐 인간
의 태도나 의지에 관 계가 없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웨슬리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무
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교리가 성경의 교훈에 맞지도 않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배치된다는 것을 지적 하며 칼빈의 예정교리를 비판한다.

웨슬리는 예정론이 말하는 바 하나님은 전능하신 폭군(Almighty Tyrant)으로 인간의 의지나
성향에 관 계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인간의 멸망을 결정하는 신으로 묘사
된다고 비판한다. 하나님께 죄인의 멸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신다면 죄인의 멸망이 하나님께
 원인이 있게되며 따라서 하 나님은 죄의 근원이 된다고 말하게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인간의 구원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불변의 경륜에 따라 미리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복음을 전하거나 전도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라 한다. 구원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듣든지 안듣든지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될 것이며, 멸망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들어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니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듣는 일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구원으로든 멸망으로든 이미 어떤 사람의 운명이 무조건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다만 자기가
어느 쪽으로 결정되어 있는지만 모르는 경우라면 이를 바꾸기 위해 인간편에서 수고하고 노력
하는 일은 무의 미하게 된다. 즉 어떤 병자의 장래가 낫든지 죽든지 어느 편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이 와 서 말하기를 너는 약을 먹든지 안먹든지 살도록 또는 죽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가 살 것 인지 죽을 것인지는 모른다 해도 이미 결정된 자기의 운명을 바
꿀 수 없으니 약을 먹는 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정론의 교리는 죄많은 세
상에서 거룩하게 살기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 를 포기하게 하는 비성서적 교훈이라 한다

사람이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이 없어서 자기는 유기되도록 예정되었다고 믿거나 또는 그러
리라고 두려워하게 되면 종교적인 위안 대신 불안과 근심을 갖게 될 것이니 예정론이 주는 해라
고 본다. 또한 선택의 교리에 만족하는 자 역시 그가 선택되었다고 믿는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가 선택된 수에 들지 못했다면 그의 만족과 위로가 헛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택되었다고
믿지만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면 불못으로 거꾸로 던져질 것이기 때문에 그의 선택에 대한 믿음은
 헛될 수밖에 없다.

 1739년 4월 26일에 웨슬리가 뉴게이트(Newgate)에서 죄인들에게 예정과 멸망에 관한 예민한
문제를 설 교하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웨슬리의 공적 활동인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고린도전서 13장과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 고 전하며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권했다. 말틴 슈미트는 이
것을 가리켜, 사람의 운명이 이미 하나 님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변경할 수 없다는 칼빈의 예정
론을 공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 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예정론에 관하여 자기 의견을 표명하고 이를 인쇄하여 분
배함으로 예정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여 웨슬리와 불편한 관계가 조성된다. 이에 대해 웨
슬리는 보편적 구원 의 교리에 관해 설교하며 구원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준비되어
 있다는 예정론을 반박했다. 휫필드의 문서에 의한 예정론 옹호를 웨슬리가 문서로 반박한 것
이 1739년에 브리스톨(Bristol)에서 설교한 '거저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예정론은 기독교의 계시사상을 전 적으로 뒤엎는 망언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를 소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모독적인 주장이라고 말 했다.


Ⅳ. 죄와 구원에 대한 일치된 견해

칼빈과 웨슬리가 꼭같이 주장하는 바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 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의지(natural free-will)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에 서 견해의 일치를 본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고 인간
에게서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다는데 칼빈과 웨슬리는 동의한다.

모든 선은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하는데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것도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아니고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free-grace of God)라는 점에서 웨슬리신학은
 칼빈신학과 공 통의 견해를 견지한다. 특별히 웨슬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칼빈주의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온당치 않 다는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 자기의 주장과 칼빈주의는 머리털 하나의
 차이밖에 안되며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멀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술회한다.

 칭의와 성결에 관하여 웨슬리가 강조하는 것을 본 당시의 교계는 그가 선행으로 성화되는 도리
를 가르 치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이에 답하기 위하여 웨슬리는 1763년에 "구원의 성서적 방법"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를 통해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며 성 결의 은총도 믿음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믿음만이
구원과 성결의 유일한 조건인 것을 밝힘과 동시에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하나님 의 주도적인
역사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 으로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칼빈과 대립을 보이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웨슬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 는
점에서 칼빈과 차이를 보인다.


Ⅴ. 하나님의 선행은총,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도 있고 혹 거역할 수도 있는 인간의 능력을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라 부른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담의 타락으로 모두 잃어버렸으나 그리스도의 구
속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 어 자기 구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 후에도 손상 이 없이 보존되고 있다는 필라기우스주의와 다른 점
이 여기에 있고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 이나 역할을 부정하는 칼빈주의와의 차
이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전적타락과 무능력의 상태에 있는 원죄하의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
을 만큼 의 지의 자유가 회복되는가를 다루는 것이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ting grace
 또는 prevenient grace) 의 교리이다. 선행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웨슬리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죄에 죽은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고 스스
로 하나님 께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행적 은
총을 통해 하나님의 선 한 소원에 웅답하여 구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생명의 길
을 선택하는 능력이 부여된다는 것 이 웨슬리의 구원관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연인에게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진행 하시기에 인간의 책임이 고조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신다(요 1:9). 사람들은 이 빛 가운데서 비췸을 받아 자비를 사랑하곤 옳
은 일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따르고 싶은 선한 소원(good desire)을
 가지게 된다. 웨슬리는 이러 한 선한 소원을 생래적 양심(natural conscience) 또는 선행적
은총이라 부른다.

