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13.

[종교] 그리스도교 종말론 휴거 천년왕국 루터 등의 천국 사상






[종교] 그리스도교 종말론 휴거 천년왕국 시대에따라 달라진 천국 개념







종말론에 관한 목회자들의 입장을 조사해보니
기사입력시간 : [2016-04-29 15:15]
전천년설 48%, 무천년설 31%, 후천년설 11%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
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7~9>

대부분의 개신교 목회자들은 예수께서 미래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종말의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목회자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미국 개신교 목회자의 1/3은 종말이 시작될 때 그리스도인들이 휴거를 당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약 절
반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수의 목회자는 적그리스도가 이미 와 있다거나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카리스마 하우스 출판 그룹의 의뢰를 받아 라이프웨이 리서치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의 일부다.
이번 조사에서는 개신교 담임목회자 1천 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을 실시해 종말론에 대한 견해를 물었
다.
라이프웨이 리서치의 부회장 스캇 머카널은 종말론은 교인들에게 여전히 인기있는 주제라고 말했다. 하
지만 이것은 설교에서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회자가 계시록과 세상의 종말에 관해 설교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목회자들과 그들이 인용하는 학자들은 종말에 일어날 일에 관해 의견을 달리하는 경
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종말론의 세 요소, 즉 휴거의 시기, 적그리스도의 본질, 천년왕국에 관해 매우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개신교 담임 목회자의 36%는 환란 전 휴거를 믿었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이 시작될 때 사
라질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환란을 당할 것이다.

목회자 넷 중 한 명은 휴거가 문자 그대로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약 1/5(18%)은 환란 후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수의 목회자들은 이미 휴거가 일어났거나(1%), 환란 중에 일어나
거나(4%), 하나님의 진노가 땅에 임하기 전(4%)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메인라인 개신교 목회자(36%)는 휴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경향이 많았다. 루터교(60%)와 감리
교(48%), 장로교/개혁교회 목회자(49%)는 약 절반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침례교(6%)와 오순절
 목회자(1% 미만)의 경우는 이런 견해를 가진 목회자가 적었다. 복음주의자(43%)는 환란 전 휴거를 믿는
 경향이 많았다.
목회자의 약 절반(49%)는 적그리스도가 미래에 나타날 인물이라고 답했다. 적그리스도가 개인이 아니라
거나(12%) 악을 의인화한 것이거나(14%) 기관(7%)이라고 답한 이들도 있었다. 6%는 적그리스도가 이미
와 있다고 말했다.

천년왕국설에 관해서도 의견이 나뉘었다.
48%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한 후에 천년왕국을 세우신다는 전천년설을 믿고 있다. 31%는 천년왕국을 문자적
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예수께서 이미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는
 무천년설을 받아들인다.
11%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이 점진적으로 기독교화된다고 보는 후천년설을 믿고 있다.
대다수의 침례교(75%)와 오순절(84%) 목회자는 전천년설을 받아들인다.
루터교(71%)와 장로교/개혁주의(52%), 감리교(37%) 목회자의 경우는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감리교의 경우 다른 교단에 비해 후천년설을 지지하는 목회자의 비율이 높았다.
머카널은 목회자들이 종말론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재림에 관한 핵심적 가르침에는 동의한다. 나머지 세부 사항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
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계시록의 큰 그림은 명확하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 사람들은 준비를 해야한다. 악은 패배한다. 나머
지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원문출처: 크리스찬타임즈
http://www.kctusa.com/technote7/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23349#.WlmPaahl82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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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 携擧. rapture[본래 뜻은 '황홀경'] - 나무위키


해당 개념을 설명하는 라틴어 불가타역 신약성경 <데살로니카 1서>의 'Rapiemur' 라는 구절에서 따온 단어이다.
 기독교의 종말론 중 하나로 예수가 재림하여 공중에 임할 때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 그와 만난다는
 것. 한자 뜻을 해석하면 '이끌어 가다'라는 뜻.


1.1. 휴거의 실제 개념과 관련 교리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
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성경 히브리서 11장 5절)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
들은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
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 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성경 테살로니카 1서 4장 14절~17절)


휴거의 개념은 19세기 미국 근본주의 및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개신교 교파들에서 성경에 나오는 승천의 사
례, 언급들과 신약성경의 언급을 문자 그대로 조합해서 내놓은 해석이다. 휴거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휴거 = 승천(강제적인 힘에 의해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 한마디로 가톨릭의 성모승천교리 같은
 식의 개념)으로 본다면 휴거와 관련된 성경 구절이나, 휴거 자체를 교리로 믿고 인정하는 기독교 교파들은 주류
와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굉장히 많은 편이다.

휴거 교리를 따르는 종말론으로는 주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가 있다. 이들은 예수가 공중에 재림하고 나서 휴
거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천국으로 이끌어 지상에 일정 기간 대혼란과 전쟁,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고통이 가
득찬 상황에서 건져주며 지상에서의 대환난이 지나가고 악과의 최후 전쟁(아마겟돈 전쟁)에서 믿는 자들이
승리한 이후 지상에 예수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스리는 천년왕국이 이뤄지고, 천년이 지난 뒤 풀려난 사탄과 그
때서야 부활하여 천년왕국에 저항하는 악한 인간들을 영원한 불지옥으로 심판한 뒤 끝없는 하느님 나라가 지상과
 천상에 펼쳐진다는 교리를 골자로 한다.

또한 이들은 하느님이 믿음이 좋았던 에녹을 그대로 하늘로 승천시킴(창세기), 하느님이 예언자 엘리야에게 화
마가 끄는 불전차를 보내 승천시킴(열왕기하),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됨, 택하
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함(마태
오 복음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함(테살로니카 1서) 등의 성경 구절들을 근거로 하
며, 그 외에 복음서에 나온 다니엘서에 대한 언급을 참조해 적그리스도에 대한 다니엘서의 예언들과, 요한묵시
록 20장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이론의 기반으로 삼는다.

여기서의 휴거 교리는 단순한 승천이 아니다. 휴거의 목적은 하느님이 묵시록에 기록된 종말과 세상의 혼란, 심
판이 임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공중에서 재림하여 믿음이 좋은 신도 일부를 공중으로 올려서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데, 사실 성경을 자세히 따져보거나 기독교 역사상에서 모든 해석을 뒤져봐도 이런 해
석이 전통적인 해석은 아니다는게 문제. 물론 성경의 자유해석을 중시하는 개신교 입장에선 전통적인 해석을 따
르지 않는다고, 그것이 성경적인 해석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미국 근본주의 개신교에서 휴거 개념을 창안해낸 것은 요한묵시록과 종말론에 대한 해석 과정에
서 파생된것이다.  영적 순결함을 유지해 생지옥을 피하고 먼저 천국에 올라가 있겠다는 마인드가 거룩함일지,
도피 심리일지는 믿는 개인의 양심만이 알 것이다.

