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18.

[사랑사건] 아빠의 지옥 아동성폭력과 대처법





[사랑사건] 아빠의 지옥 아동성폭력과 대처법































00 가해자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간 정민이

정민(가명)이는 성폭력 피해자 쉼터에서 살다가 작년 초 퇴소하였다.
쉼터에 거주할 수 있는 기간 2년을 꽉 채운 정민이는 퇴소 후 고시원에서
1년을 살았지만, 한 달에 100만원도 채 못 버는 PC방 아르바이트만으로
40만원이 넘는 고시원 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돈을 모을 수도 없었다.
오빠는 계속 집으로 들어오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정민이는 망설여졌다.

가해자는 아빠였다. 정민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추행을 시작했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4학년 때부터 집안일을 해 온 정민이는,
아빠가 자신을 추행한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오빠마저 대학을 다니러 지방에 가자, 아빠는 강간을 하려고 했다.

정민은 그 날 집에서 나와 학교 상담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쉼터에 들어온 후, 고민 끝에 아빠를 고소했다. 아빠는 징역 3년
형을 받고 복역한 후 출소해서 오빠와 같이 살고 있다.

쉼터 활동가들은 정민이에게 다른 쉼터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
안했지만, 정민이는 올해 초, 결국 집에 돌아가기로 선택했다. 다른 쉼
터나 그룹 홈에 들어가 또 규칙을 지키며 처음 본 사람들과 함께 생활
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아빠도 옛날만큼 힘을 쓸 수 없을 것이고, 또
다시 피해를 입더라도 쉼터 활동가들이 있으니 예전과는 다를 거라고 생
각했다.

최근에 만난 정민이는 아빠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며 살고 있지만, 아
빠가 자신을 쳐다볼 때 성적인 존재로 보는 것 같아 그 눈빛이 너무 싫
다고 했다. 아빠는 가끔 술을 마시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나
무시하지 마라” 하며 주정을 부린다고 한다. 정민이는 보증금이 모일
 때까지는 아빠와 불편한 동거를 계속할 생각이다.



아빠를 고소하지 말라는 영주의 엄마

성폭력 피해자 쉼터에서 퇴소한 영주(가명)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가해자는 아빠이며, 영주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강간을 당해왔다. 아
빠가 몸이 아픈 후 돈을 벌기 시작한 엄마는, 영주가 중학생일 때 자신
의 피해 사실을 털어놓자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오히려 그 날 이후 엄
마는 매일 술을 마시고, 취하면 영주를 때리기도 했다.

영주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청소년 상담기관에 전화
했고 쉼터에 입소하게 되었다. 입소 후에도 엄마는 수시로 영주에게 전
화를 걸어 집에 있는 동생들을 봐주러 오라고 했다. 고소를 고민하자,
엄마는 “아빠 고소하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아빠가 불쌍하지도 않니?
감옥 갔다 오면 노숙자로 살 게 뻔한데 넌 인정머리도 없냐?”면서 오
히려 영주를 나무랐다.

가해자를 고소한 후에도, 엄마는 이혼하고 생활비를 받는 조건으로 고
소를 취하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자꾸 흔들리며 영주에게 고소를
취하하라고 권유했다.

영주는 아빠에 대한 분노보다 엄마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다. 영주는
쉼터에 사는 동안에는 엄마랑 아예 연락을 끊어버렸다. 영주 엄마는 가
해자가 출소한 후에도 이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이혼하고
영주와 함께 살고 있다.

영주는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지만, 아직 자신의 피해 사실이나 부모의
 이혼에 대해 털어놓지 못했다. 남자친구가 성에 대해 보수적이라서
이해를 못해줄 것 같아서이다. 남자친구랑 결혼하고 싶지만 자신의 집
안 배경을 알면 남자친구 집에서 반대하지 않을까 애가 탄다. 상견례
를 하고 결혼식을 할 때만이라도 아빠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가해자인 아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 정민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신의 남편이 딸을 강간했는데, 딸을 데리고 집에서 나오지도
 않고 오히려 고소를 취하하라고 권하는 영주의 엄마를 상식적으로 납
득할 수 있을까? 결혼식장에 굳이 아빠 손을 잡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
각하는 영주를 보면서 드는 답답한 심정은 나만의 것일까?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

최근 친족성폭력 생존자가 직접 쓴 수기집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
다>와 <꽃을 던지고 싶다>가 발간되고, 친족성폭력 생존자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잔인한 나의, 홈>이 상영되면서 친족성폭력이 사람들 사이
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친족성폭력은 꺼내기 쉬운 주제가 아니다. 친족성폭력에
대해 얘기하면 사람들은 “의부지? 설마 친아빠는 아니지?”라고 묻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엄마는 무엇을 했는지 궁
금해한다.

