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1.

[명언음악] 콜니드라이 신 하나님 하느님 야웨 Kol Nidrei




[명언음악] 신 하나님 하느님 야웨





 [음악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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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가 없이 무엇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존재는 마찬가지로 증거가 없어도
 얼마든지 부정될 수 있다.'-크리스토퍼 히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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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악을 제거할 의지는 갖고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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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성경이 마땅치 않은 것은, 그것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때
문이 아니라, 내가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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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는 말이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법칙을 말한다면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정서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
중력의 법칙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칼 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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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기반한 존경보다 더 비열하고 야비한 일도 없다
-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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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악은 서로 다른 종교에서의 차이와 감정에서 비
롯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뿌리깊고 고질적인 것이며 비난 받아야 한다.
-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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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종교단체(기독교)는 개인이 자신의 사색을 통해 신념을 얻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들이 미리 준비해둔 신념을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하고 있다.
-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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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 · God · Deity)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神)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절대자를 말한다. 주로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여러 신앙에서 벼락이나 홍수와 같은 거대한 자연 현상을 신이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
한다. 또한 신은 인간의 탄생이나 사후의 운명 등을 결정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은 여러 종교와 민간 신앙에서 숭배되며, 많은 경우 인간과 유사한 인격, 의식, 지성,
감정 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기독교에서는 '아버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신을 남
성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인식의 불균형이 있었고, 이런 경향성에 반기를 들어 여신학
이 등장하였다.



일신교의 신

유대교와 여기에서 기원한 기독교 및 이슬람교를 포함하는 아브라함계 종교의 교리에
서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이들 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
한 호칭으로는 야훼 또는 여호와가 사용된다. 대한민국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에서는 하느님 등이 신의 호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신의
 호칭으로 알라를 사용하며, 이 또한 한국어에서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으로 번역된다.
다만 고대 유대교에서는 존재하는 신과 믿는 신을 서로 구분하였고, 유대교에서는 존재
하는 많은 신 가운데 단 하나의 신, 야훼를 믿었다(→단일신교).



다신교의 신

그리스 신화 및 북유럽 신화에는 초월적인 능력과 인간적인 결점을 함께 가진 수많은 신
이 등장한다.
힌두교에서는 비슈누, 시바, 인드라 등 수많은 신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각
각의 신자가 믿는 신은 하나이다(→단일신교).

고대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엘, 아세라, 아낫, 모트, 얌 등의 신을 믿고 있었는데, 이들
신들의 우두머리는 아버지 신인 엘(El)이었다. 하지만 가장 숭배되던 신은 풍요와 폭풍
우(暴風雨)의 신인 바알이었다. 왜냐하면 농업에 종사하던 가나안 인들은 바알을 잘 섬
겨야 풍요와 폭풍우를 관장하는 바알이 풍요를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생존을 위
해 바알을 자연스럽게 믿었다.





동아시아의 신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산, 강, 마을터, 나무 등에도 주관하는 신
(神)이 있다고 여겼으며, 이들에 대한 제를 지내기도 한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복을 주거나 해를 끼칠 수 있는 귀신이 된다고
믿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집안의 조상에게 예를 갖춰 제사를 지냈다. 사기에 따르면,
삼황의 시대에도 귀신에 대한 예를 갖추었으며, 유적으로는, 신석기 중기에 해당되는
제기가 발굴되었다.
사람이 쓰던 물건에 신이 있어서 도깨비가 되거나, 짐승이 사람이 되어 사람에 해를 끼
치거나 도움을 주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진다.



철학에서의 신

동양철학에서는 신은 중요한 철학 주제가 아니었다. 동양철학에서는 윤리학과 정치철
학 및 형이상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반면, 서양에서는 윤리학, 형이상학 등에 못지않게
신에 관한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중세시대에는 신,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신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했으며,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다. 이들은 특히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힘썼으며, 근대사회에까지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등 다양한 증명을 내세웠다. 그러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하
여 신의 존재 및 다양한 형이상학적인 것들 -영혼 따위- 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내세웠으며, 도덕법칙을 실현하는 데에 신의 존재를 요청했다. 현대철학에서도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철학에서 다루는 신에 대한 것으로는 “신 없이도 도덕이 가능한가?”라는 것이있다.
일반적으로 신을 믿는 사람은 그 종교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명령을 따르거나, 따르려고
애쓴다. 따라서 예전부터 이러한 신과 종교가 도덕을 가능하게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으며 “신이 도덕을 명령하기 때문에 도덕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그 도덕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가?”와 같은 반박도 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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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존재 증명과 그비판]


이제부터 나열되는 유신논증들은 사실상 가설에 불과하다고 알려진 것들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성직자들은 이 논증들을 내세워 신자들에 대해서는 신앙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비신자들에게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유신
논증들을 해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일단 제안자
들이 부여한 명칭, 즉 ‘증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

이 증명을 정리하면 “인간이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신 관념을
갖게끔 하는 절대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주장과 같다. 이 증명의
문제점은 생각 또는 상상 같은 관념적인 것을 통해 존재가 입증된다고 비약한 점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끝일뿐이다. 그 밖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증
거는 어디에도 없고 설사 존재한다 하여도 더 위대한 것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관념이 사실이 될 수 있다고 우긴다면, 다른 측면도 사실이 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
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신의 존재를 상상하지 않는다면(이 세상에는 분명히 무신론자
들이 있으므로) 그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 변화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Transformation)

사물들 중에서 어떤 것은 단지 변화(움직임)를 받고, 어떤 것은 다른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움직임을 당한다. 즉, 변화는 어디에서나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원인은 무한히 소급해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움직임
을 받지 않고 다른 것에 운동을 일으키는 어떤 존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아리
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와 같은 존재가 곧 신이다.

우선 운동의 원인에 있어서 그것의 무한소급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는 증명되지 않는다.
원인의 무한소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제 1항이 없는 수열은 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제 1항이 없는 수열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1로 시작되는 부의 정수의 수열이 그것이다. 고로 우리는 부동의 동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부동의 동자는 목적인(目的因)을 중시한다. 그러나 운동에 어떠한 목적이 끼어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다. 그리고 목적 없이도 움직이는 것이 있다. 중력에 의해 땅에 떨
어지고 있는 물체가 무슨 목적을 가진단 말인가? 한편 원자 내에서 일어나는 개별 양자
(量子)들의 변화를 살펴보면 분명히 제 멋대로 움직이거나 또는 그렇게 보이며, 여기에
부동의 동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때 양자 자체가 아무런 의지나 목적이 없는 부동
의 동자가 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 양자들을 신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 제 1 원인론(Theory of 1st Origin)

우리는 어떤 사물이 존재하도록 만든 다른 사물이나, 어떤 행동을 낳게 한 의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물이나 의지 등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선행되는 다른 원
인에 종속된다. 이렇게 누가(무엇이) 원인을 일으키는지 점점 캐어 들어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는 인과에 얽매이지 않는 제1원인에 도달하게 된다.

제1원인론은 부동의 동자가 수십 개가 될 소지가 있는 반면 신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며,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이라고도 불린다.

일단 인과율은 대체로 시간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결과에
는 어떤 원인이 선행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현대의 물리
학은 인과율을 초월하는 입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변화로부터의 증명’에
 대한 반박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원자 내에서 일어나는 개별 양자들의 변화를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원인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인과율을 초월하거나 원인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 결국 제1원인도 없을 수가 있다.

현상에 대한 관찰 대신 러셀이 제기한 반박을 소개한다.

“만약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신도 (‘모든 것’에 포함되므로)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한다. 만약 원인이 없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신과 마찬가지로 세계도 원인
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논변에는 하등의 타당성이 없다.”


○ 우연성으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Chance)

우리는 자연이 우연성을 갖고 있음을 안다. 이러한 우연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짐작한다. 우연성을 뛰어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라고(존재가 있다고)…….

위 증명을 정리하면 “자연은 우연성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실은 절대적 존재가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자연법칙론과 비슷하다. 하지만 원자와 같은 미
시 입자들은 인간이 발견해 낸 법칙들에 따르는 정도가 생각보다 낮다. 세상은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우연들’이 종합되어 평균치 또는 근사치로 움직인다. 우
연들을 평균치 또는 근사치로 종합하는 존재가 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신은 세상을 너무나 어렵게 또 불명확한 기준으로 조정하는 셈이다. 이렇게 복잡한
신보다는 세상이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 우월성의 정도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Superior Degree)

우리는 자연의 모든 사물이 가진 우월성에 그 차이가 있음을 안다. 이런 생각은 완전성의
개념을 함축한다. 우리는 점점 우월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덧 완전한 존재
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이나 우주론적 증명과 적용대상은 틀리지만 똑같은 형식을 가진
논변이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열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똑같은 대상을 놓고도 관점
을 조금만 달리하면 우열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개구리가 벌레를 잡아먹는 일만 본다면 개
구리는 벌레보다 우월하지만 벌레의 번식력을 개구리의 그것과 놓고 본다면 벌레가 우월
하다고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열은 존재하지만 완전한 존재를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우월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일 것이라는 것은, 가장 우월한 존재가 생각보다 그리 우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기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가장 우월한 존재 자체도 어느 정
도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는 가능성이 없다. 범위가 한정되지 않았을 때 더 우월한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논증을 세우지 않는 한 가장 우월한 존재를 취급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 조화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Harmony)

우리는 어디에서나 적응과 일치가 있음을 보게 된다. 물고기는 헤엄을 쳐야 하기 때문에 지
느러미와 꼬리가 있으며, 개는 뼈다귀를 갉아먹어야 하기 때문에 억센 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순전한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계획 - 사물을 다스리는 어떤 지성의 선언 - 이
라고 말할 수도 있다. 유신론자는 후자를 지지한다.

이 증명은 지적설계론이라고도 하며, ‘자연 만물이 질서를 유지하되 혼돈에 이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어떠한 이성적 존재가 필연적으로 있다’는 논증, 즉 목
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과 비슷하다. 또한 지적설계론은 자연법칙론과도 비슷하다.

계획 또는 설계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포함하며,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이렇게 설계되고 조정
되었다는 믿음이 18세기까지 이어져왔다. 하지만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다고 보기엔
 너무나 가혹하고 삭막하며, 오히려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변해왔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그리고 사물이 적응과 일치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자연적인 것(자연의 선택)
일 뿐이지 어떠한 목적이나 계획의 증거도 찾을 수 없다. 한편 적응과 일치가 계획과 통제의
 결과라고 인정하더라도 이 세상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또 진행되고 있는 부적응과 불일치가
있는데, 이것은 지성적 설계자와 질서유지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목적론에 대하여 기독교계의 주장을 가지고 살펴보자. 성경에 나온 창조의 목적 중에는 생육
하고 번성시키려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생육하고 번성하라면서 다른 동물들처럼
인간을 한꺼번에 여럿을 만들지 않은 이유라든지, 멸종된 동물들, 그리고 동물의 생육과 번
성을 방해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만든 이유 등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인들
은 각각에 대해 균형과 조화, 그리고 죄에 대한 징벌 등의 이유를 들겠지만, 그 어떤 답변도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로서의 창조주를 표현하지 못하며, 그의 애초의 목적은
 희석되고 만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 도덕론적 증명(Moral Argument)

이 사회에는 권선징악을 권장하는 도덕적 판단이 있다. 또한 개인의 양심도 악을 미워하는 성
향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선을 지향하는 도덕적 성향은 곧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인도하려는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 증명은 우선 선이나 도덕이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함으로써 실책을 범했다. 강
도에게 쫓기던 친구가 우리 집에 숨어들었을 때 뒤쫓아온 강도가 친구의 행방을 묻는 경우 절
대적 도덕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지만 사실 우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악인을 돕
는 것, 그리고 친구에 대한 배신은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선한 존재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럼 선과 악에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그 차이는 신의 명
령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차이가 있었던 것인가? 신의 명령에 의해 차이가 있
다면 신 자신은 선악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신은 선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신이 선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선악의 기준이 정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
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그것이 누구든지 간에 선한 존재는 그 위의 존재가 행사하는
 악을 어쩌지 못한다.

