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

[종교심리] 부두데스와 노시보 효과 - voodoo death 죽음의 신앙





[종교심리] 부두데스와 노시보 효과 - voodoo death 죽음의 신앙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

호주의 원주민들은 마법사의 저주를 받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뒤에 숨을 거둔다.
1942년 미국의 생리학자  월터 캐넌은  이러한 현상을 "부두 죽음"(Voodoo Death)라고
명명했다.

부두는 서인도 제도에 있는 아이티의 원시종교이다. 부두교의 주술사로부터 저주를 받
고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것으로 알려 졌다.





영국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09. 5.16) 커버스토리에 따르면 이와 유사한 사례가 선진
국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단지 마법사의 주문이 의사의 짧은 몇마디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많은 환자들은 의사로부터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듣게되면"절망에 빠져 삶의
의지를 포기하기 쉽다는 것이다.

의사의 말이 환자에게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대를 유발하여 아무런 의학적 이유 없이 환
자에게 해를 입히는 현상을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한다.

1961년 "나는 상처를 입을것이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로 만들어진 "노시보"는 역시 라
틴어에서 유래한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와 정반대가 되는 개념이다.
"플라시보" 즉 위약(僞藥)의 투여에 의한 심리효과로 환자의 용태가 실제로 좋아지는 현
상을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는데 이효과는 인체가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노시보" 효과 역시 "플라시보" 효과 처름 임상 실험으로 확인 되었다.

게다가 노시보 효과는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 영국 헐대 심리학자 어빙 커시는 수 세기
동안 원인을 확인할 수 없는 증상이 집단에 퍼진 사건, 곧 '집단 심인성 질환(mass
 psychogenic illness)'이라고 알려진 현상도 노시보 효과의 일종이라고 설명한다. 1998년
 11월 미국 고등학교의 한 교사가 휘발유 비슷한 냄새를 맡고 두통, 호흡장애, 현기증을
 호소했다. 학교는 문을 닫았으나 교사와 학생 100여명이 비슷한 증상으로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하지만 질환의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단지 친구가 아픈 것을 본 뒤에 그런 증
상이 나타났다는 결론을 얻었을 뿐이다.

어빙 커시는 대학생들에게 맑은 공기를 흡입시킨 뒤에 두통이나 메스꺼움을 일으키는 독
소가 함유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실험 대상자의 절반에게는 한 여자가 공기를 마시고
그런 증상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자가 고통을 느끼는 장면을 목격한 실험 대
상자일수록 유사한 증상을 나타냈다. 집단 심인성 질환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노시보" 효과의 실체가 밝혀짐에 따라 의사들은 하얀 옷으로 갈아 입은 마법사가 되지 않
으려면 환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언행을 삼가도록 노력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
력을 갖게 된다.

(과학문화연구소장 이인식 기사중 부분 발췌)  
-출처: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rubyhong&folder=6&list_id=11372372

------------





칼 세이건은 “믿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설득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은 증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간절한 필요에 기초하기 때문”이
라고 말했다.
 스티븐 호킹은 한발 더 나갔다. 그는 “천국은 없다. 사후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
는 이들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다. 사람들은 열망하지만 결국은 성취불가능한
윤리적 질서나 생활 방식의 근거로서 신을 찾는다”고 이죽댔다. 카를 마르크스는
 더욱 냉소적이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뉘앙스에는 차이가 있지만, 종교에 대한 이 세 사람의 태도는 유사성을 가진다.
종교 혹은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신의 뇌>를 함께 쓴 인류학자 라이오넬 타이거와 생의학자 마이클 맥과이어도
이 같은 시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세이건, 호킹, 마르크스의 태도가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이었던 것과 달리 타이거와 맥과이어는 긍정적이다.
그들은 인간의 뇌는 진화적인 필요에 의해 신을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은
뇌를 위안(brainsoothing)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종교적 믿음을 “옳은 지식이라
고는 할 수 없지만, 믿어서 굳이 나쁠 것이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종교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다. 어두컴컴한 동굴의 벽에 사냥감의 그림을 그리
던 선사시대 화가들에게도 종교적 심성이 있었다. 현재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도교 등의 종교에 동물의 특별한 힘이나 신비로운 상징을 숭배하는 종교를
더하면, 세계 성인 인구의 80% 이상이 종교인이다. 전 세계에는 4200개의 신앙집
단, 종교가 있다. 성경은 전 세계 6912개 언어 중 4516개 언어로 번역됐다. 구글 검
색창에 ‘Religion’(종교)을 치면 3억7000만개의 검색 결과가 나온다. 마르크스의 신
념을 받아들인 공산주의 국가에도 교회나 절이 있다.


