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25.

[죽음-추락사] 등산사고 산악 등반 실족 그리고 죽음의 도전






[죽음-추락사] 등산사고 산악 등반 실족 그리고 죽음의 도전




[추락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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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2
[추락사]






러시아 도전자, 스카이 워킹하다 추락사


CCTV 한국어방송  2015. 3. 25.

보고만 있어도 아찔한 높이에서 아무런 장비 없이 좁은 길을 걷는 '스카이 워커'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스카이 워킹'의 짜릿함과 즐거움에 도전하곤 하지만 자칫 사고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러시아의 '스카이 워커'가 타워 크레인 위를 걷다가
추락해 숨졌습니다.

표준 YouTube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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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고미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미영(高美英, 1967년 7월 3일 ~ 2009년 7월 12일)은 대한민국 전북 부안 출생의 산악
인이다. 작은 체구임에도 2007년 여성 산악인으로는 최초로 8,000 미터급 산 3개 등정에
 성공하는 등 대한민국 내 여성 산악인의 대표주자로 꼽혀 왔다. 2009년 등산 사고로 인
해 세상을 떠났다.

고미영은 2009년 7월 10일,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산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2009년에만 4개
 봉우리를 오르는 등 총 11좌 등정에 성공했다. 다음날 11일 낭가파르밧에서 하산하던 중
 해발 6,200 미터 지점 '칼날 능선'에서 실족하여 목숨을 잃었다. 그녀가 추락한 장소는
 눈사태와 낙석이 자주 발생하여 대원들끼리 로프로 몸을 묶을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변을 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사고 직전까지 또다른 산악인인 오은선과 함께 8,000 미터급 14좌 등정 기록을 놓고
 경쟁을 벌여 왔다.

-위키백과 '고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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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고상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상돈(高相敦, 1948년 12월 29일 ~ 1979년 5월 29일)은 1948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산악인
이다. 제주시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성장하였다.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을 마치고 중퇴하였다. 청주대학교 시절, 산악반에서 전문적 등
반 훈련을 받았었다. 중퇴 후 청주 연초 제조창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며 직장 내에 '상당
산악회'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1970년 3월에는 대한 산악 연맹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1974년~1977년까지 에베레스트
산 원정대 훈련에 참가하였다. 1975년엔 제1차 정찰대로 에베레스트 산 현지 훈련에 참가하
고 1977년, 에베레스트 산 원정대 정규 대원으로 선발된다. 1971년 네팔 정부에 입산허가서
를 제출한 지 6년 만인 1977년에 등반할 수 있었고, 그해 9월 15일 낮 12시 50분 에베레스트
 산을 한국인 최초로 등정하였다.
당시 고상돈이 한 말은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였다. 정상의 눈을 손으로
파헤친 뒤 성서(성경) 한 권과 사진 석 장을 묻음으로써 먼저 간 동료들을 추모했다고 한다.
1979년 알래스카 산맥(Alaska Range)의 디날리 산(6194m) 원정대에 참가하여 1979년 5월 29일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하산 도중, 이일교와 함께 1,000m아래로 추락하여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박훈규는 목숨은 건졌으나 10개의 발가락과 7개의 손가락을 잃는 중상을 입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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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히말라야 등반’ 산악인 2명 추락사
2011.11.12 (07:26)  (08:04)뉴스광장 | VIEW 11


<앵커 멘트>

히말라야에서 한국 산악인 2명이 추락해 숨졌습니다.
박영석 대장의 수색 작업에도 참여했던 산악인이었습니다.
구경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해발 6440미터의 네팔 촐라체 북벽을 오르던 한국 산악인 2명이 떨어져 숨졌습니다.

현지시각으로 어제 낮 12시쯤 촐라체 북벽 6천 미터 지점에서 K2익스트림팀의 김형일 대장과
 장지명 대원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한국산악연맹이 밝혔습니다.

베이스캠프에 남아있던 원정대는 사고 예상 지점을 수색한 결과 8시간 만에 천미터 지점에서
 김 대장 등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사고가 난 촐라체 북벽은 가파른 경사의 빙벽과 바위로 이뤄진 지역인데다 눈사태와 폭풍설이
 잦은 험난한 코스입니다.

김 대장 등은 특히 이 코스를 최소한의 장비를 갖추고 빠른 속도로 정상에 올랐다 36시간 만
에 복귀하는 목표에 도전중이었습니다.

김 대장 등은 촐라체 북벽을 오르기 위해 지난달 20일 출국했다가 일정을 변경해 안나푸르나
에서 실종된 박영석 원정대의 1차 수색 작업에도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KBS 뉴스 구경하입니다.

-출처: 뉴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238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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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마테호른의 비극

마테호른을 최초로 등정 성공하고 한스러운 사고

에드워드 웜퍼는 다른 등반가와는 달리 초년에는 등산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20세 때 처음 영국의 어느 출판사가 알프스의 명산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등산이라곤 책
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 산을 본 적도 없고 하물며 산에 오른 적도 없었다.

20세 때의  화가로서 처음으로 등산에 참여했다.
영국산악회가 이끌었던 알프스 몽펠부 원정에 산을 그리는 화가로 참가하여 원정은 실패했
지만 그림을 잘 그려내는 임무에 충실했고 첫 인연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1865년 7월 14일, 8번째 시도에서 마터호른의 정상에 올라서고야 만다. 세계 등반사는 물론
이거니와 윔퍼 자신도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에드워드 윔퍼는 생애 최고의 영광
과 가장 쓰라린 비극을 이 날 하루에 모두 맛본다.

당시 윔퍼 일행은 스위스의 회른리 능선을 통하여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이드 장 앙투안느 카렐 일행은 이탈리아 능선을
 통하여 오르고 있었기에 영국과 이탈리아가 마터호른 초등을 놓고 격돌한 셈이 되었으며
웜퍼 일행이 먼저 정상에 닿은 것은 200m 차이였다.

카렐 일행은 그들이 정상에 오른 것을 보자 정상에 오르지 않고 발길을 되돌려 하산해 버렸다.
정상에서 한시간 가량 머무르면서 등정자 이름을 병에 넣어 정성스럽게 남기고 하산을 준비했다.


초등의 기쁨인지, 하산의 안전에 대한 고려가 적어서인지 비극은 하산 길에서 벌어진다.
자크즈(자크로 불림)가 먼저 내려 가고, 19세이며 등산실력이 떨어지는 해도우가 두번째로
내려가면서 자크가 해도우을 잡아 주려는 순간 해도우가 미끄러져 연결했던 자일과 일행이
차례로 끌려 갔다. 자크의 비명소리를 듣고...