또한 세대주의적 관점에서도 더욱 엇나간 극단론자들이 흔히 떠드는 '종말의 정확한 시기 예측(시한부 종말론)이
나 예언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완전히 부정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서 24장 36절이 명확하게 '시기는 알 수 없다.
하느님만 알고 있다'고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마태오 복음서 24장은 '택한 자들에게 올 승천'에 대한 구
절이 있는 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우긴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게 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오 복음서 24장 36절).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제대로된 기독교인이라면 세간에 떠도는 근거없는 시한부 종말론 등을 신봉해서는 안 된다.
그 기원이 마야 달력이던 어떤 고대의 서적이던 간에 모든 언제 세상이 끝난다고 단정하는 종말론은 인간이 만든
 것임으로 앞서 나온 구절을 생각해보면 틀릴 거라고 확신 할 수 있다. 만약에 저렇게 인간이 예견한 날짜에 종
말이 오면 해당 말씀이 부정당하는 것인데 기독교인이 그런 추측을 믿는다는 거 자체가 이상한거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일상 가운데서 기독교인으로서 바르게 살아가며 예수의 지상명령을 지
키며 재림을 기다릴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 '어머니께서 아이에게 숙제를 주고 나가셨는데 언제 돌아올진 모르지만 돌아오실 것이다.' 그렇다
면 아이가 해야할 것은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숙제를 끝마치는 것(정상적인 기독교인의 종말론)이지만 '어머
니께서 언제 오실 것이다!'하면서 숙제는 내팽개치고 그저 어머니의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린다면 오셨을 때 맞을
등짝 스매쉬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하느님이 오시기까지 그의 계명대로 사랑하며 순종해야 마땅하다.






















1.2. 1992년 휴거 소동

본래 교리신학적인 면을 다루는 개신교 목회자들이나 세대주의 개신교 신자들 외에는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었는데, 대한민국의 비개신교인들에게까지 잘 알려지게 된 것은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목사 때문이다.

감리회 목사였던 이장림 목사가 미국에서 유입된 신학서들과 여러 종교 관련 책자를 읽던 도중 'Rapture'를
'휴거'로 번역하며  특정날짜를 명시한 시한부 종말론을 만들어냈다. 그후 이장림 목사는 다미선교회를 세우고
휴거가 일어나는 날짜가 1992년 10월 28일이라고 점찍은 후 이에 대비했다. 왜 1992년이냐? 요한계시록 종말 부
분에 7년간의 짐승의 지배기에 대한 부분이 있다. 1999년 공포의 대왕을 예수 재림으로 생각했을 경우 7년간의
짐승의 지배가 있기 위해서는 1992년 10월경 휴거가 있어야 했기 때문. 이건 뭐 지구가 기원전 4800년에 만들
어졌어야 한다고 본 옛날 지질학자들도 아니고...

당시 사회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 물론 대부분이 믿지 않았지만 길거리나 아파트에서 휴거나 적그리스도 등에 대
한 사이비 교회 찌라시를 사람들이 돌리고 다녔고, 뉴스에서도 연일 나왔기에 사람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살았다. 거기에다가 당시에는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세상멸망설 같은게 매우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은 나름대로 심각하거나 적어도 조금씩은 불안해했던 것. 며칠 전부터는 휴거가 9시 뉴스 주요 뉴스로 나오고 심
지어 휴거 당일에는 방송국에서 다미선교회에 취재를 나가서 몇십 분 특집을 할 정도. 심지어 CNN을 비롯한 각종
 외신에서도 취재를 나왔다.

그 때 휴거를 믿는 이들도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졌다. 휴거일에 바로 승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승천하지 않고
 세상에 남아 온갖 고초와 박해를 받는 끝에 순교하게 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환난성도라고 불
렸다. 물론 순교 후에는 당연히 천국에 간다고... 그래서 남게 될 사람들은 킥복싱을 배우거나 기타 단련들을 하
면서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한 수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장림 목사는 휴거 예정일 한 달 전 쯤에 사기죄로 구속되었
다. 구속 사유는 신도들의 재산 34억여 원을 헌납받아 가로챈 혐의. 이장림 목사 집에서 압수된 3억원짜리 환매
채의 만기일이 1993년 5월 22일이었는데(휴거일로부터 약 반년 후) 결국 시한부 종말론을 믿은 게 아니라 사기가
 목적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92년 12월 4일 징역 2년, 93년 5월 20일의 항소심에서는 징역 1년이 선고
되었다. 이장림 목사는 구속된 부정 재산축재 행위를 두고 자기는 휴거 대상이 아니라 환난성도라서 세상에 남아
사명을 다해야한다는 식의 개소리를 찍찍 해댔다(...)


그 다음날 MBC 뉴스데스크 엄기영 앵커의 오프닝 멘트.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자극적인 소재로 눈길을 끌고 있던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를 하기도 했다. 휴거라 지칭한 당일
 전후로 다미선교회에 출입하던 교인들을 인터뷰했었는데 전날 '난 지금 천국 가. 너희들은 이제 큰일났다. 히히
히' 수준의 발언을 했던 서울대생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다음날 참담하게 나오는 모습을 내보내 서울 시민
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주범인 다미선교회가 역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는 다미선교회가 너무 설치다보니 기성 개신교 교회
들 가운데 많은 수가 여기에 낚이거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말세적인 종말론 분위기가 널리 퍼졌다.

그리고 이후 일부 신도들은 인지부조화의 훌륭한 예를 보여주었다…….









1.3. 2011년 휴거설

2011년 5월 21일 심판설은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 본부를 둔 '패밀리 라디오' 설립자 해롤드 캠핑(89)이 주장해
 왔다. 캠핑은 자신이 성경을 분석한 결과 21일 오후6시에 지진계로 측정 불가능한 지구최악의 지진이 날짜변경선
을 기점으로 지구를 한바퀴 돌며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것이고, 진실한 믿음을 가진 신도 2억명이 하늘로 들려
올리는 휴거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153일 동안 공포와 혼돈이 이어지다 10월 21일 인류는 마침내 종
말을 맞이한다는 것이 그의 '종말의 날' 시나리오다. 캠핑이 주장한 심판의 날 시작일이 불과 사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종말을 준비하고 있다. 헤럴드 경제 기사

그의 추종자인 로버트 피츠패트릭은 평생 모은 재산 14만 달러를 뉴욕의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에 심판의 날을 광고
하는 데 모두 사용했다고 하니 세상에 어느 정도 이슈거리를 만든 셈.

일단 본인 말에 따르면 지진은 국제 날짜변경선, 정확히는 뉴질랜드에서 오후 6시 경에 일어나 이후 각 나라의 6시
에 맞춰 발생할 것이라 예언했는데... 당연히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게다가, 위의 1992년 휴거소동을 참고해보면
94년 9월 6일에 멸망한다는 예언을 한 전과가 있었다.
이후 5월 21일 휴거를 주장한 헤럴드 캠핑은 진짜 휴거는 10월 21일이라며 둘러댔다는 기사가 났다.
그리고 10월 21일 저녁, 당연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에도 휴거는 오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아무 일 그런
 거 없다.
이후 캠핑은 예언이 빗나간데에 충격을 받아, 뇌졸중을 일으켜 결국 2013년 12월 15일, 요단강으로 캠핑을 가게 되었다.