“종교란 중력처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현상”이며 “자신의
신앙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에게 종교적 믿음과 행동규범은 그들의 췌장만큼이나
삶의 한 부분”이다.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었을까. 종교
는 삶의 스트레스를 달래주고, 불확실한 미래의 답을 준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석가모니는 “삶은 고통”이라고 말했다. 파스칼은 “나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고 나
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한한 공간 속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정말 불안하다.… 나를
둘러싼 이런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나를 놀라게 한다”고 토로했다. 나고 늙고 병
들고 죽는 것만이 고통은 아니다. 일상의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
정의 불확실성도 스트레스다.


뇌는 이런 불확실성을 힘들어 한다.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을, 막연한 것보다는
분명한 것을, 불균형과 비대칭보다는 균형과 대칭을 좋아한다. 뇌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와 신체에서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무서우면 아드레날린, 불안하
면 코르티솔이 나온다. 이런 호르몬은 단기적으로는 스트레스와 싸우거나 그것
으로부터 도망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스트레스의 축적에 끝내 버텨낼 장사는 없다.


호주 원주민 사이엔 ‘부두 데스’(voodoo death)라는 현상이 있다. 마법사의 저주를
 받은 원주민이 스트레스와 걱정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것이다. 종교는 이 모든
고통, 스트레스에 대한 답이자 일상사의 윤활유다. 햇과일을 처음 먹고 소박한 밥상
에 감사하고 오래된 코트를 구세군에 기증하는 등의 일상사에 기쁨의 조명을 비춘다.


종교적 교류, 의식(儀式), 믿음은 대부분 종교의 특징이다. 이 삼총사는 신앙인들의
스트레스를 체계적으로 줄여준다. 먼저 종교적 교류. 교회나 절같이 성스러운 장소
는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뇌는 이같이 성스러운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부자나 빈자나 신 아래서는 같은 계급이다. 세속적 위계구조가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뇌는 줄곧 긍정적인 신호를 받는다. 기존엔 뇌와 신체에서
경험이 시작된다는 연구 결과가 지배했는데, 최근엔 경험이 뇌와 신체를 만든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버빗원숭이 집단을 연구해보니, 우두머리 수컷에게선 부하
수컷보다 행복을 유발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2배 이상 나왔다. 지위가 바뀌면
호르몬 양도 바뀌었다.


다음은 의식. 종교의식은 뇌의 생화학 체계를 바꾼다. 예를 들어 명상 등의 사색을
 하면 산소 소비와 심장 박동이 줄어든다. 기도를 하면 덜 긴장하고 마음이 편해진
다. 유산염 같은 신체 화학물질이 감소하고, 뇌에서는 혈압과 알파파가 감소한다.
“노점 채소가게 주인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이마를 대는 종교의식을 행할 때는
무슨 일인가가 그의 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믿음. “믿음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주고 미래를 보여준다. 믿음은 내세의
영원한 대축제를 위해 준비된 메뉴를 보여준다.” 세상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은 뇌에
고통을 주지만, 종교는 ‘진리’라는 명확한 스토리를 제공해 이런 고통을 덜어준다. 뇌
의 신피질은 스토리텔러다. 이 스토리텔러는 사람이 태어나 온갖 역경을 겪지만 결국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을 선호한다. 종교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신피질의 취향에 맞다. “종교적 환상은 경험의 불완전성을 채우기 위해 뇌가 활동한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내세’는 종교의 ‘대표상품’이다. 이승에서 착한 일을 하면
저승에서 복을 받고, 반대면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만한 해피엔딩이 어디 있겠는가.

-발췌출첰: ⓒ 경향신문 & 경향닷컴,
ㆍ신의 뇌라이오넬 타이거·마이클 맥과이어 지음 | 김상우 옮김의 서평 중에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1201809125&code=900308

------------------------
인간은 연약하고 위안을 찾고 싶어한다.
종교와 의학은 어느정도 그 약함을 보완시켜준다.
하지만 그만큼 해악을 가하기도 한다.

언제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 너무 믿지도,
 너무 무시하지도 말자. 그래서 중용의 길은 어렵다.
-연우생각



댓글 없음:

댓글 쓰기

가장 많이 본 글