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5.

[명시음악] 노천명 사슴 그녀의 시와 삶 Concerto Pour Une Jeune Fille Nommee






[명시음악] 노천명 사슴 그녀의 시와 삶  Concerto Pour Une Jeune Fille Nommee






[음악동영상]
Concerto Pour Une Jeune Fille Nommee "Je T'Aime"(소녀를 위한 사랑의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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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산호림, 자가본,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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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감상

 두 연만으로 된 단순한 구도의 이 작품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목이 긴 것과 슬픈 것과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길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 것일
까? 이런 물음에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답하기에는 어렵지만, 우리는 긴 목이
어떤 고고(孤高)함과 관계 있다는 데서 실마리를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과 어울리게 사슴은 언제나 점잖은 편이어서 말이 없다고 한다. 그는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지 않고 쓸쓸하다. 여기서 시인의 상상력은 사슴이 지나쳐
 온 어떤 먼 과거로 돌아간다. 향기롭고 우아한 관(뿔)이 있는 것을 보건대 그는
 아마도 예전에는 무척 고귀한 족속이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사슴은 때때로 물 속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잃어버린 전설 ― 그가
예전에 누렸을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생각해 낸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향수
(잃어버린 옛날에 대한 그리움)를 어찌할 수 없어서 사슴은 먼 산을 바라본다.
그의 긴 목은 그럴수록 더욱 가냘프고도 슬프다.
이렇게 보아 오는 동안 우리는 이 작품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고귀한
 꿈을 지키며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의 체험을 노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사슴은
그것을 노래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 내지 상징일 따름이다. [해설: 김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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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고독

 노천명


변변치 못한 화를 받던날
어린애처럼 울고 나서
고독을 사랑하는 버릇을 지었습니다.

번잡이 이처럼 싱크러울때
고독은 단 하나의 친구라 할까요.

그는 고요한 사색의 호숫가로
나를 데리고 가
내 이지러진 얼굴을 비추어 줍니다.

고독은 오히려 사랑스러운 것
함부로 권할 수 없는 것
아무나 가까이 하기 어려운 것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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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自畵像)

노천명

오 척 일 촌 오 푼 키에 이 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
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
하게 삼간다. 대[竹]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銅]처럼 휘어지며 구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요점 정리

- 자기 고백적 어조,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어조
-반복, 대조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성격을 비판하는 듯하지만 실은 자랑스러워
하는 태도가 엿보이고, 자신의 외모와 성격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반어적
뉘앙스가 담겨 있음
-출전 : 산호림(珊瑚林)(1938)



이해와 감상

 진정한 양심(良心)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흔히들 문학인들이 말하는 양심이라
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양심의 잣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 작품으로 진정으로 자신에게 부끄러워할 줄 알고, 부정한 세상에 대한
 결벽, 비타협으로 삶을 마감했던 시인 '윤동주'의 '자화상'과 비교해서 읽으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양심은 자신이 양심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양심적이 되
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살아온 삶의 이력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양심적인 인
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이 시는 시인의 인생(人生)을 살펴서 보면 민망할 뿐이다. 그토록 화려한 직함을
 달았던 시인 노천명의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이들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하여간 이 시는 시인을 보고 작품을 읽으면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젊은 시절
에 그럴 수 있었으리라는 심정을 가지고 읽는다면 시적 화자가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갖는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 자신의 현실
적인 모습을 형상화해 낸 것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의 고민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여성적인 매력도 없고, 당시 구여성들이 지
녀야 하는 덕목과는 괴리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하며 자신에 대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한 시인의 모습을 거의 직설적인 어투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자아에 대한 열등감과 자존 의식이 복합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외모에 대한 불만족의 표출은 구여성이 가져야 하는 외모를 잣
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시인의 자존 의식의
 역설적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자신을 미화시키는 일부 문학인들의 미사여구
(美辭麗句)에 진정한 안목 다시 말해서 역사적 인식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교
훈을 주고 있다.



-출처:
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i/si-new/ia-hwa-sang-n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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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을 숨쉬며 살다간 여인


노천명에게도 뜨거운 첫사랑이 있었다. 천명이 조선일보 편집부에서 <여성>지 편집일을

하던 중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하는 안톤 체홉의 ?앵화원?이란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었을 때

연극 관람을 왔던 보성전문 경제학 교수 김광진이란 사람이 바로 천명과 사랑을 나눈 첫사

람이었다. 김광진은 아내가 있는 몸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래 그런지

평생 독신으로살았으며, 원래 자존심 강하고, 고독 속에서 살던 사람이 더욱 고독과 친해진

것이다. 그의 시를 보면 곳곳에서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시집 <창변>에는 고독의

감정과 함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시들이 많이 담겨
있다.




서리 내린
지붕 지붕엔 밤이 안고

그 안엔 꽃다운 꿈이 뒹굴고
뉘집인가 창이 불빛을 한 입 물었다.