참고로 휴거 열풍이 불 때 숫자니 통계니까지 들이대면서 선동했던 다미선교회 소속 인물은 이그노벨상 수학상을 받았
다. 이 따위로 숫자 쓰지 말라는 반면교사의 의미.





1.4. 대중문화의 휴거

<휴거>라는 제목의 유명한 개신교 소설이 있다. 어니스트 W. 앵글리라는 미국인 개신교 목사의 작품으로, 1950년대를
배경으로 내용은 위에 설명된 휴거를 시작으로 휴거 후 7년간 대환난과 사탄(적그리스도)의 득세->요한묵시록의 실
현->예수 재림까지를 다룬다. 이 책이 당시 아직 이단에 빠지지 않고 정통 감리교에 남아 있었던 이장림 목사에 의해
 번역되어 나왔고, 1980년대~90년대에는 개신교계에 교단을 가리지 않고 휴거에 대한 열풍을 가져오기도 했다. 뒤에는
 만화로도 출판되었을 정도. 내용은 위에 설명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 종말 교리를 그대로 소설로 썼는데, 어느 월
요일 아침 사람들이 일어나 보니 노인에서 갓난아기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 없어졌는데, 알
고 보니 그것이 휴거였다는 내용. 이후 지상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서와 요한 묵시록에 기록된 대로의 종말이 닥쳐
오고,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지켜 적그리스도에게 순교당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고 죄악에 빠져 최후의 심판 때 지옥불의 고통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그냥 객관적으로는 널리고 널린 개신교
신앙 소설이라고 보면 읽을 만한데, 전반적인 수준은 낮고 잔혹한 면도 많다.


2014년에 개봉한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레프트 비하인드: 휴거의 시작도 있다.

그리고 재기드 얼라이언스 류의 턴제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이 내용이 엄청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예수쟁이 저항군이 적그리스도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고 비신자는 죽이는 내용. 서브컬쳐계에서는 '예수쟁이
들의 폭력성과 광신설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예시'로서 지금까지도 까이고 있다.

그 외에도 휴거를 소재로 한 영화로 밤의 도둑들 시리즈가 있다. 저예산티가 많이 나는...작품이지만 4편이나 제작
된 작품. 위에 서술된 사건 전후로 교회에서 비디오로 상영되었다... 내용이야 세계가 혼란에 빠지면서 적그리스도
가 세계 대통령이 되고, 그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길로틴으로 처형당한다는 내용인데.저예산의 압박에도 의외로 무
섭다.

아래는 소설 멋진 징조들의 한 장면이다.

사이비 종교인 왈, "(전략)파멸이 오기 전에, 종말의 네 기수가 달려 나오기 전에, 핵 미사일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쏟아져 내리기 전에, 휴거가 있을 것입니다. 휴거가 무엇이냐? 형제자매 여러분, 휴거가 오면 진정한 신앙인들은
모두 공중에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갑자기 완전하고 깨끗한 몸으로 공중에 떠 있게 되는 겁니다. 공중에 뜬 채, 파
멸의 시대가 도래하는 세상을 굽어보겠지요. 오로지 믿는 자만이 구원받으리니, 오로지 여러분들만이 다시 태어나
고통과 죽음과 공포와 불길을 피할 것입니다.(후략)"

이에 지나가던(?) 천사 왈, "(전략)...누가 그렇게 시간이 남아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골라다가 공중에 띄워서
아래 지상에서 불타고 마르고 방사능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비웃게 해주겠느냐는 거예요. "

한국에도 휴거라는 영화가 있기는 하지만 휴거에 관한 내용은 잠시 나올 뿐, 사이비 종교에 빠진 딸을 구하는 부모
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해당 영화를 제작한 감독은 결국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버렸다.

미국 영화 디스 이즈 디 엔드도 휴거를 다뤘다. 하지만 다룬 건 맞는데, 내용이 아주 병맛이어서 도리어 개신교 계
열에서는 휴거를 모욕했다며 깠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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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종말론은 정신적 에이즈였다"
[소논문]1992년 10월 28일 종말론이 시민들의 기독교관에 끼친 부정적 영향

기사원문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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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책은 그리스도교 종말에 대한 역사와 신학자들의 견해를 밝힌
종말론 논쟁 : 목창균박사저/두란노간/1998 를 발추한 글이다. 기독교 종말신
앙 이해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아 여기 소개해드린다. 일독을 권하며, 나름
종말신앙 정립에 도움이 되시길.....
-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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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논쟁 : 목창균박사저/두란노간/1998



17. 오리겐의 종말사상

-오리겐은 당시 교회의 지상 천년 왕국론, 육체적 부활설, 영원 형벌설
등을 거부하고 영적 부활, 보편 회복, 치료적 형벌설 등을 주장했다.

-오리겐의 종말론 가운데 가장 논쟁되는 것은 부활론이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영적 부활을 주장했다. 또 영혼 불멸과 죽은자의 부활을
 믿었다.

17. 그는 시편 1:5에 대한 주석에서 식인새의 예를 들어 문제점을 지적했다.
사람을 잡아먹은 새를 다시 사람이 잡아먹었다면, 그 사람의 육체는 누구의
몸으로 부활하는가? 새에게 먹힌 사람인가, 아니면 새를 먹은 사람인가?

-오리겐은 고전15장에 나타난 바울의 부활관과 플라톤적 영혼의 선재사상을
부활론에 도입했다. 플라톤은 인간 영혼은 정신, 즉 이데아의 세계에서 존
재했으나 타락으로 인해 정화를 목적으로 물질세계로 보내져 육체라는 감옥
에 갇히게 되었다고 보았다. 오리겐은 이런  것을 받아들여 물질 세계와 육
체를 정신적 존재의 그림자로 취급했다.

그는 부활한 몸을 현재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다. 부활체의 본
질은 영적인 몸이다. ..이 부활체는 죽음이 제거된 몸이다. 생전과 동일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성서의 증거, 특히 고전15:35~38과 어긋난다.

부활체는 생전의 육체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유일한 변화는 더 좋
은 것으로의 변화다.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의 변화다. 따라서
부활체는 생전과 동일한 형상을 지닌다. 현재의 인간 육체와 부활한 몸 사
이의 계속성을 보증하는 것이 영혼이다.

-오리겐의 종말론에서 또하나의 문제적인 주장은 사후악인이 받게 될 형벌의
본질과 기간에 관한 문제다. 그는 전통 교회의 영원 형벌설에 의문을 제기하
고 이를 수정하여 치유적 형벌 또는 교육적 형벌의 개념을 제시했다.