다우그발더와 윔퍼가 몸을 바위에 끼워 버티니 자일이 팽팽해 졌고 버티는 중에 더글라스와
다우그발더의 중간에서 자일이 끊어졌다. 끊어진 후 예비 자일이 많았음에도 그 자일이 가장
약한 자일이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신없이 그 자리에 30분 동안 멍하니 있다가 살은 사람은
하산은 한다.

7명의 일행 중 4명이 1,200m 아래의 빙하까지 추락하여 사망한 것이다.
등반사에서 <마테호른의 비극> 이라 일컬어지는 이 사건이 등정 역사에 후폭풍은 엄청났다.





[마터호른 추락사고 현장을 재현한 구스타프 도레의 그림]


-출처: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 중에서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6Nil&articleno=1455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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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른스트 플라츠(Ernst Platz)가 그린 19세기 후반의 일러스트. 피톤이 발명되지 않았던
 당시의 안자일렌 등반에서 추락이란 곧 몰살을 의미했다. (출처 : A HISTORY OF MOUNTAIN
 CLIMBING by Roger Frison-Roche & Sylvain Jouty 94~95페이지)


▲ 찰리 펠로우(Charles Fellows)의 몽블랑 등정을 그린 판화(1827년) 당시의 등반가들이
알펜스톡과 로프를 병행해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출처 : A HISTORY OF MOUNTAIN CLIMBING
 by Roger Frison-Roche & Sylvain Jouty 4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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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사

말 그대로 높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떨어져서 그 충격으로 죽는 것. 당연히 중력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낙사(落死)라고도 부르나 표준어는 아니다.

고공에서 암벽등반 혹은 작업 중에 발을 헛짚거나, 자살 등을 목적으로 뛰어내려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족사와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다.

失足死 [실족사]

산이나 다리 따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는 일.

문자 그대로 발이 없어져서 발을 헛디뎌 죽는 것을 의미한다. 높은곳에서 떨어져 죽건, 물에
 빠져서 죽건 일단 발을 헛디뎌 생기는 사망사고는 실족사라고 정의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에서 한잔 하신 어르신들이 이따금 실족사하기도 한다. 공사현장에서도
이따금 발생한다. 그래도 요즘은 안전장치가 많이 좋아져서, 다치긴 해도 죽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다.

정의상 실수인 경우가 많지만 정확한 사인이 규명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자면 장준
하 선생, 노무현 전 대통령. 이 때문에 추락사로 살해하고 나서 실족사나 투신자살로 꾸미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크레용 신짱을 집필한 만화가 우스이 요시토도 등산 도중에 사진을 찍다가 실족사로 명을 달
리하고 말았다.

-출처: 나무위키 '실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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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지대 ]


6. 등반가인 에트와르 위스 뒤낭은 높이 7500미너가 넘는 곳을 '죽음의 지대'
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인간은 6000미터 높은 곳에서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7000미터를 넘으면 고도
 적응이 어려워진다. 이 고도에서는 적응한다 해도 그 시간이 제한된다. 휴식을
 취해도 이미 소비한 에너지를 넉넉히 보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도 7000미터에 이르면, 영국사람들이 '쇠퇴현상'이라고 말하는 중대한 장애가
 일어난다. 처음엔 목이 아프다가 대수롭지 않던 염증이 악화되며 궤양이 일어
난다. 동상은 유기 조직에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한층 어려운 고비에 이른다. 심
장이 적응할 수 없게 되어 팽창한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비타민 부족으로 식욕을
잃는다.

이처럼 생리학적으로 자기의 한계를 벗어난 높은 곳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는 자는
 결국 '하연 죽음'의 제물이 된다.-뒤낭


14. 등반은

등반은- 어떤 가능성
등반은- 모험
등반은- 적극적인 자연체험
등반은- 유희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스포츠
등반은-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
등반은- 죽음과 맞서서 얻는 깨달음
등반은- 천국'에서 지상으로의 옮아감
등반은- 차안과 피안을 잇는 다리
등반은- 높은 의식 세계에 대한 탐구
등반은- 하나의 가능성


17. 당신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높은 곳에서는 사람의 머리가 혼란을 일으키고 행
복감에 젖게 됩니다. 즉, 당신이 말하는 기이한 체험은 모두 망상이예요.
 산소부족에서 오는 이러한 망상은 죽어가는 사람이 의식을 잃으며 품는 공상과도
 같습니다. 그 공상은 두서도 없고 앞뒤가 맞지 않아서 더 위험해요.
-마취전문 여의사


25. 낭가 파르바트에서 겪었던 극한 체험을 통해 나는 죽음에 가까울수록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그러한 결
말이 불가피하다고 완전히 납득이 가야한다. 알 수 없는 세계로 넘어가는 불안이나
 회의는 없어지고, 죽음의 현실만이 자기 것이 되어야한다.


3장 추락사-자신에게는 편안한 죽음

33. 추락할때이 심리상태와 그 변화를 처음으로 연구구한 사람은 취리히 대학의
지질학 교수이자 등반가인 알베르트 하임이다. 그가 1892년 스위스 산악회 연감에
 발표한 '추락사에 관한 노트'는 이 방면의 연구로서는 최초의 글이다. 아래글은
본문그대로이다.

별안간 조난을 당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가.
추락은 암벽에서나 빙벽에서나, 또는 눈사태에 휩쓸리거나 폭폭에서 떨어졌을 때
나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더 말한다면 떨어져 죽은 사람의 주관적 감각은 건축
현장에서 떨어질 때나 암벽에서 떨어지는 경우에도 다를 바가 없다. 또 차에 치이
거나 기계에 물리거나 물에 빠지거나 전쟁터에서 쓰러지거나 같은 느낌으로 죽음
과 대면한다.

..이런 경험에서 살아난 사람들의 자료를 25년 이상이나 모으게 된 동기는 내 자
신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조난자 거의 모두(95%이상)에게다소 그 느낌에 차이는
 있으나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그특징을 간ㅊ려보면 다음과 같다.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불이 났을 때 놀라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
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불안도 절망도 고통도 없다. 오히려 냉정해지고 체념
하게 되며 마음이 가라앉고 동작이 빨라진다.
사고활동이 활발해지고 두뇌의 회전속도나 사고의 깊이가 평소보다 수백 배나 늘
어난다. 이 우발적인 사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분명히 내다보여며, 정
신의 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행동이 번개같이 빨라지며
 사고판단이 정확해진다. 이때 자기의 과거 일이 갑자기 떠오르는 경우도 많다.