또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성폭력 피해를 반복해서 입을 수 있는
지, 왜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집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조심스레
묻기도 한다. 딸을 키우는 엄마들은 친족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
 자신의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남편도 믿을 수 없는 거냐며,
그렇다고 남편을 잠재적인 가해자로 생각하는 것은 힘들다고 답답해한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기관 ‘열림터’(성폭력피해자 쉼터)의 활동가
들이 ‘친족성폭력’ 생존자들과 만나온 경험을 토대로, 사회가 친족성
폭력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존자의 삶을 이해하며 또 다른 범죄를 예방해
가야 할지 모색해봅니다. [편집자 주]

-출처
사람들이 모르는 ‘친족성폭력’ 이야기
생존자들의 경험과 현실을 이해하기 위하여①
<여성주의 저널 일다> 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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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

사람들은 가족 안에 ‘성’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직면하기 힘들어한다.
가족 내에서의 성은 부부 사이에만 존재하며, 자식이나 친동생, 손녀, 조
카 등 어린아이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행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
족의 이미지에 어긋난다.

1980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이라는 책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읽히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이 부활할 때까지는 성적 관행에 대해 가장 대담하게 탐구한
 연구자들조차, 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남성들이 단순히 자신의 성적 쾌
락을 위해 아동을 이용할 권한이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다루기를 거부
했다.” (p.51)

“사실상 아버지는 딸에게 아무 대가 없이 주어야 할 애정과 보호를 빌미로
그녀의 몸을 바치도록 강요한다.” (p.27)

조건 없는 돌봄, 내리사랑의 관계여야 할 부모와 자녀 사이의 유대 관계가
파괴되고 성적인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는 것이기 때문일
까? 아니면 가족을 책임지는 부성 이미지, 가부장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
리는 폭로이기 때문일까? 성폭력 중에서도 친족성폭력, 그 중에서도 친부
에 의한 성폭력은 가족의 이미지에 어긋난 일, 사람들에게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세상에 꺼내어 놓았을 때 누구 하나 자신을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의 ‘말하기’를 가로막는다.

달라지는 판례들, 피해자의 복잡한 감정 고려해

우리 사회에서 친족성폭력이 가시화된 것은 1991년, 13년 간 자신을 강간한
 검찰 고위직 공무원인 의붓아버지를 딸이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사건이
었다. 60대 남자 어르신이 다급하게 당신의 아들(피해자의 남자친구)을 도와
달라며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상담을 청해왔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공동대책
위를 꾸리고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이 사건은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반(反)성폭력 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행법상 4촌 이내의 혈족과 인척에 의한 성폭력을 친족성폭력이라고 한다.
흔히 ‘근친상간’이라고 표현해왔지만, 근친상간은 혼인이 금지된 성인들
간에 일어나는 성관계를 뜻하기 때문에 일방적인 폭력인 ‘성폭력’을 왜곡
하는 용어이다.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친족성폭력이 법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의 법원 판례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 친족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더디지
만 조금씩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술이 조금이라도 일치하지
 않으면 피해자를 의심했던 과거와는 달리, 앞뒤가 맞지 않거나 피해자가 특
정 정황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면 신빙성을 인
정하고 있다. 장기간 지속적인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피해자의 기억이 정확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특히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갖는 ‘양가 감정’을 이전처럼 무죄의 증거로
 삼지 않고,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감정으로 인정하는 판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가해자들은 생존자가 어버이날에 준 “아빠 사랑해요”라는 문구가
담긴 카드, 옷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학원에 보내달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증거로 제출하며 가해 사실을 부인한다. 성폭력 가해-피해의 관계에서 어떻
게 저런 대화가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판례들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아빠이기도 한 존재에게 생존
자들이 생계를 의지하고 보호받기 위하여 한 행동을 두고, 성폭력 피해가 없
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또 “성폭력만 빼고는 좋은 아빠였다”,
 “아빠가 성폭력 할 때는 싫었지만 또 나는 따뜻함, 친밀함을 원하기도 했다”
는 생존자들의 솔직한 증언을 재판부가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판결은 생존자에게 있어서, 자신이 집을 나온 것, 가해자를 고소한
것이 정당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성폭력이 자기 잘못이 아니며 가해자의 잘못
이라는 점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의로
운 판결이 나오고 가해자가 감옥에 갇혀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
니다. 그 이면에는 생존자가 평생 오롯이 떠안아야 할 과제들이 있다.

