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

[종교] 십일조 천국저축 헌금








[종교] 십일조 천국저축 헌금 





01

고고학자들은 애굽과 바벨론의 도성의 폐허에서 흙 제단을 발견하고

거기서 그들의 신에게 십일조를 드렸던 흔적이 있다. - 먼 씨이 -



02

교회는 주식회사가 아니다. 헌금을 좀 많이 낸다고 해서 권리행사를 다 하

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헌금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미상 -



03

기도만 하고 봉헌하지 못한 인생은 위선이다. - 미상 -



04

헌금은 우리 자신이 은혜를 입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 홀 -



05쌀통에서 퍼 가지고 오는 것은 성미가 아니요, 기도함으로 식구별로 한 숟

갈씩 뜨는 것이성미이다.



05

자신의 돈이 깨끗하게 될 때까지는 아무도 봉헌된 삶을 살 수 없다.

- S. 스미스 -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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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십일조(十一租, 영어: tithe)는 헌상의 형태로서 잘 알려진 것으로서, 보통 기독교 단체를 지원할

목적으로 납부하는, 수입의 10분의 1을 가리킨다. 오늘날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자발적으로 납부하며

 현금, 수표, 주식으로 낸다. 반면 역사적으로 십일조는 농작물 (땅에서 자란 것이나 나무의 열매)

같은 종류의 것으로 냈다. 이러한 조세는 이미 고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중세를 거쳐 근세 초기

에까지 존속하였다.





구약성경



십일조는 히브리어로 마아세르라고 하는데, 70인역 구약성서에서는 에피데카토르 또는 데카토스(10)

이라고 했다. 신약성서에서는 데카토스라고 한다.





족장설화속의 십일조



구약성서에서 십일조가 처음 언급된 것은 아브라함이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전리

품의 10분의 1을 바쳤다는 전승이다.(창세기 14:17-20)야곱도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챈

 교활함때문에 형 에서에게 미움받아 도망갈때 베델(하느님의 집)에서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약속

했다.(창세기 28:18-22)하지만 성서학자들은 족장설화에 언급된 십일조를 제의적인 십일조 즉, 하

느님께 바치는 헌금으로서의 십일조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레위기의 십일조

레위기에서는 십일조가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야훼의 것이니, 야훼께

 바칠 거룩한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바친 십분의 일세의 일부를 물러내려면, 그 값에 오분의 일

을 얹어 물어야 한다. 소든 양이든 목자가 지팡이로 거느리는 모든 짐승의 십분의 일은 야훼께 거

룩한 것으로 바쳐야 한다.좋고 나쁜 것을 고르지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다. 그것을 기어이 바꾸려고

하면 그 바꾸려는 것 둘이 다 거룩한 것이 되어 물러낼 수 없게 되리라.(레위기 27:30-33

레위기 저자는 십일조를 야훼의 거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토지에서 난 것과 가축 모두 야훼

께 드리도록 지시하고 있다.





민수기의 십일조

민수기에서는 십일조가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야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이 차지할 땅에서 그들과 함께 나누어 받을 유산이

없다. 그들 가운데서 너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다만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네가 차지할 몫

이요 유산이다.

내가 이제 레위 후손에게 줄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둔 십일조 전부이다. 이것은 만남의 장막

에서 예배를 보좌한 보수로 주는 것이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도 만남의 장막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다. 가까이 가면 죄를 받아 죽으리라. 만남의 장막에서는 레위인만이 봉사할 수 있다. 만

일 다른 사람들이 범접한다면 그것도 레위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너희가 길이길이 대대로

 지킬 규정이다. 레위 후손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아무 유산도 상속받지 못한다. 나는 이스

라엘 백성이 야훼께 떼어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유산으로 준다.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그들이 상속받을 유산은 없다고 일러주는 것이다.너는 레위인들에게 이렇게 일러주

어라. '내가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는 십일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거든 너희는 그 십일조에서

십일조를 떼어 야훼께 바쳐야 한다. 나는 그것을 너희가 바칠 예물로, 타작 마당에서 모은 곡식과

술틀에서 짜낸 포도즙에서 떼어 바치는 것과 같이 쳐주리라. 너희도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은 십일조 전체에서 야훼의 몫을 나에게 떼어 바치되, 그것을 아론 사제에게 드려야 한다. 너희가

 받은 모든 선물에서도 야훼의 몫을 떼어 바쳐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극상품을 거룩한 선물로 떼어

 바쳐야 한다.'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그 가운데서 극상품을 떼어 바치고 남은 것이

 레위인들의 것이다. 그것은 타작 마당에서 난 것이나 술틀에서 짜낸 것과 같아 아무데서나 너와 너

의 식구가 먹을 수 있다. 그것은 너희가 만남의 장막에서 봉사한 보수로 받은 몫이다. 그 가운데서

 극상품을 바치기만 하면, 죄가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친 거룩한 예물을 더럽힌 것이 아

니니, 죽을 리가 없다.(민수기 18:20-32)



민수기 저자는 십일조를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비로 쓰도록 하고 있다.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성직

자들이라 일반직업인들과는 달리 꾸준한 수입이 없기 때문에, 저자는 이들을 배려하여 십일조를 성

직자들의 생계비로 쓰도록 가르친 것이다.





신약성경



기독교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십일조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기독교 종파

에 의해 강조되는 대표적인 십일조 근거 구절은 마태 23:23, 눅 11:42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느니

라 (한글개역 - 마태 23:2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천주교 성경 - 루카 11:42)



이 외에도 히브리서 7장에서 아브라함 등이 멜기세덱 대제사장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구약 내용의

 인용 구절 역시 십일조의 지지라고 주장하는 일부 개신교 교단들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만 가

지고서는 사도시대 초대교회 공동체가 명확하게 십일조를 시행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교회사속의 십일조



초대교회 -사도시기의 초대교회



사도시기 초대교회는 유대인으로 유대교 개종자들이 모인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있으며, 사도

 바울(바오로)가 개척하거나 자발적으로 형성된 이방인 교회 공동체가 있다. 유대인 개종자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서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서로 공유하는 모습이 사도행전에 나오며,

 이방인 교회 공동체의 경우는 연보라고 하여 돈을 내키는대로 얼마씩 모아서 내도록 했기에 헌금

액수의 제한이 없었다.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 분파로 간주되었기에 얌니야 회의로 축출되기 이전까

지 유대인 개종자들은 유대교 회당에 십일조를 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도교회 공인 이전의 고대교회



이 시기 교회 구성원의 헌금에 대한 언급은 '디다케'가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이레네우스'나

'오리게네스'도 언급하고 있다. 디다케의 경우에는 '맏물'을 바치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 십일조

에 대한 규정은 없다.(개신교 일부에서는 이 맏물 봉헌의 규정을 십일조의 근거로 보고 있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이레네우스'의 경우에는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바친다고 언급하며,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좀 더 낼 것을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있으나 십일조를 직접 강조하지는 않는

다. 3세기 초 교부인 '키프리아누스'가 최초로 성직자에 대한 재정적 보조를 언급하면서 십일조를

 그 좋은 예로서 언급하였으나, 오리게네스와 사도규범에서는 성직자에 대한 재정 보조만 다시 강

조되었을 뿐이며 그 수단으로서 십일조는 언급되지 않는 등 이후 100년 이상 십일조에 대한 주장은

 교회 안에서 조명받지 못하였다.





제도교회 공인 이후의 가톨릭 교회



종교의 자유가 공인되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지원으로 기독교가 제도적 가톨릭교회로 발전

하면서 교회재정의 확충이 요구되었고, 따라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부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에피파니우스'처럼 십일조는 할례보다도 가치가 없다고 하며 반대한 교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동-서방을 막론하고 교부들은 십일조를 신자의 덕목으로서 권장하기 시작하였다. 서방의 히에로니

무스, 아우구스티누스와 동방의 크리소스토모스는 십일조를 옹호한 대표적 교부이다. 하지만 이때

까지 십일조는 내도 좋지만 안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그 바치는 마음가짐이 더 중시되었다.





