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5.

[사랑예화] 나병환자들과 동거한 데미안 신부




 
[사랑예화]  나병환자들과 동거한 데미안 신부 
 
미국의 다미엔 신부는 하와이 모르카이 섬에서 일생을 나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분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이 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섬 주민들의 생활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신경이 침범된 나병환자들이 덩굴 풀의 뿌리를 원료로 만든 독한 술에 만취되
어 울분을 달래고, 정욕의 노예가 된 남녀가 어울려 순간적인 쾌락에 젖어 있
었다.
 
정부의 관리가 선창가에서 던져주는 음식에 파리 떼처럼 모여들어 서로 받아먹
으려고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지옥과도 같은 이 섬에 다미엔 신부는 저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해 상륙했던 것이다.

 
1873년 이 섬에 상륙한 다미엔 신부는 1889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늘을 원망하고 인간을 저주하면서 살아가는 나환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상처를 씻어 주고, 그 고름을 짜 주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다.
 
또한 그는 1,600개의 무덤을 파고 손수 1,000개의 관을 만들어 그들을 정중히 묻
었다. 그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랑의 헌신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나
병환자를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동거하여 44세에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짧은글 긴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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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자세히...

사제 다미안은 1840년 1월 4일 벨기에의 트레멜로 마을에 있는 베스테르 집안
에서 여섯째로 태어나 요셉(Joseph de Veuster)이라는 이름으로 세례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고 건장했기에, 부모는 그가 실업교육을 받아 집안의 기둥
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그는 성소를 꿈꾸었고 끈기 있는
 그의 지향은 결국 열매를 맺어 형이 먼저 입회한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
에 들어가 ‘다미안’이라는 수도명을 받게 됩니다. 

 해외선교가 주요 목적이었던 성심 수도회는 하와이 군도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63년 선교사로 선발된 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신학 공부 중이던 다미안은 형을 대신하여 하
와이로 가고자 했으나 수련장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몰래 프랑스에 
있는 수도원의 총원에 청원서를 냅니다. 그리고 그 청원이 수락되어 이듬해 
하와이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미안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했던 당시 그곳 사정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서구 질병에 항체를 갖고 있지 못하였던 하와이의 주민들이 티푸스, 콜레라, 매
독과 같은 병에 전염되어 1790년에 50만 명이었던 인구가 1865년에는 겨우 5만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고, 인구의 10~15%가 한센균(나균)에 감염될 정도였습니
다. 이에 공포에 사로잡힌 정부는 치유 불가능한 한센병 환자를 강제 이주시키
는 정책을 반포했습니다. 자녀, 연인, 부모에게서 강제로 격리된 환자들은 하와
이 군도 중앙에 위치한 몰로카이 섬의 북쪽 ‘칼라우파파’라고 불리는 오지, 즉
 삼면은 바다이고 육지와 연결된 남쪽은 600~900m의 벼랑으로 막혀 있는 춥고
 습한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약속했던 옷과 음식은 제공되지 않았고 그로 인하
여 40%의 환자가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지옥의 땅, 그곳이 바로 몰로카이 섬의 
‘칼라우파파’였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33세의 다미안 신부는 1873년 5월부터 
새로운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16년의 사목 생활 동안 다미안 신부는 사제이면서 동시에 경찰, 건축가, 
목수, 간호원, 농부, 농장 관리인, 변호사, 은행가, 수입상, 부동산 중개인, 
기업가, 무덤 파는 인부, 그리고 관 제작자로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타고난 목수였던 다미안 신부는 경당, 사제관, 학교, 
성당(필로메나 성당)뿐 아니라 집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지어주고, 손가
락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고름을 짜주고 싸매주었으며,  
스스럼없이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환자들을 친구로 대했습니다. 

환자들이 재배한 토란 요리와 그들이 피고름 나는 손으로 집어 주는 돼
지고기를 받아먹었으며, 사제관을 모든 환자들에게 개방하였고, 한 환
자를 요리사로 두기까지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
지 않아서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다 결
국 자신도 그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에 감염된 후에도 나환자들을 위하여 계속 일하
였습니다. 요양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
들을 돌보다가 1889년 4월 15일 성주간 월요일 8시에 선종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성 필로메나 교회 바로 옆, ‘칼라우파파’에서 첫 
밤을 지냈던 나무 아래에 묻혔습니다. 그 후 벨기에 정부가 하와이로
부터 허가를 받아 고향 땅으로 모셔, 현재는 벨기에 루뱅의 성 요셉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의 해로 선포된 2009년 
10월 11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하여 성인 반
열에 올랐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3월호]

-발췌출처 : http://www.mariasarang.net/saint_bbs/bbs_view.asp?index=bbs_saint&page=6&no=3034

[하와이주청사의 성다미안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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