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3.

[예화] 친구와 할머니






[예화] 친구와 할머니



지난 주말 친구 김 군을 만나려고 서울역에 갔다. 아주 절친한 사이였지만 세월의
 흐름은 무심함을 가져왔다. 그래도 엊그제 동창회에서 그 친구의 얼굴을 보니
우정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그래서 이렇게 서울역 부근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가 앉아 있을 찻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조금 떨어진 공중전화부스
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는 조그만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르느라
 애쓰고 있었다. 옆에는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서울 사는 아들을 보기로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로 아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김군에게 주며 연락해 주
기를 사정하였다. 마음씨 착한 김 군은 당연히 뿌리칠 생각도 하지 않고 전화를 하
는 중이었다. 몇 번을 해도 통화중이라 안되겠다고 말씀드리자 할머니는 금방 울상
을 지으며 근심어린 말을 연발하였다.

김 군이 10분 간격으로 계속 전화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짜증이 났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할머니 혼자 두고 우리 일을 보자고 말했는데, 김 군은 어
떻게 그리 몰인정할 수 있냐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보다 그 할
머니가 더 중요하냐고 물으려다 유치한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나는 친구의 말대로 가끔 전화도 해 보며 이런 저런 궁리를 하였다. 또 요즘 부모
버리는 자식 얘기가 내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하였다. 전화기가 통
화중인 것은 고장이아니라 의도적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해가 기울어 가자 허기가 들었다. 친구는 아직도 공중전화 박스에 붙어 있었다. 나
는 시간이 좀 더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으면 파출소에 할머니를 인계하고 우리 갈
길을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때“할머니.”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에서 뛰어오는 아이들의 소리에 할머니의 얼굴은 금방 환해졌다. 할머니와 손주
들이 부둥켜 안은 모습이 너무 정다웠다. 몇 시간을 서성이던 고단함도 스르르 풀어
졌다. 이어 차에서 아들과 며느리가 내려오고 자초지종을 안 다음에는 고맙다는 말
을 연발하셨다. 서울역이 아니라 용산역이라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할머니께서는
늘 오시던 대로 행동하셨던 것이다. 고속열차가 운행되면서 용산역과 서울역에 번갈
아 서는 것이라 나이드신 할머니께서 혼돈을 하신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여기까지 왔다가 할머니를 발견한 아들 내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에게 극적인 모자 상봉을 보게 해 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가
 할머니와 같이 있지 않았더라면 길이 엇갈려 그분들이 다시 만날 때까지 마음 고생
을 많이 했을 것이다. 승용차에 올라 손을 흔드는 할머니 가족의 모습에 우리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예정보다 훨씬 늦게 저녁을 먹으며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늦
게나마 오랜만의 우정을 확인하였다.



                                                                                                 
 - 황호민 경기도 용인
                                                                                           
시조 200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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