결국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는 좀처럼 실체를 정의 내릴 수 없다. 어떤 측면에서 살펴보든 간에
역설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들의 도덕적 성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를 보면 도덕율은 인간의 사회성이 만들어 낸 것이며, 또 도덕은 끊임없이 변하
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양심은 단지 도덕을 내적으로 투영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도덕과 양심
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며 어떤 가상의 주권자가 끼어 들 자리는 없다.




○ 종속론적 증명(Ethnological Argument)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지상의 모든 종족이 보편적인 신 관념과 종교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절
대자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이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과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관념, 미신, 종교가 생긴 이유를 신이 존재
하는 것으로 비약하는 것이므로 의미가 없다. 보편적인 신 관념과 종교는 다름 아닌 두려움에
기반하는 것이다. 1차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현상(바람, 홍수, 해가 뜨고 짐, 번개, 신기루, 화
산 등 자연현상)에 대한 두려움이며, 고차원적으로 올라가면 죽음, 미래(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다. 신 관념과 종교는 모두 사람이 정한 것으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존재를 형상화
하거나 관념화한 것일 뿐이다.



○ 불의치유론적 증명(Treat for Injustice)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너무나 큰 불의가 있다. 선한 자들이 고통받고, 악한 자들이 흥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서 신은 존재해야 하며, 그의 심판에 따라 현세의 불균형
은 내세(천국과 지옥)에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증명은 이 세상의 불의를 누가 만들었는가만 따지면 반박이 가능하다.

이 세상이 선하고 전능하신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전능하신 창조주는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세상이 가지게 될 온갖 불의와 고통과 불행을 내다본 셈이다. 그렇다면 창조주에게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이 불순종과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있는데, 이것은 자학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이 세상을 정의의 신이 아닌 불의
의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볼 수도 있고, 아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또 현세의 불의를 내세에서 보상한다는 것은 창조주가 현세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천국과 지옥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달리 없다. 단지 이러한 세계가 있어야만 하고
또 그 세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정한 것밖에는 말이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치유론을
내세우기보다는 세상이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고 보는 편이 훨씬 이해하기가 편하다.



○ 성경적 증명(Biblical Argument)

앞에서와 같은 합리적 신 존재증명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유한한 인간의 증명시도로서 필연적으
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적인 유추에 의해 증명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다(창 1:1). 따라서 믿는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완전한 증명이 된다.

논의할 가치가 전혀 없는 궤변이다.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전혀 반박할 길이 없다.

“믿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된다.”

이 증명은, 기독교는 '이런 걸 증명이라고 내세우는 바보들이나 믿는 것'이라는 증거로서의 가치만
 있다.

이제까지 제기된 유신논증들은 실은 가설과 기대에 불과하다. 신 존재에 대한 실증 노력은 아직까
지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며, 앞으로도 증명은 그리 기대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에 대
한 증명시도는 계속되고 있는데 그러한 시도들 자체는 시비를 걸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이미 실패가 자명한 논증을 진리인 것처럼 호도하는 짓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에 얽매일 필요나 이유가 없다. 신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를 따라야 할 이유가
 없으며, 신이 없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질 이유도 없다. 우리의 가치는 신의 존재
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관건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세상을 최
선의 상태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과거에 일천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 만든 논리에 갇혀서 독단
에 빠지거나 자기비하를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이 좀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각자가 온정을 가지고 지성과 창조력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발췌출처:
http://painfulness.egloos.com/v/3650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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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여호와 히브리어 로마자 YHWH,Yahweh ]















1. 개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 창세기 1장 1절(공동번역성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
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 출애굽기 3장 14~15절(공동번역성서)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의 아브라함교의 신의 본래 이름... 이라기보단 불리는 호칭.

동시대 다른 중근동의 신들이었던 바빌론의 마르두크나 수메르의 엘이나 가나안의 다곤, 바
알 등의 숭배는 지금은 사라졌으나 현대에까지 야훼 숭배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세계적인
종교를 이루고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당연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야훼를 운운하는 걸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애
초에 기독교 자체가 유대교에서 갈라져나온 신앙이므로 자신들의 민족신으로 여겨지는 야훼
가 언급되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게다가 야훼니 여호와니 하며 이름을 발음하는 것도 유대
인들한테는 금기이기 때문에 민감한 사항.

모든 그리스도교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야훼가 실체로는
하나이되, 성부-성자-성령의 3가지 위격을 이룬다고 본다. 그렇기에 예수 역시 실체로는 야
훼라고 보며, 야훼에 대응되는 개념은 '성부'가 아니라 '주(Dominus)'로 본다.


2. 역사

히브리어에서 야훼는 ???? (테트라그람마톤)이라고 기록된다. 그런데 이 이름은 모세 시대에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신인 엘(EL)에서 파생된 제의적인 이름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유대인들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상의 신의 개념을 가지고 야훼를 숭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신들은 거의 다 자연 종교의 신들로서 그 신들은 대부분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생활을 좌우하는 자연의 변화를 주기적으로 주관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 신들은 농
경 사회나 유목민 사회를 막론하고 제례를 통해서 자연을 주관하는 신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신들의 행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먼 미래까지도 주관하는 기능을 가
진 적은 없었다. 가령 바알은 매 7년마다 찾아오는 풍년과 흉년의 사이클에서 풍년을 위해서
 자연법칙을 주관하는 일만 했었다.

보편적으로 학계에서는 야훼 종교의 기원을 기원전 9세기 중엽에 두고 있다. 1868년에 모압의
 디본에서 발견된 메샤 석비(Mesha Stone)에 의하면 이스라엘과의 영토 분쟁을 종식한 모압의
왕 메샤가 느보에 있던 야훼의 기물들을 모압의 신인 크로쉬 제단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야훼 종교는 기원전 15세기 모세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
다.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에 나타난다. 야훼 종교라는 이름 그 자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야훼를 유일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종교를 일반적으로 야훼 종교라
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야훼는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유일신의 이름이다. 성경에 의하면 야훼가 자기 이름을 맨 먼저
나타낸 사건은 모세가 떨기나무 근처에서 그를 만났을 때 야훼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 것에 기인한다(출애굽기 3장 14절). 여기에서 야훼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하는데 이
히브리어 음역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는 영어로 "I am who I am" 정도로 번역된다, 우리말
로 직역하면 나는 나다라는 말이 될 뿐이다.

우가릿 문서에 의하면 이 '엘'이라는 어구는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
려졌는데 이 단어를 '창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는 창조하는(탄생시키는) 야훼다"
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문헌들 가운데 아문 레 신과 아텐
신에게 적용했던 정형구절 가운데 출애굽기 3장 14절과 유사한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나는 존재하게 된 것을 있게 하는 그분이다"라고 나타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말의 의미는 야훼는 그 존재의 기원이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서 생성
되거나 출생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즉, 야훼
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스스로 있는 지존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야훼의 이
름에 담겨 있는 속성이 아브라함계 종교와 다른 신앙의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다른 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은 저마다 그 기원이 있고 대부분이 창조되거나 부
모 신들의 결합으로 생긴 것들이지만 야훼는 지존자로서 그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 것이다.

족장 시대의 야훼는 한 부족의 신으로만 섬겨졌으며,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
이 네 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족장 시대에는 야훼는 한 집안의 신으로만 섬겨졌다. 물론
 성경 저자는 이 시대에도 야훼가 온 우주를 통치하는 왕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으나, 아직까
지 이스라엘은 부족 공동체였으며 야훼 역시 그 부족의 신으로만 섬겨졌다.

특히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창세기 12장 1-3절)에 의하면 지금은 비록 한 개인에
불과한 족장들이지만 그 후손의 시대에 가면 그 민족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임을 약속했다. 그래서 이 약속이 족장 시대를 이어서 내려오게 되었다. 예를 들
면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사악에게는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
함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했고, 야곱에게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야훼의 언약이 족장
 시대를 걸쳐서 계속 전수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오토 카이저나 아이히로트
와 같은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주제를 "하느님의 언약"이라고 보았으며 그 언약이 가장 잘
전수되는 이야기가 바로 족장들의 이야기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족장 시대의 야훼는 그저
 한 부족이 섬기는 유일신에 불과했다.

왕정 시대에 들어가면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야훼가 왕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
성이 되는 신정정치로 접어든다. 그러므로 야훼와의 관계가 좋은 왕들은 그 왕권을 보장받
게 되고 그렇지 못한 왕들은 왕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야훼와의 관계가 대체로 좋았
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유례 없는 번성을 했지만, 야훼를 떠난 악한 왕
들의 통치가 계속되던 시기에는 마침내 나라가 분열되고 다른 나라에 백성들이 포로로 잡
혀가는 결과를 낳았다. 성경 저자는 이 모든 결과가 사람들이 야훼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
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포로 시대에도 야훼는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소망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마침내
고국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그 동안 야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왔다고
 생각하고 야훼와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고 종교의식을 개혁하는 등의 일련
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야훼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했다.

이때 야훼가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이 바로 야훼(????)이다. 통상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야
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엄한 야훼의
이름을 피조물이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야훼를 경외하는 의미에서 "주"(主)라는 의미를
가진 아도나이라고 부른다. 야훼를 가리키는 이름은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모든
 이름이 다 야훼의 인격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야훼는 유일신이다
.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야훼는 이스라엘의 친권자로서 그 권리를 행사
하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자녀로서 그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야훼는 매우 인
격적인 동시에 신적인 권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안타
까워하며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죄를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며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내리기도 한다.

한편 이스라엘은 한때 야훼를 다른 신과 함께 겸하여 섬기는 이른바 종교혼합주의가 나타
나기도 했다. 1978년 시나이 사막에서 발견된 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항아리에는 '야훼와... 그의 배우자 아셰라'로 해석이 되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밖에도 많은 종류의 유물이 '야훼와 아셰라'를 함께 모시고 있어서, 야훼가 아셰라를
 '배우자 신'으로 여기며, 아예 바알과 동일시 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관련된
논문은 여기 참조.