십일조의 강제화



수위권을 확립하고 동로마제국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십일조는 더

욱 강조되었다.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한 교황 겔라시우스의 분배규정에서 십일조

 수입의 분배 방식에 대해서 언급하여, 이미 그 당시에 십일조가 일반화된 헌금 방식으로 정착되

어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585년의 마콘 2차 지역 공의회에서는 십일조를 법적인 의무로 고시하며,

신자들이 그 의무를 등한시할 때 파문도 가능하게 하여 강제적 규율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

러나 이는 오히려 이 시기까지 십일조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교회사가들에

 의해 이해되기도 한다.





중세교회



주교에게 헌금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십일조는 최초로 카롤루스 대제 시기에 교회 내적 규율의 차

원을 떠나 국가적인 민법상 징수 차원으로 전환되었고 완전하게는 1140년의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에

 규율되어 있다. 자체적인 교회제도(영주의 보호 하에 있는 교회)와 세속 영주로서의 수도원에 의하

여 십일조는 사실상 세속적인 조세납부 형태를 띠었다. 그 외에도 십일조는 종종 임대되었고 임차

인은 십일조와 사실 상의 납세액의 차액을 받았다.



중세 농부들은 수확의, 수공업자들은 생산의 십분의 일을 내야 했다. 유럽에서는 모인 십일조를 보

관하기 위하여 마을에 큰 창고가 설립되었다. 종종 마을에서 교회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 십일

조를 내야 하는 토지등을 십일조의무지라 한다. 어떤 수도원은 60개의 마을에 십일조의무지를 가

지고 있었다.



중세에는 구약에서 기원하는 십일조가 확대되었다. 대십일조와 소십일조가 구별된다. 대십일조는

 성경에 따라 곡물과 큰 가축을 내는 것이다. 소십일조는 추가적으로 기타 아채, 과일, 채소 등의

 농작물과 작은 가축을 내는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소십일조가 부과되는지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그 외에도 십일조는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인다. 즉 다음과 같은 종류들이 있다.





압착된 포도에 내는 포도주십일조.

수확된 건초에 내는 건초십일조.

벌채된 목재에 내는 목재십일조.

도축된 동물 내지 그로부터 만들어진 육류 생산품, 달걀, 우유 등에 내는 피의 십일조.

새로운 개척지에 부과되는 신개척지십일조.



이렇듯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십일조가 당연한 신자의 의무이며 사회 생활로 정착되었으나, 동방

 정교회에는 크리소스토모스 교부 이후에는 십일조 관련 기록이 거의 없다. 동방 정교로 개종한 블

라디미르 1세가 러시아의 종교 제도를 동로마제국 정교회를 본떠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교회 수입

으로서 십일조를 법제화하였다는 점에서 러시아 정교회에는 십일조가 있었고, 다른 국가의 동방 정

교회도 십일조 전통이 한동안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종교개혁 시기에도 십일조에 대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루터는 뮌처가 이끄는 농민 세력이 제후

들에게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면제해줄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 구약 말라기의 표현을 인용해서

 '도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강경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터나 칼뱅은

사회적으로 당연시 된 십일조를 걷는 문제보다는 헌금 수입의 사용 내역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근대교회



시민혁명으로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면서, 십일조는 유럽의 교회와 사회에서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각 유럽 국가들의 십일조 폐지제도는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1887년 폐지됨.

아일랜드: 1871년 아일랜드 성공회(아일랜드 교회)가 국교회 자격을 잃으면서 십일조가 폐지됨.

영국: 1836년 곡물 가격에 근거한 소작세로 대체.

미국: 십일조를 나라에서 의무로 부과한 적 없음. 단 기독교 교파별로 십일조 유무의 차이가 있어서,

 모르몬교와 구약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게 특징인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를 포함한

일부 교파들은 십일조를 요구함.



독일: 1803년 제국회의에 의해, 교회세로 교회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면서 이에 대한 보상으로 교

회세가 등장함. 즉, 십일조가 폐지되고 이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교회세가 등장하였다. 교회세란 독

일 기독교인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으로, 교인 수에 따라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에 분배된다. 단

, 납세자 본인이 주민등록증에 기독교인임을 표기해야만 소득세의 8-9%를 교회세로 부과한다.



프랑스: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되었으며 이후 유럽 국가들에서도 십일조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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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교회사》십일조는 반드시 해야하는 걸까?:

십일조와 교회세-독일교회의 경우/이성덕 지음/살림 p.232-233



-발췌출처: 위키백과 '십일조'

























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

- 신성남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율법적 십일조’는 사도들이 전한 바 없는 ‘다른 복음’​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말 2:13).



2004 년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인 '한미준'에서 조사한 십일조에 대한

통계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개신교도 중 매월 정기적으로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는 교인은 전체의 약 30%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교인의 절대 다수인 70%가 십일조를 하지 못 하거나 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물론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



​교회 내에서 교역자들이 이 십일조 제도에 대하여 부정적 발언을 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단 내에서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는 일이 됩니다. 그럼에도, 일

찍이 손봉호 교수님처럼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 신약 성경이나 초대 교회에는

 십일조 사례가 없다"라고 소신을 가지고 명확히 입장을 밝히신 분들도 적지 않습

니다.  ​



​정말 희한한 점은 툭하면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도 서로 쉽게 갈라서며 교단 분열

을 밥 먹듯이 하던 한국의 교회들이 성경적 근거가 매우 취약한 이 십일조는 거의

만장일치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 세계 대다수 신자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율법의 무거운 짐을 오직 한국

교회만이 일심동체가 되어 반강제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국의 많은 목사들은 교인들의 등골이 빠지든 말든 이 십일조라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아마 한국처럼 이런저런 요상한 명목

으로 많은 돈을 챙겨 가는 교회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



​특히 이 십일조 강요가 초신자나 가난한 교인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지대합니다.

 다른 무슨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교회 내에서 괜히 위축되고 믿음이 약

한 자로 손가락질을 받는 느낌으로 지내게 됩니다. 



​또한 친척들이나 다른 분들에게 전도를 하면서 교회에 나오기를 권면하면, 제일 먼

저 튀어 나오는 말이 "나도 교회에 나가게 되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

는 부담스러운 질문입니다.



​이보다 더욱 심하게 감정적으로 반발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사들이 십일조 장

사를 해서, 자식들 유학 보내거나 고급차를 타고 다닌다"는 식입니다. 이런 반응

들은 십일조 강요가 전도의 문을 얼마나 크게 막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개척 교회가 크지 못하는 데에도 십일조가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교

인들이 작은 교회에서 십일조를 못 내면 너무 표가 나서 불편하기 때문에, 크게 표

가 나지 않는 대형 교회로 이동하여 스스로 작정한 만큼의 헌금 생활을 하려고 하

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중대형 교회로의 수평 이동 현상에는 이 십일조와 기타 잡다한 헌금 강요도

 크게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한국교회 내에는 기복적인 토속 신앙의 영향이 원래 강한데다가,

일부 목사들이 이를 악용하여 십일조를 축복의 수단으로 미신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십일조 제도에 대한 반론을 간략히 검토하고,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는 허구적인 미신과 십일조 강요의 부당함에 대하여 주로

 논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십일조의 쟁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다른 분들이 이미 지적하였던 주

장이나 논리가 다소 중복되더라도, 이는 처음으로 이런 문제를 접하시는 분들의 체계

적인 이해를 돕기 위함이니 너그럽게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



​또한 일부 목사님들은 십일조가 교회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다른 반론을 내면 마치 이단처럼 취급하며 몰매를 주시기도 하는데, 신앙 양심을 걸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구약 신정 국가의 십일조는 사실상 세금이었다 ​