추락하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장밋빛 구름이 둥둥 떠있는
 맑게 갠 하늘로 빨려 들어간다. 마침내 고통없이 의식이 꺼진다- 보통 이때가 어딘
가에 부딛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소리가 본인게 들리지만 아픈 줄은 모른다. 감
각기관 중에서 청각이 제일마지막에 없어지는 것 같다. 좀더 상술하면..

먼저 고통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총탄에 맞은 군인은 누구나 총알이 자기 몸에
박힌 줄 몰랐다고 말한다. 그들은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거나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비로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추락하는 이 역시 팔다리가 축 늘어진 것을 보고야 자기의 골절을 안다. 발팔에서
떨어진 16세의 이탈리아 소년은 머리와 어깨 뼈가 부러졌는데, 부러지는 소리가 났
으나 아픈 줄 몰랐으며 이 정도면 혼자서 병원까지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
다.36

나도 16세에 마차에 치인 적이 있다. 그때 뼈가 상하는 소리를 들으며, 큰 뼈 하나
와 중간 정도의 뼈 네 개 그리고 작은 뼈 두 개가 부러지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의사에게 그대로 말했다. 그러나 부러진 데가 다리인지 팔인지 몰랐고 사람들이 나를
 들어올렸을 때 왼쪽 다리의 발목이 뒤틀리고 무릎 관절이 빠진 것을 보고서야 비로
소 상황을 알았다. 아픔을 느낀 것은 한 시간 정도 뒤의 일이었다.

산에서 돌에 맞아 다리나 팔을 다친 사람은 다친 데를 자기 눈으로 보고서야 고통을
 느낀다. 나 역시 1872년 스위스 동부 알프스의 젠티스에서 떨어졌을 때 머리와 등을
 치는 소리를 듣고도 아픈 줄을 몰랐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돌발사고에서는 고통을 즉각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아마 극도의 정신적 흥분 때문이다.
 그 흥분이 최면 상태 비슷한 작용을 하는데다가 다른 생각들이 머리안으로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에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어서이다. 아무튼 떨어저져 죽은 사람이 고
통을 모르는 것만은 틀림없다.

추락한 사람들의 보고는 모두 비슷한 구석이 많다. 북부 보헤미아 지방의 어느 우체국
장은 그가 여덟살 나던 1871년에 암벽에서 22미터 아래로 떨어졌을 때의 일을 이렇게
말했다.
"떨어질 때 불안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공중에서 서너 번 곤두박질한 일이 생생하다.
 그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버지가 준 주머니칼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머리를 심하게 부딫치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한가지 강조하고 하고
싶은 것은 떨어지는 동안에 조금도 불쾌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불안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마 그보다 앞서 의식을 완전히
 잃었던 것 같다."

추락자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집
중되는 이른 바 '의식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43

우리가 추락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영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며, 극히 단시간 내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도 그때문이다. 그것은 꿈
과도 비슷하다. 아무리 길고 내용이 풍부한 꿈도 사실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
시간을 재보면 긴 꿈도 몇 초 동안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시간 개념의 상대성을 이
처럼 뚜렷이 나타내는 예도 없다.
.. 이처럼 암벽에서 추락할 때 추락자는 의지의 활동이 소멸되면서 꿈꾸는 상태에 이
른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에 관념 연합이 자유롭게 일어난다면, 눈 앞의 영상이 입체
적으로 나타난다거나 어떤 소리가 들린다거나 또는 지난날의 일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는 보고는 모두 있을 수 있는 현상들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도 이와같이 꿈의 세계로 갑자기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책을 읽
다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나 어떤 소리에 깜짝 놀라는 일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책을 읽다가 깜빡 졸고, 그 4분의 1초 동안의 잠속에서 극히 짧은 토막 꿈을 꾼
것이다.103.

"높이가 30미터나 될까, 수직에 가까운 통바위 위로 등반 루트가 보였다.
그 하반부에는 밑에서 위로 틈이 나 있었는데, 바위는 불그레하고 푸석푸석했다. 나는
 두 발로 조그마한 홀드를 딛고 한 쪽 손을 바위틈에넣어 매달리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힘을 빼는 이 바위틈의 말단에 내 몸이 점점 가까워져 갔다. 작은 오버행 뒤에서 확보
하고 있는 동생보다 나는 벌써 12미터나 위에 있었다. 두 서너 피치만 더 올랐으면 통
바위 중앙에 있는 작은 층계참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피치에서, 팔 밑에 있는 리스 rise의 모서리가 퍽하고 갈라졌다. 떨어
졌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벌써 동생의 머리 위를 지나가서 '멈춰, 멈춰!'하고 소리쳤다.

나는 조그마한 토사지대에 세차게 부딫치고 튕겼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어딘가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그대로 다시잡은 바위 선반으로 떨어졌다. 나는 두 손으로 달라붙으
려고 했지만 떨어지던 힘에 밀려 다시 몸이 거꾸로 되면서 그대로 추락했다. 이렇게 바
운드가 심하면 절벽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  내 몸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여러
차례 조난자를 처리한 것처럼, 이번에는 동료들이 내몸을 부대에 넣고 골짜기로 끌어내
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처럼 몸 밖에서 자기를 보는 체험을 미국사람들은 '아웃 오브 보디'라고 하는데, 이런
 경험은 비록 드물긴 하지만 추락할 때 일어나는 중요한 감정의 하나다.
죽음의 위협을 피할 수 없으면 추락자는 '자기를 관찰하는 자'가 되며 자기 몸에서 빠져
나와 '떨어지고 있는 자기를 뒤쫒는다'.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에 지배되지 않고 냉정해
지며, 마침내 시간공간 감각이 사라진다. ~118

-발췌출처: 죽음의 지대
라인홀트 메스너/김영도역/한문화간/2009년3쇄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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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라인홀드 메스너/등반은 높이보다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하다]
 | 승인2008.04.30 12:5 글·사진 김세준 중앙일보 기자 (sjkim@joongang.co.kr)



▲ 히말라야에서 무산소 등정과 알파인스타일의 등반을 추구했던 진정한 알피니스트
라인홀트 매스너.