20. 악인에 대한 형벌은 하나님과의 분리되었다는 의식을 통해 일어나는 내
적 고통이다. 그는 죄인을 완전상태로 회복할 수있도록 치료하고 교정하는
것을 형벌의 목적으로 보았다. 에레미야 25:28~29의 구정 "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기를 거절하는 자는 정결케 되지 못랄 것이다."로부터 우리는 하
나님의 진노가 영혼의 정화에 공헌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한다.

21. 오리겐의 종말론에서 논란이 되는 또하나는 회복설이다. 그것은 모든 사
람이 종국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오리겐이 전통 교회의 영
원한 형벌의 교리를 거부하고 치료적 형벌설을 주장한 자연스런 결과가 보편
회복설이다. 그것은 모든 영혼이 궁극적으로 구원 얻게 되리라는 신념이 자
리잡고 있다.

23. 그의 신학 개념과 오리겐주의는 543년 저스티니안 황제와 553년 제2차
콘스탄틴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32 결론
오리겐은 동방교회 최대의 신학자요 가장 논쟁을 불러 일으킨 인물 중 하나였
다. 4세기에 일어난 신학 논쟁 대부분이 그와 직 간접으로 관계되었다해도 과
언이 아니다. 오리겐의 일부 개념이 이단으로 정죄되었음에도, 그의 종말론은
4세기 이후 종말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그의 치료적 형벌 개념
과 사후 회개 가능성에 대한 견해는 중세 연옥교리의 기원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39 어거스틴의 종말론

42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두 종류의 생명이 있다고 본다. 영혼과 하나님이 그것
이다.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며,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이다. 이 생명의 상실이
죽음이다. 그것은 생명의 종류에 따라 두 형태를 취한다.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다. 전자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 곧 육체적 불멸성의 상실을 말하는 반면,
후자는 영혼과 하나님의 분리, 곧 죄로인한 하나님의 상실을 말한다.

또 그는 인간의 죽음을 첫째 죽음과 둘째 죽음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첫째 죽음
은 시간 안에서 인간 존재의 종식, 즉 육체의 죽음이고, 둘째 죽음은 영원한 정
죄의 죽음, 즉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첫째 죽음을 통해 육체의
분리된 상태로 부활때까지 존속한다. 이기간이 중간 상태이다.
의인과 악인의 중간기 상태는 각기 다르다. 그들은 생전의 공과에 따라 안식을
누리거나 고통을 당한다. 그들은 세가지 존재유형으로 분류되는데, 천국, 천국을
 기다리는 것, 지옥이 그것이다.
의인의 영혼은 죽은 후 즉시 천국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누리는 반면, 악인
의 영혼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며 영원한 형벌을 기다린다. 천국이나 지옥에 들
어가지 않고 부활과 최후 심판을 기다리는 영혼들도 있다.

둘째 죽음은 육체의 부활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재결합 된 후 일어난다.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요, 인간의 전적 죽음이다. 아담과 회개치 않은 죄인들은 둘째 죽
음을 당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신자는 그것을 겪지않는다. 신자는 단 한
 번의 죽음, 즉 첫째 죽음만을 경험한다.

44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낙원에 거하리라"고
 하신 것은 모든 의인의 영혼은 죽는 즉시 천국에서 하나님 임재의 기쁨을 경험한
다는 것을 암시한다.

어거스틴은 구원받은 자는 천사와 동등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천사의 본래
수를 보충하기 위해 그 수만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인간의
몸은 천사들처럼 완전해질 것이며 그들과 함께 영원한 천국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46 어거스틴은 연옥에 대해 천국을 기다리는 장소로 묘사하며 마카비 12:43과 라틴
 교회 전통에 근거하여 사후 사죄 가능성을 주장했다. 즉 어떤 이는 현세에서 용서
받지 않은 죄로 인해 내세에서 징벌을 받게 되나 살아있는 사람의 기도 공덕, 연보
의 도움으로 죄를 용서받고 징벌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고백록'에서 그는
자신 역시 죽은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47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육체의 부활을 강조했던 반면, 헬라인들은 영혼의 불멸
을 강조했다. 기독교에서는 이 두 신앙이 하나의 형식으로 결합된다. 즉 인간은 사
후 육체와 분리된 형태로 존재하나, 결국 형체화된 형태로 존재를 회복한다.

49 어거스틴은 육체의 부활을 육체의 재생이 아닌, 재창조로 정의했다. 악인은 영
원한 형벌을 받기 위해, 의인은 영생을 받기 위해 부활한다. 복된 영혼은 항상 썩지
 않을 육체 안에 거하며 진정한 불멸은 육체의 부활과 더불어 확득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고전15장에 의거 부활한 몸을 영적 몸으로 해석하고, 육체의 부활을 기
독교 신앙의 필수교리로 간주했다.

50 그는 부활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본래 각 개인에 속한 모든 요소들의 재결합으로
 간주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나 질병으로 시력을 상실한 자, 또는 불구자 등은 온
전하고 완전한 몸으로 살아날 것이다. 유아나 어린이로 죽은 자들은 성인으로 성장,
부활될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부활한 몸은 본래의 성별을 그대로 유지하나 결혼
생활을 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성별은 개인의 정체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의 부
활개념은 당시 혁명적이니, 육체의 부활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51 어거스틴은 계시록 20장의 사탄이 결박되어 있는 천년 간이 미래에 있을 천년왕국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이 왕국은 미
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이며,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천년 왕국은 교회시대 전체를 포함한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을 하고 있다고 '신국'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첫 부활은 영적 부활, 즉 죄로 죽은 영혼이 세례를 통해 부활되는 것이며, 심
판의 보좌들은 교회 안에 있는 권위의 자리를 말한다. 교회는 지상의 그리스도 왕국
또는 하늘나라며,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이미 왕 노릇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53 그의 종말론의 특징은
1. 종말을 현시대의 종국과 새 시대의 시작으로 간주하지 않고, 역사 자체의 종국과
 영원한 안식일의 시작으로 이해했다.
3. 어거스틴은 부활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본래 개인에게 속한 모든 물질적요소의
재결합으로 간주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그의 종말론 가운데 사후 사죄 가능성, 죽은 자를 위한 기
도, 하나님이 타락한 천사의 수만큼 인류를 구원하기고 결정했다는 주장 등을 받아들
이지 않는다.


59 루터의 종말론

65 중세 종말론은 죽음 후 영혼은 즉시 천국이나 지옥, 혹은 연옥으로 가 육체없는 상
태로 산다고 생각했다. 이는 구원받은 영혼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영생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은 육체의 부활을 통해 영혼의 상태를 강화할 뿐이다.
 영혼은 영화롭게 된 상태로 육체를 받을 것이고, 그것이 구원을 완전하게 만든다.