따라서 양심에 화인(火印)을 맞아 분별력을 잃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유한 선행적
은총을 활 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또는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여
죄를 범하고 멸망을 받 게된다고 한다. 그런데 구원에 응답할 만한 양심 또는 선행은총을 누
구에게나 주시고 다 구원에 이르기 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완전한 타락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자연인
(natural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에게도 태어나면 서부터 가지는 양심이 있고 하나님의 선행
은총으로 그 양심이 구원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회복 되기에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
인이란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가 부여되어 있 고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지를 악용하여 죄의 길을 선택하여
고집할 때, 구원은 거부되는 것이라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는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한 다.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된 자유의지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응답할
 수 있을 만큼 분별 의 능력과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에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인간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고 선택할 수 있는 선행은총을 주신다.
 생래적인 양심 또는 회복된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할 때 구원에 이르
게 된다.
인간의 양심 또는 의지 자체가 선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행(先行)
은총을 따라 의지를 선용할 때 구원을 받게되는 것이니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고 하나
님의 은총이 된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인간에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
하시니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것이며 거저 주시는 바 은혜가 된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구원으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에 대답해야 할 자유의지
를 악용 함과 동시에 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악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하나 님의 선행은총과 부르시는 음성을 거역하고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구원의 길에서 처음부터 멀어지게 된다.
비록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지 않고 순종하여 거듭나는 은혜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사탄의 계속
적인 유 혹에 따라 신앙의 길에서 벗어날수 있다. 선행적 은총은 죄인을 깨닫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예비적 은 혜일 뿐이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중생
의 은혜에 이른 자라 하더라도 최종의 구원 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항상 깨어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신다. 그러나 주신바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며, 구원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지만 제시되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기에 구원의
 성취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협동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신인협동설
(Synergism)이다. 후 대의 신학자들 중 웨슬리의 신인협동설을 해석할 때 그것은 인본주의 입
장에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주장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의 자세를 강조한 신단 독설(Monergism)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Ⅵ. 마무리

웨슬리가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도덕폐기론
자 (Antinom-ianist)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뿐만 아니
라 경험 적으로 볼 때도 인간의구 원이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주장을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
다. 도덕폐기 론자들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선을 행한다든가 법을 지키는 일이 무의
미하며 이것은 구원 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 꼭같이 해당된다고 하는데, 이에 반대하여 기독교와
 윤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웨슬리의 입장이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죄론(罪論)이나,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 론에 있어서 웨슬리의 입장은 칼빈과 일치한다. 다만 극단적인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주의
에 반대하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결단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믿음(solafideism)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구원을 적용하는
 일 에도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올 통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유의지를 부여하시므로 역시 구원에
있어서 하 나님의 역사는 주도적(monergism)이라는 점에서 개혁자들의 신앙과 일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 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선행은총(先行恩寵)이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어진 다고 하는 점에서 있어서는 웨슬리의 주장이 개혁자들에게 가깝다기보다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가톨 릭적이라 할 수 있다.

선교 1세기만에 한국교회가 이룬 놀라운 부흥은 20세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때에 세계선교의 책임이
 한 국교회에 메워진 것을 깨닫게 한다. 십자가와 거기에 달리신 만인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요3:16,행 16:31)를 힘차게 전하
여야 하겠다. 이미 구원에 이른 이들은 자기가 받은 구원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을 감사하고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헌신 봉사하여야 할 것이며,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 부
탁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선교와 전도에 있어서는 웨슬리처럼 구원의 소식을 전함이 효과
적일 것이다.
복음을 듣는 이 들의 결단을 촉구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죄인의 죽음을 기뻐
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진리를 아는데 이르고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일 것이다.

주(註)-----------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Ⅲ, xxi. Ⅰ
 2. Calvin, Institues, Ⅲ, xxiii Ⅰ.
 3. John Wesley. Letter from Wroot on 18th August, 1725.
4. Wesley, Sermon: Free Grace, 11
5. Ibid. 6. Ibid.
7. Wesley, Works, A Thought on Necrssity, Ⅵ, 6.
8. Martin Schmidt, John Wesley (New York: Abingdon Press, 1963), p.27
9. Schmidt, p. 51.
10. Albert C. Outler. ed. , John Wesley(New York: Oxford Univ. Press, 1964, p. 350; G. D. 셀저, 송흥국 역, 「존 웨슬레의 재발견」(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 158.
11. Robert W. Burtner and Robert E. Chiles, eds., A Compend of Wesley's Theology(New York: Abing- on Press, 1954), pp. 132~133.
12. Wesley, Letters, iv; G. D. 셀저, 송홍국역, 「존 웨슬레의 새발견」, p. 158.
13. 이성주, 「웨슬리신학」(서울: 성광문화사, 1987), p.143.
14. 콜린 윌리암즈 저, 이계준 역, 「존 웨슬리의 신학」(서울 : 전망사, 1986), p.43.
15. Outer, John Wesley, p. 273.
16. Wesley, Works, vi, "Working our own salvation", pp . 508~590
17. Wesley, SermonsⅠ, p.183 (The Spirit of Bondage and of Adoption), sermons Ⅱ. p. 214 (Original Sin).
18. Wesley, Sermons Ⅱ, p. 445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19. Wesley, SermonsⅠ, p.37~38 (Salvation by Faith).
20. George D. Cell저, 송홍국역, 「존 웨슬레의 재발견」,p. 167.
21. 콜린 월리암즈 저, 이계준 역, 「존 웨슬리의 신학」, p.48.


성기호/서울대 상대와 성결교신학교를 졸업했으며, 드루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저지 한인교 회와 로워박스 한인교회에서 목회했으며, 지금은 성결교신학대학교 총장
으로 있다.
-------------------------(이글은 안명준교수의 칼빈신학연구 CD에서 퍼온 글입니다)



-출처: http://www.kirs.kr/data/calvin/calvin046.pdf 문서의 HTML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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