1950년 프랑스의 모리스 에리조그가 안나푸르나8091m 정상을 밟으면서 시작된 히말라야
 8000m 초등 레이스는 1964년 시샤팡마8046m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새로운 스타
일의 등반활동이 히말라야에서 펼쳐졌다.
1986년 10월 16일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는 42세의 나이로 로체8516m 정상을 밟았
으며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의 첫 완등이란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메스너는 알프스에서
의 등반 스타일인 ‘알파인 스타일’을 히말라야에 적용시켜 1978년 에베레스트8850m
무산소 등정, 1980년 단독 등정, 1982년 한 시즌 3개봉(칸쳉중가·가셔브룸 2봉·브로드
피크) 연속 등정, 1984년 가셔브룸 1봉8068m과 2봉8035m의 종주 등반에 성공했다.

히말라야 등반은 메스너에게 있어 위대한 도전이며 산에 있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산을 경쟁 상대로 삼지 않았고 등반을 하나의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단
지 즐겼을 뿐이다.
“메스너는 8년간의 준비 끝에 낭가파르밧8125m 단독 등반을 강행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사람들은 메스너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 자체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등반
스타일에 대해 부러워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독일의 권터 슈트롬의 말처럼 그의 등반
스타일은 당신 산악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참다운 목표는 최고의 한계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완성이야말로 끝없이 무한한 것”이라고 말했다.
메스너는 히말라야의 위대한 자연 속에서 ‘칼리페(티베트 어로 침착한 발걸음)’를 내
디디며 자신의 꿈을 차근차근 실현했다. 16년간의 히말라야 원정 속에서 항상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고독·불안·절망을 뛰어넘어 인류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주었다.

지난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열린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
기념행사에는 에드먼드 힐러리 경을 비롯해 에베레스트 최초 여성 등정자인 일본의 다베이
 준꼬, 라인홀트 메스너, 아시아인으론 최초로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른 엄홍길 씨 등
 세계적인 산악인들이 몰려 들었다.
그 현장에서 세계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59세를 만나 그의 등반 철학과 인생에 대해
 들어 보았다.




1970년 낭가파르밧 루팔벽 초등을 시작으로 히말라야에 첫 발을 내디뎠는데 당신의 새로운
 등반 스타일은 현대 등반사를 바꿔 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러한
 등반 행위에 대해 찬사와 함께 질시와 비난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1944년 북 이탈리아의 돌로미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49년부터 바위에서 놀면서 자연스
럽게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나의 산악활동은 20대 중반까지 알프스에서의 암벽등반 활동과
 그 후 40대 초반까지의 히말라야 8000m 고봉 등반으로 나눌 수 있다.
1969년까지는 자나 깨나 알프스에만 몰두했다. 1953년 독일의 헤르만 불이 초등한 낭가파르
밧은 독일인에게는 특별한 산이다.
1968년 낭가파르밧 독일원정대에 참가한 산악인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성공하리라 믿었지만 알프스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히말라
야 8000m 고봉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히말라야에서의 등반 활동은 초기에는 주로 어려운 산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낭가파르밧과 마나슬루8163m를 오른 후, 내 자신에 맞는 스타일의 등반을 추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당시 원정대의 자금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알프스를 오를 때처럼 자신이 직접 장비를 짊어지고 오르는 ‘알파인
스타일’이었다.
1975년 오스트리아의 피터 하벨러와 함께 알파인 스타일로 가셔브룸 1봉을 오르는 데 성공
했다.
그리고 애초부터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꿈 꾼 것은 아니고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얻은 결과다. 당시 나는 ‘인간이 8600m에서는 산소 없이 활동할 수 없다’는 일반
인들의 상식을 깨버렸다. 그들의 믿음을 허물어 버렸으니 많은 질시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
하지 않겠나.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에는 이제 익숙하다.
나는 등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고전적인 등반가는 아니다. 대신 ‘창조적인 정신Mental
 Power’을 중요시했다.
내 신체조건은 남들보다 뛰어나지도 않다. 그러나 도전하려는 능력이 뛰어났고 목표를 정하
면 끝까지 이뤄내려는 성취욕이 강하다는 것이 남과 다른 것 같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와
서는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등반행위인 한 시즌 3개봉 등정과 2개봉 종주 등반을 시도했다.
결국 성공했으며 1984년 여름 이탈리아의 한스 카머랜더와 함께 해낸 가셔브룸 1봉과 2봉 종
주 등반은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8000m 14개 봉을 모두 등정하고 자서전에서 ‘등산의 참다운 기술은 살아남는데 있다’고 밝
혔다. 그렇다면 16년간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를 오르면서 수많은 위험에 직면했을 텐데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나?

낭가파르밧 루팔벽 초등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낀 사건이면서 가장 힘들었던 곳
이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길다는 루팔 벽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위험에 빠지기 쉬운 코스다.
10분 간격으로 눈사태가 쏟아지고, 위에 신설이 내리면 오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체력보다는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나는 동생 권터의 죽음을 보았고 3일간 로프나 식량은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도 없이 최악의 상황에서 하산했다. 당시 모든 조건은 우리들을 죽음의 궁지
로 몰아 넣었다. 지옥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1986년 10월 16일 한스 카머랜더와 로체 정상을 밟았을 때 어떠한 느낌이었나?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날씨가 좋아서 3일간 운행 끝에 정상을 밟았으나 갑작스럽게 바람이 엄청
나게 불고 나빠진 기후 때문에 내려가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베이스캠프에 내려와서야
‘나만의 스타일에 의한 등반이 끝났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8000m 등반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당시 나의 유명세로 보아 히말라야 원정을 꾸린다면
 쉬웠겠지만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 내 앞에 펼쳐진다는 생각에 히말라야 등반의
 꿈은 접었다. 1990년대 들어 북극점 횡단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세계 산악계의 흐름은 당신의 8000m 14좌 완등 이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4좌를 완등할 당
시와 근래의 알피니즘은 어떠한 변화가 있나, 그리고 히말라야 원정에 대해 젊은 산악인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는가?