망망대해를 홀로 헤쳐가야 하는 생존자

우리가 만난 생존자들 중에는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 털어놓았을 때 가족들이
생존자의 편에 서기 보다는 가해자를 옹호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머니들
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든 없든 혈연 중심의 가족이데올로기에 강하게 매여
있었으며, 딸이 남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라도 가족
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상황이니, 법원에서 생존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고 가해자가 처벌
을 받는다고 해도 생존자가 가족 안에서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또 가해자를 제외한 가족들이 갑자기 입장을 바꿔 생존자의 편에
서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족을 해체시킨 장본인이 되어 가족들로부
터 장기간 배척당하는 경우도 있다.

가해자는 복역을 하고 나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존자들은 출소 후 가해자가 자신을 쫓아와 위협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
달린다. 가족관계를 회복하고 가해자가 반성하길 기대했던 생존자는, 판결
후 전개되는 이러한 상황에 당황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돌
아보게 되기도 한다.

또한 가해자가 처벌받는다고 해서 ‘원가족’이라는 자원을 잃어버린 생존
자가 이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이 나오지는 않는
다. 원가족, 혹은 유사 가족이 부재하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한 사람이 경
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끊임없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성폭력
피해자 쉼터에 사는 동안은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고 활동가들과 생활인
들이 지지집단이 되어 주지만, 쉼터에서 퇴소한 후에는 그야말로 혼자서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가 한 사람을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으며, 그의 일부만을
 훼손시킨다는 것을 전제 하더라도,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은 반복되는 관계의
 패턴이나 감정적인 문제를 오랜 시간 끌어안고 사는 경우가 많다. 보호받
았어야 할 어린 시절, 가장 믿었던 사람과 주변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그만큼 깊고 오래 가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길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부설기관 ‘열림터’는 성폭력 피해자 쉼터이다.
1994년 문을 연 후로 19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3백명 넘는 성폭력 생존자
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이중 대부분은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다.




이 연재는 2014년 열림터 20주년을 앞두고 친족성폭력 연구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친족성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사람들과 깊이 있게 고민을 나누고
자 기획된 것이다. 우리는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어떻게 피해 경험과 더불어
 살아가는지, 그녀들은 가해자들 혹은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어떻게 쉼터에 들어오며, 어떻게 생활하는지, 그리고 친족성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지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기사에서 제시되는 사례들은 열림터를 통해 만난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의
이야기에 국한되어 있다. 쉼터에 왔다는 것은 그만큼 고립되거나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인적 자원이 거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쉼터로 연계되
지 않은 친족성폭력의 사례까지 포괄하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 연재의 목적은 친족성폭력의 다양한 사례를 분류하거나 일반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난 수많은 생존자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맥락 안
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가해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성
폭력을 수용하거나 용서한 것은 아니다.

또, 가해자와 동거를 하거나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은 엄마와 친하게 지낸
다고 해서, 생존자가 이전과 같은 무기력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오
히려 성폭력을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사건으로 인식하여, 자기 방어의 각
본을 미리 짠다든지, 가해자를 교정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한다든지 하는 식
으로 자기만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살아간다.

그러하기에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이 친족성폭력 생존자는 이러저러하다고
규정하기보다는, 그녀들의 삶의 맥락을 폭넓게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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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 트라우마가 바꾼 인생

나스타샤 킨스키에서 버지니아 울프까지

-조성관 편집위원




토머스 하디의 소설 ‘테스’는 주인공 테스에게 닥치는 운명의 비루함을
 보여준다. 그 비극적 운명의 출발은 하녀 테스가 주인집 아들로부터 성
폭행을 당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후 테스에게 불행과 불운이 연이어 들
이닥친다.
 
   ‘테스’는 수없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우리의 뇌리 속에 저장되어 있
는 영화 ‘테스’는 1981년에 나온 나스타샤 킨스키의 그것이다. 열여덟
 살의 나스타샤 킨스키가 연기한 비극의 주인공 테스.
 