- ?창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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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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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 / 노천명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뢰 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인사들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여졌다

고도(孤島)에라도 좋으니 차라리 머언 곳으로 - 나를 보내다오
뱃사공은 나와 방언이 달라도 좋다

내가 떠나면
정든 책상은 고물상이 업어갈 것이고
애끼던 책들은 천덕구니가 되어 장터로 나갈 게다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와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먹게 던져 주어라

온갖 화근이었던 이름 석 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 버리련다
나를 어디 떨어진 섬으로 멀리 멀리 보내다오

눈물 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 곳을 떠나련다
개 짖는 마을들아
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들아
잘 있거라

별이 있고
하늘이 보이고
거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

 --

*청소년 시절에 사슴의 시인으로 깊게 각인된 탓으로 친일 시를 쓴 적이
있는 그녀이지만 그것을 미워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시를 읽고 학창 시절에 감동받
은 그 마음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연보를 읽어보니 주로 여성지와 각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직장
생활을 했군요. 재생불능성 빈혈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요.
46세의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위의 시에 나오는 단어 중에 요즘 표기법과 다른 곳이 있지만 시인이 쓴
 내용 그대로 옮겼습니다. 일테면 ‘우뢰’는 ‘우레’가 요즘 문법이지
요. 또 ‘애끼던’ 은 ‘아끼던’의 그 시절 말이기도 합니다. <제비꽃>

-출처:
http://blog.ohmynews.com/paullee/146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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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의 시인' 노천명은 왜 그토록 구차했을까

글: 유영호(ecosansa)편집: 김예지(jeor23)

 노천명이 1919년 경성에 와서 194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57년까지 거주한 집
▲  노천명이 1919년 경성에 와서 194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57년까지 거주한 집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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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이상의 집'에서 불과 2~3분 거리에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시인, 노천명의
 집이 있다. 비록 세월이 흐르며 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본적인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기에 2015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가
까이 되었지만, 이곳에 서서 시인 노천명을 상상해 보기로 하자.

노천명의 시 가운데 <사슴>이 워낙 유명한 탓에, 보통 우리는 그에게 '시인'이라는 칭
호를 붙인다. 하지만 그는 시인으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소설가와 언론인으로도 재능
을 보여준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노천명은 1911년 황해도 장연 태생으로, 본명은 노기선이었는데 어릴 때 병으로 사경
을 헤맨 뒤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또 그는 부친이 사망한 뒤 1919년 경성으로
 올라와 종로구 체부동 이모 집에서 살면서 진명보통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1934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러다 해방된 후 1949년 이곳 누하동 225-1번지로 이
사를 와서, 1957년 6월 이곳에서 숨졌다.

다재다능한 시인, 권력 앞에 갈대가 되다


노천명의 활동 상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조선
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도 이때 발표되었다. 그
 뒤 1938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고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그러다 1943년에는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승전하는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등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는 거센 친일파 척결 분위기에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했다.

곧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미쳐 피난 가지 못한 노천명은 이때 월북 작가인 임화, 김
사량 등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 대회' 등의 행사에 참
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다시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노천명은 좌익분자 혐의로 자그마
치 2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여러 문인이 구명운동을 벌였고, 약 6개월간 투
옥한 뒤 1951년 4월 석방됐다.

그 후 노천명은 공보실 중앙 방송국에서 일하고, 3차 시집을 발표했지만 건강이 악화됐
다. 1957년 6월 16일엔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쓰러졌고, 46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노천명은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는 한없이 순수한 시적 낭만에 잠긴
 소녀처럼 상상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만할 정도의 도도함과 결벽증을 지닌 여성이
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성품으로 인하여 동료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못해 독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대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었다고 그는 <자화상>에서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런 도도함조차 권력 앞에서는 한낱 갈대에 불과했나 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권력에 굴복했고, 또 전쟁 당시 인민군과 유엔군의 권력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그때그때
 굴종한 노천명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에게 도도함이란 기회주의와 같은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일본 패전 후 삭제해버린 친일시, 그는 구차했다

 해방 직전 친일시를 실어 출간했다가 해방 후 친일시만 잘라내어 다시 출간한 시집
《창변》의 목차, 친일시는 창호지로 가렸다.
▲  해방 직전 친일시를 실어 출간했다가 해방 후 친일시만 잘라내어 다시 출간한 시집
《창변》의 목차, 친일시는 창호지로 가렸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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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해방 전인 1945년 2월 25일
시집 <창변>을 출간하며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했다. 그 시집에는 친일시 9편이 수록되
어 있었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뒤 일본이 패전하고 해방이 되자 그는 그 시집에서 친일
시 9편을 빼고 계속 출판했다.

친일시는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 편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뒷부분의 친일시를 본문에서
없애고 흔적을 지웠지만 목차에는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 '재단장판'을 유통한 것이
다. 물론 목차도 친일시가 나열된 부분은 뜯어냈지만, 다른 시와 섞여 나열된 페이지는
 친일시의 제목을 창호지로 가렸다. 참으로 구차한 행위다.

서울시가 이곳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때 어떠한 이유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 수 없고,
 또 이곳을 찾을 많은 관광객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할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최근 일본
인 관광객이 이 일대를 많이 찾으니 그들을 위해 노천명의 유명한 이 시를 이곳에 써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 1943. 8.5)

 조선인징병제 실시를 찬양한 노천명의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5)
▲  조선인징병제 실시를 찬양한 노천명의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5)
ⓒ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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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노천명은 서울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가, 개발에 밀려 1973년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천주교 묘지에 그의 언니 노기용과 함께 나란히 안장되었다. 고양시에서는 그의
시비 건립을 추진했으나, 시민단체들이 그의 친일 경력을 들어 이를 반대하면서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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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9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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