1986년 이후 원정대 규모가 커지고 원정 팀도 많아졌다. 같은 노멀 루트를 올라가도 70~80년대
의 셰르파는 짐만 옮겨주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등반가들이 셰르파가 깔아 놓은 길을 따라 등
반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히말라야 등반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에베레스트의 경우, 당시에는
 아이스 폴에 사다리를 놓거나 루트를 보수하는 것도 등반가들이 직접 했지만 요즈음은 셰르파
가 이러한 일들을 한다.
올 시즌 에베레스트에서는 8500m의 사우스 콜까지 수십 명이 올랐으나 마지막 구간에 로프가 깔
리기만을 기다려 서로 눈치만 보다 셰르파가 마지막 구간에 로프를 깐 후 등정했다고 한다.
로프 없이 에베레스트의 마지막 관문인 힐러리 스텝을 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셰르파의 힘을 빌려 등반하는 상업등반대는 산악인이 아니다. 등반가가 자신의 일을
셰르파에게 맡기고 산을 오른다면 이것은 등반이 아니라 관광일 뿐이다. 올 시즌 에베레스트를
오른 등반가 중 40%는 관광객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성
취감’을 맛볼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위험과 어려움 등 온각 난관을 헤치고 정상에 올라야 희열을 맛볼 수 있다. 등반
가 자신이 스스로 루트 공략을 하는 것이야말로 히말라야 등반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산은 움직이지 않고 항상 거기에 있다. 젊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산을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어떻게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능력에 맞게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를 비롯한 10명의 산악인들이 메스너의 뒤를 따라 14좌를 완등
했다. 한국은 1962년 처음으로 다울라기리 2봉7751m에 정찰대를 보내면서 히말라야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4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14좌 완등자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 한국산악계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산악계는 1972년 마나슬루에서 원정 등반으론 가장 큰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나는 마나슬루 남쪽 사면에 있었고 한국 팀은 북쪽 사면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북쪽 사면
은 난이도가 쉬운 대신 바위가 많고 위험에 노출된 루트였고 남쪽 루트는 코스가 어렵지만 덜
위험했다. 눈보라와 함께 엄청난 눈사태가 일어났고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아 변을 당하지 않았다.
그 후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의 엄홍길 씨가 2000년 K28611m를 끝으로 8000m 14좌 완등에 성공한 것도 알고 있다. 이번
시즌 에베레스트 첫 등정자는 엄홍길 씨다. 당시 엄 씨가 티베트에서 올라 정상을 밟았을 때 나
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한국은 암벽등반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히말라야 원정은 나라의
경제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 산악계가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히말라야에서 펼치는 활
동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너무 아름답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곳을 가라’고 권하고 싶다. 등반은 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똑같이 걷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라면 지금 도전해보라. 등반가가 힐러리 경처럼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는 것만으로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은 잘못이다.


언제 8000m 14좌 완등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됐는가? 그리고 당시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와 마
르셀 루디에는 14좌 완등이라는 골인점을 향해 당신을 추격했다.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가?

쿠쿠츠카나 루디에 모두 훌륭한 산악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늦게 히말라야에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14좌를 완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나는 한번
의 등정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같은 산이라도 다른 코스로 정상을 밟으려고 노력했다.

처음부터 14좌 완등을 목표로 히말라야를 찾은 것은 아니다. 그전에는 불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1982년 한 시즌 3개봉 등정에 성공하면서 8000m 14좌 완등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쿠쿠츠카는 1980년대 가장 뛰어난 등반가였다. 2주 동안 설동을 파고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
다 등정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 부딪혀도 그것을 뛰어넘었던 훌륭한 산악인이었다. 만일 내가 히
말라야 등반 중 변을 당했다면 쿠크츠카가 현재 나의 위치에 올랐을 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루디에는 1986년 마칼루 등반 중 사망했고, 쿠쿠츠카는 1987년 두 번째로 8000m 14좌 완
등에 성공했으나 1989년 가을 로체 남벽을 등반하던 중 추락사 했다.)


1988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겨울 올림픽에서 IOC는 메스너와 쿠쿠츠카에게 메달을 수여했으
나 당신은 거부했다. 왜 거부했으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지?

메달을 받는다는 것은 등반이 경쟁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수영이나 스키 등은 경기지만 산을
 오르는 것은 경기가 아니다.
그리고 산을 오른다 해도 루트가 각기 다른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나. 이것이 내
가 수상을 거부했던 이유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동안 두 명의 동생을 산에서 잃었다. 특히 권터의 죽음은 당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것으로 안다. 지금도 그 마음의 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추억과 흔적은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법이다. 권터는 바로 아래 동생
으로 나의 영원한 자일 파트너였다.
산도 잘 올랐고 낭가파르밧을 같이 등정하다 하산길에 죽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지난
해 권터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벌거벗은 산The Naked Mountain>을 출간했다
권터가 죽은 지 32년이 지났지만 그를 생각하며 책을 썼을 정도로 아직도 동생을 사랑한다. 권터
의 죽음은 나의 책임이었고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살아있는 존재로 남아 있다. 지금 살아있으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가끔씩 생각해 본다.
지그프리트는 1985년 알프스에서 가이드를 하다 번개에 맞아 목숨을 잃었고, 당시 티베트에 있었
던 나는 몇 개월 후에 그 사실을 알았다.


이제 예순 살의 나이를 바라보게 됐다.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북 이탈리아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1살짜리 어린 막내를 비롯한 다섯 식구가 40마리의 야크를 키우
고 농사를 지으며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다. 4명의 자식 중 가장 큰 아이는 22살로 외국에서 공부
를 하고 있다. 현재 내 인생의 중심은 아이들이다. 사람은 나이에 맞게 자신의 생각을 바꿔가며
 살아야 한다.

61살이 되는 2005년부터는 또 다른 삶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사막을 횡단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
아마도 무척 바쁠 것 같다.
그는 ‘히말라야 설산에 올라 눈구덩이를 파고 요기 생활을 해볼까 한다’는 농담을 끝으로 인터
뷰를 마쳤다.

출처; 마운티
http://www.emount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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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생생한 영적 체험,추락]
 | 승인2008.04.30 12:52
‘카라비너가 바위에 긁히면서 화약 타는 냄새를 맡았다’.
글 박성용 기자(slowman8848@dreamwiz.com) 사진 김범수 기자(photobuck@yahoo.com)



▲ 추락에 대한 느낌은 산악인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떨어지는 도중에는 오히려 편안하고 담담한
 심정이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은 인수봉에서 추락하는 장면. .



▲ 마터호른을 등정하고 하산하던 에드워드 윔퍼 일행이 낙석에 로프가 끊어져 1200m 아래의 빙
하로 추락하는 그림.


깎아지른 바위나 빙벽을 오르는 산악인들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물리학의 이단
자들이다. 그들은 잘 발달된 신체 근육과 등산 장비, 그리고 산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채 중력
을 뚫고 한 피치 한 피치 정상을 향해 오른다.
정상을 오르는 행위는 어떻게 보면 중력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정상에 서야 어느 정도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때로는 뉴턴의 사
과처럼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도 한다. 산악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추락은 어쩌면 신이 내리는 형
벌인지 모른다. 신의 영역에 허락 없이 잠입한 죄 때문에.