   지난 1월 13일 세계 언론은 일제히 나스타샤 킨스키의 이야기를 전했다.
 나스타샤 킨스키는 독일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성학대에 대해
폭로했다. “나는 폴라 킨스키처럼 성폭행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성적인
학대를 받았다. 아버지는 항상 나를 지나치게 만졌다. 4~5살 때는 너무
세게 안아서 도망갈 수 없었던 적도 있다. 직감적으로 아버지로서의 포옹
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 클라우스 킨스키는 독일의 대표적인 영화배우. ‘닥터 지바고’
‘석양의 무법자’ ‘노스페라투’ ‘파가니니’ 등 1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해 독일 영화계의 전설로 불린다. 클라우스 킨스키는 1991년에 사망
했다. 다시 나스타샤의 인터뷰를 더 들어보자.


 
 
   나스타샤 킨스키 자매의 비극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그를 교도소에 보내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것
이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 언니는 자신의 마음과 영혼, 미래를 비밀의 무게에서 해방시켰다. 언니
가 자랑스럽다.”
 
   나스타샤의 인터뷰는 이복 언니인 폴라 킨스키의 폭로 인터뷰에 이어 나
온 것이다. 클라우스의 장녀인 폴라는 앞서 1월 9일 아버지의 성학대를 고
발했다. 클라우스는 1955년 폴라의 어머니와 이혼한 이후 딸 폴라와 함께
 영화촬영을 위해 유럽을 여행했다.
 
   “내가 다섯 살 때부터 14년간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왔으며 아버
지와 함께 유럽여행을 하던 때 학대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나를 벽에
던지고 성폭행했다.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만
나는 사람마다 아버지에 대해 격찬하는 것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폴라 킨스키는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담은 자서전 ‘아이의 입’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폴라와 나스타샤의 잇따른 폭로로 세계 영화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독일이 자랑하는 배우가 두 딸에게 성학대를 자행해왔다는
 사실에.
 
   정신분석학에서는 성학대로 인한 상처를 ‘섹슈얼 트라우마(Sexual Trauma)
’로 칭한다. 재미동포 정신과 의사 정국(미국명 엘란 정) 교수는 지난 40년
간 정신과 의사로 성학대 환자들을 상담해왔다. 정국 교수는 지난해 8월 ‘섹
슈얼 트라우마-인류가 숨겨온 가장 불편한 진실’(블루닷)을 썼다. 정 교수는
 이 책에서 성적 트라우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학대만큼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 사건도 없을 것이다.
그 경험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자존감을 훼손시켜 피해자의 내면에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은 물론, 가족과 대인관계에 이르는 사회적 환경까지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특히 유년 시절에 겪는 성적 학대의 경험은 씻을 수 없
는 참혹한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전문가들이 성학대의 피해자를 ‘생존자’로 규정하는 이유다. 폴라와 나
스타샤 자매는 친족 성학대의 생존자였던 것이다. 자매는 죽은 아버지를 고발
함으로써 평생을 짓누른 섹슈얼 트라우마에서 마침내 해방되는 전기를 마련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 오프라 윈프리 photo 연합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1954~)는 수년간 미국에
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뽑혔다. 오프라 윈프리는 섹슈얼 트라우마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대표적 사례로 연구된다.
 
   그의 태생과 유년시절은 불행으로 점철되었다. 미시시피주 작은 마을 코스
키우스코의 흑인 빈민가에서 10대 미혼모가 딸을 낳았다. 어머니 버니타는
하녀 신분이었고, 아버지는 잠시 휴가 나온 군인이었다. 미혼모는 가정부로
 일하며 홀몸으로 딸을 키웠다. 차별받는 흑인여성이, 결혼도 않은 상태에서
 딸을 낳았으니 세상의 시선이 어땠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독한 가난이
모녀를 옥죄었다.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엄마는 딸을 도저히 키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딸을 고향에 있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
 
   외할머니는 외손녀를 내치지 않았다. 외할머니 역시 가난했지만 외손녀를
 사랑으로 극진하게 보살폈다. 그는 세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했을 만큼 총명
했다. 동네 교회에서는 성경을 줄줄 외우는 그를 신동이라며 귀여워했다.
 
