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13.

[명시음악] 문둥이 시인 한하운시 모음 원장현 대금









[명시음악] 문둥이 시인 한하운시 모음 원장현 대금




[음악동영상 원장현 대금]






보리 피리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인환)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億劫)을 두고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罰)이올시다 벌이올시다.













어머니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지나가 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왔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辱)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 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가마는.

    아 꽃과 같은 삶과
    꽆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葛藤)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추녀 밑에 서서 우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무지개

    무지개가 섰다.
    무지개가 섰다.

    물 젖은 하늘에
    거센 햇살의 프리즘 광선 굴절로
    천연은 태고의 영광 그대로
    영롱한 칠채(七彩)의 극광으로
    하늘과 하늘에 궁륭(穹륭)한 다리가 놓여졌다.

    무지개는 이윽고 사라졌다
    아쉽게
    인간의 영혼의 그리움이
    행복을 손모아 하늘에 비는 아쉬움처럼
    사라진다 서서히......

    만사는
    무지개가 섰다 사라지듯이
    아름다운 공허였었다.



리라꽃 던지고

    P 양,
    몇 차례나 뜨거운 편지 받았읍니다.

    어쩔 줄 모르는 충격에
    외로와지기만 합니다.

    양(孃)이 보내 주신 사진은, 얼굴은
    오월의 아침 아카시아꽃 청초로
    침울한 내 병실에 구원의 마스콧으로 반겨 줍니다.

    눈물처럼 아름다운 양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사랑이
    회색에 포기한 나의 사랑의 창문을 열었읍니다.

    그러나 의학을 전공하는 양에게
    이 너무나도 또렷한 문둥이 병리학은
    모두가 부조리한 것 같고
    이 세상에서는 안 될 일이라 하겠읍니다.

    P 양
    울음이 터집니다.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이 사랑을 아끼는
    울음을 곱게 그칩니다.

    그리고 차라리 아름답게 잊도록
    덧없는 노래를 엮으며
    마음이 가도록 그 노래를
    눈물 삼키며 부릅니다.

    G선의 엘레지가 비탄하는
    덧없는 노래를 다시 엮으며

    이별이 괴로운 대로
    리라꽃 던지고 노래 부릅시다.


生命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한 세상
    한 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昌慶苑

    꽃 보러 꽃이 가지요
    꽃 볼려고 단 한분 삶을 봣지요

    꽃이 꽃을 기다리지요
    피고 질 삶이 기다리지요

    꽃이 꽃을 보지요
    사람이 꽃이지요
    꽃이 사람이지요

    꽃을 밟고 사람이 오지요
    꽃이 사람을 밟고 돌아가지요



踏花歸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지네
    함박눈인 양 날리네 깔리네

    꽃 속에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꽃이 달빛에 졸고
    봄달이 꽃 속에 졸고
    꿈결 같은데
    별은 꽃과 더불어
    아슬한 은하수 만리(萬里) 꽃 사이로 흐르네.

    꽃잎이 날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
    가슴에 안기네.

    꽃이 지네
    꽃이 지네
    뉘 사랑의 이별인가
    이 밤에 남몰래 떠나가는가.

    꽃 지는 밤
    꽃을 밟고
    옛날을 다시 걸어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손가락 한 마디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쩌구니 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 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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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길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全羅道) 길.







목  숨
 
    쓰레기통과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 있는 목숨이 꿈틀 만져진다.

    배꼽 아래 손을 넣으면
    37도의 체온이
    한 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뭉클 쥐여진다.

    아 하나 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


明洞 거리 2

    명동 길 외국 어느 낯선 거리를
    걸어가는 착각에 허둥거린다.

    알아볼 사람 없고 누구 하나 말해 볼 사람 없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 거리 에트랑제는

    시간과 과잉이 질질 흐르는 사람 틈에 끼어
    물결처럼 물결처럼 떠 간다.

    누드가 되고 싶은 계집들이 꼬리를 탈탈 터는데
    노출 과다에 눈이 맴도는 눈 허리에 기름이 돈다.

    누구 하나 같이 갈 사람 없어
    극장 광고판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나는 담배 꽁초를 다시 피워 문다.

    청춘이 시장끼 들고
    돈과 계집이 그리워지는 거리에
    나 혼자 에뜨랑제는

    누드가 되고 싶은 게집과 계집을
    따라가는 사내들 틈에 끼어 어둠을 걸어간다.


고오․스톱

    빨간 불이 켜진다
    파란 불이 켜진다.

    자동차 전차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들 신호를 기다려 섰다.

    나도 의젓한 누구와도 같이
    사람들과 사람들 틈에 끼어서
    이 네 거리를 건너가 보는 것이다.

    아 그러나
    성한 사람들은 저이들끼리
    앞을 다투어 먼저 가버린다.