본디 야훼는 스스로 다른 신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숭배될 수 없다. 야훼를 제외한 다
른 모든 신들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오직 야훼만이 숭배의 대상이므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야훼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왕정 시대의
야훼주의는 강력한 정치적인 뒷받침이 있어야만 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야훼는 왕들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서 그 계약 안에서 정치를 할 경우 그 치세를
 축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때 야훼와의 관계를 비교적 잘 유지했던 다윗이나 솔로몬,
히스기야와 같은 왕들의 통치기간은 매우 평화로운 날들이었지만 므낫세나 오므리와 같
은 왕들의 통치는 매우 불행한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야훼는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항상 예언자나 판관등을 통해서 말한다. 아주 특
별한 경우 야훼가 직접 백성들 사이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아주 특별한
 경우로서 구약성경에도 단 몇 차례만 나타날 뿐이다. 대부분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
타나서 자신의 의지를 알린다.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은 야훼의 뜻을 알기 위해 신점
의식을 치루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제비뽑기였다. 이 제비뽑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비를 뽑아서 범인을 잡거나 제자를 택하는 일은 그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고대 근동에는 여러 종류의 신점 행위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행위로는 동물의
 간이나 내장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그릇에다 물을 채워놓고 그 위에 기름을 떨어
뜨려 기름이 퍼지는 모양을 따라서 점을 치는 행위, 막대기를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화살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꿈을 통해서 점을 치는 행위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야훼의 방식을 알고자 했고, 이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바빌론 포로 시기는 야훼 종교가 매우 침체된 시기였다. 70년간의 포로생활 동안 이스
라엘은 민족정 정체성을 많이 상실했으며 종교적으로도 암울한 시기였다. 아시리아에 의
해서 먼저 기원전 722년에 식민지가 된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시리아를 정복한 바빌론에
 의해서 기원전 586년 식민지가 된 남유다 모두는 야훼에 대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안식일과 할례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야훼는 포로기의 예언자인 에제키엘이나 예레미야를 통해서 야훼와의 계약관
계를 기억하고 충실한 종교적 생활을 할 것을 강조했으나, 이스라엘은 너무도 쉽게 바
빌론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어 버렸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가 된 것
은 야훼와의 관계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동시에 포로기
의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야훼가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 것을 선언
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포로생활을 하는 기간은 야훼 종교의 암흑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론 포로 시기 이후 하깨와 즈가리야 그리고 느헤미야, 스룹바벨, 에즈라와 같은 젊
은 개혁가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실시된 개혁이 바로 야훼에 대
한 종교적인 의식과 가르침의 회복이었다. 그들은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수축하고 안식
일과 할례, 파스카를 강조했으며, 도덕적 성결과 윤리적 정결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포로 시기와 같은 암울한 현실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시 야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
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들은 바빌론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제2세대를 위해서 성경
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야훼가 그들의 조상들을 위해 한 일들을 되새길 수 있
도록 토라(모세 5경)를 강조하는 교육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통해서 개혁
가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포로생활을 하고 귀환한 지도층과 포로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남아서 온갖 수탈과
 착취를 경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포로생활을
 하고 온 지도층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된 종교개혁은 결국 본토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방해에 의해서 일시 중단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연이어서 4세기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통치는 더욱더 심한 다신론적 상황을 야기시켰고, 기원전 54년 로마가 그리
스를 정복하고 예수 시대 전까지 온갖 예언과 환상이 즐비한 혼란스러운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야훼 신앙은 그리스 철학,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플라톤
 철학과 만나게 되었다. 야훼에 플라토니즘적 존재론이 들러붙으면서 온갖 떡밥이 생성된
 것이었다.

야훼는 유일신이며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야훼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었
고, 나중에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야훼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존재인 우주의 제1원리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
존재가 질투를 한다는 둥, 분노를 한다는 둥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논쟁이 벌
어졌다. 초월적 존재가 왜 인간처럼 사사로운 감정을 보이냐는 것.

일단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이 대세였기 때문에 여기서 비롯된 질문, "왜
신이 이 세상을 이 따위로 만들었나?" "온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가 왜 유대인만 편애하
고 타민족은 잡아 죽이냐?" 하는 등의 질문이 무시될 수는 없었다. 반면 플라톤 이후에
 나타난 헬레니즘 철학[8]은 플라톤의 불생불멸적 이데아를 수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유물론적인 경우까지도 있었으므로 기독교가 이런 헬레니즘 철학과 연결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교 신학이 나올 수가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가 되는 그리
스철학은 플라톤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중세 신학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통으로 삼는데, 전자는 플라
톤 철학을,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활용해 신학 체계를 만들었다. 하여 현대 그
리스도교 신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예수가 플라톤 주의자였는가?라는 문제다.

이와 같이 야훼 종교는 약 2천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변화와 갈등을 겪었다. 우
리가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야훼 종교 역시 그 시대적인 삶
의 자리에 따라서 부흥과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한편,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첫번째로 토마스 복
음서에서는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라고 말한다. 로마 황제와 야훼를 동일선상에 놓고, 자신을 따로 말
하고 있다. 토마스 복음서의 내용은 현존하는 정경의 4복음서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대충 영지주의 문서니 하면서 넘어갈 수가 없는 내용이지만, 이게 원전에 더 가
까운 자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확답할 수 없다.

두번째로, 논리적으로는 아버지라는 말 자체에 인격성이 있는데 이러한 인격신은 그 자
체로 제약성을 띠기 때문에 절대적인 유일신일 수 없다는 의견이다. 이에 의하면 예수
가 말하는 신의 절대성은 '존재의 절대성'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의 절대성'이 된다
고 한다. 예수의 가르침만 봐도 예수의 아버지는 구약에 나오는 야훼와는 여러 모로 차
이가 있다. 애초에 신을 개인적인 아버지로 규정한다는 것부터가 구약과 매우 다르다.
 이건 모세 오경이든 후대의 예언서든 마찬가지의 문제. 또한 전술/후술하듯 구약에서
 야훼는 본래 유대 민족의 신이었다. 출애굽기만 봐도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
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
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하고 일러주어라."라는 표현이 나
온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첫째, 신구약 중간 시대의 변천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있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로 올 것이라는 전승은 예수 출현
훨씬 이전부터 유대교 분파 중 에세네파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전승이었다. 에세네파가
 소수 종파이고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성도 논란이므로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두번째로
예수 자신의 발언은 그가 아버지를 야훼라고 주장했음을 입증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
박다니라는 시편의 기도문을 인용하는 등 그는 구약을 즐겨 인용하고, 스스로를 이사
야서의 다음 구절에 나오는 야훼의 종과 명백하게 동일시하였다.



세번째로, 야훼의 성전에서 모친 성모 마리아에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발언한 점(루카 복음서 2:49,
공동번역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야훼로 인식하고 있으며, 네번째로 예
수는 자기 자신을 Ego sum이라고 드러내는 독특한 화법으로 자신을 야훼라고 선언하
였으며, 자신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Ego sum은 존
재적 절대성을 극도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다섯번째로, 애초에 유대교에서 고백하
는 야훼는 인격신이다. 따라서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에게 인격성이 있다고 해서,
야훼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넌센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교에서도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가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유대교가 부정하
는 것은 예수가 진짜 야훼의 아들이다라는 믿음이지, 예수가 스스로를 야훼의 아들
이라고 믿었다는 것은 부정한 바가 없다. 애초에 그거 때문에 시비 붙어서 고발한건데

그나마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성경은 본래
 야훼(알라)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나 변개되었고, 꾸란에는 그 메시지가 100% 온전
히 보전되어있다고 본다. 그리고 꾸란에서 예수가 야훼의 아들이며 야훼 그 자체라는
 말이 강하게 부정된다. 어차피 성경은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변개되어 신뢰
성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보통 예수에 대해 언급할때는 복음서의 예수를 말하지만,
굳이 복음서에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가장 유효한 반론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예수의 아버지 논란(?)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1. 복음서의 예수는 명백히 스스로가 야훼와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이룬다고 주장하
였고, 유대교에서도 이는 부정하지 않는다.
2. 꾸란에서는 예수가, 자신은 야훼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3.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는 이 떡밥에 관심이 없다.


4. 구원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안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구원관
(매우 거친 요약이지만)을 내세웠으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굴곡을 거쳐 현대
가톨릭과 정교회의 구원관은 "성부도 믿고 예수도 영접하고 착한 일도 해야 천
당 간다."로 바뀌었다… 라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 엄밀히 따지면 이 문
장은 명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해야 구원받는다'라
고 교리에 규정지어 놓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착한 일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주장은 가톨릭과 정교회가 분리되
기도 전에 이단취급 받은 '펠라기우스라는 자의 주장이다.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종파를 초월한 공통된 구원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이고 이를
베이스로 하여 종파별로 해석이 달라진다. 그러나 어느 종파든 간에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규정한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
(바울)가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매우 강경한 개신교와 다르게 가톨릭과 정교회가 '타종교를 존중'하는 자
세로 전환한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유일신을 믿으며 '구원은 주님을 통해'임은 변
하지 않는다.

한편 개신교, 특히 근본주의 개신교는 예수만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든 개신교 종파 측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면 개신교
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후술하겠지만, 반개신교 세력들의 희망사항과 정
반대로 개신교 신학에서 보수적 근본주의는 당당하게 개신교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주요 종파의 교리이다.(도리어 진보적 교리를 가진 자유주의 교파들은 내부
모순으로 몰락해가고 있다.)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위인들이 지옥에 갔느냐는 논제에 대
하여 성경에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라고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맥락에서 보면 충무공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은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지
옥에서 훨훨 타고 있다는 병크스러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론 모
른다는 것이 답이다. 성경에 안나오는 것을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위
로 간주하기 때문.[29]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자살하면 지옥간다' 란 말도 개신교
 교리상 잘못된 말이다.  다만 로마서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명확히 듣도보도 못한이의 구원을 확실히 말해주
진 않아서 모른다고 하는것이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그 어떤 개신교 교단에서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이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위인들이 지옥에 가지 않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교단은
 단 하나도 없다.[31][32][33] 어디까지나 성경에 없으므로 모른다이다. 이는 진보
와 보수를 막론하고 개신교 자체가 사람은 그 자신의 의로움으로 천국에 갈 수 없으
며, 무조건 예수를 향한 믿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를 확고한 진리
로 상정하기 때문이지만, 듣도보도 못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 '그럼 소위
 복음을 들었더라도 예수를 안 믿은 의로운 사람이나 위인들은 지옥에 간 것이냐?'
 라는 비판에 대해서 말하자면 개신교 교리상 의인은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하
나뿐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애초에 무시한다.


허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은 종파의 구조적인 면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개신
교는 인정하지 않고 정교회나 가톨릭은 인정하는 것, '보편 교회의 권위'라는 면이
다. 이 두 종파의 경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주교로 삼아 세웠고 현
재의 주교들은 그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성경' 뿐만 아니라 교회
의 전승, 사도단(주교단)의 해석 등을 모두 중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히 성서 비
평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근대 이후로는, 이 두 교회는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오
류에 빠져들 위험이 그나마 줄어들게 된다. 그렇기에 구원관에 있어서 현대에는 다
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세례와 구원의 관계만 하더
라도 이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있었던 트렌토 공의회에서 "만일
누가 세례는 자유로운 것으로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7차 회기 中)"라고 언급할 정도로 가톨릭 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유일한 수단임을 강경하게 표현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교의헌장 中)"라고 언급하고 무신론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잘못
된 언행이 오히려 무신론의 발생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을 지적할 정도로(사목헌
장 19) 입장이 온건해졌다.[40]


5. 특징

유일성

야훼와 고대 근동 종교 문헌의 가장 크고 분명한 차이점은 신의 숫자이다. 창세기
는 다수의 신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가르친다.
창세기에서는 오직 하나의 신이 하늘과 땅, 바다, 땅과 식물, 천체, 동물과 사람
등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각 창조물이나 영역에 별도의 신이 존재하
지 않는다. 신들끼리 경쟁하지도 않는다. 유일신이 만물을 주재하며, 모든 것을 통
제하는 것이다.