반면 루터는 영혼불멸 신앙보다는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저 세상에는 때나 시간의 흐름이 없다. 모든 것이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는 아주 짧은 순간으로 단축된다. 마지막 날은 죽은 사람
에게 죽은 후 곧, 심지어 죽자마자 온다. 죽는 순간, 세상의 마지막 날과에 이르게 된다.
아담이 부활한다면, 세계의 시작부터 전 역사의 기간이 그에게는 한 순간의 잠과 같이
여겨질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는 죽음의 잠으로부터 인간들을 소생시킨다. ********

68 루터는 죽음을 잠으로 이해했다. 그의 신념은 신앙 안에서 죽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잠잔다는 것이다. "전에는 그리스도로부터 떠난 것이 참다운
영원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과하여 다시 살아난 후에는,
 죽음은 단지 잠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과 무덤은 심판 날까지 당신이 달게 잠잘 수 있는 요람 또는 작고 부드러운 침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린이와같이 눕힌다는것을 의미한다."

루터는 요한복음 11:11에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셨고 마태복음 9:24에서도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셨다.
루터는 요한복음 8:51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안을 것이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죽은 크리스천은 수면 속으로 들어가며,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이
승에서부터 자면서 간다고 보았다.

71 루터는 몸이 죽어있는 동안에 영혼만이 살아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인간은 단순히 육
체 또는 영혼이 아닌, 육체와 영혼 모두를 포함한 전체다. 죽은 후 그리스도인은 영혼뿐 아
니라 그의 전체가 살아있다. 루터는 하늘에 있는 영혼이 몸이 없다는 것은 기이한 것이며,
 육체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누군가 아브라함의 영혼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있지만 그의 몸은 여기에 죽어있다."
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치도 않은 구별이다. 나는 그것을 논박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전부
가 살아있다'고 말해야한다."

72 17세기 이후 루터교 신학과 개신교 신학은 루터의 견해보다는 중세 전통을 채택하여 계
승하고 있다. 부활 이전 영혼은 몸이 없는 상태로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상태를 누린다는
것이 그것이다. 반면 현대의 알트하우스, 쿨만 등은 루터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76 루터는 죽음을 한 순간의 잠으로 간주함으로써 마지막 날의 부활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
했다.
루터는 연옥을 비성서적인 걳으로 취급하고 영혼의 거처에 대한 내세의 지도를 부정했다.
또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롸 간주했다.

루터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기대를 회복하고 마지막 날의 부활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개신교 종말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5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

리츨은 하나님 나라가 이세상에서 실현되는 윤리적인 인간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를 창건한
예수는 위대한 교사며 인류의 원형이다. 리츨 신학에서는 예수를 영적이며 윤리적인 가치로
본다.

하르낙은 하나님 나라를 '개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했다.



113 볼트만의 실존적 종말론

볼트만은 당대 가장 탁월한 신약성서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현대에 있어 복음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길은 비신화화라 주장한다. 그는 성서의 대부분이 신화형태로 이뤄져 있어서 이를
이해하려면 실존적으로 분석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 자체보다는 그것이 인간에게 뭘 의미하는가에 관심을 둔다. 하나님
이 최후 심판을 함으로써 세상의 끝이 온다는 전통적인 종말론을 부정하고, 이를 개인의 수직
적 위기와 심판으로 재해석 했다. 안간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영생의 가능성
을 경험한다. 천국이나 지옥 역시 사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을 의미한다. 볼트만
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현재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서 최후 심판은 예수의 오심에서 이루어진 현재적 현상이었다.



125 칼 바르트의 보편구원론

전통기독교는 이분법이다. 인간의 최후상태는 영원한 행복이나 영원한 형벌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런 영원한 형벌의 교리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보는 것을 보편 구원
론(UNIVERSAL SALVATION)이라 한다.

127 보편 구원론의 출발점은 사랑의 하나님 개념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며,
그것을 성취할 수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국 구원받게 될 것이다.
둘째, 보편구원론은 만유의 회복(행 3:21), 많은 사람의 구원(롬5:18),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의 생명획득(고전15:22), 만물의 통일(엡1:9~10)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셋째, 보편 구원론은 사후 인간 영혼의 운명과 조건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며 죽은 후에도 구원
의 기회가 제공된다고 본다. 근거는 음부에서의 복음 전파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다.
그리스도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구절 (벧전 3:19)을 그리스도가 죽은 자
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음부로 간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고대 교회의 관행이었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사후 영혼의 조건이 산
 자의 기도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는 근거로 간주한다.

요약하면 보편 구원론은 사도행전 3:21을 근거로 하여 만인 구원을 주장하며, 영원한 형벌의 교
리를 부정한다. 바르트는 이 보편성에 대한 성서귀절로 베드로 전서 3:19, 즉 그리스도가 옥에
 갇힌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구절을 인용한다.

132 바르트는 선택된 자의 수를 한정하거나 하나님의 구원을 인류의 특정 부분에 제한하는 칼빈
주의적 예정론을 비판하고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결정
력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0 여호와의 증인

181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고 영적인 부활을 주장했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나, 그 부활은 육체로 죽었다가 비가시적인 영으로 부활했다는 것
이다.
그들에 따르면, 아담의 범죄로 상실하게 된 인간의 완전성과 생명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는 아담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대속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든 존재가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그
가 육체로 부활했다면 대속의 값을 되돌려 받은 것이 되므로 그의 구속사역은 무효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육체로 부활할 수 없다.
이는 정통기독교에 배치된다. 도마에게 나타난 사건(요 20:29)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사도바울의
증거(골2:9) 등 성경에 위배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재림을 부정하고 비가시적 재림을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부활후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지
않을 것이며, 인간의 눈이 재림하는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창립자 러셀은 그리스도가 보이지않
는 모습으로 1914년 재림했다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은 죽더라도 그 영혼은 살아 남아 내세에서 또
다른 삶을 산다는 정통 기독교의 입장을 부인한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단순히 육체를 살게하는
생명력으로 보고,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영혼은 소멸된다고 했다. 죽음을 잠으로 간주하고 죽은자
들의 영혼은 잠자다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에 의해 영적 존재로 다시 창조되어 생명을 부여받
는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이것은 성경에 위배된다. 셩경은 신자는 사망 직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의
식적 생명을 향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눅 16:19-31, 빌1:21-24, 고후5:5-10)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모순된다는 이유로다. 그들은
 죽은 자가 생명도 의식도 없기에 고통을 받을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헨나'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며 통상적인 죽음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것 역시 성경에 위배. 예수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영원한 형벌과 지옥존재를 교훈했다.
(눅16:19-31)