​원래 구약에 언급된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처럼 일회성인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신정 국가 체제에서 제사직을 전문으로 맡은 레위 지파를 위한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용도로는 절기 행사 비용으로 또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가난한 사람

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거의 세금에 가까웠습니다.​



​출애굽 이 후 땅을 분배받은 나머지 지파들과는 달리, 제사직을 맡은 레위인들에게는

 다른 수입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당시에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온전하게 내지 않으면, 당장 제사직을 맡은 레위

인들과 가난한 자들을 굶게 만드는 아주 심각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십일조를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따르는지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금석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는 모든 신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사직이 더 이상 별도로 필요 없는 신약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누구의 몫으로 드려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가 '성직자'이니 목사의 몫이라고 하는데,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유

감스럽게도 이는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의 목사직은 구약의 성직자인 제사장직이 아니고 신약 성경에 언급된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신자가 다 스스로 제사장의 신분으로 주 앞에 직접 설

수 있는 성직자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리적으로 신분상 성직자를 인정하는 가톨

릭조차도 현재 율법적인 십일조 헌금을 걷고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의 변질과 부활



바리새인과 랍비들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한 십일조는 로마 제국 시대와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변절되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잘 내면, 악한 자가 지옥에서 받는 열두 달 동안의 형벌

에서 면제된다"고까지 황당하게 부추겼다고 합니다.



​이런 엽기적인 선동은 "십일조 안 내는 자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큰 소리

치는 한국의 어느 목사님을 연상케 합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이 멸망한 후인 신약 초대교회 시기에는 십일조를 잘해야 한다거나,

 또는 잘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박해 시대를 거쳐 황제에 의해 공인되기 전인 4 세기 초가 될 때까지도 십일

조가 헌금의 일종으로 바쳐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십일조를 안 가르쳤다는

실제적 증거입니다.​



​특히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일조라는 것은 할례보다도 구속력

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세가 확장되고 교권력이 강화되면서 십일조 복원이

시도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암브로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십일조를 거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습

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들은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고, 서방 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심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밀고 당기다가 결국 한참 후대인 AD 585 년에 가서야 마콘(Macon) 교부회의에서

 십일조가 채택되었습니다.  ​



​이때부터 십일조는 점차로 강제성을 지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교부 회

의들도 십일조를 속속 채택하였고, 결국은 AD 800 년 경 샤를레망(Charlemagne) 대제

때 비로소 십일조가 정식 법령으로 공포되었습니다.  ​



​그런데 13 세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십일조의 대상이 구약의 가르침 그대로 주로 '토

지 소산물'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

일조 창고'를 따로 만들어 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3 세기에 이를 즈음, 십일조의 대상이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

되기 시작했습니다.  ​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교세가 커지고 교권과 이권이 거대해질 때 십일조가 머리

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즉 십일조가 하나의 엄청난 기득권이나 치부의 수단으로 자리 잡는 곳에서는, 반드시

 종교 지도자들이 십일조를 강요하여 교묘하게 가로채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시대, 신구약 중간 시대, 중세 시대, 그리고 오늘날에도 모

두 마찬가지입니다.  ​



​이렇게 1 세기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에 의해 폐지되었던 십일조 제도는 한참 후대의 중세

 가톨릭 시대에 슬며시 나타났다가, 종교개혁 이 후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면서 다시 대

부분의 유럽 교회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과정을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몽둥이를 맞고 비실거리다가 19 세기를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 세기에 들어서 교회 부흥이 일어나, 교세

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머리를 들게 된 것이다"고 평했습니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 동안 막대한 십일조 수입으로 온갖 비리를

 저질렀던 가톨릭조차도 이제는 그 십일조 제도를 버리고 자율적인 헌금 방식을 채택하

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을 개혁한 루터와 칼뱅을 지지한다는 한국의 개신교가 이제 와서 오히려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오직 한국교회와 미국의 극

히 일부 교단 교회들을 제외하면 의무적 십일조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명확히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 준 외국 여러 나라의 교회들도 거의 하지 않는

십일조를 한국교회가 목소리 높여 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모습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치 십일조 강요가 바리새인들이나 중세 가톨릭 주교 등 교권주

의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변절 역시 교회 내의 막강한 교권과

 기득권을 지닌 귀족 목사들에 의하여 자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 강요와 한국교회의 변절은 모두 교권 남용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꼴입니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변절된 시대에는 반드시 십일조 강요가 왜 나타나는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에서 왜 유독 한국교회만이 십일조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즉 동서양을 합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국교회만큼 단기간에 교세가 급격히 성장한

곳도 매우 드물고, 동시에 이처럼 빠르게 예수 따르는 길을 벗어나 변절된 교회도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



​만일 필자의 말에 동의를 못하시겠다면, 지금이라도 한국의 일부 귀족 목사들만큼 사

치스러운 목회자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직접 확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처럼 대부분의 교단 선거에서 돈을 주고받는, 더럽고 타락한 목회자들이 많

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 보십시요. 



​아울러 한국교회처럼 세습이 많은 나라가 있는지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한국처럼

교회가 세력과 이권을 키우기 위해 서로 큰 교회당을 짓겠다고 단체로 몸부림치는 나라도

 있는지 둘러보십시요. 이들은 목자의 얼굴로 양들을 속이고, 그저 먹기를 탐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율법적인 십일조가 지금도 유효한가  ​



​많은 목사님들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

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십일조를

 만고의 진리처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으므로, 그 시점에서는 구약의 십일

조가 아직 유효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당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다른 율법인 할례와 안식일도 지키셨

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명령하시기도 하셨

습니다. 즉 율법의 마침이 되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다른 율법들을 지

키셨다는 것입니다. ​



​반면에 예수님에 의하여 십일조가 폐지될 것임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



십일조는 성전에서 드려져야 하는데,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드릴 방법을 하나

님이 스스로 제거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전이 제거되면 레위 지파의 임무도 종결됩

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기서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킬 성전이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전도, 안식일도, 할례도, 제물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따라서 율법에 의한 십일조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



​또한 신약성경 속의 초대교회를 보면, 일반 헌금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즉 '십일조의 정신'인 '사랑'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돕기 위해 '자발

적인 연보'는 했지만, '율법적이며 강제적인 십일조'를 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



​심지어 당시에 할례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할례당'은 있었으나, '십일조당'은

결코 없었다는 점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 및 관례는 전적으로 폐지하면서, 오로지 돈줄이 되는

 십일조만은 예외로 적용시켜 강요함은 상식에 어긋나는 논리입니다. 



​바울 사도도 '연보'에 대하여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

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당시에 십일조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구제를 위한 연보를 그토록 강

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십일조의 본래 목적이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성직자의 생활비

를 지급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어느 분의 지적처럼, 기타 다른 신약성경 어디에도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고 꾸지

람을 받은 교회가 없고, 반대로 십일조를 잘 했다고 칭찬을 받은 교회도 없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완고한 주장을 고려해 볼 때 십일조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바울의 서신

들 속에서 한두 번이라도 꼭 언급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책

망 하는 부분에서도 십일조를 도적질했다는 책망이 반드시 나왔을 것입니다.  ​



​사도 요한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순교

를 당했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전하여 준 가르침에는 이 십일조란 단어

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십일조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들과 함께 폐지된 것을 당연시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그토록 중요했다면, 사도 바울을 비롯한 다른 사도들이 이를 경시했을 리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구태여 밝히자면, 앞서 언급한 '십일조의 정신'은 살아 있으나

'율법의 십일조'의 시효는 다른 율법에 명시된 성전, 제사, 안식일, 할례 등과 함께 동

시에 종료된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

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기록된 말씀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사도들에 의해 전파된 기독교는 결코 유대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가 유대교 율법의 하나였던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십자가를 거

스르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헤롯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라 확신합니다.



​또한 안식일도 지키고, 성전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고, 할례도 하자는 억지와 크게 다

를 바가 없습니다. 