초월성

위의 유일성과 연동해서 또한 창세기 기사에서 눈여겨 볼 점은 초월성이다. 즉 야
훼는 모든 피조물 이전에 존재했었고, 만물을 창조한 주인으로, 만들어진 사물과
는 구분된다. 어떤 의미에서 야훼는 자연 질서를 초월하여 그 외부에 있는 '초자연
'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에서 '초자연적'이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우리는 이런 야훼의 특성이 당시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의 신관과 얼마나 다른지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하늘과 달, 태양 등이 곧 신이었다(최소한 신들은 이런 자
연요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집트의 세티 1세가 지었거나 그를 위해 지은 오시
리스 신전 천장에는 누트 여신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누트는 하늘처럼 공중에
펼쳐져 있었다. 공기의 신 슈가 누트를 떠받들고 있다. 슈는 땅의 신 게브 위에 서
 있다. 해와 달과 별을 포함한 다른 신들은 누트의 다양한 부위에서 형성되었다가,
 적절한 시간에 다시 돌아갔다. 슈는 누트를 떠받들고 있을 뿐 아니라, 넷에서 여덟
 신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있는 물을 막고 있다. 이처럼 세상의 각 요소는 개별 신
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성경에 계시된 신관은 다르다. 야훼는 태양이나 폭풍 가운데 있지 않고, 이
세계를 초월하여 다스린다. 그리하여 공간이든 시간이든 만물을 다스리는 유일신은
자연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 자연과 우주마저 야훼의 일부가 아니라, 그가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전지전능

절대자답게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말 그대로 전지전능하다. 말 한 마디로 만물을
창조하고(창세기), 바다를 갈랐다가 도로 합쳐놓으며[42](출애굽기) 소돔과 고모라를
 하루만에 불과 유황으로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다.(창세기[43]) 그리고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의미가 담긴 꿈을 꾸게도 한다. 사실 말 한마디로 세계 창조한 것부터
 킹왕짱. 물론 천지창조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였다고 나오지만, 일곱째 날에 피곤해
서 안식했다는 암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안식일의 '쉼'은 창조 활동의 마
감을 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빌로니아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하는 압수 주신은 자신의
소생 에아의 주술로 잠에 빠진다. 그는 잠을 자는 동안 결박을 당하고,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야훼는 이 정도로 유약하지 않다. 그는 창조 세계에 속하지도 않고, 종속당
하지도 않고, 오히려 창조 세계를 초월한다. 성경에서 야훼는 자신을 물질세계와 시간
을 초월하는 존재로 계시한다. 야훼는 세계를 창조했지, 세계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
니라는 것이다.

이 전지전능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인간 언어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단어라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악을 방치하는가?'라고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데, 그리스도
교에서는 피조물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창조 이념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스
스로 악을 제거하면 신 스스로가 부여한 창조 이념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기에
 직접 악을 없애지는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을 하게 되면
'선하다'는 속성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지전능'이라는 속성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애초에 이 논제 자체가 야훼교를 조소하기 위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난제인만큼,
그리스도교가 특정하는 야훼의 성향을 가지고서는 풀 수 없는 문제로 보아야 옳다.

이렇게 악을 스스로 제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을 못한 마당에 전
지전능해서 인간이 타락할 줄 알고 있었으면서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의문까지 나오게 된다. 결국 이런 질문에 시달리고 또 시달린 나머지 기독교에서 내
놓은 나름의 해석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시는 신은 전지전능하셔서 확실히 현재와 미래와 과거를 다 알고 계신다.
허나 그는 시공간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이 우리와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
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우리가 너비와 길이, 깊이를 보듯이 동시에 볼 수 있기
에, 그에게 과거나 미래는 없고 그저 한없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가 보
는 우주는 우리가 보는 우주와 완전히 다르며, 따라서 자유 의지와 전지전능함은 충돌
하지 않는다.

결국 또 인간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이건 결국 신앙의 부분이니까 어찌보면 답이 없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인간 인식의
 한계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 듯 대충 인터스텔라에서 가르강튀아 속 5차원을 연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성경을 읽어봐도 부활신앙이 없으면 기독교인 스스로를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부활 역시 인간의 상식이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저런 설명이 성경에는 없다는 반
박을 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의 준수 대상으로 보는 성서무오설의
 입장은 현대 신학계에서는 그다지 받아들여지는 편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물론 아
직도 상당수 개신교 교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나라나 미국의 개신교
내에선 이쪽이 오히려 다수인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데, 정말로 인간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변명할 말이 없어서 우기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게 문제. 다르게보면 인간이 무한한 신의 차원까지 이른다는 더 이상하다고 할 수도..
당장 그런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 자신도 인간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도 이해 하지 못
하는 것을 진리로 믿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아니면 인간이 아니거나 즉 그
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들이 이야기 하는 교리가 진리라고 어떻게 확신하는
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는 정황상, 비신자들 입장에서는 가능성이 후자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 개신교(장로교)의 경우 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택받은 이들
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믿을 수 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비신자는 신이
애초에 버렸으므로 이해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며 결국엔 사후에 지옥으로 갈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기준은 신의 고유 영역(이라 하)니 알 수 없다.

이러한 절대성의 논리에 관한 유명한 주제로 "만약 어떠한 것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신이 있다 하면, '신의 힘으로 전혀 다룰 수 없는 세계'도 만들 수 있는가?"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전능하기에 신의 힘으로 전혀 다룰수 없는 세계도 조종할수 있겠지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삼위일체 교리에 의하면 같은 본질이나 다른 위격,
단순하게는 외아들인 걸로 나온다. 옛날 중국 청나라에선 기독교 신자인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뭔가 계시를 받는 듯한 꿈을 꾸고서, 이 성부의 둘째 아들을 자처하며 태평천
국 운동을 일으켰다. 홍수전 외에도 성부의 둘째 아들 같은 걸 자칭한 사람은 종종
있었다.

이 이외에도 기본적으로는 선을 나타내지만, 선이라는 개념을 좀 더 명혹히 하기위해
그에 반하는 악을 만들어내고 반면교사로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악을 방치한다는
 것. 악을 저지르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현세의 사람들이 악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선과 악의 개념이 더 명확해진다는 설이다.

또 하나로는 전지(모든 것을 알고)전능(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성질에 있다는 것.
 특히 앞의 전지(모든 것을 알고 인식한다)라는 것은 애초에 인간만이 멋대로 신이 선
하다고 믿는 것일 뿐 사실 신에게는 그런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 자체
를 초월하여 그냥 이것 저것 만들다보니 선인도 악인도 창조된 것이라는 설이다.






만들어지지 않은 신

다른 종교의 신화 속에는 그들의 신들이 만들어진 과정이 나와 있다.

그런데 출애급기에는 모세가 처음 야훼를 만났을 때,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
이 있다. 이때, 야훼는 자신을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설명한 까닭은 자신은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혹은 어떤
초월자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한 것이다.
인간이 섬기는 대다수의 신들이나 초월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있다.
즉, 스스로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한 신이 아니라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거나 만들
어진 신이다.

반면 야훼는 자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존재임을 부각한 것이다.[50] 물론 다른 종교에도 이와 비슷한 창조주나 조물주라
는 개념은 있지만 이런 신들은 우주의 법칙을 관장하지 인간사에 관여하는 신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섬기지는 않았다. 창조신이면서도 인간사에 깊게 관여하는 야훼가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즉, 반면적으로 "창조신을 섬기는 근본주의"임을 주장한 것인데.. 이것도
 좀 사연이 있는 편이다.

후대 유대교의 해석 개념에서는 이것이 태초로부터 스스로 존재하기로 규정된 것, 즉 태초
의 무한으로부터 처음 존재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실제로 이 개념은 카오스로부
터 태어난 우라누스와 가이아 등과 비슷한 견지로 해석할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것이 나중
에 "다신교의 신들보다도 우위에 있는 근본적인 신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 공식화 된 것
으로 볼수 있을 듯.

이러한 특성들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야훼를, 삼위 중에서는 특히 성부를 '기원 없는
기원(근원 없는 근원)'이라 고백한다.



존재 그 자체(ipsum esse)

위 서술의 연장선이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존재론적 고찰의 연장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가 집대성한 특성이다.[51] 야훼는 그 어떤 가능태도 배제되는 순수 현실태이며, 그렇기에
야훼는 불변한다. 또한 그는 완전한 순수 현실태이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자도 그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야훼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은 '거기 있는 자'(신
학대전 I, 13, 11)이다. 그러므로 야훼는 '그의 존재이다'(신학대전 I, 3, 4c). 따라서 존
재야말로 야훼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세의 신학자이자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로 꼽히는 카를 라너(Karl
 Rahner)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스승이었던 하이데거의 철학을 수용하
여, 인간이 유한성(시간성)에 걸릴때 무한성인 야훼를 인식할 수 있으며, 이는 피조물 중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된 능력이라 하였다.

이해가 안간다면 "I am a wiki-neet"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I와 wiki-neet는 존재자이며,
am에 대응되는 것이 바로 '존재'다. 존재는, 그것을 통하여 존재자가 있게하는 그러한 완전
성이다. 그리고 서방교회에서는 바로 이 '존재'를 야훼라고 해석한다.


성적인 존재가 아님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
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靈)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어떠한 완전성, 곧 어머니의 완전성, 아버지와 남편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 가톨릭 교리서 370항

다른 종교 및 신화, 전설의 신들은 사람과 비슷한 존재로 묘사된다. 중근동 신화는 물론이고
 대표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와 북유럽 신화만 봐도 낯 뜨거운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물리적, 성적 정복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피조물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야훼는 다르다. 야훼는 우월한 인간이 아니다. 야훼에게는 약
점이 하나도 없다. 창세기는 야훼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 즉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즉 야훼는 형상이 사람의 모습일 뿐, 결코 성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
라서 야훼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양성 모두 야훼의 일부분을 표현한다.