여호와의 증인은 지상천국론을 주장한다. 여호와의 왕국은 그들의 핵심교리다. 그리스도가 1914년
재림했고 하늘에서 여호와의 왕국을 시작하며, 세계는 환란과 심판의 시대에 돌입한다.
 이 왕국의 시민은 여호와의 증인들로서 그수는 144,000명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왕과 제사장으로 봉사하며 인류를 심판하는 배심관이 된다. 이 여호와의 왕국의
기간은 천년이 될 것이다. 이 기간이 차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최고 재판관인 여호와로부터 최후
적인 심판을 받으며, 이땅은 낙원을 회복되어 영원한 여호와의 왕국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하
늘에서 살게 될 여호와의 증인들은 144,000명뿐이며, 나머지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늘에서 추
방되어 지상 낙원에서 살게 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7:4의 144,000명을 오해한 것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를 알 수 있다고 하였고, 천년왕국의 백성은 부활에 참여한 죽었던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재림때
에 살아 있는 성도들임을 명시하고 있다.(살전4:16-17, 고전15:6)

-발췌출처:
종말론 논쟁 : 목창균박사저/두란노간/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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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시대, 종말론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 필요
2015년 11월 27일 (금) 17:55:31 크리스챤월드모니터  webmaster@cwmonitor.com



‘종말론’은 기독교 신앙의 ‘핵’

성경을 신앙 교과서로 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종말론’이다. 기독교 신앙이 궁극적으로
종말에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종말론을 부정하는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종말론이 기독교에서 갖는 비중에 대해 루터와 칼뱅 이후 최고의 개신교 신학자로 불리는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교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지 않다면 그리스도교와 어떤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독일 튀빙엔 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칼 바르트 이후 현대 신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개신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도 “기독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이다. 전 교회의 성격이 종말론적으로 지배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교회가 견지하는 종말론의 요점은

① 마지막 심판(종말)은 반드시 있다,
② 종말의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다,
③ 그러므로 매 순간 주의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가진 종말론의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과연 언제 종말이 올까 하는 문제는 인류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이다. 장로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해설서는 종말의 시기에 대하여 “그리
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 그때 세상은 종말이 되고 만물은 풀어질 것이다. 그
러나 주의 날이 도적과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
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장 10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 교회 목사들은 “때가 가깝다”(계 22장 10절)는 성구를 인용해 지금이 그 때와 시기와 맞닿아
있음을 끝없이 상기시킨다.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재난과 환란을 언급하며 이것이 성경의 마지
막 시대 징조(마 24장)이고, 우리가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시키며 느슨해진 신앙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입하기도 한다.

정동섭 목사(가족관계연구소장,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 자문위원)도 지난 6월 12일자 <교회와 신앙>
기고글에서 “우리는 특별한 ‘종말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로서, 세상 속에서 일하
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라며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세에는 네 가지 징조가
있다.
① 사람의 징조 ‘미혹’이다(마 24:4)
② 환란의 징조 ‘난리’이다(마 24:6); 처처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③ 자연의 징조 ‘재난’이다(마 24:7-8); 지진과 화산폭발, 쓰나미가 일어나고 있다
④ 종교적 징조 ‘이단’이다. 각종 사이비종교가 난무하고 있다(마 24:11, 23-24).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전쟁과 재난과 재앙’을 ‘말세의 징조’라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종말의 때와 시기임을 확신하는 것을 보니 종말이 임박했다는 점에 대해 이견이 없는 듯하다.


‘시한부’에서 시작된 종말론 역사

종말론 가운데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도 다름 아닌 ‘때와 시기’이다. 현재 한국 교회는 ‘때와 시기’
에 대하여 질색한다. 성경은 ‘때에 대하여는 아무도 모른다’, ‘도적과 같이 임한다’고 했기 때문
에 때와 시기를 미리 예측하고 특정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규정한다. 종말 시기를 미리 예측해 특
정 연도, 일자, 시간을 언급하는 것이 시한부종말론이다. 교계는 이러한 시한부종말론 주장자와 추종
자를 이단·사이비로 규정해 배척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교회의 종말론은 시한부종말론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초창기 한국 기
독교 신앙은 시한부 성격이 짙었는데, 서구의 종말론이 그대로 유입됐기 때문이다. 로마의 히폴리터
스(262년)로부터 유명한 교부 신학자 어거스틴(650년), 개신교 탄생의 주역인 마르틴 루터(1556년)까
지 많은 이들이 연도를 특정해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장로교의 대부’ 혹은 ‘한국 교회의 아버지’라 추앙되는 길선주 목사는 대표적인 시한부종말론 신
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국 교회 시한부종말론의 최초 주창자이기도 하다. 길 목사는 ‘말세론’ 강
의를 통해 말세의 징조를 29가지의 내증과 6가지의 외증으로 열거하며 긴박감을 조성하고 신도들에게
종말사상을 고취시키면서 장로교 부흥을 이끌었다. 그는 ‘지진의 발생’, ‘전화와 라디오의 등장’,
 ‘여권신장’, ‘장갑자동차의 발명’ 등을 말세의 징조로 보았다.

1936년 1월 19일 종말론에 이어, ‘예루살렘 멸망’과 ‘평양 멸망’을 외치며 1974년이 재림의 해이
고, 모세에게 명한 희년을 계산하여 2002년에 지상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길 목사의 이러
한 종말사상은 현재 장로교 종말론의 근간이 됐다. 소위 정통 개신교에서 시한부종말론자들이 대거
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다미선교회 이장림도 성결교회의 협동목사였고, 대다수 시
한부종말론자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개신교 출신이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길 목사의 종말론은 분명 시한부종말론이고 배척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는 다른
 시한부종말론자들과 달리 여전히 교계의 선망과 존경이 대상이다.


‘종말론’을 대하는 한국 교회의 양면성

한국 기독교 종말론의 시초가 시한부이기 때문인지 소위 정통 교단 목사들에 의한 시한부종말론도 꾸
준히 제기돼 왔다. 인천 숭의감리교회의 이호문 감독은 1989년을, 예장통합 소속 서울홍익교회 김태
복 목사는 저서 <한국의 시대가 오고 있다>에서 1990년을 전후한 3년 사이를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도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등에 근거해 1999년을 ‘종말의
해’라고 설교했다. 이들은 시한부종말론을 금기시하는 교단 소속임에도 이단·사이비로 규정된 바 없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또한 동영상 설교와 세미나 녹취록 등을 볼 때 연도(2000년 안)를 특정해 종말
이라고 수차례 주장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 목사는 여러 문제점으로 예장통합 등에 의해 이단·사이비성
이 있다고 규정된 바 있지만 현재 철회된 상태다. 당시 사이비 규정에 대해 그는 ‘연도만 말했을 뿐
일시를 특정 안 했는데 시한부종말론자로 몰리는 건 억울하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2011년
 3월 22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이렇듯 한국 교회는 같은 시한부종말론을 놓고 양면성을 보인다. 어떤 이에게는 이단·사이비라는 낙인
을, 어떤 이에게는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았다. 왜일까? 교세의 영향일까, 아니면 ‘제 식구 감싸기’일
까. 내부 문제를 끄집어내 교단의 이미지를 추락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쉬쉬하고 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