​더구나 신정 국가 시대가 아닌 현대를 사는 신도들은 이미 국가에 상당 수준의 세금을

내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획일적인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이중과세나 다름

이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거기에 별도로 주일헌금, 감사헌금, 건축헌금, 그리고 선교헌금 등 일일이

 다 외우기도 힘든 수십 종의 헌금 명목을 만들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요하며 전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온통 돈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묘하게 경제적인 착취를 하는 행위이며, 비판자들로부터

 '현대판 농노 제도'라는 비난을 들어도 떳떳하게 반박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십일조의 정신  ​



​그러나 사실 원칙을 따지자면,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생명, 가족,

 친구, 재산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단순한 '십분의 일'이 아닌, 우리 자신 전부를 '산제사'로 주님께 드리는

 '경건한 삶'이 신약 시대의 '온전한 십일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

니라"고 하신 말씀이 참조가 될 것입니다. 



즉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의 '문자적인 율법'은 폐지되었으나, 그 '율법의 정신'은

오히려 더욱 완성된 의미로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강요적인 십일조'를 폐지하고, 율법의 정신에 따른 자발적인 '사랑

의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율법의 정신이란 요약을 하면, 바로 '하나님 사

랑,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십일조가 없으면 교회 재정 수입이 줄어 교회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주기 때

문에 곤란하다는 변명을 하시는데, 진리가 아니라면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강요적인 십일조'가 꼭 있어야 하고 '자발적인 헌금'만으로는 운영을

 못할 교회라면, 그런 교회는 그냥 문을 닫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주님의 사

업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헌금을 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우리에게 이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가 또 다시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입이 너무 적어 생활이 매우 어려운 분들은 백분의 일을 헌금해도 상관이 없고, 때로

는 헌금을 못 하셔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필요하면 교회가 이 분들을 경제적

으로 도와드려야 합니다.   ​



​반면에 1 년에 10 억 원이나 벌면서 1 억을 떼어 헌금하고,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주해

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은사이든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은 열매를 기대하시

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왜곡하며 십일조와 수십 종류의 헌금을 강요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간판만 개혁 교

회이지, 실제로 하는 행동은 루터와 칼뱅을 벗어나 중세 가톨릭만도 못한 행태를 보여 주

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귀족 목사들이 마치 제사장이라도 된 듯 자신들의 권위를 치장하며, 스스로 중

세 성직자 행세를 하는 것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헌금은 흰 봉투 하나면 족하다



​아울러 교인들의 주머니는 한정되어 있는데, 이런 저런 잡다한 이유와 이름을 붙인 수십

 가지나 되는 헌금 항목들도 모조리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매주일 자신의 능력과 여건에 따라 정성껏 주일헌금을 하면 되는 것이지, 도대체 왜 이런

 복잡한 분류가 필요한지요.  ​



​예를 들어 생일 감사는 꼭 감사 헌금 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따로 구별해서 헌금해

야만 하나님께서 알아보신다는 말인가요. 그냥 무기명으로 주일헌금에 합쳐 넣으면, 무

슨 복잡한 문제라도 생깁니까. 헌금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하는가요.



​신약 초대교회에서도 이렇게 세분화한 헌금 분류를 사용했다는 말은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또한 이런저런 구실로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공개한다거나, 예배시 감사 헌금자를 호명하

며 별도로 기도를 해 준다거나 하는 행동은 지극히 세속적인 처사라고 분명히 경고하고 싶

습니다. ​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이런 행위는 개혁 교회답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이런 행태들은 그저 돈을 더 뜯어

내려는 극히 인위적이며 세속적인 잔 수로밖에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튼 한국교회 귀족 목사님들은 잔머리를 굴리며 쓸데없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데는 올림픽 금메달 감입니다.  ​



​한마디로 요약해서,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헌금을 무기명으로 하여 앞

으로 순결해야 할 주님의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냈다고 어깨에 힘주거나, 반대로 헌금을

많이 못해서 위축되는 일이 없어져야 합니다.



​목회자가 헌금자를 은근히 공개하여, 돈 많이 낸 사람들이 득세한다거나 더 좋은 대접을

받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있을 수 있는 저질적인 행태입니다.



​이상으로 한국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율법적 십일조'에 대한 반론을 간단히 요약해 보았습

니다.



​만일 십일조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명백히 오류라는 것을 다른 분들이 구체적으로 잘 지적

해 주시고 설명해 주신다면, 이 후에 언제라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

도 아울러 밝혀 두고자 합니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 



​어찌 되었든 어떤 분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열심히 하는 것을, 구태여 도시락 들고 따라

다니며 말리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적이 매우 미신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즉 세속적인 출세와 복을 위

하여 십일조를 바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치 무속인이 천신굿을 할 때 돈을 바치듯, 매

우 기복적이라는 것입니다.  ​



​필자가 최근에 만난 어떤 분은 "십일조를 하면, 큰 복을 받는다"는 친척 목사님의 말을

굳게 믿고 십의 이조까지 바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놀랍게도 사업에 대박이 터져

수 년 전에 아주 큰돈을 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맛에 신바람이 나서 나중에도 열심히

 십의 이조를 해 오셨는데, 실망스럽게도 근자에는 사업도 잘 안 되고 거의 약발이 떨어진

 모습으로 한숨 속에 지내시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 일부 교인들의 의식 수준을 잘 보여 주고 있는 하나의 삽화입니다.

 즉 '십일조의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세속적인 복만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설마라고 하시며 웃어넘기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의외로 십일조를 복 받

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시는 순진한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 모두 귀족 목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감염된 탓이지요. ​



​이는 '돈 놓고, 돈 먹기'인 투기꾼의 심보이며, 성황당에 물을 떠 놓고 손바닥에 불이 나

게 비비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여기서 필자는 이런 분들께 분명히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십일조를 바쳐서 어쩌다 부자

가 될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대로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구를 다 바쳐도 깡통을 찰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언급한 말라기서의 핵심 주제는 단순히 '돈을 내면, 복을 받는다' 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이며

탄식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증한 일에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일조를 아무리 잘해도, 행실이 올바

르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입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하고 성공한다"는 일부 목사들의 달콤

하고도 무지한 설교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성경대로 충실하게 살아도, 지지리 고생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 수

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큰 상을 받은 자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작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거나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자에게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으나, "나를 따르

면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신 적은 결코 없으셨습니다.



​거짓 목사들이 이런 사실은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성경의 앞뒤를 다 잘라 낸 후 단순하

게 "십일조를 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잘하기로 따지자면, 아마 바리새인들보다 더 잘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들이 복을 받았나요. 오히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책망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요즘 많은 목사들이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른 신정 국가 시대의 말라기서를 자세

한 배경 설명이 없이 단순히 인용하며,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거나 "하나님의 것

을 도적질하지 말라"라고 강조하는 것은 십일조의 참된 정신을 왜곡하는 날조이며 기만입니다.



​말라기서의 주제는 '십일조와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구약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관련 내용 역시 백성들보다는 오히려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도적처럼 십일조를 떼어먹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제대로 나

누어 주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말라기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신정 국가 백성으로서의 '책임'과

'특권'을 강조한 '온전한 십일조'인 것이지, 세속적 축복을 받기 위한 '도깨비 방망이 ' 같

은 그런 십일조가 아닙니다.



​즉 "복 나와라! 뚝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백성 된 책무인 온전한 십일조를 잘 바치면 비로소 참된 복을 받는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



​이런 '섬김과 책임'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거짓 목사들이 단순히 "돈 내면, 복 받는다" 는

 식의 미신적이며 주술적인 기복 신앙만을 상습적으로 떠벌리니 교회가 굿 판처럼 매일 복

 타령이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사업 번영, 자식 출세, 무병장수, 호의호식만을 꿈꾸게 되고, 이에 안주하

는 복쟁이들이 되어 교회가 병들게 됩니다. 