성향

성부의 성향은 남성적 → 무성적, 감정적 → 무감정적으로 변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신약에서는 성부 대신 예수와 성령의 비중이 커보여서 그렇다.
 또한 떨기나무와 같은 상징적인 요소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예수의 세
례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던가, 예수가 거룩한 모
습으로 변했을때(루카 9장 참조)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목소리가 들
렸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형상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결국 성부도 제우스 같은 흰 머
리와 수염을 한 백인 남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 모습은 아마도 고대 로마의 신이었
던 제우스 등의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스테레오타입
도 많이 사라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와 '도그마'. 브루스 올마이
티에서는 흑인 배우인 모건 프리먼이 연기하였고, 도그마에서의 모습은 충격과 공포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사실 모습 또한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형용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하니, 흰 수염에 흰 옷 차림
의 노인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단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천지창조처럼 유명한 그림들
은 이러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으며 심지어 이런 그림들은 성당에 그려지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지전능한 초월한 존재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려낼 수도 없다는 것.
 비유하자면 ∞을 100으로 나누어 봤자(간단하게 표현해 봤자) 여전히 ∞이라는 식이다. 때문
에 유대교나 기독교,[52] 이슬람에서는 그림이나 석상 등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거나 다른 이교도 신으로 여긴다.

구약에서 나오는 야훼에 대한 내용은 제각각이다. 모세오경의 경우는 야훼에게 유일신적 요소
와, 다신교 신앙의 주신(主神)적 요소가 함께 묘사된다. 이를테면 창세기 천지창조 일화의 야
훼는 해와 달과 별과 괴물들마저도 창조한다. 이는 천체와 신을 동일시하고, 흔히 괴물들을
신의 대적자로 설정하는 고대 다신교 세계관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을 당시에, 유대인들도 각기 다른 신을 믿고 있었다고 묘사되며, 모세
 아래로 집결하여 이집트에서 나온 후부터 야훼 만을 믿기로 계약한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다신교의 주신적 요소가 나타난다. 예를들어 신명기 5장, 그리고 그 병행구절인 출애굽기 20
장에서는 야훼는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느님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신명기 7장에
서는 이방신의 제단은 허물어야 한다고 묘사된다. 이런 점에서는 확실히 유일신적 요소와 주
신적 요소가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53]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적어도 모세오경의 뼈대가 되는 텍스트가 작성되는 시기에는,[54] 유
일신적 요소와 주신적 요소가 병존된 것으로 보인다.[55]

또한 초창기 야훼는 매우 투쟁적이고 잔인한 신으로 묘사된다. 유대인과의 계약 때문에 유대
인과 대적하는 다른 민족들-갓난 아기까지-를 학살하고, 계약을 어긴 유대인에게도 엄벌을 내
리고 있다. 그렇게 구약 성경에서 죽인 사람만 숫자로 추산할 수 있는 것만[56] 다 따지면 대
략 200만명이 넘어간다[57]. 사탄은 고작 9명인데. 그것도 야훼가 명령해서 죽인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또한 성경 여기 저기를 봐도 야훼 자신이 악신이나 거짓말 하는 영을 부리거나,다
윗에게 인구 조사를 명할 마음을 넣은 것이 야훼였다는 기록과 사탄이었다는 기록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야훼'


--------[보충. 성경구약의 비윤리성 논란]



1. 개요[편집]

기독교의 신은 잔인하고 복수심이 많으며 변덕스럽고 불공평한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다.
- 토마스 제퍼슨

잔인한 야훼에 대한 믿음은 잔인한 사람을 만듭니다.
- 토마스 페인

내가 사람들이 사용하는 논리의 방식대로 말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의롭지 못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더욱 밝히 드러날 경우,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
시는 하느님을 의롭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 사도 바울


2.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

다음은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야훼의 모습들 중 일부의 몇 가지 구절들이다.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어라.
(민수기 31장 18절, 공동번역성서)

그러나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 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신명기 20:16~17, 공동번역성서)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사무엘기 상 15:1-3, 공동번역성서)

백성들은 고함을 지르고 나팔 소리는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가 울리자 백성은 "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은 일제히 성으로 곧장 쳐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여호수아 6장 20~21절, 공동번역성서)

어떤 성에 접근하여 치고자 할 때에는 먼저 화평하자고 외쳐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하기로 하고 성문을 열거든 너희는 안에 있는
 백성을 모두 노무자로 삼아 부려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할 생각이
 없어서 싸움을 걸거든 너희는 그 성을 포위 공격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붙이실 터이니,
거기에 있는 남자를 모두 칼로 쳐죽여라.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과 그 밖에 그 성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차지하여도 된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원수들에게서 빼앗아 주시는 전리품을 너희는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신명기 20장 10절~14절)

자기 남종이나 여종을 때려 당장에 숨지게 한 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 종이 하루나 이틀만 더 살아 있어도 벌을 면한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1장 20~21절, 공동번역성서)

여자와 한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
어야 마땅하다. (레위기 20:13, 공동번역성서)

사악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고린토1서 6장 9~10절, 공동번역성서)




4.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견해

리처드 도킨스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이런 모습들에 대해 그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전략)... <구약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
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
고 심술궂은 난폭자...(후략)


















4.1.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박

사실 도킨스가 지적한 이같은 문제 때문에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구약을 폐기하고 신약 만을
 정경으로 쓰자는 주장이 나온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문제는 구약성경이 당시 고대인
들의 야훼를 바라보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가톨릭의 관점
에서 보자면 이런식의 학살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기 보다는, '신성한 계약'에 대한 후대
 유대인들의 '이론적 설명'이다 즉 '계약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고고학적으로 보면
역사적 신빙성도 의심되는(...) 것에 너무 충격먹을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반
박은 야훼의 성향에 대한 해명은 될 지 몰라도 야훼의 존재 여부에 대한 신빙성은 오히려 떨
어뜨린다. 쉽게 말해 구약이 고대인들의 시각에서 쓰여졌음을 감안해야 한다면, 그들이 이해
하지 못하는 자연현상을 보고 신으로 숭배하기 쉬운 고대인들이었음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다. 자세한 것은 예리코의 전투 항목을 참조할 것.


5.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근본주의 신학의 교리적 견해

야훼에 대한 정통주의자들의 설명은 보편적인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인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수가 사랑을 강조한 탓에('하나님은 사랑이시라'로 대표되는 가르침)
기독교인들의 야훼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매우 인자한 할아버지와 흡사하지만 성경이 일관
적으로 서술하는 야훼는 엄청나게 무서운 신이다.
기본적으로 야훼의 심판은 비교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무자비하다. 어린아이나 약자라고
봐주는 것이 없으며, 단 한 번의 죄를 저지른다면 이전까지 일관적으로 실천했던 선행들에
대한 정상참작 따위는 없다. 그리고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드는 나쁜 생각만으로도 실제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과 동일하게 간주한다.
이것은 야훼가 인간과 달리 완전하게 공의롭기 때문인데 이 야훼의 공의는 완벽한 탓에 털
끝만큼의 죄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털어서 먼지 한 톨이라도 나오는 사람은 영원한
불지옥을 면할 수 없다.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야훼의 행동들은 모두 이
러한 야훼의 속성에서 나오는 '심판'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따라나오게 된다. 첫째, 이런 야훼의 무자비한 심판의
 칼날 앞에서 어떤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온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예수 외에는 없다.

둘째, 그렇게나 완벽하게 공의로운 야훼가 존재한다면 왜 죄를 짓고 멀쩡하게 사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이 세상에 어떻게 죄나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야훼가 인간의 상
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내심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심판을 시작하면 인간의 눈에는 야만스럽게
 보일정도로 무자비한 야훼이지만 그 심판을 웬만하면 참는다. 완벽하게 공의로운 존재인 야
훼가 인간의 죄를 본다면 얼마나 심기에 거슬리겠는가?
하지만 야훼는 인간들은 발휘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끓어오르는 의분을 '거의' 무한하게 참고
 있는 것이다.

셋째, 아무리 공의롭다지만 이렇게 무자비한 야훼라면 예수가 야훼를 사랑의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야훼의 바로 이 무시무시한 공의 위에서 기독교의 빛나는 대속 교리가
 탄생한다. 지금까지 보여줘온 야훼의 모습때문에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야훼는 인간을
 사랑한다. 너무나 사랑해서 영원히 자신과 함께하길 원한다. 어느정도냐면 이 인간들이 야훼
 자신이 지닌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기 원할 정도로.그런 분이 청소한답시고 홍수 일으켜서
 일대를 싸그리 없애버린다는 게 참 그렇지만...
그러나 털어서 먼지하나도 안나는 공의를 원하는 야훼의 완전함과 매 순간 쉴새 없이 죄를 짓
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래적 부패성 덕택에 야훼의 의지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야훼는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방법을 인간과 세상을 만들기 이전에 계획해 놓았다.

그것은 삼위의 야훼 가운데 성자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저질렀던, 또 앞으로
저지를 모든 죄악에 대한 야훼의 진노의 심판을 모두 대신해서 치루는 방법이다. 그래서 성자
가 야훼의 심판을 받기 이전에 태어난 인간들은 성자가 대신 받게될 심판을 상징하는 순결한
동물을 처형하는 모형을 통해 성자의 대속을 받았으며 성자가 야훼의 심판을 받은 이후에 태
어난 인간들은 이 성자의 대속 사건을 믿음으로써 대속을 받는다. 처형모형은 특정 집단속에
서만 계승될 수 있기 때문에 육체적 혈통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성자의 대속 이후에는 믿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육체적 혈통의 제약을 벗어나게 된다. 이 믿음 이라는게 정신적?추상적?인
 거라서 하나의 제약이 추가되는데 바로 이 대속에 대한 믿음은 야훼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대속사건이 믿어지지 않는 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지 말자.

당신은 단지 야훼의 선택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8]이런 이유로 대속사건이 안믿어지는 것이
사실은 더 자연스럽고 내추럴한 거다. 믿어지는 사람들이 별난거 맞음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야훼로 부터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므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자신이 받은 야훼
로 부터 받은 사랑을 똑같이(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에 참예시키기 원하여 그
들의 죄를 성자에게 전가하고 처형을 집행한 야훼처럼 이웃의 죄를 자신이 지고 처형을 받는
 사랑을 베푸는 것) 실천할 의무가 생기는 거고.

이 야훼의 무차별적인 공의는 영원불변의 속성이다. 구약의 야훼가 유대인들에게 명령한 대학
살이 피학살자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야훼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말의 인정도
 두지 않았다.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할 때 어린아이나 노약자라는 인도적인 이유로
유황불의 재앙을 전혀 피할 수 없었듯이 어린이나 노약자라고 칼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다. 이 심판의 개념은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현대의 정통주의 기독교에서는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구약의 야훼와 신약의 야훼사이에 간격이 있어 보이는 것은 신약시대
 이후로는 야훼가 심판을 역사의 종말 이후로 연기했기 떄문이다.


5.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 및 진보적 개신교인들의 반박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타 종교를 무조건 비방하고 적대시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기독교 전체의
 입장은 아니다. 당장 최대의 기독교인 가톨릭만 해도 이러한 관점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리
고 개신교에서도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관점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유일신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시도로 해석
될 수 있겠으나, 이를 위해 타 종교에 대해 무조건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태도는 결코 신학적
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들은 이는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광신적 믿음에 입각한 행위는 같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비판의 대상인 것은 물론이고, 비기독인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 교리와 규율은 시대에 따라서 달려져왔고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니라 신약 이후의 시대다. 즉, 예수의 죽음이 있었던 기원후이며 지금의 기독교
에게 있어서 그 핵심적인 교리는 무한한 사랑과 포용, 용서, 자비인 것이다.
2015년 기준,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어떤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선한 의지를 갖고 하느님을 찾
는데 내가 어찌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입장을 대변했다. 하물며 다
른 종교를 박해하고 그들의 신전을 밟아 부순다? 예수의 죽음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원죄가 용서받은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그저 예수의 뜻대로 사랑을 받기보단 베풀
고 배척하기 보단 포용하는 것 뿐이다.