시한부종말론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거나 피해자를 낳았을 때, 교계와 사회에서 동시에 문제가 됐다.
 다미선교회 이장림은 1992년 시한부종말론으로 재산헌납·자살·가출·이혼·직장포기·학업중단 등
각종 사회 문제를 야기하며 피해자를 낳았고, 결국 징역 2년의 실형을 살았다. 신문지상에 대국민 사과
광고를 실었고, 교회까지 폐쇄조치당해 사실상 조직이 와해됐다. 2000년을 전후해 활개치던 천존회 역
시 교주가 시한부종말론으로 신도들을 속여 재산헌납·직장포기·자살 등 큰 피해를 입히고 사회적 물
의를 일으켜 실형선고를 받은 바 있다. 조희성의 영생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시한부종말론이 사회적으로 온갖 피해와 폐단을 일으키면 엄중한 법의 잣대로 심판을 받아야
함은 물론 도덕적·윤리적으로도 지탄받아 마땅하다. 종교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순기능을 감당하
는 것이 종교 본연의 사명이고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성
경적 종말론까지 오해를 사서 ‘종말론’ 자체가 반사회적인 교리로 인식되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시한부’ 딜레마에 갇혀 박제된 종말론

시한부종말론으로 인한 불미스런 역사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시한부종말론=재산헌납·자살·이혼·
가출·학업중단·직장포기’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됐다. 이러한 사람들의 인식을 이용해 기성교단
의 소위 정통파 목사들은 자신들 내부에서 불거진 시한부종말론에 대해서는 모른 체하면서, 신진 세력
이나 눈에 거슬리는 존재를 견제하고 축출하려고, 그들의 성경적인 종말론을 ‘시한부종말론’으로 둔
갑시켜 이단·사이비라고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초기 기독교 ‘부흥 도구’로 활용하던 것을
견제 세력을 척결하는 무기로 재활용하기 시작한 셈이다.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한 사실이 전혀 없음에도 기성 교단의 모함과 음해로 시한부종말론 집단 또는 주
장자로 오해받는 교단과 교회가 생기는 궁극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므로 어느
 교회나 ‘종말론’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기득권 세력이 신진 세력을 배척하기 위해 ‘시한부종말
론자’로 둔갑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례를 보자.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 재림의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징조가 무
엇인지 알려주는 내용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종말론을 설명하고 가르칠 때 마태복음 24장을 인용하는
 것은 필수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앞서 한국이단상담소 자문위원 또한 ‘종말 시대의 4가지 징조’
로 마태복음 24장을 인용했다. 그러나 ‘환란의 징조(난리와 전쟁)’, ‘자연의 징조(재난-지진과 화산
폭발, 쓰나미)’에 대하여 소위 정통파 목사가 인용하면 ‘성경적 종말론’이 되고, 신진 세력이나 소
위 비정통파가 인용하면 ‘시한부’ 또는 ‘임박한 종말론 주장자’로 매도된다.

실제로도 특정 종파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시한부종말론자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시한부종말론은 재산헌납 등 문제를 유발하는 반사회적 종교단체’로 자동 인식되는 메커니
즘을 이용해 손쉽게 ‘문제 집단’으로 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한부종말론자로 인해 피해가 발생해 사회문제가 되는 사례가 있고, 성경적인 종말론조차 ‘시한부종
말론’으로 매도되는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은 아예 종말론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자연 종
말론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임에도 신도들은 교회에서 종말론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거나 아예 없게 되
었다. 성경적인 종말론임에도 자칫 시한부종말론으로 비쳐져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설교나
학습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종말의 시대에 필요한 건 종말론에 대한 유연한 사고

종말론이 구원과 직결되는 교리임에도 일체 함구한 채 종말의 징조와 재림의 징조를 알리지 않고 종말에
 임하는 신도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말세’,
‘종말의 시대’라고 부르짖으면서도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치
지 않는다면 이는 ‘기독교인의 직무유기’이다.

최근 CBS 등 기독교방송 등을 중심으로 ‘종말론 특강’ 등 강의나 설교를 가끔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종말론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사고가 곱지 않고 경직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종말론은 신도들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테러와 전쟁과 재난과 환난이 난무하는
 종말의 시대, 구원을 갈망하는 신도들에게 성경이 가르치는 건강한 종말론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할 때가
 됐다. 종말론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로 ‘시한부’ 딜레마에 갇혀 성경책 안에 박제되어 있는
종말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 구원의 메시지를 꺼내야 한다.

‘그 날과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말세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재림의 순간만 기다리며 하늘만
쳐다보는 ‘망부석 신앙’이나,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술친구와 더불어 허랑방탕하는 ‘좀비신앙’이 되
어선 안 된다.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종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삶을 살다 재림의 순간을 맞아야 하지 않을까?


-원문출처:
http://www.cwmonitor.com/news/articleView.html?idxno=4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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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종말론
교회와신앙  |  webmaster@amennews.com
이종성 원장(장로회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역임, 기독교학술원 원장)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
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
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
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
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
고자 '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먼저 성서적이고 정통적 종말론의 요점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과 인간과의 계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역사)에 마지막을 오게 한다.
 그것이 모든 존재의 마지막이 된다.

둘째, 예수의 재림이 곧 세상의 마지막이 된다.
셋째,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의 삶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한다. 그것을 최후심판이라고 부른다.
넷째, 예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았다.
다섯째, 예수는 직접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양으로 온다.
여섯째, 예수는 승리자로 재림한다.
일곱째, 최후심판이 끝나면 모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버림의 세계로 나누어준다.
여덟째, 그것으로써 현재의 우주와 세상과 역사는 종결이 된다. 성서가 가르치고 교회가 이때까지 믿어온
종말신앙은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이와 같은, 성서가 가르치는 정통적 신앙과는 다른 종말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서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이단적 종말사상에 현혹되어 개인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차제에 이단종말사상을 밝힘으로써 신앙
적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종말이 없다는 이단

17세기부터 산업과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가 강하게 나타났다. 천재인재(天災人災)도
 사람의 지혜로 막을 수 있으며, 인간의 행동도 발달된 지식과 상식과 이해심으로 공존을 위해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의 주장대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연법에 의
하여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위하여 얼마든지 이끌어갈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종말이 있다면 종말사건으
로써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나 지상에는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가 와서 역사의 손을 대어 수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낙관적 역사관과 강한 인본주의 신봉자들은 세상에는 종말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이단적 종말관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서가 가르쳐준 것과 같은 역사관을 무시하고 상대적 존
재를 절대화하고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마치 인간이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오해하고 오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종말은 있으나 예수가 재림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이단

일반적으로 역사나 세상에는 종말이 있다고 믿는다. 지식인들은 논리적으로나 체험적으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풀도 일년초가 있고 일년을 더 산다 해도 몇 년 가지 못한다. 동물의 수명이 길다
 해도 십수 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1백년 안팎이 한계 수명인 것을 알고 있다.