​제대로 양심을 가진 목사라면, 이웃을 섬기는 것이 복이고,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복이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복이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복 이고, 억울

한 자와 함께 우는 것이 복이고, 낮아지는 것이 복이고, 가슴을 치며 회개 하는 것이 복이

라고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복이고, 남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고 사는 것이 복이고, 사

회의 소금이 되어 녹아지는 것이 복이고, 그리고 예수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

을 가다가 때로는 눈물 나는 고생을 하는 것도 참된 복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닌지요.





​사람이 만든 올무 



​십일조 강요는 결코 성경적이 아니며, 현실적으로도 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전도의 문을

 크게 막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교회에서 은근히 조직적이며 지능적인 십일조 강요로 인하여, 초신자들이나 가난

한 교인들이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올무입니다.​



​말라기서에는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

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탐욕스런 교회 지도자들은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

는 행위를 재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신자들에게 다시 율법적인 십일조를 강요하는 행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십자가를 역행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마치 국세청을 대신해서 추

가로 세금을 더 받겠다는 것과 비슷한 월권입니다.​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위선적인 십일조로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결국에는 큰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정복자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세운 왕조인 북쪽의 셀류쿠스 왕국과 남쪽 프톨레미 왕국 사

이의 그 유명한 '150 년 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운데에 두고, 양측 군대가 오르내리며 지긋지긋하게 벌린 이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완전히 초토화하고 처참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당시에 얼마나 이들 군대의

 겁탈과 약탈이 심했으면 귀중품을 밭에 감출 수밖에 없었을까요.​



​예수님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 관습을 근거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하고 가식적인 제사와 십일조를 바친 결과를 이스라엘의 역사가 생생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 교회는 이제라도 현대 가톨릭에서조차 시행하지 않는 이 십일조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

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잡다한 명목의 헌금들도 자발적인 '무기명 주일헌금'으

로 단순화하기를 부탁 드립니다. ​



어떤 이유로든, 교회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큰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결단코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이는 주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당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바쳐진 온전한 '사랑의 헌금'만을 가지고,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소모적인 논쟁 이젠 끝장내자



이렇게 십일조 폐지를 교회와 교단에 강력히 건의하지만, 사실 이 분들의 답변에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 강요는 한국교회의 변절에 기인한 것이고, 교회의 변절은 교단을 장악한 교권주의자들

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마음을 열고 들을 리가 없습니다.



​또한 진리 문제를 단순히 다수결로 해결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찬반이 팽팽하여 결론

이 나지 않는, 필요 이상으로 소모적인 논쟁은 아무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



​하지만 해결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끝도 없이 연구만 하고 논쟁을 할 것

이 아니라, 이제는 실천을 하자는 것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신앙 양심에 따라 이번 주일부터라도 자신의 교회에서 율법적인 십일조를 공

개적으로 거부하고, '십일조의 정신'에 따른 사랑이 담긴 주일헌금을 하면 됩니다. 구태여

교회에서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집사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보수 교단 소속의 어느 중형 교회에 출석하는 이 친구는 대학 시절부터 늘 무기명 주일헌금

만을 고집하여 왔습니다. 하루는 나이 드신 교회 여전도사님이 다가오셔서, "아무개 집사님도,

 앞으로 십일조를 좀 하시지요" 하고 부드러운 충고를 주셨습니다.



​그 때 이 집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변을 드렸다고 합니다. "저는 원칙적으로 십일조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기명 헌금에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제 신앙양심에 따라 무기명 주일

헌금을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얼마 뒤에는 담임목사님이 같은 권고를 주셨습니다. 물론 동일한 답변을 드렸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런 일이 있은 이 후로는 누구도 이 친구의 십일조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장로가 되지 못 한 것 외에는 교회 생활에 별 다른 불이익이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십일조나 감사헌금 실적을 높여서 담임목사의 인정을 받고 장로나 권사 등의 직분을

서둘러 받고 싶으신 분들이 아니라면, 이 집사의 소신 있는 처신도 약간의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때로는 힘에 벅찰 정도로 많은 헌금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추가로 알려 드리

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라



여섯 번에 걸쳐 20 년 이상 추방을 당하면서도 정통 '삼위일체론'을 끝까지 고수했던, 4 세

기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아타나시우스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반

대하는가, 그러면 나도 온 세상을 반대하노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필요하다면 담임목사나 교권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대들이 나의 신앙 양심을 반대하는가, 그러면 나도 그대들을 반대하노라."​



​또한 이 말도 추가하고 싶습니다. "나는 율법적인 십일조 강요가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합

니다. 따라서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대와 그대의 후손들이나 열

심히 해서 그토록 좋아하시는 복을 대대로 받으십시오!" ​



​한국교회의 십일조 강요는 명백하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퍼트리는 일이며, 사도들이 결코

 전하여 준 바가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 개혁은 십일조 폐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이미 복을 넘치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복이 그렇게 더

 필요해서 허구한 날 복 타령만 하며 십일조를 노래하나요. ​



​마지막으로 보수와 진보를 따지지 말고 여러 교단의 뜻있는 신학자들도 중립적인 침묵으로

세월만 보낼 것이 아니라, 진리의 파숫군답게 명철한 지혜를 가지고 이 율법적인 십일조

의무화에 대하여 분명한 나팔소리를 들려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

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



[출처] 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 ① - 신성남|작성자 복음의 그루터기



-원문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ostar74&logNo=220659245698&parentCategoryNo=&categoryNo=57&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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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十一租 / tithe -나무위키]



1. 개요



그리스도교에서 자신의 수입의 10%(=1/10)을 헌금 등으로 납부하는 것.



그리스도교에서 자신의 수입의 10%(=1/10)을 헌금 등으로 납부하는 것이나 수입이 수익인지

 수입인지를 따져야 한다. 물론 후자가 더 헌금액수가 많아진다.

구약의 원어를 살펴보면 '테부아'로서 열매, 증가, 수익이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원래는

농사를 지어서 나온 수확물의 십분의 일이었다. 목축업은 전통적으로 첫 새끼를 바치는 것

이 원칙이다. 양계장으로 따지면 초란은 원래 다 헌금해야 할 것. 현대사회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월급 생활자들과 자영업자로서는 실질적으로 비용을 공제한 수익이 원래 의미에 가까

울 것이다. 월급생활자들이 많아서 보통 한국의 교회에서는 달마다 걷지만 성서에 따르면 연

마다 걷어야 하는 것이고, 논리적으로 수익보다 빚이 많아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수입이라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십일조의 근거가 되는 구절은 성경 신명기 14장 22절부터 29절까지로, '매년 토지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가지고 예배하며 먹고 마시는 것과 삼년마다 너희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

성중의 고아와 과부를 먹이고 레위 지파인들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다음 구절은 7년

마다 빚 탕감하기... 원래 그리스도교 예배는 설교 후 빵과 포도주(즙)를 나누어 먹는 것으

로 서술되어 있고, 유대교 예배도 희생제물을 불에 태우는 등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과정

에서 제거되는 부위는 주로 피와 내장 부위였다. 남은 제물의 부위를 굽거나 삶은 고기나 빵,

 과일 등의 음식들을 예배자들끼리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배 후 같이 밥을 먹는 것

은 유구한 전통이 있는 것. 그리고 그 구절의 유래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멜기

세덱에게 바쳤던 노략물의 10분의 1 구절.*



***

제정일치 시대의 세금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구약성경을 보면 당시의 제사장들은

정치지도자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모세를 봐도 종교 지도자이지만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동시키는 정치 지도자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사울이나 다윗의 경우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종교적인 권위도 함께 가지게 된다. 이 때 레위 지파 사람들은 아

예 신전 관련 업무가 아닌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 교구민(敎區民)으로부터 수입의 1/10을 징수하기도 했는데 '10분의 1세',

 '10분의 1교구세'라고도 했다. 고대의 유대교도에게 수입의 1/10을 하느님께 바칠 것을 명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연유한 것인데, 구약시대의 제사 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기도 하였고, 바쳐진 것의 9/10은 레위인들의 소득을

 위해서, 1/10은 제사장들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私有敎會制)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世俗領主)들은 자신들의

 영민(領民)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점차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1078) 및

1179년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의 교회제도 개혁을 통하여 영주로부터 십일조를 환수하려 하

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소교구(小敎區)의

사제(司祭)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

일조), 아마(亞麻)·가금(家禽)·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開墾地:신십일조) 등에 십일조

를 부과하였다.



