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음악] 체게바라 어록 Soldier of Fortune. Deep purple
[음악동영상 Soldier of Fortune. Deep purple]
01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리얼리스트(realist)란 우리말로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객관적 사실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이른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말은 곧,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되 그것을 맹목적으로 좇지 않겠다는 말로 생각한다. 나아가 잘못된 현
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한 커다란 이상(理想)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02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농림부 장관 재직시절)
03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인터뷰 중에서)
04
바보같다고 생각될 지 모르나, 진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에 의해 인도된다. 인간에의 사랑,
정의에의 사랑, 진실에의 사랑, 사랑이 없는 진짜 혁명가를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UN총회 출석을 위해 뉴욕 체재 중, 인터뷰에서의 질문 “혁명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에 대답하며)
05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고통당하고 있는 부정(不正)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진심으로 슬퍼
할 수 있는 인간이 되거라. 그것이야말로 혁명가로서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므로
(5명의 자식들에게 남긴 편지의 일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로 향할 즈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06
만약 우리들에게 공상가 같다고 한다면, 구제할 방법없는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
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몇천 번이라도 대답해 주지. [바로 그렇다!]
07
“무언가를 위해 죽을 각오가 없다면, 인생을 살게 해줄 무언가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08
진정한 혁명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혁명이며,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09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10
나는 해방가가 아니다. '해방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11
많은 이들이 저를 모험가라고 부르겠지만, 저는 다른 류의 모험가입니다. 자기 의견을 증명
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모험가입니다. (체 게바라, 자신감명언)
12
태양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뜨거운 가슴을 찾아 헤맬 줄 알아야한다.
그 길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 할지라도-≪체게바라 어록≫
13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으로
언제나 세상의 모든 불의에 맞서
그대가 분노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다!-≪체게바라 어록≫
14
만일 네가 항상 부조리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면
너는 곧 내 동료이다.
-체 게바라
15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것은 때때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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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사르트르로부터 ‘우리 시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받은 에
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깊고 투명한 눈빛으로 시가를 물고 있
는 그의 사진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혁명과 반항’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열정과 창조’
의 삶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게바라의 삶에는 안주(安住)가 없었으며, 오로지 도전만이 있었
다. 자신을 압박하는 세계의 모든 도전을 완벽하게 음미하며, 비타협적 투쟁으로 고유의 신념
을 완성해간 게바라의 ‘실천적 삶’에 대해 사르트르는 ‘완벽한’이라는 최고의 수식을 부여
했다. 편안이 보장된 현실을 거부하고 혁명의 길에 나선 게바라의 삶은 ‘혁명에서 발원하여
혁명으로 귀결’한 드라마틱한 여정이었다. 그 여정은 19767년 10월 9일 몇 발의 총성으로
끝났다. 39세의 나이로 볼리비아 군에 의해 총살된 게바라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고유의 열정’으로 메워나간 21세기 최고의 ‘낭만적 리얼리스트’이자 혁
명가였다.
1928년 6월,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의학을 전공하고, 시
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준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으나 두 번의 걸친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계
기로 삶의 노정을 혁명으로 전환시켰다. 1952년 1월 4일 고물 오토바이 ‘포데로사’를 타고
알베르토와 함께 라티아메리카의 남단에서 북단까지 6,400킬로미터를 종단한 청년 게바라의 눈
에 비친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는 빈곤과 기아와 질병이었으며, 세계는 왜
이렇게 불평등한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첫 번째 여행에서 게바라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미국의
제국주의임을 깨닫는다.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게바라는 지역 병원들의 스카우트 제
의를 거부하고 두 번째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의 과정에서 체는 첫 번째 부인이 될 페루 출신
의 운동가 ‘일다’를 만나고,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그들의 혁명동지들을 만
난다.
게바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책 살인자가 되어 벽 앞에
세워져 총살당했다. 역사상 정의가 그보다 더 훌륭하게 실현된 적이 없다.”(움베르토 폰타바
Humberto Fontova, 《체 게바라의 실체를 폭로한다 Exposing the Real Che Guevara》)는 지나
친 악평에서부터 “공산주의의 불꽃은 사그라졌는지 몰라도 그는 반항과 혁명에 대한 매력적 열
정을 대표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아리엘 도르프만 Ariel Dorfman, 칠레 소설가)는
찬사까지 게바라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세인들의 반응은 빈부간의 갈등만큼 그 골이 깊다. 이
러한 현상은 게바라의 행적과 사상에 객관적인 이해보다는 주관적인 감정(막연한 동경과 무조건
적인 혐오)에 근거한 편견 때문에 발생한다.