    또다시 빨간 불이 켜진다
    또다시 파란 불이 켜진다.

    또다시 자동차 전차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들 신호를 기다려 섰다.

    또다시 나도 의젓한 누구와도 같이
    사람들과 사람들 큼에 끼어서
    이 네거리를 건너가 보는 것이다.

    아 그러나
    또다시 성한 사람들은 저이들끼리
    앞을 다투어 먼저 가 버린다.

    또다시 나에게 어디로 가라는 길이냐
    또다시 나에게 어디로 가라는 신호냐.


靑 芝 有 情

    내가 울고 싶어서
    파랑 잔디를 찾아갑니다.

    남 몰래 한(恨)이 가도록 울고 싶어서
    파랑 잔디를 찾아갑니다.

    인간 폐업
    천형 원한(天刑怨恨)을 울었읍니다.

    몇 백번 죽음을 고쳐 죽어도
    자욱 자욱 피 맺힌
    그리움과 누우침이 가득찬
    문둥이 아니겠읍니까

    실컷 울어봐도 유한(有恨)이 가시지는 않아
    그래도 울음이 울음을, 눈물이 눈물을
    달래 주는 자위가 그립습니다.

    눈 감고 눈 감고 누워서 조는
    미령(靡寧)의 피로한 몸에

    폭신한 파랑 잔디는
    생명의 태반인 양
    지령(地靈)의 혈맥이 이다지도
    내 혈관에 싱싱한 채 순환합니다.






秋夕 달

    추석 달은 밝은데

    갈대꽃 위에
    돌아가신 어머님 환영(幻影)이 쓰러지고 쓰러지곤 한다.

    추석 달은 밝은데
    내 조상에
    문둥이 장손은 다례도 없다.

    추석 달
    추석 달
    어처구니 없는 8월 한가위
    밝은 달이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쩌구니 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冷水 마시고 가련다

    산천아 구름아 하늘아
    알고도 모르는 척할 것이로되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를 말라.

    구름아 또 흐르누나
    나는 가고 너는 오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너와 나와 헛갈리누나.

    아 아 하늘이라면
    많은 별과 태양과 구름을 가졌더냐

    이렇듯 맑은 세월도
    푸른 지평(地平)도 건강한 생(生)도 평등할 행(幸)도
    나와는 머얼지도 가깝지도 못할
    못내 허공에도 끼어질 틈이 없다.

    삼라만상은 상호 부조의 깍지를 끼고
    을스꿍
    저 좋은 곳으로만 돌아가는가

    산천아 내 너를 알기에
    냉수 마시고 가련다.

    기어코 허락할 수 없는 생명을 지닌
    내 목으로 너를 들이키기엔
    너무나도 시원한 이해이어라.


悲  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悲愴)>이
    이 격리된 나요양소(癩療養所)에

    국경도 없이 차별도 없이
    또 세균학도 없이
    뇌파에 흐흐 느끼어 온다.

    지금 나는 옛날 성하던 게절에 서 있고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수없이
    떠내려온 하류에서
    불시 나는 나의 현실을 차 버린다.
    두 조각 세 조각 산산이 깨어진다.

    지금
    모든 것이 깨어진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만이
    영원으로 가는 것이다.


버러지

    새살이 하려 찾아온
    또 새손댁 금실기가
    바램에 부풀은 눈시울에
    똑똑히 삶을 그린 눈썹이 시물구나

    손가락 떨어지면
    손목은 뭉뚝한 몽두리 됐다

    분에 못견딘 삶이래서
    내 몽두리도 마구마구 휘어때린
    매 맞는 땅바닥은 태연도 한데
    어이 억울한 하늘이 울음을 대신하나

    한 가지 약을 물어 천 가지를 바래며
    전설로 걸어가면 신기(神奇)를 만나련가

    이 실천이 꿈이련가
    꿈이 실천이련가

    큰 목적을 위하여
    이 몹쓸 고집을 복종시키자
    인내만이 불행을 달래어 두고
    의심만이 나와 소근거리자

    버러지 버러지 약 버러지

    놀래 자지러진
    네 너로 네딴으로 죄없단 빛이
    누두둑 푸른 피 흘려 흘려

    헒 짙은 목덜미에
    왕소름을 끼친다

    내가 버러지를 먹는지
    버러지가 나를 먹는지


輪  廻

    가랑잎이 우수수 굴러간다
    지난해 가랑잎이 굴러간 바로 그 위에
    올해의 가랑잎이 굴러간다

    이제 사람이 죽었다
    지난해 죽은 사람의 시간 바로 그 시간에
    지금 사람이 또 죽었다

    모두가
    지금 있는 것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또 미래에도 있을 지금의 바로 그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 미래에 똑같은 그것이
    영원으로 이어주는 것이다
    윤회(輪廻)
    우수수 가랑잎이 굴러간다


新  雪

    눈이 오는가.