한국 가톨릭의 경우엔 "교무금"이라는 것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항목을 참조.



참고로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유럽에는 십일조가 없다'라는 오해가 퍼져있는데, 당연하지만

유럽에도 십일조는 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 이후 그리스도교가 국교였던 유럽국가들은, 십일

조가 세속법에 의해서 보장이 되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권에서 차츰차츰 교권과 속권이

 더 엄격하게 구분되며 '세속법에 의한 십일조 보장'이 폐지되었기에 이런 오해를 부른 것이다.

  어차피 한국에서는 천주교든 개신교이든 국교가 된 역사가 없고, 따라서 한국의 그리스도교

에서 십일조는 역사상 언제나 '세속법이 아닌' 순수한 종교적 의무의 영역이였다. 그리고 이것

은 혁명 이후의 유럽권 교회와 유사하다. 물론 종교적으로 의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신자의

경우 신부나 목사와 상담하여 사정을 설명하면 얼마든지 면제받을 수는 있다. 중세와의 차이점

은, 이것을 세속법이 보장해주느냐 마느냐이다.





2.1. 유대교의 경우



유대교의 경우,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레위 지파로 이루어진 제사장 계급이 사라지면서,

 성전 참배를 토라 학습으로 대체하고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은 랍비들이 대신하였으며 성전의

 역할은 회당이 이어받게 되었다. 이와 때를 함께 하여 레위 지파 제사장들을 위한 십일조 제도

도 같이 없어졌다. 성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사장도 필요없고, 제사장 계급이 없으니 제사

장 계급의 생계 유지를 위해서 걷던 십일조 제도도 더 이상 존속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랍비들이나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서는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레위 지파의 제

사장'이 거두도록 되어 있는 십일조를 제사장이 아닌 다른 지파 사람들이 받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짓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유대교에서도 현재의 상황이 구약 시대와 맞지 않아 십일조를 폐기한 마당에, 레위 지파는 커녕

 유대인도 아닌 개신교의 목사들이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것은 타

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랍비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별도의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전업 랍비는 이스라엘군의 군종 랍비(military rabbinate)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에 비해, 특히 한국의 개신교에는 목사가 다른 부업을 갖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

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그렇다고 이런 분위기가 십일조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서로 완전히 별개

의 문제이다.





2.2. 천주교의 경우



천주교에는 십일조와 비슷한 것으로 교무금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는 교회법상 가톨릭 신자의

 6가지 의무 중 하나(교회 유지비 부담의 의무)이며, 매년 일정 금액을 약속하여 납부한다.

 신자 재량에 따라 20분의 1, 30분의 1정도만 내도 전혀 문제가 없으며 실제로 교무금으로 얼마

를 내든지 신자의 철저한 자유다. 일단 각 본당에서 걷은 교무금은 전부 교구청으로 보내서 다시

각 본당에 나누어주고 교구청에서도 쓴다.



다만, 혼자 사는 어르신이라든가 생활보호대상자, 학생(취준생, 공시생 포함) 등 교무금을 내기

에 경제적 사정이 넉넉지 않은 경우, 본당신부와 면담을 하면 면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의무사

항이기 때문에 이걸 밀리게 되면 밀린 것의 일부든 전부든 일단 정산해야 하며, 서울대교구 같

은 경우 교무금 정산을 하지 않으면 교적 이동을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밀리면 꼭 전부 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일부라도 반드시 정산하자. 아니, 애초에 부담없는 내에서 교무금을 설정하

고 추후에 조금씩 올려가도록 하자. 처음부터 교무금이 너무 많으면 나중에 부담스러워지기 때문

이다.



교무금 말고는 미사 성찬의 전례 전에 내는 기본적으로 내는 헌금(봉헌금)이 있고, 그외에 2차헌

금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목적을 위한 별도의 헌금, 감사미사나 위령미사를 봉헌할 때 자발적으로

 내는 미사예물 정도만 있고 다른 것은 없다.



교무금, 헌금 등은 모두 종교 기부금으로 처리되므로 연말정산 때 기부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

낼 사람은 내고 종교기관에 연말정산 영수증 발급해달라고 말하자. 이것은 개신교의 헌금도 마

찬가지다.



그런데 신부님들에 의하면 돈을 내든 안 내든 성당 다닐 수 있고, 차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천주교는 돈 걷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다. 즉 돈에 집착해서 믿음을 망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공통된 입장이다. 사실 애초에 천주교 자체가 강압적인 것이랑 거리가 먼 종교다.





2.3. 정교회의 경우



정교회는 애초에 역사상 한 번도 십일조를 의무화 혹은 법제화한 적이 없다.



정교회는 특별히 각 교인이 얼마를 교회에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해 놓지 않

지만 교회가 운영되어야 하고, 자선 사업과 선교 사업이 행해져야 하며, 또 성직자들과 사무직

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해야 하므로 교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많이,

자진해서, 교회에 헌금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2.4. 이슬람교의 경우



이슬람교의 경우, 무슬림들이 지켜야 할 5가지 의무 중 '자카트(?????? ; 희사 혹은 자선이라는

 뜻)'라 하여 무슬림들은 ?수입의 일부분을 바쳐야 한다.



보통 이 돈은 와크프(???, 재단이란 뜻??)로 들어가 새로운 성원을 짓거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인다. 하지만 굳이 와크프에 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이나 여행객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풀 수도 있다. 간간히 이러한 자금들 중 일부가 테러 단체로

흘러드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외로는 사다카(??????)라는 헌금도 있는데, 이는 모스크에서 아무 때나 낼 수 있는 일종의 기부

금이다. 자카트와는 자유로 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3. 대한민국 개신교에서의 십일조



개신교의 경우, 걷히는 헌금에 대해 지출하는 구제비는 3.8% 미만이기 때문에, 이들이 걷는

십일조는 사실상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라고 하기가 어렵다. 착각하기 쉬운 것이, 십일조로

 받은 돈은 100% 구제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를 착복하고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

질하는 것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제사장에 속하는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도 십일조를 주라고 했으니 목

사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주장이 있으나, 개신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

에서 사망했을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는데 이것은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누구라도 하

나님과 만날 수 있는 증표라고 했으며, 개신교를 창시한 마르틴 루터가 제창한 '만민사제주의'

에 의하면 목사는 제사장에 속하는 사제도 아니고 흔히 '평신도'라고 불리는 일반 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애초부터 천주교에서 사제들이 갖던 배타적인 권한을 부정하면서 나온 것이

 개신교였다.



개신교에서 구원을 특히 강조하는 경향에 대해 십일조를 이용하여 비꼬는 유머가 있다. 왜

구원을 주느냐고 하니까, 원래는 10원을 주려고 했지만 십일조로 1원을 떼가서 결국 잔액인

9원만 준다는 식의 블랙 코미디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11조 내고 9원 받는다는 개그도 있다.

 십일조가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 만연하여 이곳저곳에서 폐단을 내보이는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가장 큰 문제는 2가지로 첫째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을 크게 강조하여 마치 많이 내야만 믿음

 있는 사람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교회에서의 직위를 가진 사람에게 많은 헌금을 강요

한다던가, - 아래 반론 참고) 2번째로 목사와 그 처자식의 생계, 필요를 넘어서 과도하게

물질적인 부를 안겨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에게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할 때 단순히 이

동수단으로서의 차를 넘어서 다른 이에게 과시하기 위해(특히 다른 교회에게) 고급차, 혹은

 외제차를 준다던가 말이다.