6.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일부 진보신학 및 진보적 복음주의 신학의 교리적 견해

1. 고난받던 히브리인의 개념을 특정한 민족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떠돌이 유목민이던 가난하
고 힘없고 박해받던 사회계층이다. 즉, 야훼는 이런 가난하고 힘없고 박해받던 사회 계층
의 구원자, 해방자이다.

야훼의 이러한 면모에 대해 반감을 가진 비종교인들은 예리코 성의 젖먹이 아기까지 다 죽이
라는 야훼의 명령에 대하여 젖먹이 아기도 힘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을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하고 힘 없다는 뜻은 일종의 계급적 개념으로써 착취당하고 핍박받는 민중들을 뜻
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에 대하여 잔인하고 살벌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복 전쟁을
수행한 것은 낡은 가죽부대를 터트리기 위한 사회 운동이다. -여기서 파파 스탈린 혹은 마오
따꺼의 향기가 느껴진다면 지는겁니다.

구약 율법서를 보면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경제적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라는 내용이
 많이 나와 있다. 그냥 자발적으로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제도화하여 말이다. 십일조
를 거둬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라든지, 농산물을 수확할
때 조금씩 남겨 두어서 누구든지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하라든지 하라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예 50년마다 모든 사람에게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토지 가치의
 공유와 생산 수단의 공평한 분배를 도모하고자 한 희년법과 같이 급진적인 제도까지 언급되어
 있다. 또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회가 본격 국가 막장 테크를 탈 때 권력자와 부자들의 핍
박과 착취 행위를 비판하면서 특별히 이러한 사회적 약자 보호, 경제적 정의 실현과 관련된 율
법을 제대로 지키라고, 그러지 않으면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부르짖고
있기도 하다.대표적인 인물이 아모스, 이사야, 미카, 예레미야, 에제키엘.

2. 오직 야훼뿐(Mono Yawhism)이란 그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다른 종교(우상)과 대결이라는 시
각보다는 신격화된 인간의 지배에 대한 절대 부정이다.

또한 가나안의 사회는 윗동네 막장 왕국의 주체교를 생각하면 되며, 당시 가나안에서 섬기던
이방 신들은 신격화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해 주는 장치였다. 가나안의 신들은 지배 계급의
옹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 없는 민중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사회 구조,
체제를 '신의 뜻이다!' 라고 선포함으로써 민중들이 찍소리 못 하고 이런 핍박과 착취 체제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체제를 뒤집어 엎고, 모든 사람이 야훼 앞에서 평등하며, 소중하고 존엄하게 대접받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에게 내린 야훼의 명령이다.

3. 히브리어 샬롬(shalom)의 평화를 싸움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곧 정의를 무너뜨리는 세력과 적극적으로 싸우면서 찾는 역동적인 상태다. 여기서 '평화' 라
는 것은 단순히 무력 충돌과 살육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정의가
구현되어 모든 사람이 야훼 앞에서 평등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상태를 뜻한다. 히브리의 평화
개념은 반드시 정의를 동반한다. 정의의 기초 위에 평화가 설 수 있다는 이러한 사상은 현대
가톨릭에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즉 민중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체제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무력 충돌이 없고 평온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평화로운 것이 아니며, 그런
불의한 체제가 뒤집어지고 정의로운 체제가 들어서야 그것이 진정한 평화다.

가령 출애굽 사건의 경우 단순히 야훼를 믿는 민족이 우상을 숭배하던 이집트인들을 물리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이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히브리인들을 압제자인 이집트인들에게
서 정의의 힘으로 해방시키는 역사인 것이다. 즉 민족과 민족의 대결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
는 자의 편에서 서는 신의 역사인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이런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엎고 공평과 정의(사무엘기 하권 8장 15절)의
 기초 위에 생명과 평화(로마서 8장 6절)가 구현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야 한다. 구약에 나오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기에 잔인하고 살벌해 보이는 정복 전쟁은 사실 이러한 사회, 정치적 변혁 운
동의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신들은 민족 신의 개념이어서, (모압인이었지만 야훼 신앙을 받아들이고 보아즈와 결혼한)
룻과 같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민족들이 야훼를 믿게 된 경우는 많지 않았으므로 히브리 공
동체를 통해 구현되어야 할 야훼의 '공평과 정의에 입각한 생명과 평화의 대안적 세계질서'가 위
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아예 아무도 살려 두지 말고 다 죽여 버리라는 다소
극단적이고 살벌한 명령을 야훼가 내리는 것이다.



6.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의 학문적 반박

물론 위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진보주의적 개신교인들의 주장이다. 애초에 야훼는 자신이 선택한
히브리 민족만을 차별적으로 우대했다.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십계명조차, 사실은 다른 유대인
을 죽이지 말라는 집단 내의 도덕일 뿐이다.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가나안이 불의한 사회체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주
장을 뒷받침 할 만한 역사적 사료는 전무하므로, 이러한 아전인수격 주장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역사적 사료가 전무하다는 것은, 성경을 제외하고 당대 가나안의 사회체제를 기록한 역사
서가 없다는 뜻이며, 성경은 종교적 경전이지 역사서가 아니므로[18], 가나안의 사회체제가 불의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말이다.

진보측 개신교인들이나 김회권 교수의 주장대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타민족 학살 및 유아
학살이,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 엎고 새로운 세상, 곧 대안적 세계질서를 세우라는 명령으로 해석
을 한다고 해도 유아를 학살하는 행위는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으며, 포장될 수도 없는 일이라
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더군다나 모세오경에 나오는, 유아는 학살하고 죽이면서 처녀들은 전리
품으로 살려서 끌고 가는 행위는 도무지 합리화할 길이 없다. "너희를 위해서"라고 했으므로 더
더욱 빼박캔트이다.

개신교인들이 예로 드는 구약 율법서의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경제적 공평과 정의를 실
현하라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내 집단 도덕으로서, 히브리 사회 내에서 같은 히브리인들을 배려하
는 것에 불과했다. 구약 경전에서 히브리 족이 가나안의 타민족과 온건하게 공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이 히브리의 침략 이후 도륙되고 진멸되었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보이는, 히브리의 타민족의 신앙을 모독하는 부분은 설명이 불가하다.
이를테면 바알 신전을 화장실로 만든다거나… 또한 이후 집필된 열왕기에는 엘리야가 바알의 예
언자들의 제사를 조롱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바알의 신관들이 불을 내려달라고 제사를 지내며 춤
을 추고 노래 부르다가 급기야 자해 행위까지 해도 '아무 일도 없다'면서 조롱하는 장면이다.

일부 개신교인들은 가나안의 토착 종교가 인신공양을 요구했으며, 따라서 불의한 것이라고 주장
하는데, 앞서도 서술했지만 가나안의 토착 종교가 그 모양이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없으므로, 해
당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오히려 구약성경을 들여다 보면,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입
다의 예를 제외하더라도, 야훼가 인신공양을 받았다는 구절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그 예들 중에 하나로 다음을 보자.

그들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는 모조리 죽였다. 이렇게 군사만
무찔러 죽였을 뿐 아니라 미디안의 왕들도 죽였는데 에위, 레켐, 수르, 후르, 레바 등 다섯 미
디안 왕을 죽였고, 브올의 아들 발람도 칼로 쳐죽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여인들과 아이
들을 사로잡고 가축과 양떼 등 재산을 모두 약탈하고는, 그들이 살던 촌락들과 천막촌들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들은 사람이고 짐승이고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여 전리품으로 삼았다. 그들은
포로와 노략질한 전리품을 예리고 근처 요르단강가 모압 평야에 있는 모세와 엘르아잘 사제와
이스라엘 백성 회중의 진지로 가져왔다. (민수기 31장 7~12절, 공동번역성서)

민수기를 보면 야훼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갚으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여 미디안을 쳐서
학살을 하고 약탈품과 포로들을 끌고 오는 대목이다.

계속 살펴보자.

모세와 엘르아잘 사제와 회중의 대표들은 그들을 맞으러 진지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모세는 싸움
터에서 돌아오는 군대 지휘관들, 천인대장, 백인대장들을 보고 화가 나서 야단쳤다. "어찌하여
이렇게 여자들을 모두 살려주었느냐?? 브올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것들이 바로 발람의 말
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꾀지 않았느냐?? 야훼를 배신하게 한 것들이 바로 이것들이 아니냐??
야훼의 회중에 염병이 내린 것도 이것들 때문이 아니냐??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
하여 살려두어라. (민수기 31장 13~18절, 공동번역성서)

전투가 끝나서 히브리가 승리하여 포로들과 전리품을 끌고 개선하는데, 모세가 어째서 여자들을
살려주었느냐면서 아이들 중에서 남자와 비처녀를 다 죽이고 처녀들만 살려주라고 화를 내면 장면
이다. 그런데 처녀인지 아닌지는 대체 어떻게 구별한 거냐여성할례를 참조하라.

그리고 전리품을 분배하는 장면인 다음을 보면,

모세와 사제 엘르아잘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 군대가 약탈해 온 전리품 가운데
 살아 남은 것은 양이 67,5000마리, 소가 72,000마리, 나귀가 61,000마리요, 사람은 32,000명이었
는데, 이들은 모두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이었다. 그 절반은 싸우러 나갔던 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는데, 양이 337,500마리였다. 그 양떼 가운데서 야훼께 드린 헌납품은 675마리였다. 소는
36,000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야훼께 드린 헌납품은 72마리였다. 나귀는 30,500마리였는데 그 가
운데서 야훼께 드린 헌납품은 61마리였다. 사람은 16,000명인데, 그 가운데서 야훼께 헌납된 사람은
 32명이었다. (민수기 31장 31~40절, 공동번역성서)

보다시피 야훼에게 헌납된 사람이 32명이었다고 나온다. 31절을 보면 이것이 야훼가 모세에게 명령
한 대로 행한 것임을 알 수 있으므로, 야훼가 원하지 않는데 모세가 독단적으로 행했다고 볼 수 없
으며, 타 민족의 여자들과 아이들마저도 비처녀는 싹 잡아죽이는 전황으로 미루어 보아 저 32명을
살려서 성전에서 노역을 시켰다는 변명도 불가능하다. 만약 저 32명의 미디안 사람들이 인신공
양된 것이 아니라면 다르게 처리되었다는 구절이라도 있어야 정상인데, 그런 구절은 전혀 없고 바
로 앞에는 똑같이 야훼에게 공물로 바쳐진 짐승들의 목록이 나와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야훼의
 뜻으로 자행된 인신공양인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인신공양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인식의 변화가 반영되어, 그 이전까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과 같은 말로 인신공양에 대한 부정적 구절이 등장하긴 한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 그런 식으로 해 드리면 안 된다. 그들이 저희 신들에게 해 드리는 일은 한결같이
 야훼께서 싫어하시고 역겨워하시는 일이다. 그들은 심지어 제 아들 딸마저 불에 살라 자기네 신들에
게 바친다. (신명기 12장 31절, 공동번역성서)