    나요양소(癩療養所)
    인간 공동묘지에
    함박눈이 푹 푹 나린다.

    추억같이......
    추억같이......

    고요히 눈 오는 밤은
    추억을 견뎌야 하는 밤이다.

    흰 눈이 차가운 흰 눈이
    따스한 인정으로 내 몸에 퍼붓는다.

    이 백설 천지에

    이렇게 머뭇거리며
    눈을 맞고만 싶은 밤이다.

    눈이 오는가.

    유형지(流刑地)
    나요양소
    인간 공동묘지에.

    하늘 아득한 하늘에서
    흰 편지가 소식처럼
    이다지도 마구 오는가.

    흰 편지따라 소식따라
    길 떠나고픈 눈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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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韓何雲(본명:한태영1920년 3월 20일 ~ 1975년 2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함경남도 함흥군 덕천면 쌍봉리에서 부유한 선비였던 한종규의 2남 3녀 중 장
남으로 태어났다. 중국 베이징 대학 농학원(이후 중국 농업 대학)을 졸업한
후 함남도청, 경기도청 등에서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1949년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
여 나병시인으로서 화제를 낳았다.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간행하고, 19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1958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
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
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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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 시인 한하운, 파랑새로 다시 태어나다
인천아트플랫폼서 한하운 시 낭독 콘서트 열려
10.11.03 16:40l최종 업데이트 10.11.03 16:40l이정민(min93)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우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한하운시초의 '파랑새' 중에서)

나병(=한센병)에 걸려 화제가 됐던 인천의 대표적 시인 한하운(사진). 자신의 천형(天刑
=하늘의 형벌)의 병고를 구슬프게 시로 읊어 더 유명한 한하운 시인의 시 낭독 콘서트가
 열렸다.

인천문화재단(이하 재단)은 2010 인천문화예술 대표인물로 '보리피리'와 '파랑새'의 시
로 유명한 시인 한하운을 선정, 11월 16일 오후 7시,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서 시
 낭독 콘서트를 무료로 개최한다. 재단은 시인을 기리기 위한 한하운 전집을 11월께 발간
할 예정이다.

콘서트에선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원작인 소설 '미실'의 작가 김별아와 영화 '방가?
방가!'의 여주인공 신현빈, 시인 이기인·신현수 등이 한하운의 시를 낭독하며, 가수 안
치환은 시를 노래한다. 이와 함께 윤영천 인하대 명예교수의 해설도 곁들여진다.
도 진행돼 시와 음악과 해설이 있는 콘서트로 진행된다.

또한 16일부터 28일까지 아트플랫폼 크리스탈큐브에선 한하운 자료전이 진행된다. 이 자
료전은 고인의 친필 유고와 사진·편지글·시집 등을 엮어 한하운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자리로 마련된다. 특히 나병이 발병하기 전 한하운의 사진과 직접 작성한 약
력, 제3시집을 기획했던 자료와 함께 나환자 인권 선양을 위한 노고를 치하하는 육영수
여사의 친필서명이 담긴 서한도 공개된다. 아울러 제1시집 '한하운시초'를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월북 작가 이병철의 명함도 전시될 예정이다.



나병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본명 한태영)은 1920년 함경남도 함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2년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하여 수의 축산과를 졸업하였으나, 1936년 17세가
 되던 해에 나병 확정 진단을 받고 금강산 등지에서 요양을 하며 병세가 호전된다. 병세
의 호전으로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공부하며 안정을 찾지만 나병이 재발하여 고향으로
귀국해 문학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1949년 '신천지' 4월 호에 시를 발표하였고, 같은 해 1시집 '한하운시초'를 발간한다.
1950년 부평 나환자 정착촌인 '성계원'으로 이주하여 자치회장에 선임되고, 1952년 부평
에 신명보육원을 창설했다.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과 함께 나환자 복지 사업에 힘을 쓰
다가 1975년 2월 28일 간경화증으로 타계했다.

대표 작품집으로는 '한하운시초'가 있으며, 자서전으로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
가 있다.

한편 재단은 2005년부터 인천을 빛낸 문화예술인을 매년 1인씩 선정하여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해 왔다. 2005년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선생을 시작으로 2006년 서예가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2007년 소설가 현덕(玄德), 2008년 한글점자 '훈맹점음'의
창안자 송암 박두성(松菴 朴斗星)을 조명하는 등 그 동안 지역 안팎에서 많은 호응을 얻
어낸 바 있다.