[출처] 체게바라 명언 , 체게바라 어록 |작성자 thothbook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hothbook&logNo=17191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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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스페인어: 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는 체 게바라(스페인어: 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이자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 위키백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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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화된 혁명가 우상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실패하고 단명한 비운의 혁명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고 결국은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공산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세 번 씩이나 영화화되었으며 다방면에서 상품화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
다. 논란은 있겠지만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제국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의 상징이 되어 아직도 21세
기를 살아가는 불멸의 투쟁가로 기억되고 있다.
최소한 엘리트 지식인(의사)이었던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총을 잡고 혁명에 나선 일이나,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권력다툼이나 하고 부정부패로 재산 모아서 잘먹고 잘 살 궁리나 했던 동료들에 비해,
쿠바 혁명 성공 뒤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마지막까지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고결
함 만으로도 인기의 비결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완얼+스토리 덕이겠지만.
쿠바에서 떠난 것을 권력다툼에서 밀려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쿠바에
서 재산 잔뜩 챙긴 뒤에 중립국으로 튀어서 평생 편하게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아니면
미국 같은 데로 망명해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카스트로 뒷담화나 까면서 회고록 팔아먹으면
서 편히 살거나.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던 그였으나 훗날 자본주의자들에게 의해 상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다. 실은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젊어서 죽은 데다 대단한 미남이
었다는 것이다. 항상 군복에 수염도 깎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눈에 뜨일 정도였으니. 청년 시
절 사진을 보면 어지간한 배우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꽃미남이다. 또 다른 이유는 위의 별 붙은 베
레모를 쓴 유명한 사진을 찍은 코르다가 그 사진에 한해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무나 그 사진을 써도 상관 없게 되었으니, 저항의 상징이자 젊은 순교자 이미지를 팔아먹으려는 전
세계 회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체와 전혀 상관 없는 오스트리아의 스
키 회사 Fischer에서는 "스키의 혁명"이란 문구로 체의 얼굴을 써먹었고, 술은 입에 대지 않았던 체의
이름이 붙은 술도 나와 있다. 스노보드 바닥에도 있고...국내에서도 게바라를 검색 엔진에서 치면 티
셔츠 등 꽤 많은 상품이 올라온다. 심지어 축구공이나 속옷에까지 쓰이는 등 상업적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에 저작권자가 저작권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를 상업적인 아
이콘으로서 써먹은 서구 기업가들에 의해 그의 이미지가 과대포장되었다"며 인물에 대해 근본적인 부
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마저도 나오는 실정. 후일 체와 함께한 최후의 게릴라였던 부스토스가 체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에게 "그걸 왜 입나"라고 물어보자 대답을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체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는 게 전 게릴라의 씁쓸한 회상.
긍정적 평가
천식과 같은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과 고강도 노동, 게릴라전까지 감내하는 극기력은
체 게바라의 삶에 바탕이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안락한 의사의 길 대신 혁명가
의 길을, 승리한 혁명사회의 각료로써 누리는 삶 대신 혁명가의 삶을 살게 하였다. 혁명가로서 종속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빈곤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 체의 이상은 라틴아메리카
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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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dier of Fortune. Deep purple
I have often told you stories about the way
내 인생에 대해 당신께 자주 얘기했었죠
I lived the life of a drifter waiting for the day
하루를 기다리는 방랑자의 삶을 살았던
When I'd take your hand and sing you songs then maybe you would say
내가 당신 손을 잡고 노래를 불러주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죠
"Come lay with me love me And I would surely stay"
"내 곁에 누워서 날 사랑해 주세요"
그럼 난 기꺼이 당신 곁에 머무르겠어요
But I feel I'm growing older 하지만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and the songs that I have sung Echo in the distance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멀리서 메아리 치고 있어요
Like the sound of a windmill goin' 'round 돌아가는 풍차 소리처럼 ...
I guess I'll always be a soldier of fortune
난 아무래도 군인일 수밖에 없나 봐요
Many times I've been a traveller I looked for something new
난 여행을 하며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 다녔어요
in days of old When nights were cold I wandered without you
그 옛 시절에 추운 밤이 찾아오면 당신이 없는 난 방황했었죠
But those days I thougt my eyes had seen you standing near
그런 때에 난 당신이 바로 곁에 서있는 걸 내 눈으로 본 것 같았어요
Though blindness is confusing It shows that you're not here
눈이 먼 것처럼 혼란스러웠지만 당신은 여기에 없는걸요
Now I feel I'm growing older
이제 난 나이가 든 것 같아요
and the songs that I have sung Echo in the distance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멀리서 메아리 치고 있어요
Like the sound of a windmill goin' 'round
풍차 돌아가는 소리처럼 ...
I guess I'll always be a soldier of fortune
난 아무래도 군인일 수밖에 없나봐요
I can hear the sound of a windmill goin' 'round
풍차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요
I guess I'll always be a soldier of fortune
난 누가 뭐래도 항상 군인일 수밖에 없겠지요
I guess I'll always be a soldier of fortune
난 누가 뭐래도 항상 군인일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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