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5.

[사랑예화] 대신죽는 사랑 콜베신부






[사랑예화] 대신죽는 사랑 콜베신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우슈비츠의 성인인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를 떠
올리게 합니다.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는 당시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콜베
신부를 체포하여 죽음의 수용소에 가둡니다.

수용소의 규칙에, 수감자 한 명이 도망쳤을 경우 그 사람이 속한 방이
열 명을 무작위로 뽑아 끔찍한 지하 감방에서 굶겨 죽이도록 되어 있었
습니다.

콜베 신부가 구금된 수용소에서 수감자 한 명이 탈출했습니다. 수용소의
 소장은 수감자들을 세워 놓고 아사 감방으로 갈 열 명을 골라내었습니
다.

뽑힌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
짖었습니다. 이를 본 콜베 신부는 동료들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나와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하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콜베 신부는 참혹한 감방에 갇힙니다. 절규와 비탄의 소리가 가
득했던 감방은 콜베 신부로 말미암아 기도와 사랑으로 채워졌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잔혹한 지하 감방이 교회로 변한 것입니다.
콜베 신부는 결국 독극물 주사를 맞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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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 Sanctus Maximilianus Maria Kolbe


1894년 1월 8일 폴란드 즈둔스카 볼라 출생, 1941년 8월 14일 폴란드 아우
슈비츠 수용소에서 선종.

1910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했고, 1911년 첫 서원을 했다. 1914년 로마에 유학을 가서 종
신서원을 하고 성모신심을 표현하고자 수도명에 '마리아'를 덧붙였다.
1912년 로마 대학에서 철학, 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했으며, 1915년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9년 폴란드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
작하였으며, 라디오 방송국과 출판 사업에 참여하여 언론인으로서 활동
했다. 1930년 동양 선교를 위해서 일본을 방문하여 6년간 머물렀다. 귀국
한 뒤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체포

1939년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었다. 이 때문에 콜베 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콜베 신부는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
 유태인을 포함한 전쟁 난민들을 숨겨주는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이어나
갔다.

1941년 2월 17일, 콜베 신부는 다른 4명의 신부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
되었다. 당시 나치는 유태인만이 아니라 폴란드의 유력 인물도 체포의 대상
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죄수 번호는 16670.

순교

1941년 7월 말, 이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나오자 수용소 지휘관이자 SS중위
인 카를 프리취는 14A동 블록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을 다 끌어내서 처형
할 것을 명령했다. 이 10명 가운데 폴란드군의 중사였던 프란치셰크 가요브
니체크(Franciszek Gajowniczek)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요브니체크는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는 "나는 가톨릭 신부이며, 가요브니체크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라고 자청하
여 나섰다.
프리취 중위는 이를 승락했고 콜베 신부와 9명의 죄수가 지하감옥에 갇혔다.

프리취는 그들을 즉시 처형하지 않고, 물과 음식을 일체 주지 않고 아사하도
록 계속 가두어 두었다. 일반적으로 아사형에 처해지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콜베 신부는 의연하게 다른 포
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때때로 감옥의 모습을 보러 온 통역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성가가 들려, 마치 감옥이 성당처럼 느껴졌습니다."라고
증언했다.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범죄자 보프를 시켜서 독약인 페놀을 주
사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콜베 신부의 시신은 성모승천대축일 날짜인 8월 15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다.

시성

1971년 10월 10일에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요한 바
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선언되고 시성되었다.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가요브니체크는 1944년 8월 25일 까지 아우슈비츠에
 있었고, 다른 캠프로 보내졌다가 연합군에게 해방되어 생존자가 되었다.
그의 아내 엘레나는 살아 있었지만 아들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소련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가요브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9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
할 때까지 콜베의 사랑과 영웅적인 행동이 알려지도록 세계 각지에서 강연을 했
다. 시복식과 시성식에도 참여했다.


-발췌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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