[덧붙이는 글] 만월산 골짜기에 묻힌 한하운의 유토피아

한국전쟁 중인 1951년 5월, 기묘한 사건 하나가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나병환자가 아이들 셋을 잡아먹었는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한
다는 것이 회의의 요지였다. 도시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살아있는 아이를 잡아
먹었는지 죽은 아이를 잡아먹었는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소문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제기됐지만, 정부가 한센병환자 수용대책을 마련해야한다는 데에는 의견이 모아졌다.

수용대책이란 3·8선 이남 전역의 한센병환자들을 해상고도(海上孤島)와 같은 특수지대로
 보내는 조치를 의미했다. 3일 후에 재개된 회의에서 이 사건은 결국 사실무근으로 판명
 났으나 수용계획은 계속 추진됐다. 그대로 두면 '전염병 때문에 우리가 다 죽을 테니까'
무슨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웃지 못 할 사건이 20세기 중반의 대한민국 국회에서 정기회의 의제로 다루어지
던 무렵 '문둥이 시인'으로 알려진 한하운은 거렁뱅이 생활을 끝내고 부평에 정착해 한센병
환자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꿈을 실천해가기 시작한다. 그의 시 구절처럼 '앞날이 없는
 문둥이는 / 돌아서 돌아서면서 무너지는 가슴에' 희망을 갖기 어렵지만 그는 하루빨리 구걸
이나 구호에 의지하지 않는 생활과 경제의 독립을 성취하고 싶어 했다. 부평은 그러한 신천
지 개척의 첫 삽을 뜨는 곳이었다.

함경남도 함주 출생인 한하운은 1948년 월남한 후 문전걸식을 하며 쓴 그의 첫 시집 <한하운
시초>가 출판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명동성당 안의 방공호, 용산 삼각지 다리 밑, 강릉,
수원 등지를 헤매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한하운은 서울, 경기, 강원 일대의 한센병환자들을
모아 부평에 수용하자는 정부의 교섭안을 받아들여 1949년 12월 30일 밤 우선 70여명의 환자
를 이끌고 부평 공동묘지 골짜기로 향한다. 이탈자들도 간혹 있었지만 골짜기 안은 곧 600여
명에 달하는 환자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이들은 자치회를 조직해 그들만의 '공화국'을 만들어갔다.

선거를 통해 자치위원장으로 임명된 한하운은 부평의 요양원을 성혜원(成蹊院)이라고 이름
붙였다. '도리지하 자성혜(桃李之下 自成蹊)'라는 글귀에서 따왔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으나
그가 한때 일본에 머물며 몸담았던 곳이 도쿄세이케이고등학교(東京成蹊高等學校)였으니 아직
은 온전한 몸으로 일본, 북경 등지를 유랑하며 문학가를 꿈꾸던 아름다운 한 시절을 잊지 못
한 때문이기도 하리라. 본래 이 말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실린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에서 유래하는데 복숭아와 오얏꽃은 달리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천형의 낙인을 찍고 세상과 등져야 하는 지독한 외로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울타리를 치고
 지친 몸을 쉬게 하고 싶은 패배감.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고 싶은, 꿈틀
대는 갈등이 또한 이 말 속에 담겨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하운은 다시 부평으로 돌아와 한센병환자 자활사업에 힘을 쏟는다. 그러
나 아직 이념의 칼날이 무디어지기 전인 1953년 8월 한 주간신문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
체'라는 제목 하에 그의 시를 '붉은 시집'으로 규정하고 한하운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문화
빨치산'이라고 매도하면서 그가 계획하던 사업들이 일시 타격을 받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몰리며 국회에서까지 논의된 소위 '문화 빨치산 사건'은 그해 11월
'한하운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치안국장의 발표가 있은 연후에야 잠잠해질 수 있었다.
그 후 부평을 기지로 하여 시 창작과 한센병환자 복지사업에 더욱 몰두하던 한하운은 <보리피리>,
 <나의 슬픈 반생기> 등을 연이어 출판하고 보육원, 제약회사, 출판사 등을 운영하며 세상으로
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1976년 십정동에서 사망한 그의 묘는 지금 김포공원묘지에 자리 잡고
 있다.

한하운은 아무도 찾지 않는 만월산의 골짜기를 그들만의 낙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유토
피아를 꿈꾸며 그가 부평에 내딛은 첫 발자국의 자취는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한하운은 인간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영원한 '이상촌(理想村)'과 자연과 벗하며 지낼 수 있
는 문인들의 마을을 건설하고 싶어 했다. 그 꿈의 흔적만이라도 부평에 재현해 볼 수는 없을까.
 죽어서 파랑새가 되고 싶었던 한하운의 힘겨운 날갯짓을 우리가 거두어 줄 때가 되지 않았나.
<김현석 인하대 강사가 쓴 부평신문 칼럼중에서. 2008-12-03>

-출처: 오마의 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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