추락은 산악인의 꽁무니를 늘 따라 다니는 존재이다. 산꾼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
쯤 추락에 관한 경험을 갖고 있다.
달갑지 않은 이 손님은 등반 도중에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며 불쑥불쑥 나타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러나 산꾼들은 추락도 팔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추락 먹었다’는 표현을 쓰며 추락을 운명
이나 한몸처럼 여긴다. 추락 시간은 찰나에 불과할 정도로 짧다. 하지만 산꾼들은 이 촌음 동안
삶과 죽음을 오가는 생생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산꾼들의 이야기 보따리에는 추락에 관한 화제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으며, 때로는 무용담
내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추락자의 심리를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은 스위스 취리히대학의 지질학 교수이자 저명한 등산가인
 알베르트 하임(Albert Heim·1849∼1937). 그는 1892년 스위스 산악회 연감에 ‘추락사에 관한
 노트’를 발표해 이 분야에서 최초의 글을 썼다. 이 글에서 눈에 띄는 대목 몇 개를 인용 소개한다.

‘추락은 암벽에서나 빙벽에서나 또는 눈사태에 휩쓸리거나 폭포에서 떨어졌을 때나 본질적인 차이
가 없다. 추락자는 마지막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장밋빛 구름이 둥둥 떠있는 맑게 갠 하늘로
 빨려 들어간다. 마침내 의식이 고통 없이 꺼진다. 보통 이때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순간이다.’
‘떨어질 때 불안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버지가 준 주머니칼
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떨어지는 동안에 조금도 불쾌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과연 알베르트 하임의 글처럼 추락 도중에는 불안과 고통이 없을까.
이에 관해 1972년 캔더스 퍼트 박사와 공동으로 아편 수용기(약물이 결합되는 장소)의 존재를 증명
한 바 있는 미국 존슨 홉킨스대학 의과대학의 솔로몬 스나이더 박사는 “극한 상황에서는 인간의
신경계에 모르핀과 유사한 물질이 생겨서 고통을 없애고 환각을 자극하며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고 언급했다.


고통과 불안 보다는 편안하고 담담한 심정

추락에 대한 느낌은 어떨까. 먼저 1982년 아이거 북벽을 등정하고 나서 <영광의 북벽>이란 책을
펴낸 정광식(47세·한국외국어대 OB)씨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정씨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그는 유난히 추락이 잦았다”고 했다. 현재 홍콩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답신을 통해 추락에 대한 느낌을 “아, 떨어지는구나!”하는 생각밖에 안 났다고 짤막하게
전했다. 그는 두 번이나 큰 추락을 먹었다. 1977년 1월, 지리산 동계 장기산행 중 한신계곡에서 빙
벽 30m 추락과 1979년 북한산 인수봉에서 40m 추락. 이때 큰 부상을 입어 두개골에 FRP로 만든 인
조뼈를 댔는가 하면 다리에 깁스를 하고 허리에는 쇠로 된 코르셋을 차기도 했다.

추락 거리는 짧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산악인도 있다. 1992년 1월 1일 설악산 토왕성폭 단독
등정에 성공한 심권식(44세·청죽산악회)씨는 “두려움과 공포감의 극치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토왕성폭 상단 50∼60m쯤 도달할 때 얼음에 박힌 왼쪽 아이스 바일이 손에서 빠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1m 가량을 미끄러졌다. 당시 오른쪽 아이스 바일은 얼음턱에 걸쳐 놓기만 해서 자칫하
다가는 하단 바닥까지 200여 미터를 자유 낙하할 뻔한 다급한 상황. 그때 그의 귀에는 “아빠!”하
는 아이들의 외마디 비명이 스쳤다고 한다.
얼음에 매달려 오도가도 못한 그는 노적봉과 속초 앞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몰랐다고 고백했다. 무사히 하산한 그는 토왕성폭을 갈 때마다 ‘토왕 할아버지 산신’을 향해 큰
절을 올린다고 했다.
1991년 8월 인수봉 벗길 슬랩에서 30m를 추락한 박문홍(41세·록파티산악회)씨는 “기분에 하루종일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릿 속이 정연해지면서 어디선가 멈춰야 되는데 확보자를 지나치자 그냥 죽는구나 하는 담담한 생
각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추락 도중에 겪은 후각 체험은 매우 독특했다.
그는 “떨어지는 동안 카라비너가 바위에 긁히면서 화약 타는 냄새를 맡았다”면서 “그 뒤부터 바
위에 붙기만 하면 화약 냄새가 났다”고 덧붙였다.
유학재(43세·트랑고 대표)씨는 추락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988년 인수봉
 서면 비둘기길을 오르던 중 순간의 부주의로 바닥까지 15m를 추락했다. 일명 ‘바닥치기’를 한
이다.
이 사고로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그는 온몸을 깁스한 상태로 6개월이나 병상에 누워 있었다.
 이보다 앞서 1978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 건폭에서 추락할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했다.
한편 재미있는 추락도 있었다. 1991년 도봉산 선인봉 S침니 마지막 지점에서 추락했던 송화섭(36세·
한림대 OB)씨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떨어져 밑에 있던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럼 국내와는 상황이 전혀 다른 고산 원정에서 겪은 추락은 어떨까.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박영석(40세·동국산악회)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추락은 세계 3대
 거벽의 하나인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 때였다”고 한다. 그때 해발 7000m대인 제3캠프∼제
4캠프 구간의 고정 로프를 설치하던 중 순간 실수로 150m를 추락한 그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어
 어딘지 모를 정도였다”고 했다.
얼굴을 크게 다친 그는 캠프 2로 구조되어 당시 미국 원정대의 팀 닥터에게 마취 없이 응급수술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1991년 일본 북알프스 동계 등반에서 홀드가 뽑혀 200m를 추락한 경험을 갖고 있는 박헌주(36세·전남
대 산악회)씨는 “불과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살아온 전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면서 빌려준
돈 받을 것이 다 생각났다”고 한 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아늑하고 포근한 행
복감 같은 걸 느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임사(臨死) 체험이라고 강조했다.
꽈배기 모양으로 굴러 떨어져 목숨을 건진 경우도 있다. 2001년 K2 원정대원이었던 오은선(37세·수원
대 OB)씨는 캠프 4에서 캠프 3으로 하산 도중 7500m 지점에 있는 200m 가량의 설벽 구간에서 미끄러졌다.
당시 날씨가 안 좋아 빨리 내려가려는 다급한 마음에 발걸음 균형이 깨지면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 50m를 추락한 그는 “생각보다 많이 구르는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구르다가 바람결에 층층이 다져 쌓인 눈더미에 몸이 걸려 겨우 살았다”고
했다.
이처럼 추락에 대한 느낌은 산악인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떨어지는 도중에는 오히려 편안하고 담담한
심정이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극한 영역에서는 새로운 의식의 차원 열려