그러나 후기에 구약 성경이 집필되고 인신공양의 풍습이 다른 의식으로 변하면서, 여기에 대한 히브
리인들의 인식이 달라지자 야훼도 자신이 인신공양을 명령했음을 인정하며 변명을 시도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여러 민족 가운데 흐트러뜨려 여러 나라에 쫓아보내겠다고 광야에서 또 한 번 손
을 들어 맹세한 것은, 그들이 조상들이 위하던 우상들에 눈이 홀려 내가 세워준 법대로 살지 않았고,
내가 정해 준 규정을 거절하였으며 내가 정해 준 안식일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좋지 못한
 규정도 정해 주었다. 그대로 하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법도 세워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예물을 우상에게 바쳤다. 제 속에서 나온 첫 새끼까지 바쳤다. 내가 그들을 이런 것으로 부정하게 만들
어 벌을 내린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야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에제키엘 20장 23~26절, 공동번역성서)

그 이전까지 인신공양을 명한 야훼가 이제는 그 명령이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한 모양인데, 자기의 인신
공양 명령이 옳지 않은 율법이었음을 자폭고백하면서도 그 이유가 너무나 처참하다. 히브리족이 자기의
 규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율례를 멸시하며 자기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이며, 따라서 자신이 야훼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러한 인신공양이란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야훼가 스
스로 인신공양을 명령했다고 자백 하는 구절까지 있으니 도저히 변명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개신교 목회자들이 주로 참고하는 주석 중 하나인 존 위클리프의 주석을 보면, 해당 구절을 다음
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족들이 몰렉을 숭배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 우상 숭배 의식은 아이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이미 가나안 땅에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율법으로 이 의식을 금지하셨다(레위기 18:21;2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족들은 가나
안 땅에 입성하기 전 광야 40년 동안에도 이 우상을 숭배했고(행 7:43), 후에 솔로몬 왕 시대
(열왕기상 11:5, 7), 아하스 왕(역대기하 28:3) 및 므낫세 왕(열왕기하 21:6) 시대에도 섬겼다.

분명히 에제키엘서의 해당 구절을 보면 야훼 자신이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인신공양을 드리게끔 명령했다고
나오는데, 개신교인들의 성경 주석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고 엉뚱하게도 몰렉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런 해석은 야훼가 악행을 시킨 것이 아니라 그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는 구절로 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해도, 야훼의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은 없이 그냥 몰렉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넘어간 것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하며, 앞에서 설명한 사탄의 악행도 결국 전지전능
한 신의 책임일 수 밖에 없는 문제에 다시 봉착할 뿐이다. 또 다른 주석에도 위에서 언급한 민수기의
구절에 대해서도 언급을 회피하며, 위에도 언급한, 민수기 이후 성경 집필 과정에서 인신공양에 대한 히
브리인들의 인식이 변화한 이후 기술된 인신공양에 대한 부정적인 구절들만을 언급하고 다시 우상 숭배
 이야기로 넘어가 버린다.

해당 구절에 대해서 존 위클리프 뿐 아니라 메튜 헨리, 오리게네스, 페트릭, 다이어, 헹스턴버그 등의
개신교인들이 참조하는 다른 주석들도 모두 이 모양이다(…). 야훼 스스로가 인신공양을 드리게끔 명령
했다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모두 회피할 뿐이다. 초등학교 수준의 문장 이해력만 겸비하고 해당 구절을
읽어 보더라도 이 구절은 야훼가 인신공양을 명령했다는 내용을 기술한 것이라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또한 진보진영 개신교인들은 히브리가 사회적 약자였고, 야훼는 사회적 약자인 히브리를 도왔다고 주장하
는데, 히브리가 가나안을 침공하여 예리코를 비롯하여 여러 타 민족을 진멸시킨 것을 볼 때, 히브리가
과연 사회적 약자였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히브리인들이 야훼의 명령 아래 벌인 타 민족 학살과 유아 살해에 대해, 우리 한국의
 독립군이나 아일랜드의 IRA를 생각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독립군이나 IRA는
힘없는 젖먹이 유아와 노약자를 학살하고 처녀들을 전리품으로 취하지 않았다(…).

또한 야훼가 세계 평화와 정의를 수립하려고 타 민족의 젖먹이 아기까지 살해했다는 주장도 동의하기 어
렵다. 처녀들은 살려서 전리품으로 끌고가는 마당에 젖먹이 갓난아기들을 굳이나 칼로 쑤셔 죽이는 방법
으로 '생명과 평화의 세계 질서'를 수립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뭐가 얼어죽을 생명과 평화냐

다시 말하지만, 어떠한 포장으로도 유아 학살과 처녀들을 전리품으로 끌고 간 행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여 합리화하는 것은 궤변일 뿐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그 부모의 죄와는 상관없다. 이는 야훼 스스로
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자식의 잘못 때문에 아비를 죽일 수 없고, 아비의 잘못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다. 죽을 사람은 죄 지
은 바로 그 사람이다. (신명기 24장 16절, 공동번역성서)

앞서도 서술했으나 가나안과 예리코인들이 그 정도로 타락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
다는 것을 상기할 때, 개신교인들의 아전인수격 억지 주장에 가깝다. 백번 양보해서 그 주장을 받아들인
다 하더라도, 전지전능하다는 야훼가 이런 방법밖에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인간들마저 교육이나 제도 정비를 통해 교화하는 방법을 충분히 생각해냈을 법한데 말이다. 게다가 무엇보
다도, 어떤 변명을 덧붙이더라도 이러한 학살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학살자들
도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온갖 변명과 핑계, 명분을 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것.

젖먹이 아기를 죽임으로써 불의한 사회 체제를 개혁한다는 말도 동의하기 어렵다. 죄 없는 젖먹이 아기를
 죽이는 불의한 짓을 통해 불의한 체제를 개혁한다니? 어떻게 보면 우생학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게다가 전지전능하니 일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터, 갓난아이를 죽이고 미래에 태어날 아이
들의 가능성마저 미리 끊어버릴 정도라면 처음부터 가나안과 예리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했으면 되었
을 게 아닌가? 시간이라는 4번째 차원의 축에서 조율까지 가능하다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타락 때문에 아
이들을 미리미리 죽이면서, 세상에 넘쳐나는 온갖 범죄자들은 미리미리 처단하지 않는 이유가 참으로 궁금
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젖도 못 뗀 젖먹이 아기들은 죽이면서 처녀들은 살려서 전리품으로 끌고 간 이유
에 대해서도 전혀 제대로 된 답변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저 민족은 악의 민족이니까 씨를 뿌리뽑아 멸절해야한다"라는 논리가 어떤 종자들에 의한 인종
청소와 크게다를바 없는 주장이며,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 상기해보면 금방 성경의 논리는 말도 안되는 헛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야훼의 인종청소


7.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의견을 피력했다.

하느님의 분노는 우리가 하느님 자신이신 사랑에 대해 어긋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나 사는 사람, 선을 벗어나 사는 사람은 그럼으로써 그 분노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은 부정적인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분노는 지배욕에
찬 독재자가 매를 드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내적인 논리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 곧 우리를 지
탱해주는 사랑에서 벗어나면 그야말로 공허와 어둠 속으로 빠져 버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는 이른바 사랑의 영역에 존재하지 못하고, 분노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에 머무르게 되
는 것이죠. 따라서 하느님의 형벌은 하느님께서 벌금을 부과하시고 사람에게 무엇인가 제재를 가하시는 데
서 재미를 느낀다는 의미의 형벌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형벌은 우리가 실제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노선으로 들어서고 올바른 삶을 벗어날 경우에 느끼게 되는 당연한 결과들의 표현입니다.

다만 오해해선 안되는게, 교황의 이 발언은 구약에 묘사된 야훼의 행위 그 자체가 옳다기 보다는, '성경이
 유기적 영감에 의해 쓰였다는 전제하에' 과연 구약에서 나타난 이런 묘사들이 궁극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전달하는 메세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즉 구약에 나타는 그런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
보다는, 이것이 고대인들이 적은 신학적인 설명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이러한 서술의 목적을 설명한 것이
다. 이렇게 될 경우, '야훼는 악한 신인가?'라는 논란에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다만 성서무오설
을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논리라는 한계점이 있다.



7.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의 반박

교황의 답변은, 그리스도교 측의 답변 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많은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답변이 된다.
허나 이 경우 '해당 행위'에 대해서는 답변할 수 있지만,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종파들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어차피 그런 종파들이 교황말 듣는 것도 아니지만. 또한 '유기적 영감설'
을 근거로 '고대인의 신학적 해석'이라고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자칫 '설정 뒤집기'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다.

이걸 가지고 일부 종교인들은 그러나 이 유기적 영감설을 부정하면 비종교인들은 성서무오설에 대한 반박의
 근거를 잃게 된다느니, 성서무오설을 반박할 때는 성서가 모순과 오류가 없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야
훼의 모습을 비판할 때는 성경의 구절 하나 하나를 들고 와 반박한다면서 자가당착이라느니 하며 반발하지
만, 이는 억지에 가깝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서무오설을 신봉하는 보수적 입장의 사람들과, 성서무오설은 부정하지만 성서에 여
전히 가치가 있고, 야훼는 실존한다고 보는 다소 진보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으며,
각기 다른 두 입장을 가진 두 부류의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반박해야 할 때 각기 다른 두 개의 비판을 가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1. 성서무오설을 반박할 때에는 성서 그 자체가 현대의 보편적 윤리와 동
떨어진 전근대적 윤리관을 지향하며, 비과학적이고 시대 착오적인 내용들이 즐비한 시대적 한계가 분명한
 경전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며, 2. 성서무오설을 부정하지만 여전히 성서가 가치가 있으며 야훼는 실
존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할 때에는 그러한 시대적 한계를 가진 성경이 다른 종교의 경전과 비교하여
 다를 바가 없으며, 따라서 비슈누, 시바, 오딘, 토르, 제우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과 같은 온갖
형이상학적 존재 가운데 야훼 만이 실존한다는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또한 유기적 영감설은 단순히 성서가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결국 야훼가 실존하여 성서 필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신학적 견해이다. 애초에 유기적 영
감설이니, 축자 영감설이니 하는 기독교 신학에서의 영감(靈感)라는 말 자체가 영(靈)에 의한 감응(感)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서무오설을 부정하는 비신자들은 야훼 같은 건 실존하지도 않았고, 야훼이건 성경이건
 그 시절 유대인들의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전혀 유기적 영감설이 아니다.
따라서 유기적 영감설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서무오설을 부정하는 근거를 잃는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고로 위에서 서술한 종교인들의 반발들은 사실상 억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 단락명은 분명히 비종교인들의 반박이다. 이전 버전에서는 이 항목에 기독교인들이 위와 같
은 자신들의 입장을 억지스럽게 써놓았는데, 최소한 단락명은 봐 가면서 반달을 저지르도록 하자. 성령이
충만해서 단락명도 눈에 안 들어오나 봅니다

또 다른 한 면으로 해석적인 영역에 있어서 가톨릭 측에서 말하는 궁극적 메시지라는 것이 사실 종단 측의
견강부회가 아닌가 하는 부분은 여전히 쟁점으로 남는다. 본 항목의 종교적 견해는 비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형적인 Ad Hoc 논리에 불과하다. 예컨대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면서 쇠의 산화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에 '플로지스톤은 음의 질량을 가진다'고 주장했던 과거의 학자들, 어느 날 외계인이 나타나 자
신들을 세계멸망에서 구해줄 것이라 믿었으나 정해진 날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우리의 신앙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고 태도를 바꾼 한 종교단체를 생각해보자. 절대선신을 무조건 존재한다고 확정해놓고 그에
 반대되는 사례를 지적받으면 '그건 ~하고 ~해서 결국엔 다 선한 일이다'라는 식으로 반론하는 것이 앞의
경우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설득력을 가지고 일리 있는 논증으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견해는
가톨릭 안에서 신자들의 믿음을 더 공고히 하는데는 쓰일 수 있는 논리이고 성경 역시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만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없는 사람들, 즉 비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성경은
수메르 신화, 이집트 신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 단군 신화와 동일선에서 보일 뿐이다.