현재 이 정도 수준으로까지 물질에 집착하는 교회는 전세계에 한국의 개신교를 제외하고는 진

짜 얼마 없다.





3.1. 십일조를 옹호하는 입장



1. 민수기 18장에 하나님이 최초의 대자세장인 아론에게 십일조에 관하여 계시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이제 레위 후손에게 줄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둔 십일조 전부이다.

이것은 만남의 장막에서 예배를 보좌한 보수로 주는 것이다.

-민수기 18장 21절 (공동번역)



간단히 요약하자면,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직분 때문에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토지를 분배받지

못하였으므로 레위 지파에게 이스라엘의 나머지 11지파에서 10%씩 소득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내용으로, 달리 소득이 없는 성직자들의 생계비라는 의미이다.



현대에서도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 성직자라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생활하는 게 아니며, 신

자들에게 제공하는 용역 역시 공짜가 아니다. 천막 하나 치고, 또는 솔로몬 성전 하나만 관리

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오히려 돈 쓸 일은 더 많아졌다. 신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구휼보다 앞서는 교회의 목적이므로 허술하게 할 수도 없다.





2.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

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마가복음 12장 42-44절 (공동번역)



부자가 많은 돈을 헌금한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적은 돈을 헌금한 것을 예수가 훨씬 높이 평가

했는데, 이는 부자는 넉넉한 가운데 일부만 떼어내도 많은 돈이므로 그정도의 돈은 아깝지 않지만,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친 것이므로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부자의 헌금보다 더

많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비율로서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한국의

개신교이다. 즉 버는 돈에서의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하나님에게 많은 것을 바치게 되는 셈

이므로, 최소한 십일조는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3. 서양에서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과

정에서 국가 규모의 강제사항 또는 조세로서의 십일조가 폐지되어있다는 의미이며, 개인이 내는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은 자유사항이다. 애초부터 당연한 소리이므로 우습다. 이 점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십일조를 세금 걷듯이 걷어간다는 인식이 많지만, 교회가 개인의 소득조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알아서 계산해서 가져오는 것이다. 물론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책

을 맡으려면 십일조의 납부 여부가 중요해지겠지만 애초에 이런 직책들은 교회에 헌신적이고 신앙

이 투철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명예직이고 실익이 없기 때문에 십일조 가지고 상처 입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탐낼 필요도 없는 타이틀이다.



십일조를 내는 신자는 전체의 30% 가량으로 알려져 있는데,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

의 모든 소득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십일조에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

는다. 십일조 안 낸다고 교회에서 파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기 싫으면 안 내도 되고, 십일조

가지고 시끄러운 교회 있으면 교회를 옮겨버려도 그만이다. 돈 쓸 일이 많은 교회입장에서야 강조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십일조는 신자 개인의 자유이며, 교회라는 공동체 내부의 문제

이므로 교회 외부의 사람이 관여할 일도 아니다. 물론 교회 외부에서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건전

한 비판은 당연한 것이지만 십일조에 대해 극단적인 반감을 지닌 안티기독교들이 비아냥대는 것처

럼 신자들 돈을 강도처럼 뜯어간다는 식의 강요는 절대 아니란 것이다.



4. 복음서에서도 제자들을 보내면서 스스로 쓸 것을 가지지 말라 하면서 복음 받은 자들을 통해서

 물질적인 필요를 채움받는 것을 말하였고(마태복음 10장 9~11절[20]) 바울도 배우는 자가 가르

치는 자에게 주라고 하였으며(갈라디아서 6장 6절, 디모데전서 5장 18절, 고린도전서 9장 9절~15절)

 실제로 받기도 하였다.(빌립보서 4장 16절[24]) (다만 사람들에게서 금전적 이득을 취한다는 오해

를 피하기위해 일부러 안받기도 하였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





6. 예수가 십일조를 명령했다는 주장이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

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23장 23절(공동번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과 행동 모두를 챙겨야 한다는 대목이며 여기서 행동은 십일조로 표현된

다. 모두 알다시피 마태복음은 신약서다.





3.2. 옹호하는 입장에 대한 반론



(위 주장과 비교했을 때 번호 순서가 맞지는 않으니 주의할 것.)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느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느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 천벌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공동번역)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

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개역개정)

-말라기 3장 8-9절





현대 개신교 교회에서 목사들이 주로 하는 설교이다. 목사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잘 내지 않는 성

도가 많으면 주로 하는 설교인데,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도둑질하는것은 저주받을 행

위이므로, 십일조는 꼭 지켜야 하고 꼭 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저 구절은 일반 성도가

아닌, 목사에게 하는 소리이다.



보통 3장 8절과 9절만을 읽게 하는데, 앞뒤 문맥을 읽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십일조로 받은

헌물을 제사장(현대의 목사)들이 사사로이 사용한 것. 십일조는 100% 과부와 고아, 거지와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돈이다. 즉, 목사가 십일조를 받았으면 한치의 흠도 없이 그 십일조의 모든

 돈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고아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목사들 중, 소수의

 개혁파 목사들(무교회, 무보수 목사)을 제외하면, 모두가 저 구절에 걸린다. 기독교인들, 특히

목회자에게 성경은 양날의 검이며, 남을 베려다 자신이 베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다니,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실, 이 단락만으로도, 국내의 십일조 변명은 한번에 정리가 된다.



만약, 십일조를 받았다면 모든 목사들은 그 십일조를 한푼도 사사로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십

일조를 모두 기부하거나, 모두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하여야 한다. 단 한푼도 이 외의

용도에 벗어나는것은 하나님이 명시한 저주받을 행위이다.



1. 위의 비판에도 잘 드러난다. 일단 구약 시대 레위 지파 제사장들과 현 개신교 목사들은 동일

 위치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는 제사장은커녕 성직자조차 아니다. 그냥 평신도일 뿐. 이

는 개신교의 근본정신인 만인사제주의를 무시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목사의 생계를 내세워 십일조를 합리화하는 것도 병크다. 목사라는 직업 자체는 일종의 자원봉사

로서 목회 활동 자체는 수익구조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십일조 이외에 매주마다 걷는

 헌금은 정작 따로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교단의 지원도 받는다. 또 목사 개인의 강연활동 등

으로 투잡을 뛸 수도 있으며, 현대에서는 맞벌이가 일반적이기에 배우자나 직장이 있는 자녀 등

외적인 수입원이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기에 십일조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더

욱 설득력을 잃는다. 유대교 항목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랍비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기 직업을

따로 가지고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예 종교인로서 무소유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도 분명 있다. 애초에 한국의 개신교에서

교회의 빈곤이란 개척교회 시스템에서 비롯된 성장단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2. 흔히 들을 수 있는 변명 중에 하나가 건축자금이다. '신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구휼보다 앞서는 교회의 목적이므로 허술하게 할 수도 없다.'고 하는 주

장인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반대에 있는 주장이다. 예수는 그 호화로운 예루살렘 성전

에 대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선언했으며 통곡의 벽 빼고

그대로 되었다. 오늘날의 교회 건물도 여기 해당이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또한 그 전에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라는 구절, "너희 중 가장 낮은 자 하나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는

 것이다."라는 구절도 있으며, 최후의 심판 시에 일생 동안 '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목 마르고

 나그네 된 주변의 헐벗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지 않은 것이 예수 자신을 돕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돕지 않은 이들을 악인으로 분류하여 지옥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자기 주변의 가난하고 헐벗은 예수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교회 건물 마련하는 것이 앞서는 목적

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십일조에 대한 비판은 '청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종교가 돈을 요구하고, 그 돈을 구제나 사회

정의 구현 등에 쓰는 대신 목사의 사업자금 내지는 비자금으로 쓰이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애초에 십일조가 정말로 목사 생계 유지를 위해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돈이고 목사가

그 돈을 최소한 구제하는 데라도 잘 썼다면 십일조 비판이 나오기나 했을까?