그럼 산악인들이 생사를 넘나든 추락을 겪고도 다시 산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1982년 국내 최초로
 히말라야 동계 원정대를 꾸려 푸모리(7145m) 동계 초등을 이룩한 어느 중견 산악인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기억의 망각은 산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상황을 똑같이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산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존재론적인 답변을 했다.

또 원종민(43세·청악산우회)씨는 “등반이란 확보물 설치 등의 안전 조치를 취하며 자기를 관리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다시 산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산을 차마 버릴 수 없다”,
“악우들과 같이 어울리는 게 좋다”, “산에 안 가면 막상 할 일이 없다”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한편 외국의 산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인류 최초로 8000m급 14좌를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극한 영역에서는 거의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서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는 사실이
 등산의 중요한 자극제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정도의 산에 대한 열정은 천석고황을 넘어선 어떤 중독이나 병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 서문에서 “인간은 장애물과 겨를 때에만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산악인이라면 깊은 상징과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말을 한번쯤 곱씹어 볼 만하다.

추락도 장소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전문가들은 “슬랩에서의 추락은 발목 골절과 찰과상이 많으며,
크랙은 등반 자세가 복잡하기 때문에 몸이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 또 한쪽 발은 빠지고 다른 한 발이 안
 빠질 경우 부러지기 쉽다. 그리고 오버행 추락은 허공에서 매달리기 때문에 로프가 끊어지지 않는 한
크게 다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추락의 원인은 어디 있을까.
기자가 취재한 산악인들은 순간의 부주의나 방심을 첫손으로 꼽았다. 산악인들은 통상 자신의 등반 실력
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기 때문에 무모한 등반에서 오는 추락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기자가 들었던 추락 또한 대부분 ‘아차!’ 하는 부주의와 방심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추락 예방을 위
해선 무엇보다 충분한 기본 교육이 필요하다”고 전제한 뒤 “추락 계수를 고려한 확보물 설치, 무리 없
는 등반, 확실한 장비 사용”을 지적했다. 특히 단지 오르기 위한 등반보다는 산을 가기 위한 등반, 즉
총제적인 등반을 강조했다.
추락에 대한 공포는 죽음의 공포와 일치하다. 그 공포는 불확실성에서 기인한다. 등산의 진리는 이런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이겨내는데 있지 않을까. 그래서 등산이란 죽음과 맞서서 얻는 정신의 깨달음이
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라인홀트 메스너의 <죽음의 지대>를 읽고 산에 대한 열정에 전율을 느꼈다면 어느 날 설악의 뭇별
들이 추락으로 생을 마감한 숱한 산악인들의 영혼처럼 느껴지리라.

-출처: 마운틴

http://www.emount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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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Survival · 추락] 아무도 떨어지기 위해 산에 가지 않는다
민은주 기자 | 승인2014.07.18 10:52

▲ 등반가들이 설악산 천화대의 칼바위 능선을 걸어가고 있다.


추락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등반장비나 기술의 부족, 판단미숙, 만용과 부주의, 때로는 기
상악화나 낙석 같은 환경적 요소에 의해 한해 평균 10여명의 등산가가 국립공원 내에서 추락
사하고 100명 이상이 골절 등의 부상을 입는다. 추락은 지병이나 자살처럼 내재된 위험요소
를 제외하면 산에서 신체손상 및 사망에 이르는 가장 흔하고 강력한 원인이다. 특히 전문적인
 암벽등반은 그 행위 자체에 추락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작은 실수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다양한 추락사고의 원인과 사례, 그리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스
스로를 구할 수 있는 대처법을 알아보자.

0002(등산역사에서 추락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60년대 후반,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에서
 추락 중인 등반가. 사진=나경봉)


▲ 등산역사에서 추락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60년대 후반,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에서
추락 중인 등반가. 사진=나경봉


등반 중 추락, 극복해야할 한계 혹은 감당 못할 위험
추락의 위험이 전혀 없는 산은 없고 암벽등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추락은 등반행위의 일부
이며 많은 경우 등반가에게 찰과상과 멍, 자존심의 상처를 남기는 해프닝으로 끝난다. 물론
염좌나 골절처럼 각오보다 가혹한 결과도 종종 일어난다. 줄줄이 터지는 확보물, 잘못 묶은
매듭으로 인한 자유낙하, 볼트에 손가락을 낀 채 추락하여 절단에 이르는 일도 실제로 벌어
진다. 주로 능력 이상의 루트를 시도했거나, 중간확보물 설치가 부적절했거나, 안전수칙을
어겼을 때 발생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헬멧 등의 안전장비를 갖추고 확보 상의 실수가 없었
다면 암벽등반 중의 추락으로 죽음까지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상과 사망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사고는 주로 암릉등반이나 단독등반 중에 일어난다.

흔히 리지(Ridge)라고 부르는 암릉등반은 바위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등반방
식으로 도보산행보다는 기술을 요하면서 암벽등반보다는 수월한 산행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인식이 초보자들의 손쉬운 접근과 기본 장비조차 착용하지 않는 무모한 등반으로 이어져, 암
릉사고는 암벽사고보다 훨씬 빈번하게 일어나고 결과도 더욱 참혹하다.
북한산사무소가 2013년 8월~9월 추락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염초봉과 만경대 암릉 구간의 등반
자 355명을 관찰한 결과 82명(26%)이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고 99명(28%)은 혼자 등반한 것으
로 나타났다. 2012년 11월2일 북한산에서 실종된 40대 남성이 출입금지 암릉구간에서 이듬해
3월에 발견된 사례도 있었다. 경찰구조대 관계자에 따르면 장비미착용, 단독등반, 음주가 사
고원인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0003(북한산 경찰구조대가 헬기로 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최근에는 헬기가 뜨지 않는 주말이
 없을 정도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사진=북한산경찰구조대)

▲ 북한산 경찰구조대가 헬기로 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최근에는 헬기가 뜨지 않는 주말이
없을 정도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사진=북한산경찰구조대


또한 도보산행을 나온 무경험자가 무작정 암릉등반가를 따라가거나 경험자 한 명이 다수의
초보자를 이끌고 암릉등반에 나서는 것도 흔한 사고유형이다. 암릉등반은 대부분 코스가 길어
 체력소모가 크고 중간 탈출이 어렵다. 암벽등반에 비해 중간확보물이나 고정확보물의 수가 적
어 추락거리가 길고, 수직등반 뿐 아니라 수평이동이나 횡단, 클라이밍다운 등 다양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또한 아무리 쉬운 구간이라 해도 한번의 실수로 수십 미터를 추락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암릉 역시 반드시 장비를 착용하고 안전수칙을 지켜야하는 본격적인 등
반의 영역이다.