옛날 시인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고 읊었으나 의구(依舊)한 그 산천에는 사실은 매순간
 퇴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종말이 있다고 느낀다.

일반 대중은 지식인들보다 세상에 종말이 있을 것을 일상생활에서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
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최근 한국인이 체험한 공중재난, 지상재난, 해상재난 등
을 통하여 매우 불안해하고 있으며, 다음에는 지중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
고 교통사고나 화재사고 등으로 하루의 삶의 보장을 받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무
심코 말세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과 예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다. 예수는 2천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 살다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사람으로서 역사와는 관계를 끊어버렸는데, 20세기의 오늘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와 무슨 관
계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종말은 있을 것이나 예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이 이단적이라는 이유는, 성서에 의하면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하여 지배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와 직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예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기(롬11:36, 마28:20) 때문이다.


예수가 직접 오시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리라고 하는 이단

일반 평신도나 신학자들 가운데는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직접 오시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 세상에는 환생(還生)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 인도교와 불교다. 그들은 윤회설을 굳게 믿고 있기 때
문에 전생과 현생과 내생이 연결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전생에서 한 행동에 따라 현생에 사람
으로나 동물로 환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기저기에서 자기가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에 미국에서 물의
를 일으킨 짐 존스나 코레쉬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한국교회 안에도 심심치않게 그러한 사람이 나타난다. 해방 전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다. 통일교 교주는 자
기가 예수를 대신하여 세상에 와서 예수가 실패한 그 일, 즉 육체적 구원을 완수하려고 포교한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이단적인 이유는 인간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거나 대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가 그렇게 위임한 일도 없거니와 이간으로서는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유한자가 영원자를 대행할 수가
 없다. 성경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24:5)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낭설을 믿지 않고 참예수가 오실 것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가 분명히 말씀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요143, 행1:11).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보아 마지막 날에 예수가 자기 대신에 다른 사람을 대리인으로 보내리라는 생각은 이단적인 생각
이다.


예수가 영적으로만 오신다는 이단

많은 사람들은 영과 육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양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이원론) 서로 혼합이 될 수 없
다고 생각한다. 영은 영으로, 육체는 육체로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가 부활했을 때, 육체를 가진 것 같았으나 그것은 사람들(제자들)의 착각이었지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하늘에서 영적으로 계시므로 예수가 오실 때에는 육체를 가진 분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오실 것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단체에 속한 사람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시나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존재양태는 영과 육을 동시적으로 완전한 합
일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오신다고 한다(행1:11).

초림(성육신) 때와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구하러 오시기 때문에 재림하실 예수도 육체를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영적으로만 오신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며 따라서 이단적인
 생각이다.


아무도 모르게 이미 재림했다는 이단

재림을 열심히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이나 자기를 재림예수로 착각한 사람들 중에는 예수가 아무도 모르게
이미 재림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사이비 기독교 종파를 형성하여 그들의 추종자들을
모아 별개의 집단생활을 하게 된다.

자기가 재림주라고 하거나 재림 예수의 특별한 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하
면서 현세를 떠나 독특한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현세를 죄악시한다.

그러한 예로서 미국에서 일어난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과 크리스천사이언스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 일
어난 유사한 운동은 통일교를 들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예수가 이미 1914년에 하나님의 우편의 보
좌에 앉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둘째 현존(역사 안에서의)이며 재림이다. 그
때부터 예수는 지상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일교의 주장은 더 극단적이다. 예수가 세상에 온 초림 목적은 인간의 영과 육의 구원이었으나 그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됨으로써 인간의 영적 구원에는 성공했으나 육체적 구원에는 실패했다고 본다. 재림예수는 십자
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사람과 똑같은 몸을 갖춘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올 것인데, 이미 일제 때 왔다
고 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는 이 사실을 모르고 육적 구원 사업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박해하고 있다. 그리고 원리
강론에서 그가 바로 문선명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교의 재림관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이단적 요
소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구원사역을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으로 나누고 예수는 완전한 인류구원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중 반만 수행했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유일의 구주성을 부인한다.

또 하나의 이단적 요소는 현재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는 문선명을 재림주처럼 선전하는 점이다. 이외에도 한
국에는 재림주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출현하고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재림의 날짜를 예고할 수 있다고 하는 이단

예수의 재림은 성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성서는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날짜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예
수가 직접 말하고 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행1:7).

바울은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고 누차 말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5:1,2,4).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쉬이 동심(動心)하지 말라고 주의한다(살후2:2).

이와 같이 성서는 주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말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예수의 재림을 인간이 사용하는 시간으로 측정하여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예고했
다가 거짓말쟁이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윌리엄 밀러(1782~1849)와 한국의 이장림이다. 밀러는 재림의 날
짜를 1843년 3월 21일에서 1844년 3월 20일 사이라고 일차적으로 정했다가 그 동안에 재림사건이 없었으므로
 다시 10월 20일까지 연기했다가 실패했다.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을 예수의 공중 재림일로 정하고 그날
에 휴거가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다가 역시 불발로 끝났다.

이러한 예고는 하나님의 경세섭리(經世攝理)의 심부까지 파헤치려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을 도
저히 용납할 수 없다.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라"(벧후1:20)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사로이 예고했다가 실패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감행했다.

재림신앙 때문에 세상일을 포기하는 이단

교회와 신자는 반드시 역사와 사회 안에서 활동해야한다.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다해도 현 사회를 부인하고
 사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문화적 생활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이 점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너
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3-14).

세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대상에는 둘이 있는데, 하나님과 이웃이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요한도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니라"(요일4:20).
 이와 같이 신앙생활은 예수의 재림 날까지 이 세사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삶을 말하다.

그런데 예수재림의 날짜를 예고하는 사람들은 재림이 임박했으니 세상에서의 모든 육체적 삶의 멍에를 끊어버
리고 오로지 찬송과 기도로만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물론 신앙생활을 원숙하게 하려면 주님만을 생각하고 경
건한 생활에 몰두하며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버리고, 이혼하고, 직장을 떠나고, 학교도
 다니지 않고, 일체의 사회활동을 단절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사회와 문화를 떠난 신앙생활
은 불가능하다.

모든 종교에는 현세의 구체적 생활을 단념하고 일정한 장소에서 세속적인 생활양식을 버리고 영혼의 안식만을
 추구하는 제도가 있으나 그것이 정당한 신앙생활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활을 원치 않으셨다. 세상에 나
가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예수재림을 기다리면서 사회를 버리고 문화생활을 부인하고 기도에만 힘쓴다는 것은 성서적 종말신앙
은 아니다.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언제 예수의 재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항상 깨어있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신앙 때문에 세상의 일을 전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비성서적인 이단사상이다.

한국교회는 상기한 것과 같은 잘못된 종말신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상이 혼란할 때 그러한 사
상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이단사상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른다해도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원문출처: 기독교 포털뉴스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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