물론 대전제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 어차피 종교라는 것은 믿는 것이지 증명
하는 것이 아니므로, 궁극적인 영역(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에 대한 대전제)에서는 논쟁이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다.


8. 구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비종교적/학문적 인식


그나마 이걸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고 현대인에게 주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해석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
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있으나, 이러한 서술을 한 인간 저자의 시대적 한계들 때문에 비신자들에게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효과가 있다.

또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와 편집자의 개성이 풍부하게 반영된 책이라고 주장
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비신자가 기독교를 믿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전혀 아니다. 애초에 사실상 이것은
개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저자의 인간적/시대적 한계에 가깝다. 이는 해당 구절들의 문제가 성경 저자 개
인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 아니라,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전근대적인 가치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서 근원하기 때문이다.

사실 유아를 학살하고 처녀를 전리품으로 삼아 끌고 가는 구절이 구약 성경에 있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타민족 학살 전쟁은 사실 고대 시대에 세계 어느 문명이든 있었기 때문인데, 이를 21세기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에 야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저러한 기록은 그냥 그 시대 사람들의 한
계일 뿐이다. 즉 그 당시 중동 히브리 족들에게는 타민족의 유아와 노약자를 학살하고 처녀를 전리품으로 끌
고 가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이며 선이었다는 이야기다.

밑에도 후술되어 있듯이, 바빌론 유수 및 페르시아의 영향 등, 히브리인들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변동에 따
라 야훼의 성향도 달라지는 것은, 야훼가 히브리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실존할
 확률이 0%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존재할 확률이라는게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제우스, 비슈누, 라,
미트라, 아후라 마즈다, 아마테라스, 대일여래, 미륵, 여와, 오딘이 존재할 확률과 동일하다는 것(...) 결국
 이 지극히 희박한 확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갈림길인데, '확률은 낮지만 참이라고
확신하고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실존할 확률이 동일하다면
 저 존재들 중에 유독 야훼만을 취사 선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적 관점을 배제하고 바라본다면, 야훼는 히브리인들이 상상해 낸 존재이며 야만적
이고 잔혹하게 보인다. 21세기 현대의 전 인류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구약 성경의 내용들도 실존할 확률이
제우스, 오딘과 동일한 야훼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냥 청동기 시절 히브리인들의 수준이 그 수준이었기 때문
인 것을 탓해야 하는데, 이 야훼를 실존한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내용이 어떻든 옳다고 합리화 하려고
 하니 위와 같은 복잡한 답변들이 나오는 것 뿐이다.

물론 현대 기독교의 진보적 종파들은 성서무오설을 부정하는데, 이들의 의하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유기적
으로 받은 저자가 개성[33]을 넣어서 집필한 것이므로 성경이 비신자가 보기엔 다른 신화책과 다를 바가 없어
도 적어도 기독교 적 관점에서는 내면에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의 논리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논
리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영감'을 믿는 기독교 안에서만 통용되는 논리이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논리이다.[34] 어차피 유기 영감으로 가지 않고, 축자 영감으로 가더라도 비신자에게는 성경이
다른 신화와 다르게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당장 기독교 종파 내부에서도 교파 별로 유기적 영감설에 대한 교리 및 주장이 다르다. 완전 축자 영감설
부터, 부분 축자 영감설, 그리고 받아쓰기설 및, 기계적 영감설, 성령 자동 축자 영감설, 성령 감동설 및 유기
적 영감설, 문학적 영감설까지 해당 문제와 관련된 주장과 교리가 한 둘이 아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내부적으로
 자기들끼리도 말이 통일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비신자들[35]에게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는 현대에는 모조리 유기적 영감을 지지하고, 성서무오설을 부정[36]하긴 하
지만, 상술한 4개의 기독교 종파는 한국에서 세력이 약하며, 한국에선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종파들이 대세라
는 것이다. 그나마 가톨릭의 경우는 한국인의 10% 정도를 신자수로 가지기는 했지만,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한
국인 개신교인들을 긁어모으면 가톨릭보다 훨씬 숫자가 많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봐도 전세계 3.5억명의 개
신교 신자 중에서 보수적 종파의 신자는 1억 9천 6백만으로, 개신교 내부의 진보적 종파의 신자 수보다 오히려
숫자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저러한 말들은 성령, 즉 유일 신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현대는 합리적이고 보편 타당한 것이 주를 이루는 사회이다. 당연히 '믿는' 것보다는, 합리적이고 증명된 것에
 무게가 실릴 수 밖에 없다. 종교인이고 비종교인이고 간에 이건 엄연한 21세기 현대의 객관적 현실이다.

물론 어차피 성경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교(구약은 유대교 포함)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논리로 읽으라고 적힌
 경전이고[37] 그렇기에 비신자들이 성경을 소설책 읽듯이 읽고 비판하는 것이 기분 나쁠수는 있다. 그러나 적
어도 성경에 적힌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여기에 서술된 유일신의 행적이 현대인들에게는 굉장히 회의적
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성경이 종교 안에서 종교의 눈으로 보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 저자들의
시대적 한계는 오늘날 비신자들에게 결코 좋게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극단적이고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비신자들은
 단지 소설책[38]을 소설책 읽는 방식으로 읽어서, 등장 인물인 야훼의 행적을 비판하는 것이긴 하다. 다만 이렇
게 야훼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존재라고 하면서 어째서 야훼의 유아 학살 등의 행위를 문제시 삼느냐는 종교인
들의 반론이 있을 수도 있으나, 허구라 하더라도 그러한 것을 합리화/옹호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라도 유아 학살을 자행했다면 그 인물을 미화/합리화 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읽고 비신자들은 소설책 읽듯이 읽게 되는데, 양측의 패러다임 안에서
는 각자의 의견이 맞는 것이 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종교인이 비종교인을 종교적 패러다임 안의 논리로 설득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종교인이 종교인을 무신론적 패러다임 안의 논리로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실 인류역
사상 종교인이 사라지거나 비종교인이 사라지지도 않는 이유도 이것 때문. 한마디로 서로간에 말이 안통하고 각자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자기들 말이 맞아서 논쟁이 평행선을 달린다(...)

많은 종교인들이 논리적으로 무신론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데,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39] 물론 그 반대 역
시도 불가능하다.[40] 그것이 가능했으면 '학문적 성향'을 지지하는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는 진작에 종교 위키 혹은
 반종교위키로 바뀌었을 것이다. 허나 전술했듯이 나무위키는 공식적으로 비(非)종교 위키이며, 규정상 세속적 관점
과 종교적 관점이 충돌할 경우, 세속적 관점을 위주로 쓰여지게 되어 있다.


9. 여담

상기 기술 내용에서는 "비종교인"이라는 하나의 틀로만 묶여있으나, 사실, 종교를 믿지 않거나 무신론을 견지하는
 사람들의 인식 또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교세를
갖고 있는 종교인 기독교 및 그 계보/파생 종교들의 유일신인 '야훼'에 대한 문서인 만큼 교인들이 서로 다른 입장
을 보다 중점적으로 서술한 것 뿐.

엄밀히 말해서, 상기 기술된 내용의 "비종교인"은 "비종교인"이라기 보다는 "反종교인"이라고 일컫는게 옳을 수도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무신론, 혹은 불가지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할지라도 믿음과 신
앙에 대한 이들의 이해 및 관용의 범위는 서로 많이 다르기 때문. 예컨대, 자신의 믿음을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하
기에 종교인들이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인물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만, 그 못지 않게 '비종
교인' 중에서도 도킨스류의 반종교-반기독교 정서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도킨스나 히친스 등 '그쪽 계통'의 반
종교주의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이성과 논리의 절대성을 너무나도 쉽게 설파하지만, 당장 현대 인문사상과 철학에
 들어오면 논리도, 이성도 결국 절대적이기 보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상대성이 있으며, 종교가 너무나도 쉽게 악
용되듯 마찬가지로 쉽사리 뒤틀리고 악용되기 쉬운 면모가 있음을 경계한다. "유대인학살과 이성중심주의
(logocentraicism)"라는 주제의 고민은 2차세계대전 직후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을 한 세대 넘도록 사로잡은 악몽
과도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현실의 모습과 인간심리의 작용이 논리에만 기반해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스타트렉의 벌
컨인들도 그렇게는 못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인간에 내재 된 감성, 비이성적 심리작용들을 나쁜 것
으로 간주하지도 않으며, 일상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이성의 중요성 못지 않게, 스트레스 해소와 심적 평안에 지
대한 영향을 미치는 비논리적 감성 및 믿음 등의 비이성적 요소의 중요성 또한 마찬가지라고 보고 있다. 결국 인간
의 정체성,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느 한 쪽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지, 원칙론적으로 이성
이 더 중요하거나 믿음이 더 중요하거나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런 측면에서, 신, 특히 '야훼'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과 옹호 그 자체를 비논리적인 어리석음으로 여기며 사회악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비종교인'이 있는 만큼이나, 무엇을 믿고 따르고 신앙하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이
며, 종교인들이 믿음에 따라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이 종교를 믿지 않는 스스로가 이성과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 만
큼이나 당연함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자세를 취하는 '비종교인'들도 많다. 물론, 이런 입장에서도 종교인들의 믿음이
구체적 실체를 지닌 사회적 악업으로서 법과 규칙을 무시하고, 그에 기반하여 타인을 억압하거나 타인의 자유를 침해
하려는 경우에는 '反종교인이 아닌 비종교인' 또한 가만히 있지 않는다. 다만, 종교인들의 성향과 믿음이 케바케이며,
어떤 비인간적인 하나의 단일원칙을 발견하여 그것을 근거로 '믿음'과 '믿는 사람들'이라는 인간 현상 자체를 근본적
으로 비판해서는 안 됨을 구분하는 것 뿐.

그런 차원에서 '비종교인' 또한 단일집단이 아니며, 상기 '비종교인들의 언행'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표성을 띈 자세나 논리는 아니다.


-발췌출처: 나무위키 '야웨/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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