일행 없이 오르는 단독등반도 극단적인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단독등반은 모든 장비와 시스
템을 혼자 책임져야하기에 높은 집중력과 등반지식, 실력을 요하는 첨예한 분야이다. 확보,
자일처리 등의 실수를 누군가 지적해줄 수 없고, 사고 후에 빠르고 적절한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대부분 목격자가 없어 정확한 사고원인조차 밝히기 힘들다. 2006년 인수봉 비둘기길,
2010년 영길. 2013년 인수A변형길을 올랐던 단독등반가들이 모두 추락으로 사망했다. ‘확보
 착각’으로 추정되는 2013년 사고 당시 북한산경찰구조대의 김창곤 대장은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귀신에 홀린 듯 실수를 한다”며 등반가들에게 단독등반을 삼가줄 것을 당부했다.

0004(하강은 체력과 집중력을 떨어진 상태에서 진행되고 작은 실수도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
문에 등반보다 훨씬 위험하다.)
▲ 하강은 체력과 집중력을 떨어진 상태에서 진행되고 작은 실수도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
에 등반보다 훨씬 위험하다.


등반보다 위험한 하강사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강사고로 살짝 다치는 경우는 드물다. 순간의 실수가 바로 심각한 신체손상이나 사망으로 이
어진다. 2013년 8월 24일 설악산 미륵장군봉에서 하강자가 장비미숙으로 로프에서 이탈, 60m를
 추락하여 그 자리에서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피치를 끊어 하강하는 과정에서 중간확보지점
을 놓치며 로프가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 산악회의 대장도 2005년 선인봉에서 하강 중 로
프를 이탈하는 사고로 40m를 추락해 사망했다. 하강사고에는 전문가와 초보자의 구분이 없다는
증거이다. 로프 끝에 매듭을 했거나 션트나 프루지크 같은 하강자동제어장치를 이용했다면 막을
 수 있는 이런 사고로 무수히 많은 등반가가 생명을 잃었다.

자기확보나 매듭의 실수도 종종 일어난다. 올해 5월11일 인수봉 비둘기길 하강코스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는 사고자가 로프에 매듭을 제대로 하지 않고 확보줄을 풀어 60m를 자유 낙하한 것으
로 추정된다. 이날 인수봉 정상엔 강풍이 심해 하강을 서둘렀다고 한다. 작은 부주의로 20여 년
 경력의 베테랑 등반가가 익숙한 하강루트에서 사망한 것이다. 2006년 6월17일에는 다른 팀에게
 하강완료 후 매듭을 풀어줄 것을 부탁하고 두 줄로 내려가던 마지막 하강자가 한족 줄이 1m 정
도 짧아 중간확보를 하고 60m 한 줄로 하강하던 중 로프가 풀리면서 추락했다. 인수봉 정상의
 다른 팀원이 하강이 완료된 줄 알고 매듭을 풀었던 것이다. 사고자는 흙으로 떨어져 목숨을 건
졌으며 구조대의 진술에 따르면 사고 당시 만취 상태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하강기에 뭔가가 끼거나, 로프 끝이 맞지 않아 한 줄이 빠지거나, 로프가 꼬이거나 크
랙에 끼는 사건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안전한 하강을 위해서는 확보지점이 튼튼한지 확인하고
반드시 두 개의 확보물을 설치해야 한다. 로프에 손상된 부분이 없는지 점검하고 연결 매듭의 상
태를 확인한다. 로프 끝에 백업 매듭을 하면 하강 중 이탈을 방지할 수 있다. 안전벨트를 제대
로 착용했는지, 하강기에 로프가 정확히 끼워졌고 잠금 카라비너가 잠겨있는지, 하강기 외에 백
업시스템을 설치했는지, 아래 확보지점까지 로프 길이가 충분한지도 확인해야 한다. 당겨야 할
로프를 기억하고, 머리카락, 옷자락, 헬멧 끈 등 하강기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것을 단정하게 간
수한다. 이는 반드시 하강로프에 매달리기 전에 안전하게 확보된 상태에서 이뤄져야하며, 일행
들이 서로의 안전을 대조 점검해야만 한다.

하강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 처음과 마지막을 맡아야 한다. 로프가 엉키지 않게 두 번으로 나눠
 던지는 쪽이 안전하고, 기상상황이 나쁘다면 로프 백에 넣고 조금씩 풀어주면서 내려갈 수도 있
다. 만일 하강 중에 로프가 꼬이거나 꼈을 때는 그 지점을 지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프루지크
 매듭 등의 백업시스템 없이 정지해야 할 때는 로프를 다리에 여러 번 돌려 감으면 제동이 가능하다.

하강을 완료한 후에는 반드시 자신을 먼저 확보한 후에 하강기를 해제하고, 다음 하강자를 위해
 로프를 손으로 잡고 마지막까지 주시한다. 크랙이나 볼트에 끼는 것을 방지하려면 로프를 내릴
 방향을 사전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강 중에 발생하는 문제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사고로 확대
될 위험이 있다.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론,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이
 필수적이다.

0005(등산로를 정비하고 안전등반을 지원하는 국립공원 내 안전관리부와 재난구조대. 이들은 사고
시 초동대처와 응급구조도 맡고 있다.)
▲ 등산로를 정비하고 안전등반을 지원하는 국립공원 내 안전관리부와 재난구조대. 이들은 사고 시
 초동대처와 응급구조도 맡고 있다.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 실족사고
도보산행 중 실족으로 인한 부상은 국립공원은 물론 국내산 어디서나 흔하게 발생된다. 발을 헛딛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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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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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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