3. 대부분의 교회에서 권사, 장로의 직분을 줄 때 정기적인 십일조의 여부를 확인한다. 가장 개

혁적이라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총회장을 하던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의 경우에도, 권사

임직시 200만원, 장로 임직시 1,000만원의 헌금을 여러 구실로 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부

이단 드립을 치겠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독일같은 나라에서

는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정부에서 교회세를 떼어가서 종교예산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차라리

독일처럼 정부에서 관여하여 교회세를 떼어가면 모를까, 한국의 개신교와 목사들은 분류상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면서도 단 1원의 세금도 내지 않는다.



또한 주마다 주보에 감사헌금 및 십일조를 납부한 사람들의 실명 명단을 공개하는 교회가 대부분

인데다, 그것이 일정 액수, 이를테면 10만원 이상이면 따로 명단을 올리기도 하는 교회가 상당수

이기에, 개인의 자유로 내는 것이라는 말도 사실상 궁색하기 이를 데 없어진다.



4. 십일조라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맥락인 구약 율법의 일부이다. 예수가

 와서 구약 율법을 일일히 지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

였음에도 같은 구약 율법인 십일조는 지키도록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는 모순이 있다. 또 십일

조로 마련된 금액은 성경대로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써야 하는데, 십일조를 포함해서 교회 내

 헌금의 8할 이상은 목회자 월급과 성전건축에 들어가는데 이에 반해 구제비는 3.9% 미만이라는

 통계자료가 존재한다. 또, 십일조 자체가 강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서 십일조 납부를

 장려하는 주보의 문구나 목사의 설교를 대부분의 교회라면 흔히 접할 수 있다. 또 십일조를 착

실히 작정하였다는 록펠러를 앞에 내세워 십일조를 권유하기도 한다.즉 십일조를 강제하지 않지

만 이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산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 내면 그만'이라는 옹호론의 가장 큰 문제는 만약 십일조가 '안 낼 수 없고, 내

도록 강요하는 것'이라면 응당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교회가 십

일조를 강도처럼 뜯어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목사 이하 교직자들은 죄다 쇠고랑 찼을

 테니까. 그나마 강탈해 가지는 않으니 이런 원론적인 수준에서 비판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끼리 우리 맘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 라는 주장은 십일조 작정에 대한 본 문제

를 회피하는 것으로, 십일조 옹호론에 대한 근거로서 적절치 않다.



5. 또 복음서나 사도행전 등등에서 12사도들이나 바울이 '물질적 도움'을 받은 것을 들고 나오는

데 그러한 사례금을 어디까지나 '사례금'의 명목으로 받은 것이지,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받아

주머니에 넣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받은 사례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이고 최소한적

인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 조금 더 되는 금액이었지, 매달 부를 축적할 정도의 받은 것은 아니었다.



6. 가난한 과부 이야기는 오히려 '십일조를 착실하게 내라'보다는 '종교인들아, 가난한 사람들

등쳐먹지 마라'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일화이다. 우선 이 일화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한다. 특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디스하면서 했던 다음 말들을 천천히

 읽어보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받을 것이다.

너희는 과부들의 가산을 몽땅 삼켜버리는가 하면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늘어놓는다. 이때문에 너희는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3장 14절 (공동번역성서)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12장 40절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만은 남에게 보이려고 오래 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루카 복음서 20장 47절 (공동번역성서)





그리스도는 부패한 종교인들이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음 장면에서 한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으

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마가복음 12장 42-44절 (공동번역)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

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 복음서 21장 3~4절 (공동번역성서)





즉 여기서 그리스도는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이 나쁜 놈들아"라고 말하는 어조에 더

가깝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조금 전까지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등쳐먹는 놈들"이라고 부

패한 종교권력을 욕하다가, 잠시 후 진짜로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냈다. 당연히 이것은 과부에

대한 칭찬보다는, 부패한 종교권력에 대한 비판에 훨씬 가깝다. 즉 먹사들이 성경의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십일조는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리고 그

직후 십일조로 만든 성전을 나가면서 예수는 과부를 등쳐먹으면서 만든 성전에 저주를 퍼붓는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

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나중에 더 크게 주신다는 신학적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교단 내

부에서 통하는 내용이므로 십일조 옹호론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다수에게 기독교 교리를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그 설득력이 매우 낮다.





3.3. 십일조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



여러분이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

나,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

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문제나 명절 지키는 일이나 초생달 축제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

제로 아무에게도 비난을 사지 마십시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고 그 본체는 그리스도입니다. (공동번역)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개역개정)

-골로새서 2장 13-17절





율법 완성의 관점에도 치명적인 결점이 있는데 예수의 이 일화는 십자가에 대속하기 전의 일이고,

 십일조나 제사와 같은 각종 율법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속하게 됨으로써 모두 새롭게 완성되었

기 때문이다. 다만 어쨌든, 이러한 구약에서의 십일조는 신약으로써 리모델링된 셈이므로, 반드

시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근거는 이제 더는 없는 셈이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유대인들에게 속했던 모든 절기법과 사회법과 종교법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스스로의 죽음을 통

해 구약의 내용을 신약으로 새로이 완성했으며, 여기에는 십일조 또한 포함된다. 즉 십일조는 유

대교에서 끝이 났다. 기독교는 십일조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구약의 십일조를 의무화한다고 하면 다른 제사법 또한 동일한 이유로 지켜야만 하는

 셈이다. 성경/구약 교리 요약의 규칙을 보면 이거 다 지켰다면 인생 살기 피곤한 수준을 넘어서

서 사실상 사회생활이 안 되겠구나 싶은 규약들이 차고 넘친다. 이슬람의 할랄 푸드보다 더 제약

이 많은 것이 구약의 율법이고, 이걸 실제로 지키고 있는 하레디 같은 유대교 극단주의자들은 안

식일인 토요일에는 전등불도 자기 손으로 안 켜고, 전 세계 어디에 가던지 자기들의 율법에 맞는

 음식만을 직접 싸들고 다니면서 먹는다. 기름이나 피는 절대로 먹지 못 한다는 규율을 오히려

확대해서 지키는 것이, 수혈을 거부하고 죽어가는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규율에 따르면 합성섬유

로 만든 옷을 입지 못하기 때문에 입을 옷이 거의 사라지고, 먹는 것도 엄청난 제약이 따르고,

움직이는 것도 제약이 따르고, 온갖 제사와 규율과 금기들이 당신을 기다린다.



다른 제사법에 관해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대속했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라는 교

리를 통해 절대 지키지 않음에도, 같은 등급의 내용인 십일조에 관해서는 '성경에 나오므로 반드

시 지켜야 한다'면 정말 이보다도 완벽한 아전인수는 없는 셈이다. 현대의 소피스트라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이다.



현재 한국의 개신교에서 걷는 십일조는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현'

 또는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유지

비를 위해, 그리고 교회와 담임목사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존재하는 셈이다.



현재 교회에서 십일조의 명분으로 헌금을 걷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신자들로부터 매달 수입의

 10분의 1을 징수 받기에 가장 편리한 구실이자 그럴듯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교회 재정에 보태기

위한 돈을 걷을 거라면 그 헌금은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걷으면 안 되고 따로 솔직하게 교무금이나

기부금이라는 이름으로 걷어야 할 것이다. 만약, 위에서 살펴본대로 근거는 너무 빈약하지만,

'그래도 구약의 구절에 근거해서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헌금을 계속 걷는 게 맞다'고 생각되어 십

일조를 걷을 거라면 현재의 3.8% 미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100% 이웃들을 위한 구제비로

지출해야 옳을 것이다.



문제는 사이비가 아닌 대부분의 기성 교단들도 십일조를 강권한다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라고 강

요할 수는 당연히 없고,너무 속 보이니까 따라서 십일조를 내면 더 크게 돌려 받는다거나, 복을

받는다는 식의 기복 신앙으로 꼬드기는 경우가 대다수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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