   불행의 그늘은 여섯 살 되던 해 다시 그를 덮쳤다. 생모는 그를 친정어머
니에게서 자신이 사는 밀워키 시내의 흑인빈민가로 데리고 왔다. 엄마가 돈을
벌러 나가면 딸은 집에 홀로 남겨지는 시간이 많았다. 딸은 아홉 살 때 같은
집에 살던 사촌오빠에게 몹쓸짓을 당했다. 이후 외삼촌과 이웃집 남자들이
잇달아 그를 범했다. 어린 소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열세
살 되던 해 그는 결국 가출을 했고, 마약에도 손을 댔다. 열네 살 되던 해 임
신을 했다. 엄마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10대 미혼모는 아이를 출산했고,
그 아이는 태어난 2주 후 숨을 거둔다. 미혼모는 갓난아기의 죽음을 지켜보며
충격에 빠진다. 이때 그는 앞으로 평생 아이를 낳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생모는 그를 생부 버넌 윈프리에게 보내기로 한다. 버넌 윈프리는 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처받은 사춘기 딸을 받아들였다. 버넌 윈프리
는 생모와 달리 딸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매주 한 권씩 책을 읽게 하고 성
경을 암송하게 했다. 그는 친아버지의 지시에 따랐고, 얼마 후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윈프리는 학교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연설동아리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네시빌 라디오방
송국의 파트타임 아나운서가 된다. 그는 전미 스피치경연에 참가해 희곡해석
부문에서 2등을 차지했다.
 
   윈프리는 테네시주립대 매스컴 전공으로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윈프리는 라디오국에서 TV뉴스국으로 옮겼고, 차곡차곡 성공을
 향한 계단을 밟아나갔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여성 앵커
자리에 올랐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를 스스로 털어놓았다. 1986년
‘오프라 윈프리 쇼’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윈프리는 근친 성학대를 당한
여성이 자신의 피해경험을 털어놓자 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어린 시절 피해자였
다는 사실을 고백해 미국의 시청자들을 울렸다.
 
   윈프리는 25년간 ‘오프라 윈프리 쇼’를 진행하면서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윈프리는 이 쇼에서 성폭력, 성차별, 이혼, 아동학대, 다이어트 등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주제를 놓고 출연자들과 소통하고 시청자들과 공감했다. ‘
오프라 윈프리 쇼’가 성공한 데는 윈프리가 출연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
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윈프리와 마주 앉으면 출연자들은 모두 마음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섹슈얼 트라우마의 극복
 
   오프라 윈프리는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읽는 탁월한 능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
앞서 언급한 ‘섹슈얼 트라우마’의 저자 정국 교수는 이런 해석을 한다.
 
   “아동이 학대를 당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세계가 안전하지 않고 예측불가
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 뇌 하반부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에 있는 전투적
 반응이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이로써 정신이 활발히 활동하고 위험 요소에 재
빠르게 반응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이는 에너지와 추진력을 낳는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위험하다는 자각 역시 외부 환경에 촉각을 곤두세우도록 만드는
데, 그들은 언제나 위험이나 고난의 경고 사인, 특히 주변인으로부터 오는 위
험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 끊임없는 기민함은 타인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발
달시키며, 따라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타인의 마음을 잘 해독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 결과 성인이 되어서도 그들은 매우 지각력이 뛰어난 사람이
된다.”
 
   오프라 윈프리는 성폭행을 당한 직후 정신과적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윈프리는 독서와 공부로 방송인의 꿈을 키우며 성적 트라우마를 잘 극복한
경우에 해당한다.
 
   통계에 따르면 세계 여성의 25%, 남성의 10%가 아동 성학대를 경험한다. 미
국은 여자아이 26%, 남자아이 16%가 친족 성학대의 표적이다. 인류의 3분의 1
이상이 아동 성학대의 표적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
래 가장 만연한 범죄이면서도 동시에 인류가 숨겨온 가장 불편한 진실이 아동
성학대인 것이다.
 
   성학대는 끔찍한 범죄이지만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특별한 정
신과적 치료과정이 필요하다. 알려진 대로 푸른아우성 대표 구성애씨는 초등학
교 시절 성폭행을 당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가 딸에게 한 첫마디는 “네 잘
못이 아니야”였다. 구성애씨는 어머니의 이 한마디로 성적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8월, 전남 나주에서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이 벌
어졌을 때 ‘나영이 주치의’였던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이 급히 현장으로 내려갔
다. 신의진 의원은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의사다. 아동 성학대는 발생 초기부터
정신과 의사의 보살핌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즈의 여왕 빌리 홀리데이의 최후
 

▲ 빌리 홀리데이 photo 을유문화사‘글루미 선데이’ ‘뉴욕의 가을’ ‘스트
레인지 푸르츠’ ‘서머타임’ 등을 부른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1915~1959).
 그는 언제 들어도 몽환적 음색에 빨려들게 만드는 가수다. 그가 루이 암스트롱
의 여자 후계자로 평가받았다는 말은 결코 허사(虛辭)가 아니다. 재즈 여왕으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44세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왜 그는 이런 최
후를 맞아야 했을까.
 
   그는 1915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은 엘리노어 페이건. 열악한 환경에서 힘겨운 유년기를 보낸 그는 열
 살 되던 해 끔찍한 일을 겪는다. 40대 백인 남자에게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한다.
더 어이없는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어머니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성범
죄자를 검거하지 않고 그와 그의 어머니를 성매매 및 소란 혐의로 체포한 것이다.
명백한 인종차별이었다. 홀리데이는 훗날 가수로 성공한 뒤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경찰은 엄마와 나를, 도움이 필요해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아니라
마치 살인이라도 한 범죄자처럼 대했어요. 엄마와 나를 창녀 취급하며 유치장에
 던져 넣었죠. 그때 나는 강간을 당해서 피를 계속 흘리고 있었어요. 그게 안되
어 보였는지 유치장에서 일하는 뚱뚱한 백인 여자가 우유 한 잔을 가져다줬던 게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지나치면서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것 말고는 피 흘리는 어린 내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범인은 5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는 가톨릭 감화원에 수용되었다.
이후 홀리데이는 타고난 노래 실력으로 가수로 데뷔해 성공한다. 하지만 이성관
계에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남자들로부터 학대에 시달렸고, 급기야 마약에까지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최고의 가수가 마약 투약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석방되기
를 반복했다. 가수인생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는 결국 마약중독자 집단수용시설
에서 약에 절고 간질환 합병증에 피골이 상접한 채로 죽어갔다. 그가 한때 재즈의
 여왕으로 불리던 빌리 홀리데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가수
로는 성공했지만 사생활에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왜 그랬을까. 성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다.



 
 
   천재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
 

▲ 버지니아 울프 photo 지호 영국의 천재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 1941).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자기만의 방’ ‘올란도’ ‘세월’ 등을 발표한
버지니아 울프가 194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2차대전
 중인 1941년 3월, 그는 런던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르위스(Lewis)의 우즈강에 뛰
어들었다. 코트 호주머니에 돌을 잔뜩 집어넣은 채로.
 
   버지니아 울프는 성차별과 성학대의 피해자였다. 그는 아이가 있는 상태에서 재
혼한 부부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영국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작가였다. 그러나 스티븐은 아들에게는 대학 공부를 시켰지만 딸은 대학에 보
내지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독학으로 글을 썼고, 에세이스트 겸 소설가가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린 시절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의붓오빠들로부터 지속적인 성학
대를 받았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부모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성학대를
받은 아동들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원인 모를 신경쇠약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결혼을 했지
만 아이가 없었다. 남편 레너드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일 때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는 1941년 죽기 직전 자신이 어린 시절
성학대를 받은 사실을 남편에게 편지로 고백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죽기 직전 그를
 진찰했던 의사는 그가 그런 몸으로 59세까지 살 수 있었던 게 기적이라고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성적 트라우마를 견딘 것은 글쓰기와 남편 덕분이었다는 게 연구
자들의 결론이다. 레너드는 아내의 천재성을 일찍부터 알아보았고, 자신을 희생하
면서 아내의 모든 상처를 품어주었던 사람이다.


 
 
   마릴린 먼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 마릴린 먼로 photo 앤톤 퓨리 마지막으로 섹슈얼 트라우마의 희생자로 연구되는
사람이 마릴린 먼로(1926~1962)다. 지난해는 마릴린 먼로 사망 60주기였다. 마릴린 먼
로는 할리우드에 데뷔하면서 받은 예명. 본명은 노마 진 모텐슨. 그는 10대 미혼모에
게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아버지를 본 일이 없다. 어머니는 걸핏하면 정신발작을 일으
켜 정신병원에 수용되곤 했다. 고아원과 양부모 집을 전전하던 여덟 살 때 그는 성학
대를 받았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또다시 버려질지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성적 트라우마와 부성결핍 콤플렉스. 2011년 개봉된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My week with Marylin)’이라는 영화를 보면 마릴린
은 침대 옆 탁자에 링컨 대통령의 사진을 놓고 “아빠일지 모른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먼로는 36년의 생애를 살면서 세 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했다. 최고의 영화배우로
인기를 누렸지만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이유는 뭘까. 남자들은 먼로와 함께 생활하
면서 그가 밤마다 신경쇠약, 두통, 불면증 등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약과 술을 먹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신적인 고통을 이해 못한
 두 번째 남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그를 때렸다. 세 번째 남편 작가 아서 밀러는
그런 먼로와 6년을 살았다. 아빠 같은 남편이 곁에 없자 먼로는 약물과 술에 더 많이
의지했고, 이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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